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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만주 총리
사민
| 파일:사회민주당 로고 (개화).png | ||
| 사회민주당 | ||
|---|---|---|
| 영문명 | Social Democratic Party of Korea, SDPK | |
| 표어 | 모두가 행복스럽게 잘 사는 복지사회 | |
| 창당일 | 1935년 6월 4일 | |
| 선행 조직 | / 당내 노선갈등으로 분열 | |
| 비변위의정 | 공석 | |
| 원무영임 | 김기현 | |
| 사무총관 | 정호진 | |
| 정책위의정 | 권성동 | |
| 이념 | 사회민주주의 태평양주의 • 좌익민족주의, 사회보수주의 (현장파) • 제3의 길, 중도개혁주의 (화요파·새길파) • 진보주의 (정의파), 민주사회주의 (민사파) | |
| 스펙트럼 | 중도좌파 (중도~좌익) | |
| 중추원의원 | 284석 / 750석 (37.9%) | |
| 당색 | 라즈베리색 (#D52C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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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원 수 | 75만 명 | |
| 국제조직 |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 |
| 진보동맹 | ||
| 청년조직 | 파일:청년사회민주당 로고 (개화).png | |
| 공식 사이트 | 파일:사회민주당 로고 (개화).png | |
| SNS | ||
| 2024년 포스터 - "먹고사니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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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민국의 제1야당.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정당 중 가장 역사가 긴 정당이다. 신한국당-국민의당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과 함께 한국의 양대 수권정당 중 하나이며, 동아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온건좌파 정당으로 일컬어진다.
1930년대 사회당 내부의 노선 투쟁의 결과로 탄생하였으며, 사회민주주의 국민정당을 표방한다. 궁극적으로는 민주적 복지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고 있다.
역사
성향
지도부
내부 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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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선거 결과
KNA
HHH
옥균's 내각
현장파
화요파
새길파
아이신기오로
금위대
은항
어떻게 된 거야 무서워
네놈들의 지도는 망했어!
감독선생
민국정보
틀:대한민국 국무총리 직속 기관 (개화)| 육화원 六花園 | Yukhwawon | ||
|---|---|---|
| 창립일 | 1902년 5월 12일 (천사희화점) | |
| 명칭 변경 | 1915년 1월 25일 (육화원) | |
| 원장 | 주원장 / 제36대 | |
| 원감 | 비공개[23] | |
| 주소 | 한성부 서초구 내곡동 | |
| 소속 | 대한민국 총리부 | |
| 원훈 | 꽃잎이 떨어질 제 나라를 지켰다 말하리라 | |
개요
육화원(六花園, Yukhwawon)은 대한민국 총리부 직속 정보기관이다.
각 기관에 분산되어있던 정보기관들을 통합하여 정보 수집과 방첩을 더욱 효과적으로 행하기 위해 1902년 김홍집 총리가 비밀리에 조직하였다. 육화원은 꽃집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위장명칭이었으나 현재는 정식 명칭으로 지정되어 있다.
상징
로고
원훈
| 꽃잎이 떨어질 제 나라를 지켰다 말하리라 |
1905년 설립 당시 채택되어 현재까지 쓰이고 있는 원훈.
역사
1902년 이전까지 한국 정부는 체계적인 정보기관을 운영하지 않았다. 다만 각 부서가 필요한 사안을 처리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소규모 정보조직을 만들 뿐이었다. 각 정보조직들을 규모가 작았고 체계적이지 못했으며 정보조직 간의 연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당시 총리였던 김홍집은 흩어져 있는 임시 정보조직들을 하나의 상설기구로 통합, 정부의 중추적 정보기관을 세울 목적으로 1902년 천사희화점이라는 이름으로 중앙정보기관을 비밀리에 설립했다. 천사희화점이라는 이름을 쓴 이유는 꽃집으로 위장시켜 첩보 활동을 더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수장은 점장이라고 불렸다.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첩보와 방첩의 중요성이 더욱 대두되었다. 따라서 당시 총리였던 서재필은 기존에는 국급 기관이었언 천사희화점을 성급 기관으로 두 단계 올려 확대개편하였으며, 비교적 더 큰 기관이라는 느낌의 원을 붙여 육화원으로 개칭하여 총리부 직속에 두었다. 물론 이 때까지도 육화원은 비밀 조직이었으며 외부적으로는 평범한 꽃집인 것처럼 위장하였다. 육화원은 1차 세계대전 말기 러시아에서 혁명의 낌새를 알아채 한국이 북방 출병을 미리 준비할 수 았도록 하였으며 출병 이후에도 회유, 암살, 파괴 등의 각종 공작을 벌여 한국의 북방 지역 장악에 이바지했다.
