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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베리아 전쟁 Siberian War Сибирская войн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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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짜 | 1918년 1월 12일 ~ 1921년 3월 | |||
| 장소 | 동시베리아, 연해주 | |||
| 결과 | 하바리우스크 조약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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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향 | 러시아 내전의 종결 소·오 영토분쟁 촉발 | |||
| 교전국 | ||||
| 지휘관 | [ 펼치기 · 접기 ] | |||
| 전력 | [ 펼치기 · 접기 ] | |||
| 피해 | [ 펼치기 · 접기 ] | |||
개요
시베리아 전쟁은 러시아 내전의 일부로, 시베리아에서 러시아 적군과 러시아 백군 및 간섭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하바리우스크 조약을 통해 마무리되었으며, 러시아 적군은 동시베리아 대부분의 지역을 합병했고 녹우크라이나는 연해주 지방을 영토로 하여 독립하였다.
주요 전투
- 전광 작전: 1918년 초, 한국군이 4개 보병연대 등 약 1만 7천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우수리 강과 아무르 강 연안의 러시아 백군령 주요 도시들을 기습 점령한 군사작전. 한국 정부는 연해주의 한국 국민 보호와 우크라이나 민족의 자결권 보장을 작전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적군과의 전쟁을 벌이는 중이던 백군은 한국군의 기습 점령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연해주 지방에서는 백군과 한국군의 기묘한 공존이 한동안 이어졌다.
- 정북 작전:
- 부레이 작전: 녹우크라이나군이 부레이 강 유역의 적군과 백군을 제압하고 부레이 강 유역을 장악한 작전. 슬리셴코 준장을 지휘관으로 하는 녹우크라이나 1사단의 작전이었다. 작전의 성공으로 녹우크라이나의 동북쪽 방면이 안정화되었다.
- 제야 호 전투:
- 자바이칼 공세:
결과 및 영향
소련과 대한민국 그리고 녹우크라이나는 서로 원하던 바를 일정 부분만 이루어낼 수 있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백군을 사실상 제압하고 러시아 내전을 승리로 종결시킬 수 있었으나, 극동 지방에서 가장 큰 두 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를 포함한 연해주 지방을 상실하고 말았다. 특히 제한적이나마 러시아의 부동항 역할을 하던 해군 요충지인 블라디보스토크를 잃은 것은 큰 타격이었다. 한국의 경우 공산주의자들의 남하를 막고 녹우크라이나를 독립시켜 완충지대를 확보하였다. 하지만 이는 동시베리아 전체를 영향력 아래에 두려던 한국의 이승만 내각의 원래 계획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한편 녹우크라이나는 표면적으로는 원하는 바를 이루어냈다. 극동 지방에 우크라이나인 민족국가를 세우겠다는 1차적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본토 우크라이나와의 통일에는 실패하였는데, 본토 우크라이나에서의 민족주의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소련에 병합당했기 때문이었다.
이와는 달리 서방 간섭군은 완전히 실패했다. 간섭군은 체코 자유군단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시베리아에 개입했지만 체코 군단은 결론적으로 모두 러시아 밖으로 철수하였고, 실질적인 목표였던 러시아 백군 지원과 적군 격퇴에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일본 역시 동시베리아의 이권을 노리고 참전하였으나 결론적으로 아무 것도 못 얻었으며, 그나마 점령했던 북사할린도 한국의 지원을 받는 녹우크라이나와의 분쟁에서 밀려 녹우크라이나에 넘겨주고 말았다. 이는 일본군에게, 더 나아가 일본 전체에게 커다란 수치였으며 이는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제3차 극동전쟁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