라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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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자치령 민정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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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소명출
제2대
습원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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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택민
제4대
라정남
제5대
이성한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차오양현 서기
만주 자치령 제4대 민정장관
라정남
羅正男 | La Jeong-nam
본명 라뇌초(羅雷超)
출생 1924년 3월 20일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차오양현
(現 대한민국 요서북도 조양시)
사망 1986년 4월 13일 (향년 62세)
만주 자치령 요동도 심양시 북구 세원대로
(現 대한민국 심양광역시 북구 계만대로)
국적 중화인민공화국
대한민국 ( 만주 자치령)
재임기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차오양현 서기
1965년 8월 7일 - 1970년 8월 7일
만주 자치령 제4대 민정장관
1985년 12월 7일 - 1986년 7월 17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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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조양 라씨
배우자 샤오위리엔
자녀 아들 라우재, 라금형
라은희, 라현미
기타 친인척 손녀 라하연
학력 연변대학[1] (사회학 / 졸업)
칭화대학 (정치학 / 학사)
베이징대학 (공안학 / 석사)
김일성종합대학[2] (정치학 / 석사)
종교 무종교 (무신론) → 개신교 (고신)[3]
신체 167cm
소속 정당 민국공치회
계만(啓滿)[4]
주요 서훈 신계훈장 을지장 (2급, 1971)
보국훈장 통일장 (1급, 1985)
국민훈장 무궁화장 (1급, 1986, 추서)

개요

구 중공대한민국(만주 자치령)의 정치인.

중공 시기엔 자오양현 서기에 재임했으며 동아시아 전쟁 이후엔 만주 자치령의 경무차장과 교육부장, 민정차관, 경무부장, 민정장관 등을 역임했다.

생애

동아시아 전쟁

자오양현 서기일 때 촬영한 기념사진

1924년 3월 20일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자오양현[5]에서 태어났다. 공부는 매우 잘 했지만 과묵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전형적인 엘리트코스를 밝아 연변대, 칭화대, 베이징대에서 학석사를 취득하였고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후 41세라는 젊은 나이에 자신의 고향인 자오양현의 서기(한국의 군수에 해당)에 임명되었다. 당시 기록된 중공측 문서에 따르면 라정남은 행정능력이 좋고 자기관리에 철저하여 실수 한 번 안 했지만 사상적으로는 그다지 열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대약진운동 중에 철저하게 박살난 농촌 경제를 상당 부분 복구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민가를 들쑤시고 다니는 홍위병을 체포하거나 현 관료들의 풍기를 철저히 단속하고 사치를 멀리한 덕에 현민들도 그에 대해 대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내렸었다.

만주 자치령의 관료

그가 46세가 되던 해엔 동아시아 전쟁이 일어나 한국군이 조양현을 점령하게 되었다. 마침 그는 한국어를 꽤 유창하게 했기 때문에 한국군 군정사령부에 협조하며 당시 군정사령관이었던 채명신의 신임을 얻었다.

만주 자치령의 성립 이후에는 초대 군정장관으로 취임한 채명신에 의해 치안을 담당하는 경무부의 2인자인 경무차장에 임명되었다. 라정남은 중국 민족주의자의 반한 운동을 탄압하면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체포된 반한분자를 전향시켜 스파이로 활용하거나 전향을 거부한 반한분자는 가족까지 수용소로 보내버리는 동시에 좋은 행정능력을 보여준 라정남은 경무차장, 교육부장, 민정차관 겸 경무부장 등을 거치면서 한국 정부로부터는 신임을, 중국의 좌익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로부터는 원망과 증오를 쌓아갔다. 이것은 한국 정부가 그를 자치령 내에서 만주인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이자 한국인인 군정장관에 이은 2인자인 민정장관에 임명하도록 만들었지만 동시에 중국 공산당 동북지부가 그를 제거 대상 1순위로 두도록 만들었다.