업무
청사
역대 원장
육화원장·경위정보부총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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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원장
- 초대 택풍화 (1902~1907)
- 26대 김종필 (1977~1989)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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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건빵
개요
한국군의 전투식량에 관해 설명하는 문서.
역사
19세기
한국군은 20세기 이전까지는 전투식량이라는 개념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기껏해야 장거리 작전에 나가는 병사들이 떡이나 쌀가루 등의 전근대적인 휴대용 식량을 사용했다고 추정될[24] 뿐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전투식량은 건뻥이었는데, 이는 중국의 의화단 반란 당시 한국군 지휘관으로 참전한 서재창 당시 정령이 일본군이 건빵을 먹는 모습을 보고 상부에 건의해 도입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서재창과 통역무관 서기학 참위 사이의 일화가 하나 전해진다.
| 서재창: (일본군 병사들이 건빵을 먹는 모습을 보고) 이보게, 서 참위. 일본군 무관한테 저 병졸들이 먹고 있는 저 전병처럼 생긴 것이 무엇인고 하고 한 번 물어보게. 서기학: 예, 연대장 각하. (일본군 무관에게 일본어로) 저 병사들이 먹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일본군 무관: 아, 칸판(乾パン)이라는 거요. 빵을 여러 번 구워 물기를 완전이 빼낸 보존식이오. 서재창: 서 참위, 저 무관이 무어라고 하던? 서기학: 아, 그게… 마를 건 자에… 어… 건빵이라고 하덥니다. |
서재창은 ‘건빵’에 대해 조금 더 조사한 뒤 군용 식량으로써의 건빵의 가치를 다룬 보고서를 본국에 제출했다. 파병된 병력의 식량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군무성은 이 보고서를 눈여겨보았고 건빵 생산을 결정한다. 1900년 가을, 건빵공장이 평안북도 정주에 완공되었고 그곳에서 한국 최초의 전투식량인 건빵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건빵을 섭취한 일선 병사와 간부들의 평가는 최악이었다. 이전까지는 건빵은 고사하고 근대적인 전투식량을 만들어본 적이 없는 한국에서 생산한 건빵이었던 만큼 당연하게도 딱딱하기 그지없었고 맛도 없었다. 병사들은 이 딱딱하고 맛없으며 어찌어찌 먹는 데에 성공해도 퍽퍽해서 물을 들이켜야 하는 이 음식을 매우 싫어했다. 이후 일본으로부터 별사탕을 도입해 건빵과 함께 제공하면서 그나마 먹을 만해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여담으로 서기학이 즉석에서 만들어낸 ‘건빵’이라는 단어로 인해 서양의 빵(bread)이 한국어로 빵으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반
| 시베리아 전쟁 중 1호 전식을 먹는 육군 정교 (1920.7.17) |
1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한국군은 건빵 이외의 전투식량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끝없는 참호전으로 인해 참호 안에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전투식량이 필요했던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한국군은 1차 세계대전 중에는 기껏해야 독일령 칭다오 공략전 등에만 참여했다. 이로 인해 한국군은 가급적이면 야전취사 마차를 통해 장병들에게 따뜻한 밥과 국을 제공하되 그럴 여건이 안 될 때에만 전투식량을 섭취하면 됐고, 이런 목적으로는 건빵과 별사탕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만 1차 세계대전이 심화되면서 유럽에서의 참상이 전해지자 한국군도 본격적인 전투식량의 생산 필요성을 인식하고 개발에 착수했다.
