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수 (민중의꿈)

Communist 1968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5월 15일 (수) 19:05 판

개요

촛불혁명 완수
권력을 민중에게
제20대 대통령 선거 슬로건

대한민국의 제20대 대통령.

약력

  •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
  • 서울노동운동연합 지도위원
  •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민중당 노동위원장
  • 민중당 부천 남 지구당위원장
  • 제14-17대 국회의원 (경기 부천 남 → 소사)
  • 민중당 의원단대표(원내대표)
  • 민주노동당 의원단대표 (원내대표)
  • 제32-34대 경기도지사
  • 통합진보당 초대 공동대표
  • 진보신당 창당준비위원장
  • 민중당 상임대표
  • 제21대 국회의원 (서울 종로)
  • 제20대 대통령

생애

유년기

1951년 9월,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영천국민학교, 경북중학교(現 경운중학교), 경북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였다. 전공을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에 당시 영남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사촌형 김장수가 전공으로 경영학을 추천해서 경영학과를 선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노동운동가 김문수

대학교 1학년 때 학교 선배 심재권의 권유로 학생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2학년 때, 당시 서울대에서 학생운동을 이끌고 있던 김근태와 함께 활동하다 공활(공장 체험)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노동자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평생 노동운동에 몸담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김문수는 70년대 초중반까지는 학생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병행했는데 스스로 회고하기를 당시 진로 방향을 제대로 못 잡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노동운동에만 전념하기로 하고 공장에 위장취업 후 노동조합을 만들면서 80년대에 전설적인 노동운동가가 되었다.

1971년 대학교 2학년 때 위수령이 내려져 한번 제적되었다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또 걸려서 제적되었다. 그러나 대학 제적 이후 더욱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고 한일도루코 노조를 결성해 민주노조 창립 운동을 전개, 후대 노동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전두환 정권이 성립되자, 그는 위장취업과 민주노조 설립, 어용노조 철폐 운동을 더욱 가속화해 대학생들 사이에서 전설이 되었다. 1985년에는 "서울노동운동연합"을 창립해 활동이 정점에 달한다.

그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 정국 때도 활발히 활동했으며 현대 노동자들과 연대했는데, 이때의 운동은 민주노총 설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진보정당 창당운동

1987년 대선에서 양김의 분열로 군부독재 정권이 연장되자 독자적 진보정당이 필요함을 느끼고 노동운동에서 진보정당 창당운동으로 투쟁의 무대를 옮기게 되었다. 1990년, 그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시 김문수와 같은 재야 노동운동가였던 이우재, 이재오 등과 연합해 민주화 이후 한국 최초의 진보정당 "민중당"을 창당한다. 민중당은 1990년 지방선거에서 지방의회 30여석을 얻으며 제3정당으로 존재감을 알린다.

이후 민중당의 초대 노동위원장을 지내며 민주노조 설립운동과 진보정당 창당운동의 연계를 잇는 가교역할을 했으며, 단병호, 권영길과도 친분을 쌓는다. 잠깐 구로공단이 위치한 구로구 선거구의 지역위원장을 맡다가, 부천시 남구(現 소사구)의 지역위원장을 맡으며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초기에는 밀리는 형국이었으나 도시빈민과 노동자의 표를 끌어모으면서 4자 구도 속에 근소하게 당선되는 이변을 연출한다.

그가 속한 민중당은 지역구 3석, 전국구 2석 등 총 5석으로 민자당, 민주당, 통일국민당에 이은 원내4당이자 원내 유일의 노동자정당이라는 지위를 굳혔다. 그는 만장일치로 민중당의 초대 의원단 대표, 즉 원내대표의 자리에 오르며 의회 내 노동투쟁에 박차를 가한다.

제14-15대 국회의원

1992년 대선에서 민중당이 지원한 민중단일 무소속 후보 백기완이 2%의 저조한 득표를 보이며 낙선하자, 김문수는 대통령 후보, 지방선거 후보 등 전국 각지에 후보를 낼 수 있는 "대중적 민중 노동자 정당"을 지향하게 되었다. 그는 1995년 첫 지방선거 때 서울시장에 학교 선배 김근태 전 서청련 의장을, 전라북도지사에 삼민투 의장 함운경을 영입 공천하는 파격적인 수를 두었는데, 김근태는 조직력과 자금력이 모두 부족한 상황에서 13%라는 높은 득표를 보이며 선전한다.

그 외에도 14대 국회의원 활동 도중 그는 민주노조 설립을 지원하는 여러 법안을 발의하였으며, 노동쟁의에 관해 정부가 섣불리 개입할 수 없도록 하는 개혁안을 통과시키며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민중당 후보로 출마해 45%라는 여유로운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목표했던 의석수 10석은 달성하지 못하자, 막 설립된 민주노총과의 연계투쟁을 강화하는 한편 독자적인 정책을 개발하는 "노동자 정책 정당" 투쟁안을 제시했다.

1996년 크리스마스 노동법 날치기 당시 그는 신한국당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성명으로 화제를 모았으며, 다가오는 1997년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당의 공천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 김근태 의원이 김대중을 지지하자, 민중당은 당 차원에서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동해 선거에 국민승리21이 창당되어 권영길 초대 민주노총 위원장이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역시나 저조한 득표율로 낙선하였다.