민정장관과 암살

1985년 12월 7일엔 그토록 고대하던 민정장관에 임명되었다.[6] 하지만 1년도 안 된 1986년 7월 17일, 평소 그의 반인륜적인 통치 방식에 원한을 품고 있던 열투단원 이명재장도기자신의 가슴 속에 숨겨놨던 수류탄을 터뜨려 중상을 입었고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향년 62세. 사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책

채명신이 군정장관을 맡던 시절에는 채명신이 민사작전을 매우 중시하였고 당시 라정남 직책이 경무부의 2인자인 경무차장이었던지라 큰 존재감은 없었다. 교육부장 시기에는 만주의 사학자들을 포섭하여 역사적으로 한국과 만주는 하나였다는 '한만일체론'을 만들어내[7] 한국의 만주 지배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하였고 교과서에는 한국군을 '해방군'으로, 구 중공을 '억압자'로, 한국의 만주 지배는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으로 묘사하도록 했다. 또한 기존의 한국의 '국민의례'를 모방하여 모든 학생들이 '대한공민[8]의 맹세'를 외우게 하였다.

첫 번째[9]

하나, 우리들은 대한민국의 공민입니다.

둘, 우리들은 마음을 모아 대한민국에 충의를 다하겠습니다.

셋, 우리들은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공민이 되겠습니다.

두 번째[10]

하나, 우리는 대한의 공민이니 충성으로써 조국에 보답하리라.

둘, 우리 공민은 서로 신애협력함으로써 단결을 굳게 하리라.

셋, 우리 공민은 인고단련 힘을 기름으로써 조국을 선양하리라.

대한공민의 맹세[11]

쭉 읽다 보면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이 조선에 썼던 정책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이는 라정남이 교육정책을 설계할 당시 일제의 통치 정책을 적극 참고했기 때문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은 민정차관 겸 경무부장에 임명된 후부터다. 그는 조선 후기 기독교인을 잡기 위해 시행된 '오가작통법'에서 영향을 받은 치안유지법반한정치범색출령을 곧바로 민정ㆍ군정 장관에게 건의하여 시행했다.[12] 다섯 집을 한 통으로 묶어 한 집에서라도 정치범이 나오면 다섯 집을 함께 처벌했다. 이 정책은 주민들이 서로를 감시하도록 하여 사람들이 자가검열을 하도록 만들었다. 정치범은 가족과 함께 수용소에 수감하였으며 전향한 정치범은 스파이로 활용했다. 또한 경무부 휘하의 '특임단'을 편제하여 한국의 만주 통치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인사들을 포섭하거나 암살했다. 또한 만주 자치령 내 여러 곳에 일반 회사 등으로 위장한 공안분실을 설치하여 사상범들을 취조고문하도록 했다.

평가

긍정적 평가

  • 능숙한 행정능력 : 라정남은 중공의 자오양현 서기였을 때부터 행정적 수완으로 유명했다.  또한 한만 합병 과도기의 막대한 행정 업무를 잘 처리해냈다.
  • 한만 일체화 공로 : 비록 라정남의 정책이 과격하고 비인도적이었다 하더라도 그로 말미암아 만주가 빠르게 동화되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라정남이 악역을 자처하여 욕을 먹을 수 있는 업무를 앞장서 처리하여 향후의 더 큰 위협을 막았다고 볼 수 있다.

라정남이 만주 자치령의 민정장관 신분이었던 만큼 한국 정부는 나름 대접을 한다. 사후 무궁화 대훈장 다음가는 등급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고 매년 내무부장관 주최로 간소한 추도식이 열린다.