그렇게 개발된 것이 야전전투식량 1호, YJS-1이다.[25] 통칭 1호 전식이라고 불린다. 1호 전식은 건빵과 절인 고기(콘비프), 구운 콩, 말린 생선, 고춧가루와 약간의 설탕과 소금으로 구성되었고, 한 끼에 약 1천 칼로리로 하루 세 끼 기준 약 3천 칼로리의 열량을 냈다.
한국군이 개발한 전식의 진가는 1918년 개시된 시베리아 전쟁에서 입증되었다. 동시베리아의 혹독한 날씨와 빨치산의 습격으로 한국군 장병들은 제대로 된 취사를 할 수 없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이 때 야전전투식량은 병사들의 소중한 한 끼 식사가 되어주었다. 당시 참전용사들의 회고에 따르면 1호 전식은 맛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먹을만 했고, 전식 덕분에 다분한 노력의 필요와 빨치산의 기습 가능성을 높여주는 취사 과정을 생략할 수 있었다고 한다.
| 점심시간이 되자, 우리 소대원들은 보초조를 제외하고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일제히 연갈색 전투식량 봉지를 꺼내어 들었다. 소대장이 취사 대신 전투식량을 섭취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밥을 하려 불을 피웠다가는 인근의 좌익 빨치산들의 이목을 끌 수 있기 때문이라고 소대장은 말했다. 처음 먹어보는 전식의 맛은, 설명할 길이 없지만 그저 그랬다. 못 먹을 맛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맛이 좋지도 아니하였다. 건빵은 씹기 전에는 딱딱하고 씹은 후에는 퍽퍽해서 먹기 힘들었지만 별사탕, 염장고기과 함께 먹으니 그나마 괜찮았다. 구운 콩과 동태에는 고춧가루를 뿌려 먹었다. 그렇게 전식으로 꼬박 다섯 끼를 떼웠다. 쌀밥과 국이 그리웠다. 박진순 중추원 의원, 당시 육군 상병 |
박진순의 증언에서도 확인되듯이 1호 전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시베리아 전쟁에 파견된 병사들이 야전취사 마차가 들어서지 못하는 지역에서도 1호 전식의 건빵과 염장고기 대신에 따뜻한 쌀밥과 김치를 먹고 싶어했던 것. 이에 한국군은 쌀밥이 포함된 2호 전식(YJS-2)을 개발해냈다. 2호 전식의 내용물로는 백미와 함께 고기, 콩, 나물 캔과 말린 다시마와 말린 생선 그리고 간장, 된장, 고추장, 녹찻잎이 있었다. 이와 함께 일선 부대에는 찬합에 밥을 하거나 차를 끓여 마실 수 있게[26] 소형 스토브와 연기가 나지 않는 고체 연료가 지급되었다. 다만 병사들이 그리도 먹고 싶은 했던 김치는 산성 때문에 기술의 한계로 포함되지 못했다. 2호 전식이 1921년 초부터 보급되면서, 국군은 1호 전식과 2호 전식을 혼용했다. 2호 전식은 스토브를 사용해 간단함 취사를 할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 1호 전식은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섭취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제3차 극동전쟁)
| 춘천 전투 직후 3호 전식을 먹는 육군 의무관[27] (194x.x.xx) |
1호 전식을 대체한 3호 전식(YJS-3)은 1933년에 대공황 속에서 개발되었다. 3호 전식은 1호 전식에 비해 조금 더 사람 먹는 것 같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염장고기가 사라졌고 그 대신 고기 스튜 캔, 비빔밥 캔, 고추장과 정수제가 추가되었다. 일선 장병과 간부들 사이에서 이빨분쇄기라고 불릴 정도로 딱딱했던 건빵이 개량을 통해 조금 더 부드러워지는 등 몇 가지의 사소한 개선도 있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훨씬 더 다양한 메뉴가 추가되어 3개 종류의 식단이 개발되었어야 했지만 대공황으로 인한 가혹한 군축때문에 대폭 깎인 예산으로 근근히 군대를 유지해야 했던 국방성은 비용 절감을 위해 여러 메뉴를 삭제했고 식단도 단일 종류로 줄였다.
