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표회의 (조선의 장단)

핫산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24일 (월) 13:20 판 (→개요)

핫산
[ 주요 인물 ]
[ 타임라인 ]
[ 타임라인 ]
[ 연표 (조선의 장단) ] : 본 타임라인에는 한국의 정치적 사건, 혹은 본 세계관에서 한국과 관련을 갖는 문서만을 서술함.
1910년대   경술국치 · 3.1운동 · 상해임시정부
1920년대   국민대표회의 · 진호합작
1930년대   수양동우회 사건
[ 세계관 소개 ]
[ 세계관 소개 ]
전 세계의 동정만 가지고는 독립을 얻을 줄로 생각지 맙시다.
우리의 독립은 우리의 손으로만이 되옵니다.
우리의 독립은 우리의 맘으로만이 되옵니다.
우리의 독립은 우리가 단결하여 싸우되 마지막 핏방울이 떨어질 때까지 싸워야 되옵니다.
– 김규식 (1881~1962) –


조선의 장단은 "만일 해방 전후 한국이 평화롭게 통일했다면?" 이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브위키의 대체역사 세계관입니다.
[ 목록 바로가기 ]
[ 허브 문서 바로가기 ]
이 문서는 조선의 장단의 공식 설정입니다. 관계자 외 이용을 금지합니다.
문서의 모든 내용은 허구입니다.

개요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 중국 상하이 인민정부대례당에서 개최된 한국의 독립운동 계파 간의 회의를 말한다. 이 회의에 모인 국내외 단체의 대표들은 새로운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하였다.

상세

1923년 1월 3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민국로(民國路)의 미국인 예배당에서 첫 회의가 열렸으며 1923년 6월 7일까지 총 74차례의 회의를 개최하였다.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 71개, 지역 23개 대표 125명이 참석해 공론과 공결을 통해 독립운동의 통일적 지도기관과 운동노선을 세울 목적으로 개최되었다. [4]

국민대표회의의 대표는 자격심사를 거쳐 뽑았는데 대표로 확정된 인원은 국내·상해·만주 일대·북경·간도 일대·노령(연해주)·미주 등지의 대표 124명이었다.

창조파(신채호)와 개조파(안창호), 그리고 현상유지파(김구, 이동녕)의 대립이 있었다. 임시정부의 존속을 주장하는 김구, 조소앙, 이동녕 등이 모조리 불참하였기에 회의는 창조파와 개조파 간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중립파를 주축으로 한 이들이 부상하며 정치력 영향력을 확대하고, 김구가 김철수를 저격하면서[5] 위기가 고조되자, 새로운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양자 간 합의에 도달하였으며, 기존의 임시정부를 대체하며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군사조직을 통할하는 천진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사회주의 이념을 따르지 않는 타협안에 불만을 품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6]

배경

임시정부 내 갈등

3.1운동이후 국내외에서 선포, 수립된 임시정부들 가운데 노령의 대한국민의회(1919.3.17.)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4.11.)가 실질적인 추진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두 임시정부는 통합협상과정을 통해서 국내에서 4월 23일에 선포된 한성정부를 봉대˜승인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임시의정원과 국민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국회를 구성하고, 정부는 한성정부 각원명단대로 구성하기로 한 것이다. 상하이 임정 측은 임시의정원(1919.8.23.~9.17.)에서 앞서 4월 11일 임정조직 당시 임시헌장을 개정하는 방식으로 임시헌법을 만들었고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를 ‘대통령’으로 바꿨다. 국민의회 측은 상하이 임정 측이 ‘승인’이 아닌 ‘개조’를 단행하여 통합을 위한 ‘협약’을 파기하였다며 통합임시정부 참여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승인-개조분쟁의 결과 한국독립운동세력은 임시정부 참여파(개조파) 와 비참여파(승인파)의 두 진영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일부 불참세력에도 불구하고 ‘통합임시정부’는 1919년말 군사, 외교, 내정, 교통, 교육 등 국정 전반에 걸친 ‘대정방침’을 마련하고,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하는 등 국내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렇지만 통합임시정부 1년여의 활동기간에 지도자들간의 독립운동노선, 지역적, 종교적 배경의 차이에 따른 갈등과 분열로 인하여 명실상부한 통합에 이르지 못하여 내홍을 계속하였다. 외교독립론을 주장한 이승만계, 무장독립론을 주장한 박용만계, 실력양성론을 내세운 안창호계로 대립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은 또한 지역색에 따라 기호파와 서북파 등으로도 나뉘었다.

