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열황제/생애

솔피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4월 2일 (화) 23:05 판 (새 문서: === 유년기 === 1938년(희승 18년) 1월 19일, 승경군과 단온부대부인 유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38년 4월 17일 창순군 이재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는 바람에 창순군이 죽은 이튿날에 양자로 입적하여 한경군(漢景君)에 봉해졌다. 열조는 유년기부터 남다른 리더십과 능력를 보였다. 유치원에서는 혜종이 있는 경복궁을 향해 궁성요배를 주도하기도 했고,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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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

1938년(희승 18년) 1월 19일, 승경군과 단온부대부인 유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38년 4월 17일 창순군 이재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는 바람에 창순군이 죽은 이튿날에 양자로 입적하여 한경군(漢景君)에 봉해졌다.

열조는 유년기부터 남다른 리더십과 능력를 보였다. 유치원에서는 혜종이 있는 경복궁을 향해 궁성요배를 주도하기도 했고, 강학원 중등과에서는 무리를 이끌고 패싸움을 벌여 세간의 이슈가 되기도 했다. 강학원 고등과에서는 학생들을 이끌고 고등과의 악습을 뿌리뿝고, 교내의 수구적인 교칙을 고치기 위해 학생운동을 주도하며 황실의 골칫덩이가 되기도 했다.

전후 최초의 황족 관료

열조는 관례적으로 황족들이 무조건 진학하는 강학원대학 대신, 대한제국 최고의 대학인 한성제국대학의 꽃인 법학과에 당당하게 합격했다. 법학과 합격 이후에도 열조는 파격적인 길을 걸었다. 종친사환금지법[1]의 제약을 받지 않는 군관이 되는 대신, 종친사환금지법의 제한을 받는 고등문관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달라 청하여 또 한번 장안의 화제가 되다. 당시 황실에서는 한경군의 행동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으나 혜종의 윤허를 받아 한성제국대학 재학 시절인 22살의 나이로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공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열조는 고시 합격자들의 선망인 경찰청 커리어에 지원하여 최우선적으로 선발되었고, 경시청 고등경찰과[2]의 특별고등경찰로 임용되어 정보계통 분야에서 주로 근무했다. 경찰 시절 숙조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자 근황주의자로써 비 제도권 극우, 극좌 세력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고, 혜종의 총애를 받아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1965년부터는 고등경찰과의 수장인 고등경찰과장으로 임명되어 경찰의 정보계통을 장악했으며, 1968년에는 경찰을 떠나 귀족원의 황족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하였다. 정계 입문 이후에는 황실의 개혁과 자유권의 확대를 외치며 귀족원의 보수파와 대립했으며, 귀족원의 리버럴 파벌의 중진이 되었다. 이후 1970년에는 혜종에 의하여 대한제국의 정보를 총괄하는 정보대의 수장인 정보사가 되었다.

9.18 사건과 즉위

정보사 재임 시절 열조는 9.18 총격 사건을 통해 조카 뻘 나이의 6촌 친척인 소황제를 압박하여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3] 이후 열조는 대신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황속[4]에 봉해졌고, 정통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다시금 승경대원왕의 아들로 입적 되었다.[5][6] 3개월 후 두려움에 떨던 소황제가 자신이 앓고 있던 병을 명분으로 황속에게 양위 하였고, 황속이었던 이면이 연호를 성녕(咸寧)으로 하여 대한제국의 제5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재위 초기

즉위 초의 모습

열조는 즉위 이후 기존의 기득권을 견제하기 위해 황제 중심의 정치를 강화하고 함흥부와 전주부를 각각 상경 함흥부, 남경 전주부로 승격시켰다. 또한 3S정책과 범죄와의 전쟁 선포를 통해 민심을 얻었고, 나토를 모티브로 동북아시아의 친미 국가들의 군사동맹기구인 NEATO[7]를 창설하고, ECSC와 코메콘을 모방한 아세아경제발전공동체(AEDC)를 창설하여 대한제국을 동아시아의 안보와 경제의 중심으로 성장시켰다.