20세기 후반
현재
종류
평가
단
노베루 프라이즈
당
| 녹우크라이나의 보수주의 정당 | ||||
| 창당 | → | 진보당 | → | |
| 진보당 | |
|---|---|
| 오어명 | Партія прогресу[30] |
| 영어명 | Progress Party (of Green Ukraine) |
| 창당일 | 1917년 |
| 해산일 | 1931년 (신설합당) |
| 후신 | |
| 이념 | 보수주의 (녹오) 국민주의 (녹오) 경제적 자유주의 반공주의 |
| 스펙트럼 | 중도우파 ~ 우익 |
| 당색 | 청회색 (#475885)
|
| 당원 수 | 1만 9천 명 (해산 직전) |
| 선거연합 | |
개요
녹우크라이나 제1공화국 시기에 존재했던 혁명적 민족주의 성향의 우익 정당. 강력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함께 사회보수주의, 반공산주의, 기독교(특히 정교회) 가치 보호 등을 추구했다. 주요 인물로는 녹우크라이나 제헌위원회 의장과 제9대 총리를 역임한 베네딕트 야코벤코가 있다.
상세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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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녹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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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대 녹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 미콜라 레온티요비치 유나키우 Микола Леонтійович Юнаків | ||||||||||||||||||
| 출생 | 1871년 12월 6일 | |||||||||||||||||
| 국적 | → → | |||||||||||||||||
| 사망 | 1931년 8월 1일 (향년 59세) | |||||||||||||||||
| 묘소 | 녹우크라이나 성 안드레아 국립묘원 | |||||||||||||||||
| 임기 | ||||||||||||||||||
| 1925년 5월 ~ 1928년 8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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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러시아 제국,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그리고 녹우크라이나의 군인. 제3대 우크라이나 극동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생애
평가
여담
- 프로필 사진은 우크라이나 인민군 시절 찍은 것으로, 옷깃의 계급장은 소장 계급장이다.
각주
누군가
녹우크라이나 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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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반 모졸레우스키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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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대 녹우크라이나 대통령 이반 빅토로비치 모졸레우스키 Іван Вікторович Мозолевський | ||||||||||||||||||||||
| 출생 | 1862년 4월 1일 | |||||||||||||||||||||
| 국적 | → | |||||||||||||||||||||
| 사망 | 1935년 1월 10일 (향년 72세) | |||||||||||||||||||||
| 묘소 | 녹우크라이나 성 안드레아 국립묘원 | |||||||||||||||||||||
| 임기 | 제2대 녹우크라이나 대통령 | |||||||||||||||||||||
| 1926년 4월 1일 ~ 1930년 3월 3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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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녹우크라이나의 의학자, 민족주의 운동가이자 정치인. 제2대 녹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역임하였으며 녹우크라이나의 국부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생애
| 1919년의 모졸레우스키 |
여담
소속 정당
| 소속 정당 | 기간 | 비고 |
|---|---|---|