게다가 임시정부 자체의 대표성 또한 문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상하이 임시정부의 한성정부의 '승인'·'개조' 문제는 이후 임시정부의 분열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야기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20년 가을 일본이 자행한 경신참변(간도참변)으로 상하이 임정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1920년 6월의 봉오동 전투, 10월의 청산리 전투에서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무기 고갈과 근거지 상실로 인하여 서북간도의 항일독립군들은 근거지를 떠나 러시아 연해주지역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서북간도의 항일독립군 섬멸이라는 간도 침공의 목표 달성에 실패한 일본은 서북간도의 한인 동포들에 무자비한 학살, 방황, 파괴 등을 자행하였다. 무방비 상태의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한 아무런 대책이나 대응도 취하지 않은 임시정부에 대한 국내외의 격렬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베이징에서는 1920년 9월 박용만, 신채호, 신숙 등 15명이 베이징에서 군사통일촉성회를 조직하고 남북만주로 대표를 파견하여 군사통일회의 개최를 추진하였다. 이는 1920년 봄 이후 서북간도 일대에서 독립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 일본군에 맞서 항일무장단체들을 통일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군사통일촉성회는 이후 베이징을 중심으로 반임정세력이 조직적 결집이 시작되었다.

1920년 말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 처하게 되자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으로부터 급거 상하이로 오게 됨으로써 1921년 초 대통령이 최초로 참석한 수차례의 국무원회의가 열렸다. 국무총리 이동휘가 이승만의 대미위임통치청원에 대한 해명과 근본적인 임정개혁을 요구하였으나 안창호와 이동녕 등 기호출신 총장들의 반대로 무산되자 1921년 1월 24일 국무총리직을 사임하고 말았다. 같은 날 국무원 비서장 오영선, 법무차장 안병찬이 동시에 사임하였다.

신채호·김숙·박용만등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문제로, 문창범은 한성정부의 '승인'·'개조' 문제로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임시정부는 민족운동세력을 전부 포함하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동휘의 사임 이후 뒤이어 안창호·남형우·김규식등도 탈퇴하여 임시정부는 사실상 정부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국민대표회의 개최 요구

국무총리 이동휘의 사임으로 시작된 시국 변화에 호응하여 1921년 2월, 김창숙·박은식·원세훈 등 독립운동가 15인이 1921년 2월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을 발표했다.이들은 국민대표회의 목적이 “전국민의 의사에 의하여 통일적인 온고穩固한 정국을 기도하고” “군책群策과 군력群力을 복합하여 독립운동의 최량最良한 방침을 수립”하는 데 있다고 천명하였다. 이들은 국민을 대표하여 정부를 감독하는 기관인 임시의정원이 이를수습할 능력이 없다고 결론짓고 민의에 의해서만이 “근본적 대개혁으로써 통일의 재조再造를 계획하고 정국의 완조完組를 도모하여 독립운동의 신국면을 타개”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즉, 본 격문에서 이들은 무능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과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무장투쟁세력을 포함한 통일적인 정부와 독립운동방향을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각료들은 국민대표회의 소집운동을 정부패궤운동이라고 규정하고 반발하였다.