민주노동당 창당

199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그는 "단일한 사회주의 대중정당"이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국민승리21과 민중당의 합당을 추진했다. 그렇게 당은 "민주노동당"이라는 당명으로 출범했다. 민주노동당은 비록 창당 된 직후 선거에 나섰던지라 광역단체장을 얻는데에는 실패했으나, 울산 북구청장으로 조승수 후보가 당선되고 성남시장으로 정형주 시당위원장이 당선되는 등 소기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2년 후, 그는 제16대 총선에서 3선에 성공해, 진보정당 최초의 3선 국회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또한 당은 지역구 7석, 전국구 4석 등 처음으로 두자릿수 의석을 확보했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울산시장으로 송철호를 배출하고, 서울시장으로 출마한 이문옥이 2위로 낙선하는 등, 대단한 선전을 거두었다. 이러한 승리를 이끈 김문수 의원은 2002년 대선 출마를 제의받았고 실제로 5%에 달하는 지지를 받기도 했으나, 승리 가능성이 적다는 이유로 스스로 출마를 고사하였다. 대신 경선에서 승리한 권영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을 민중후보로 추대했다. 권영길은 선명한 좌파적 정책으로 초기 20%에 달하는 높은 지지율을 보였으나, 선거막판 노무현 후보의 돌풍으로 최종적으로는 7.5%를 득표하며 패배했다. 이후 김문수는 "미선이 효순이 사건" 촛불시위에 참석하는 등, 시민사회 참여적 성격을 보이게 되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때 민주노동당이 애매한 태도를 보이면서 지지율에 타격을 입기도 했으나, 김문수가 직접 민주노동당 의원단대표 신분으로 탄핵 저지 촛불집회에 참석하며 여론을 반전시켰다. 민주노동당은 열린우리당과 더불어 청년세대의 지지를 받으며 지지율에 있어 크게 선전하는 모습을 보였고, 막 도입된 1인 2표제의 수혜도 얻어, 선거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 지역구에서 27명이 당선되고, 총 22.6%의 비례득표로 11석의 비례대표를 얻어, 총 38석이나 얻은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136석을 얻어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한 열린우리당의 안정적 국회 의석 확보를 위해 민주노동당-열린우리당 연정을 제안했고, 김문수를 노동부장관 후보로 거론했다. 그러나 이는 무위로 돌아갔다.

2004년 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 그는 평등파와 노동계의 지지를 얻어 자주파의 지지를 받은 김창현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민주노동당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노무현 정권이 지나치게 삼성과 재벌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 비판하며 "이건희 저격수" 정당을 자처, 선명한 좌파 정당의 색체를 강화했다. 2005년에 접어들며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이 하락함에 따라,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은 열린우리당을 누르고 2위를 차지했다.

경기도지사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김문수의 경기도지사 출마설이 대두되었다. 김문수는 이미 4선이나 한 의원이었고, 국회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을 모두 이루었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노동당은 그 이전까지 경기도와 같은 거대한 광역단체의 장을 배출한 적이 없었기에, 김문수가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다. 김문수는 경기도지사 출마를 선언, 경선에서 정형주 성남시장을 73% 대 27%로 누른 후 본선에 진출했다.

선거전 초반에는 차기 대권주자로 몸값을 높이고 있던 손학규 지사의 재선이 점쳐졌으나, 타이밍을 놓치는 결정적인 실수를 연발하며 지지율이 하락했다. 또한 열린우리당의 후보 진대제는 삼성 출신 인물로 서민과 진보층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고, 선거 막판이 될수록 김문수로 지지가 결집하는 양상을 보였다. 출구조사에서는 손학규 43.0% 대 김문수 41.2%로 손학규의 근소한 우세가 예상되었지만 실제 개표 결과는 김문수 42.8% 대 손학규 41.5%로 진땀승부 끝에 1.3%p 차이로 김문수가 경기도지사로 당선된다.

제17대 대선 출마

대선 낙선 이후

정계복귀와 21대 총선

제20대 대선 출마

대통령 임기 중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민중당 1990 - 1998 창당
정계입문
1998 - 2007 합당[1]
진보신당 2007 - 2011 당명 변경
2011 - 2015 합당[2]
민중당 2015 - 당명 변경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부천 남 민중당 43,922 (29.76%) 당선 (1위) 초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부천 소사 38,760 (44.72%) 재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48,390 (55.83%) 3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50,418 (52.94%) 4선[3]
2006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경기도 1,582,065 (42.81%) 초선
2007 제17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진보신당 6,244,113 (26.31%) 낙선 (2위)
2010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경기도 2,271,492 (52.20%) 당선 (1위) 재선[4]
2014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2,855,259 (55.37%) 3선[5][6]
2020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 민중당 41,571 (43.65%) 5선
2022 제20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13,646,732 (40.42%) 초선

어록

노란봉투법을 지지한다면 (동지도) 사회주의자.
(동지들은) 사회주의를 잊었는가?
술 담배 끊는것 보다 어려운 공산주의 끊기
그러니까 사회주의 사상은 피억압노동자 민중 계급이 억압하는 자본가, 제국주의 세력과 싸워서 혁명적인 방식으로 뒤집어 엎어서 만인이 평화롭고...

여담

  1. 국민승리21과 신설합당
  2. 통일민족당, 국민참여당과 신설합당
  3. 2006.04.31. 의원직 사퇴 (경기도지사 출마)
  4. 야권 단일후보(진보신당-통일민족당-국민참여당-창조한국당)
  5. 야권 단일후보(통합진보당-새정치민주연합-노동당)
  6. 헌정사상 최초의 3선 경기도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