| 1917 - 1931 | 창당 | |
| 1931 - 1935 | 합당 |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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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탕
| 파일:레몬 탕후루당 로고 (개화).svg | |
| 레몬 탕후루당 | |
|---|---|
영어명
|
Lemon Tanghuru Party |
창당일
|
2023년 11월 8일 |
당영임
|
ㅇ |
이념
|
직접민주주의 자유주의 (한국) 청년정치 |
스펙트럼
|
중도 - 중도좌파 |
중추원의원
|
0석 / NNN석 (0.0%) |
부·도지사
|
0석 / 16석 (0.0%) |
당색
|
노란색 (#F8DE7E)
|
보라색 (#8A2B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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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원 수
|
4만 2천 명 |
국제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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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동맹 |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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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제📗에 치인 대학생👨🎓도
레몬 탕후루당 당가 |
국대
고쿠민노토
- 자유주의
- 국바세(보수자유주의): 이준석, 천하람, 허은아, 김용태
- 여시재(시장자유주의): 이광재, 김동연, 조정훈
- 보수본류
- 바른정치(공화주의): 유승민, 하태경, 유의동, 류성걸, 오신환
- 새보수(자유보수주의): 정병국, 원희룡, 남경필, 조응천
- 청류회(온건 보수주의): 나경원, 오세훈, 최재형
- 새미래(사회보수주의): 이낙연, 박광온, 이원욱
- 보수방류
- 자유한국(국민보수주의): 홍준표, 조경태, 김용판
- 비상(자유지상 보수주의): 용혜인, 오준호
인구 최라
- 볼로 312 31
- 프리 326 32
- 모바 257 25
- 티흐 272 27
- 우수 211 21
- 하바 255 25
- 하카 225 22
- 스보 283 28
- 아무 189 19
- 이미 27 3
- 사할 85 9
- 비라 146 14
- 제이 123 12
- 우다 172 17
- 부레 106 11
- 추미 15 2
- 3,004 301
녹오 대학
- 볼로 성 일라리온, 볼로
- 프리 프리, 육군, 국방, 슬로
- 모바 모바, 항공, 공군, 모바 의과, 모바 농과, 유리, 프코
- 티흐 티흐, 해군, 해양, 즈나 공과, 아드, 야폰
- 우수 우수, 이만 의과
- 하바 하바, 과기
- 하카 하카, 트하 공과
- 스보 스보, 자유, 스보 공과
- 아무 아무, 코노
- 사할 사할
- 이미 이미 민족
- 비라 비라, 문화예술
- 제이 제이
피카레스크 단편선
| 그는 한국의 거대 기업들이 증오스러웠다. 자국의 재벌들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한국에서 온 기업들은 그 정도가 심했다. 적어도, 자국의 재벌들이 버는 돈은 어디까지나 '우리 나라'의 돈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온 기업들은 오로지 우리 나라의 자원과 노동력을 한국 본토로 방출할 뿐이었고, 현지의 경제개발에는 하등 관심이 없었다. 뼈빠지게 일해봤자, 가족들의 생계는 나아질 구석이 보이지 않았고 한국인들의 배만 채워줄 뿐이었다. 이반 탈리스넨코의 일기 (가제) by 에러 |
| 캄캄한 어둠 속, 차가운 돌과 흙 사이. 장스쥔은 깊이 들이마신 공기가 검은 먼지로 가득 차 있음을 느꼈다. 막장 작업을 끝마친 뒤에도, 탄광의 무겁고 답답한 느낌은 그를 계속해서 짓눌렀다.
거울 앞에서 분진이 까맣게 앉은 얼굴을 문지르며, 그는 어린 시절 그의 소학교 선생이 알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얼마 가지 않아 노동운동을 위해 학교를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내려간 선생. 그가 들었던 마지막 소식은 인민혁명당에 가입했다가 한국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짐 크로. 그것은 거울 속 남자를 말하는 것 같았다. 또는, 같은 아세아인임을 외치며 광부들을 부려먹는 한국인 사장같기도, 명목상으로 시찰을 온 한국 본사의 직원들같기도 한 것이었다. 일이 끝나면, 곧바로 노동자들은 일곱 평 남짓하는 방에 몸을 뉘었다. 