한 편 임시정부의 외교노선에 반대하고 무장투쟁 노선을 주장하던 신채호·박용만·신숙 등을 비롯한 8개 단체 대표들은 1920년 9월 북경에서 군사통일회를 조직한다. 여기에 참가한 하와이 독립단 대표 권성근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사실을 폭로하고, 이로써 군사통일회는 이승만을 성토하고 임시정부 불신임을 결의하게 된다. 이 결의에 입각하여 군사통일회의는 1921년 4월 27일 자로 임시의정원에 「통첩」을 전달하였고, 5월 같은 내용이 담긴 「선언서」와 대미위임통치청원자인 임시대통령 이승만과 이를 방치한 전대한국민회중앙총회장 안창호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내외에 공포하였다. 베이징의 유학생회 역시 같은 취지의 「성토문」을 발표하였다. 4월에 들어와 임시정부의 주요각원들인 유동열(참모총장겸 총사령관), 남형우(교통총장), 김규식(학무총장), 안창호(노동국총판)가 연이어 사임하게 되면서 임시정부는 마비 상태에 빠졌다. 이에 군사통일회에서는 임시정부 불신임에 따른 제반문제를 논의하고 국내외의 독립군을 망라하여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것을 주장하고 5명의 준비위원을 뽑았다.

이어 1921년 5월 6일에는 만주지역의 김동삼·이탁·여준등이 액목현(額穆縣) 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개혁안>을 작성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추진한다. 이렇게 국외 각지에서 임시정부를 부인하고 개조하자는 요구가 이어지자 여운형·안창호 등에 의해 국민대표회의 소집문제가 제기된 후 국민대표회의 기성회가 결성되었고, 이를 토대로 1921년 8월 '국민대표회비회'가 성립되었다.

국민대표회주비회

국민대표회 소집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계기는 상하이에서 개최된 두 차례의 연설회였다. 5월 12일 상하이 재류 동포 4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첫 연설회에서 여운형과 안창호가 연이어 나서서 국민대표회 소집의 필요성을 제창하였다. 연설회 후 참석자의 절대 다수가 국민대표회 소집에 동의하였다.

두 번째로 개최된 연설회에서 안창호의 연설이 끝난 후 참석자 300여 명의 동의를 얻어 국민대표회기성회 조직을 촉진하기 위한 조직위원 20명을 선출하였다. 여기에는 여운형, 김규식, 안창호, 남형우, 윤현진, 김만겸, 원세훈 등 상하이 지역의 주요 인물들이 망라되었다. 마침내 1921년 6월 6일 상하이 국민대표회기성회 총회가 열려 「국민대표회기성회 간장簡章」을 의결하고 전권위원 30명을 선출하였다. 상하이의 국민대표회기성회에 이어 이후 베이징, 톈진, 하와이, 난징, 미주 다뉴바 등지에서도 국민대표회 촉성회 또는 국민대표회 기성회가 차례로 조직되었다.

1921년 8월, 상하이, 베이징, 톈진, 난징의 대표들이 긴밀히 협의하여 국민대표주비회를 조직하였다. 주비회는 집무위원을 선출하여 회의를 열고 회의지점, 회의기일, 대표 자격 등에 관한 진행방침을 결정하였다. 대회를 상하이에서 11월 상순에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대표들은 지역대표와 단체대표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주비회의 활동은 김구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옹호파의 반대, 대회경비에 따른 자금난 등으로 인해 부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러 독립 운동 세력은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와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극동인민대표대회)에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에 두 회의 개최 기간 중에는 일시 중단되었다. 이외에도 민국民國 연호와 기원紀元 연호 논쟁과 국민대표회 소집에 필요한 자금 문제 역시 대회 개최를 어렵게 하였다. 그러나 두 국제회의에서 예상과 달리 큰 성과를 얻지 못하게 되자 결국 국민대표회준비회는 1922년 다시 활동을 재개하였다.