부정적 평가

  • 비인도적 정책 : 중국어 사용 금지 등은 중국계의 민족성을 말살시키려는 정책이었다. 또한 중국 민족주의자들을 투옥하는 등의 탄압정책을 펼친 것도 사실이다. 결국 그의 비인도적 정책은 현재까지 만주가 자유민주연합 등 자유당계 정당의 우세지로 변하는데에 영향을 미쳤다.
  • 기회주의적 행보 : 본래 그의 조국이었던 중공을 버리고 동포들을 탄압했다.[13]

중공에서 그의 평가는 최악이다. 일명 '중국판 이완용'. 라정남이 자신의 본래 조국을 버리고 만주 자치령의 2인자인 민정장관이 되었던 것이 그 이유다. 라정남 이전의 두 명의 민정장관들이 중공에서 비교적 덜 비판받는 것은 그 두 명은 사실상의 실권이 존재하지 않는 얼굴마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정남은 민정장관으로서 적극적으로 통치정책 수립에 참여했다.

서중국의 초ㆍ중등 교과서에는 '모범 군인'인 레이펑과 비교되며 등장한다.[14]

한국에서도 진영에 따라서는 그다지 평이 좋지 못한 정치인이다. 국내의 인권단체들은 라정남에게 매우 부정적이며 그의 생전 받은 훈장들을 전부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5] 자유민주연합과 같은 자유당계 정당의 지지세가 높은 만주에서도 그의 평가는 좋지 못하다. 국가사회주의대한노동자당 등의 극우 진영에서는 중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서중국

서중국에서는 그를 중국판 이완용, 아니 이보다 더 나쁜 취급을 한다. 중국에서는 민족 반역의 대명사이다. 서중국인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너는 커서 라뇌초를 닮지 말라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서중국인들은 그의 이름만 나와도 치를 떨며, 사람에게 라뇌초라고 지칭하는 것은 거의 사람 비하 또는 욕이나 다름 없다. 당연히 그는 기록말살형을 당해 중국 매체에서 그가 나오는 자료는 거의 없다. 서중국 정부는 '민족반역자'27인에 대한 궐석재판에서 라정남에게 사형을 판결하기도 했다.

반면 그를 죽인 이명재, 장도기에 대해서는 평가가 정반대인데 그들은 중공 내에선 '매국노를 암살한 민족의 영웅' 으로 특별대우를 받는 것은 물론 추모제도 지낸다.

동중국

동중국에서도 서중국만큼은 아니지만 중국어와 만주의 중국 문화 말살정책으로 인해 평가는 별로 좋지 않다.

상훈

  • 신계훈장 을지장 : 신계훈장은 대한민국의 동아시아 전쟁 승전 기념 겸 영토 확장 기념을 위해 제정된 훈장으로 을지장은 광개토장 다음으로 높다.  한국 군정에 협력한 공을 인정받아 1971년에 수여받았다.  2022년 현재 가치 약 2억 5천만 원의 포상금 따로 받았다.
  • 보국훈장 통일장 : 보국훈장의 최고등급 훈장으로,빨치산 토벌과 치안 확보의 공을 인정받아 1985년에 경무부장 임기를 마치는 동시에 수여받았다.
  • 국민훈장 무궁화장 : 국민훈장의 최고등급 훈장으로, 암살 이후 서석준 총통의 결정으로 추서되었다.

가족

아내 샤오위리엔(1925년생)은 헤이룽장성 출신으로 1950년 결혼했다. 라정남과 소여원은 2남 2녀를 두었다.  첫째 라우재(1952년생)는 사업을 하여 재계 16위인 라우그룹 창업주가 되었고 둘째 라은희(1954년생)는 심양미대 교수가 되었으며 라은희의 쌍둥이 동생인 셋째 라현미(1954년생)는 소설가, 수필가가 되었고 넷째 라금형(1955년생)은 부산으로 이사해 부산대학교병원 원장이 되었다.  라금형의 막내딸인 라하연은 라정남과 같은 민주국민당 소속의 정치인이 되었다.