재위 중반

즉위 중반의 모습

재위 말기

퇴위와 태상황

호랑이 등에서 내리다

열조는 고령을 이유로 2017년 손자 이연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황으로 물러났다. 이는 대한의 황제들 중 유일하게 자의로 퇴위한 황제[8]이기도 한데 열조가 존경하는 증조부 성조의 46년 치세라는 기록을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으로, 2017년 정확하게 재위 45년만에 퇴위하여 상황(上皇)이 되었고, 태손 이연이 다음 황제로 즉위하였다.

즉위식 당시 태손인 이연이 아직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아 태손의 계급인 원수 계급장[9]이 부착된 제복을 착용했는데, 열조가 자신이 입은 제복의 대원수 견장을 손수 떼어 태손의 견장 자리에 달아주고 자신이 쓰던 원수봉을 태손의 손에 들려준 후에 "황상, 이 대한을 잘 부탁드립니다."하고 절하니 그 자리에 있던 대신들과 장성이 열조의 손주 사랑에 감동하였지만, 이연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르고 체통을 지키기 위해 울음을 꾹 참는 모습이 생중계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열조는 이연이 황제가 된 이후로도 군권은 여전히 자신이 쥐고 있었고 일부 분야에 대해서도 대리청정을 하였다. 또한 열조는 중국과의 영토 분쟁에서 적극적으로 강경 대응을 주문하고, 네아토 구성국과의 결속을 위해 여러번 순방을 다니는 등 주도적으로 활약했다. 또한 즉위 1개월 뒤 이연은 상황이라는 칭호로는 열조의 공적을 기릴 수 없다며 태고광무신성요순소열[10](太高光武神聖堯舜昭烈)이라는 존호를 새롭게 바치며 열조를 상황에서 태상황으로 격상시켰다. 이렇게 열조는 태상황이 되어서도 대한제국의 안정과 손자 이연의 황권 안정을 위해 노력했고, 말년에는 계절에 따라 황성과 서경, 남경과 동경을 오가며 당구와 사냥을 즐기는 등 즐겁게 여생을 보내기도 했다. 게다가 자신이 후계자로 삼은 이연의 뛰어난 자질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이에 만족하는 말도 남겼으며, 순방 도중 일본의 내대신 도쿠가와 이에히로가 이연을 극찬하자 크게 기뻐하기도 했다.

붕어

이렇듯 말년을 평안하게 보내다가 퇴위 2년차부터 갑자기 몸이 안좋아지더니 퇴위 3년 만인 2019년 4월 27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붕어했다. 사후 묘호는 시법에서 강직하고 덕스러워 앞으로 나감을 일컫는 '숙(肅)'에다가 나라에 큰 공이 있는 군주라는 이유에서 조(祖)를 붙여 숙조(肅祖)로 이미 결정되어 있었으나, 황제인 이연이 이에 불만을 가지고 묘호인 숙조가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며 열조(烈祖)를 제안했다.

대신들은 과거 인묘의 묘호를 정할 때 남당의 왕 서지고가 열조라는 묘호를 사용하여 국운(國運)을 재촉했기 때문에 인조의 묘호를 열조가 아닌 인조로 결정하였다는 전례를 들었으나, 이연은 “계한 소열황제의 묘호도 열조였소. 고금의 전례를 볼때 소열황제처럼 성군에게 합당한 묘호가 돌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남당의 서지고와 같은 자들에게 어울리지 않은 묘호가 붙은 전례도 있소. 그런다고 해서 서지고가 열조라는 묘호를 썼다 하여 소열황제의 공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하물며 대행께서 쌓아올리신 찬란한 공적은 소열황제 뿐만 아니라 옛 문왕과 무왕에 비해서도 비해서도 비해서도 뒤지지 않소.“라며 숙조의 묘호를 열조로 교체하는데 성공한다.