국민대표회의 개최

임정특사로 모스크바에 파견되었던 한형권이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20만 루블의 자금을 받아 1921년 11월 21일 상하이에 도착하게 되면서 국민대표회주비회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리고 워싱턴회의에 이어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가 종결되면서 국민대표회 소집운동이 재개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특히 1922년 3월경 모스크바 대회 참여 대표들이 상하이로 대거 귀환하게 되면서 국민대표회 개최 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한편, 4월 16일 임시의정원에서는 4월 3일에 제출되었으나 며칠째 논란 중에 있던, 국민대표회의 조속한 개최를 찬성하자는 천세헌 등 102명이 제출한 인민청원안이 통과되었다.

한형권의 자금 덕분으로 활동을 재개한 국민대표회주비회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 소집에 관한 일체 사항을 준비하는 것을 목적으로 규정한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 장정을 정하고 새로이 12명의 위원으로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주비위원회는 1922년 5월 10일,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주비위원회의 이 「선언(서)」은 “시세의 추향과 민중의 요구에 응하여 과거의 모든 분규 착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의 완전 확실한 방침을 수립하여 우리의 독립운동이 다시 통일적, 조직적으로 진행되게 할 양대 안건 하에서 국민대표회 소집사항을주비할 책임을 부담하고 성립되었다”며 그 활동 목표를 제시하였다. 주비위원회 선언서는 기원 연호와 민국 연호를 병기하였는데, 임시정부에 대한 대립된 두 입장이 타협된 것이다.

주비위원회는 대회 연기로 인한 새로운 상황을 반영하여 1921년 8월에 결정한 대표선정에 관한 사항을 수정한 내용을 『독립신문』 1922년 6월 3일 자에 발표하였다. 대표를 선거할 구역, 단체, 인원수를 재조정하고, 대표는 지방과 단체로 나누었다. 대표들은 대표회에서 공인할만한 확실한 신임장을 휴대해야 하고, 현하 시국의 정돈과 장래 방침의 수립에 관한 의안제출, 해당 지방에 대한 상황보고를 준비하도록 했다. 이후 주비위원회는 러시아, 국내, 일본, 만주 등지로 대회참가 대표들을 초치하기 위한 13명의 특파원들을 파견하였다.

1922년 5월 국민대표회준비회는 소집 선언서를 발표하고 9월 1일에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한다고 공고하였다. 그러나 10월 15일로 연기되었다. 1922년 9월 상순 이래 각지에서 대표들이 상하이로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나 대표들이 충분히 모이지 않아 당초 예정했던 10월 15일에는 개최되지 못하였고 12월 20일로 다시 연기되었다. 개회일을 또 다시 연기한 것은 교통의 불편 때문이었다. 대회가 개최되지 못한 또 다른 원인은 1922년 10월 말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였다. 당시 이 대회에는 128명의 대표가 참여하였고, 특히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경우 국내 대표들은 국민대표회의에 참석대표 자격을 갖고 있어 이들의 상하이 도착을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2월 19일에는 주비회 위원들이 도착한 대표들을 대동여사大東旅舍로 초청하여 만찬을 가졌으며, 12월 22일에는 주비회 위원들과 54명의 대표들이 간담회를 가졌다. 12월 하순에 이르러 60명에 가까운 대표들이 도착하여 12월 23일부터 28일까지 수차례의 예비회의를 가졌다. 특히 12월 27일 삼일당에서 개최한 예비회의에서는 대표들이 중론을 모아 1월 3일에 정식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각처에서 국민대표회의 촉성회가 조직되는 등 활발한 준비 작업 끝에 마침내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 1월 3일에 개막하였다. 여기에는 국내·상하이·만주일대·북경·간도일대·노령·미주 등의 135개 독립운동단체, 158여 명의 대표들이 모였으며 최종적으로 125명의 대표가 확정되었다.

먼저 안창호를 임시의장으로 한 예비 회의에서 본회의에 상정할 안건이 심의되고, 1월 31일부터 김동삼을 의장으로 본회의가 시작되었다. 국민대표회 본회의에서는 먼저 주비위원장 남형우의 경과보고가 있었고, 곧이어 회의를 진행할 의장단 선출에 들어갔다.