여담

  • 생전에는 모우양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 원래는 종교가 없었지만 한국군이 만주를 점령하자 한국의 고위직에 개신교도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즉시 개신교로 개종했다. 진짜 신앙이 있어서 개신교도가 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지도층과 공통점을 만들기 위한 일종의 처세인 셈이다.처세의 달인 그와 대조적으로 손녀 라하연은 독실한 개신교도다.[16]
  • 1973년에 중공은 재판을 통해 '민족반역자'들에 대한 궐석재판을 실시했는데 그 재판에서 경무차장이었던 라정남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84년에 있었던 추가재판에서는 사형을 선고받았다.[17]
  • 사치를 멀리 하고 검소한 삶을 하였다고 한다. 그가 살았던 집도 별로 크지 않았고 식사도 간소했다. 원래는 자동차도 없었는데 경무차장 시절에 군정장관 채명신이 포니를 한 대 사주었고 그 포니를 평생 타고다녔다.
  • 부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가정에서는 인자하고 따뜻한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다고 한다. 매 한 번 든 적이 없었던 모양. 가족들한테는 그리도 온화했던 사람이 정치범들한테는 원 역사의 중앙정보부 대공분실 마냥 고문을 잘도 했다(...)[18]

재산

라정남은 근검한 습관과는 별개로 축재에는 열심이었다.[19] 그는 15년만에 재산을 90배로 불리는 데에 성공했다. 게다가 라정남의 장남인 라우재가 라정남의 재산으로 사업을 하여 큰 성공을 거두면서 현재 라씨 일가의 재산은 2022년 기준 한화로 약 9천 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20]

어록

인민의 적인 홍위병들이 이 조양현에는 발도 들이지 못하게 하라![21]
1968년, 중공 조양현 서기 시절
조양현 현민 일동은 해방군을 환영합니다.
1970년, 통일전쟁 당시 한국군이 조양현에 '진출'하자
만주인들도 한국어를 쓰고 한국 음식을 먹고 본성인과 같은 사고를 한다면 언젠가 본성인들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지 않겠니.
1975년, 동화정책에 의문을 품은 아들 라금형에게
한만합방으로 피해를 입은 이들은 공산당 간부들 밖에는 없습니다.  만주는 한국의 통치로 말미암아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번성하는 시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1982년

소속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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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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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국립연길대학교.
  2. 국립평양대학교.
  3. 대한민국이 만주를 점령하자 개종했다. 그러나 출세에 도움이 되기 위해 개종을 했기 때문에 독실하지는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여담 항목 참조.
  4. 만주(滿)를 계몽(啓)했다는 뜻에서 지었다.
  5. 현재의 대한민국 요서북도 조양시.
  6. 상단 프로필 사진도 민정장관 임명 기념으로 촬영한 것이다.
  7. 과거 만주를 주 활동지로 삼은 부여고구려, 발해를 그 근거로 삼았다.
  8. 만주 자치령은 명목상으론 대한민국의 강역이었으나 그 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국민'이 아닌 '공민'으로 불리며 2등 시민 취급을 받았다. 이런 제도적 차별은 김대중 정부 시기 대한민국으로의 최종 편입을 통해 모두 철폐되었다.
  9. 학생용.
  10. 성인용.
  11. 구 일제의 황국신민서사와 매우 흡사하다.
  12. 보고를 받은 서석준 총통은 "똑똑하기는 하구만... 안 좋은 쪽으로."라고 말했다.
  13. 홍위병이 꼴보기 싫어서 전향했다는 말도 있다.
  14. 다만 라정남이 아닌 원래 이름인 라뇌초로 나온다.
  15. 이에 한국 정부는 딱 잘라 거절했다.
  16. 이 때문에 라하연의 연인인 이운석은 무종교에 가까움에도 매주 교회로 끌려가듯시피 한다.
  17. 어차피 궐석재판이라 중공이 실질적으로 처벌하는 것이 아닌 상징적인 의미였지만... 얼마 안 가 라정남이 암살당했다.
  18. 직접 고문한 것은 아니다. 다만 고문을 명령했을 뿐이지...
  19. 물론 횡령 같은 불법적인 일이 아닌 주식과 부동산 투기로 재산을 불렸다.
  20. 이것 때문에 어려서부터 돈 걱정 하나도 없이 산 라하연이 경제관념이 조금 모자르다.
  21. 이로 인해 몇 주 후에 홍위병들에게 구타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