숨이 막히는 기분은 잠시도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씻어내지 못한 분진이 그를 불태울 듯한 불안감이 들었다. 때로 그는 아버지와의 추억을 그 방에서 찾았다. 기억 속아버지는 어머니와 어린 그를 사이에 두고 누워, 자신의 후난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당신이 도망쳐온 이곳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읊어주곤 했다. 많은 것이 바뀌었다. 더이상 마적떼도, 군량을 요구하던 군인의 무리도 없었으나, 그와 그 동네에 살던 사람들은 어떤 것들을 잃어버렸다. 어느새부터, 그들은 중국인이지만 중국인이 아니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찾은 기회의 땅도 어디론가 도망가버렸다. 아버지가 일구던 밭은 공장이 되었고, 오지 않은 고지를 무시한 죄로 그 노인은 땅을 빼았겼다. 시내에서 한국인이 떠드는 말을 듣고 자신이 농사로 먹고 사는 것과 새로 깔린 철도 사이의 연관성을 궁구하던 소년은 시간에 떠밀려 청년이 되었다. 청년이 황황히 떠난 그 마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을 견디지 못하고 지워졌다. 그가 누운 일곱 평 방에는 이부자리를 깔고 같이 누울 아내도, 이야기를 들려줄 아이들도 없었다. 그의 아내는 럭키의 공장이 폐기물을 간수하지 못해서 보상금 몇 푼만을 남기고 떠나갔다.(모순적이게도, 그는 결국 그 돈의 일부로 럭키 치약을 샀다.) 한국은 그의 남은 가정을 완전히 망가뜨려 놓을 셈이었는지도 모른다. 공부에 뜻이 없었던 그의 아이들은 중학교를 나오자마자 현대의 공장으로 들어갔다. 가난에 쫒긴 맏이는 손가락을 잃었고, 둘째는 병원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병원비가 필요했던 그는 다시 탄광에 들어갔다. 그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는 먹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갱도는 게걸스럽게 그 안의 사람들을 먹어치웠고, 이 땅의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렸다. 혹은 아예 신경쓰지 않는지도 모른다. 대신 사람들은 황제가 라디오에서 떠드는 거창한 소리, 나라를 한국 기업에 들어다 바치는 일에 대해 떠들기를 즐겼다. 카나리아가 산소가 부족한 갱도 속에서 스러지듯, 사람들은 듣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해 떠드는 사람들을 사회주의자라는 핑계로 침묵시켰다. 그 속에서 스쥔은 생각하는 방법을 잊었다. 신문도 더이상 펼치지 않았다. 고향의 풀꽃 향기는 갱도의 흙내음에 덮여 더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꿈꾸던 세계는 개화하지 못했다.by 키네 |
by [[]] |
by [[]] |
- ↑ 비변위의정 대행
- ↑ 발음 : 아이실란 타이핀 사타아
- ↑ 원내대표
- ↑ 사무총장
- ↑ 회파 형성
- ↑ 중추원 의원연구단체 등록
- ↑ 국무총리를 역임한 당산 김철이 이끌던 계파
- ↑ 사회민주당 부영임을 역임한 영암 박용만이 이끌던 계파
- ↑ 김영삼 내각 초기 당시 부총리 겸 국토건설성장관를 역임한 세명 제정구가 이끌던 계파
- ↑ 김철은 총리 재임 당시에는 양산파 소속이었다.
- ↑ 경제적으로는 중도좌파와 좌익에 걸쳐져있다는 평가를 받으나 사회적으로는 상당히 보수적이면서도 민족주의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 ↑ 현장파가 정식 중추원 의원연구단체로 등록되기 전
- ↑ 회파 형성
- ↑ 중추원 의원연구단체 등록
- ↑ 국무총리를 역임한 거산 김영삼이 이끌던 계파
- ↑ 김철은 총리 재임 당시에는 양산파 소속이었다.
- ↑ 17.0 17.1 회파 내 구성원들의 의견에 편차가 있어 사회적 이념이 명확하지 않다.
- ↑ 현장파가 정식 중추원 의원연구단체로 등록되기 전
- ↑ 아이신기오로 성씨 사용 시작
- ↑ 발음 : 만주 투림파 방크
- ↑ 국무원 소속이 아니며 따라서 내각이나 수상의 지시를 받지 않는다.
- ↑ [1]
- ↑ 원장을 제외한 육화원의 모든 조직원은 신원이 대외비이다.
- ↑ 개화 이전의 전투식량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기 때문에 추정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 ↑ 야전의 첫글자 Y, 전투의 첫글자 J, 식량의 첫글자 S를 따와 만든 단어로, 대부분의 국군 장비의 제식번호가 이런 식으로 붙여진다.
- ↑ 전선에서 끓여 마시는 차는 일종의 기호식품으로서 병사들의 사기 증진의 효과와 동시에 더러운 물을 끓여 마셔 질병을 예방하는 기능도 있었다.
- ↑ 부위 계급장을 달고 있다.
- ↑ 최화학, 장세용과 공동 수상
- ↑ 박남규 등 3명과 공동 수상
- ↑ 발음 : 파르티야 프로흐레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