의장단의 구성은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한 독립운동단체들의 지역적 기반을 고려하여 의장에 김동삼, 부의장에 윤해·안창호 등을 뽑았다. 본회의는 회의규정 및 일정을 마련하고 독립운동방침을 효율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군사·재무·외교·생계·교육·노동 등 6개 분과를 두었다. 회의는 분과를 중심으로 제반 문제를 구체적으로 토의하는 등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시국문제, 즉 임시정부에 관한 의제가 논의되는 과정에서 의견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먼저 개조파(계통파)는“임시정부의 전통을 인정하고 그것을 개조해서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개조파에는 국내 각 지방 단체 대표들, 시베리아와 남북만주에서 온 대표들 거의 전부가 속해서 대회의 다수파를 형성했다. 대표들의 출신 지역으로 보면 서도파(평안, 황해), 양남파(전라, 경상)에 상해 공산당파가 가담한 형세였고, 김동삼, 안창호, 윤자영, 김철수 등이 주요 인물이었다.

창조파는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인정한다면 국민의회도 동시에 최고기관이었음을 인정하라”고 주장했다. 이는 과거의 임시정부를 다 부인하고 새로이 최고기관을 창조하자는 입장이었는데, 여기에는 “아령에서 온 국민의회파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박용만파 등 17명”에 일부 상해파 소속 인사들이 속했는데, 과거 통합임시정부 출범 당시 승인˜개조분쟁에서 ‘승인’ 입장에 섰던 세력이었다. 윤해, 원세훈, 오창환, 신숙, 이청천 등이 주요 인물이었다.

개조와 창조,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은 중도파는 “극단적 성향의 양 극단에서 종국적으로 두 개의 정부가 등장하는 것을 막고자” 양 극단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다.

임시정부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탈퇴

안창호, 여운형, 김동삼 등 개조파 일부는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열렬히 원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민족적 운동인 3.1운동 정신의 결과물로서의 임시정부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새로운 최고기관의 설치가 아닌, '타락한 이승만'과 그의 주구로서의 정부를 타도하고 정부의 이전을 결의하자는 새로운 안건을 내놓았다.

결의는 다수결에 따라 통과되었고, 이어서 개헌과 국민위원회 조직 등의 결의안이 통과되며 논의는 급물살을 맞았다. 이러한 방향에 위기감을 느낀 김구가 청년들을 운용해 김철수를 저격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에 따라 개조파와 창조파의 합의는 사실상 결정되었으며, 북경과 근접하며 독립운동 총노선을 지휘 가능한 톈진 프랑스 조계지에 신 정부를 설치하고자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임시정부의 적통을 잇고자 하는 것과, 비-사회주의 정부 건설에 반발하며 이탈했다.

결과

상해임시정부에서는 이동녕 내각이 구성되었으나, 곧 경비 부족 등으로 무너졌고, 상해임시정부는 기나긴 침체기에 들어섰으며, 결국 1925년, 이승만의 쿠데타 이후로 완전히 독립운동의 지도력을 상실하게 된다.

천진임시정부 수립

국내외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톈진에 새로운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며, 이것이 천진임시정부가 된다.

  1. 위 사진에는 현 시점 가장 큰 진보정당만을 기재한다.
  2. 위 사진에는 현 시점 가장 큰 민주당계 정당만을 기재한다.
  3. 위 사진에는 현 시점 가장 큰 보수정당만을 기재한다.
  4. 김구의 백범일지 등에 따르면 소련 정부가 지원한 20만원의 자금으로 회의가 개최되었다고 했지만, 근거는 부재하다.
  5. 생존했다.
  6. 소련이 이들을 승인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첫째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만의 임시정부라 조선민족을 대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정통성이 천진임시정부에 있다고 판단했고, 둘째로 적백내전을 막 끝낸 소련의 입장에선 이들을 소련 영내에 두면서까지 일본과 대립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