"열조"는 시법(詩法)에서 모두 3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연이 해석한 것은 "덕(德)을 지켜 업(業)을 높였다"이다. 계한 소열황제의 사례를 봤을 때 열조란 묘호가 대행 황제의 공덕(恭德)에 부합된다고 적었다. 여기서 유비가 한나라의 명맥을 이은 '계한'의 창시자였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소열황제가 한을 이은 계한의 창건자이자 중시조로 대우받은 것 처럼 이연은 황실 직계와 6촌이라는 머나먼 방계 출신의 열조의 후손들이 황위를 이어 받는 이 상황이 마치 인조 이후 인조의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하여 인조가 조선의 중시조로 대우 받을 것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계한 소열황제의 묘호인 열조를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열조 또한 소열황제처럼 조선 왕조의 정당한 계승자로 대우 받을 것을 감안한 조치로 보인다.

  1. 이 법은 경조 시대 사라진 법이었으나, 한소전쟁 이후 환친왕의 의지로 부활하였다. 옛 법에서는 5촌 이내의 종친의 정치, 관직 참여를 금하는 법이었지만 신 종친사환금지법은 환친왕의 강력한 의지로, 8촌 이내의 종친의 관직 진출 범위를 황족회의 위원과 추밀고문, 귀족원 황실의원, 그외의 명예직과 무관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 제한한 법이었지만 1975년 열조의 즉위 이후 폐지된다.
  2. 열조 즉위 이후 개편되어 일부는 내부 공안조사청으로 분리되었고, 다른 부분은 경시청 공안과로 분리되었다.
  3. 현재까지도 황실과 대한제국 정부는 9.18 총격 사건이 제경군과 연관된 정치자금 수사를 위해 연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충돌사건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내외에서는 당시 황실 여론상 황위 계승에서 지지를 받지 못하던 열조가 9월 19일에 공포하기로한 (사실상 제경군으로 결정된) 황속(皇續) 책봉 공포를 무산시키고 황위를 차지할 목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제경군과 경신순황후등 자신과 정적 관계에 있었던 반대파들을 제거한 뒤 소황제를 반강제로 퇴위시킨 일종의 친위 쿠데타로 간주한다.
  4. 황속(皇續)은 황실예전에 따른 황위 계승자를 뜻하는 칭호이다.
  5. 본래 열조는 창순군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나 황속으로써 황위를 계승할 경우 향렬과 촌수 문제가 열조의 발목을 잡았다. 사실 열조는 국가와 군대를 완벽하게 장악했기에 이러한 문제를 무시해도 그만 이었지만 사실상 황위 찬탈의 형식으로 황위를 계승하였기에 정통성에 민감했고, 이러한 재 입적까지 단행한 것 이었다.
  6. 이에 따라 은언궁가의 봉사손으로는 숙부인 (이광과 열조는 1살 터울로 유년기부터 사실상 형제처럼 지내 친분이 돈독했다.) 이광이 낙점되었고, 창순군의 아들로 이광이 입적되어 이광의 후손들이 은언궁가를 계승하고 있다.
  7. 공식 명칭은 동북아시아 조약 기구, (Nor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로 영어 발음은 네아토가 된다.
  8. 생전 퇴위한 황제는 소황제와 열조가 있지만, 소황제가 사실상 반강제로 퇴위한 점을 감안하면 자의로 퇴위한 황제는 숙조가 유일하다.
  9. 원래 태손의 계급은 현역 무관이 올라갈 수 있는 계급인 부원수이지만, 이연이 16세가 되던 해 열조에 의해 이연이 원수로 진급하였기에 태손의 계급도 원수가 되었다.
  10. 이연이 올린 시호를 풀어서 설명하자면 태고는 매우 높다는 뜻이고, 광무는 한나라를 재조한 세조의 시호이다. 신성은 신성하다는 뜻 그대로이며, 요순이라는 시호는 열조의 치세가 요순에 버금가는 태평성대였다는 의미이며 소열은 열조의 덕과 공훈이 계한의 소열제에 버금간다는 극찬을 담은 시호이다. 한마디로 열조는 매우 신성하며 그 치세와 업적은 한나라 세조와 소열제에 버금가며 요순에 버금갈 정도로 성군이었고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군주라는 의미를 담은 존호로, 손자인 이연의 열조에 대한 존경심을 한눈에 보여주는 존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