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열황제/생애

솔피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8월 9일 (금) 14:39 판 (→대학생 시절)

틀:고종 인황제 관련 문서

생애

(전략) 대황제께서는 성군이었다. 세도가의 전횡과 계속되는 당쟁으로 환란에 봉착한 제국을 구출하시었고, 제국이 나아갈 방향을 밝히셨다. 대황제께서 이루신 업적은 경조 인황제·성조 태황제께서 어일신을 통해 재조를 이루신 일과 같으시며, 대황제께서 하신 말씀은 공자·맹자·정자·주자가 한 말이었다. 황제의 위에 오르시기 전에는 충용한 신하로써 국체를 호지하셨고, 지존이 되신 뒤에는 앞장서서 제국의 위엄과 번영을 위해 애쓰셨으며, 뒤에서는 사민의 평안을 위해, 일평생을 제국을 위해 바치셨다. 특히 고금을 통틀어 이토록 사민을 염려하시고 아끼신 애민의 군주는 없었다. 이처럼 현명하고 위대하셨던 임금이었던 그의 왕도를 단지 이 정도로 밖에 소개할 수 없어 애석할 따름이다.
고종 묘지명

어린 시절

1938년(대흥 10년) 1월 19일, 황실병원에서 선친왕과 선친왕비 유씨의 3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1945년 6월 한왕(漢王)에 봉해졌다. 아명은 할아버지 열종이 이름을 직접 지어주었는데, 황실의 막내라는 의미에서 막동(莫同, 막내)이었다.

고종은 어릴 때부터 자유롭게 성장하였다. 그 때문에 '사람들과 능숙하게 어울리며,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한다는'는 평도 받았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장래 선친왕이 될 후계자였던 예친왕과 대궁의 봉사손으로 입적된 광친왕은 고종에 비해 대단히 엄격하게 양육되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리견의 사상과 생활 방식을 배우게 하려는 아버지 선친왕의 의향에 따라 미국 태생의 엘리자베스 바이닝 부인[1]을 가정교사로 초빙하여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녀는 대한에서 가장 유명한 퀘이커[2] 교도 중 하나로, 퀘이커 교도와의 친분은 선친왕 때부터 전통이었다.

다만, 고종은 바이닝 부인과도 괄괄한 성격으로 인해 마찰을 빚었는데, 그 일화 중 하나로 바이닝 부인이 광친왕과 고종의 영어 수업 시간에 외국인 친구들을 부르고 그들과 스스럼없이 지내게 하기 위해 각각 광원군과 한왕이 아닌 '브래드(Brad)'와 '지미(Jimmy)'란 애칭으로 광친왕과 고종을 부르려 했는데, 이때 광친왕은 브래드라는 이름을 썼지만, 황족으로써 자부심이 넘쳤던 고종이 "싫습니다, 저는 한왕입니다.(No, I'm a King of Han.)"라고 반발한 일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바이닝 부인이 "이 수업에서는 '지미'라고 불려야 한다."고 설득하자, 고집을 부리며 "그렇다면, 저는 경(澃)[3]입니다."라며 고집을 부렸다.

사실 대한에서 바이닝 부인은 청소년기 고종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바이닝 부인은 황족으로써 자부심이 넘쳤던 고종에게 황족이 아닌 인간으로써 대하였고, 혼자서 무언가를 할 일이 거의 없는 고종이 수동적인 사람이 될까 우려하여[4] 여러모로 개방적이고[5], 능동적인 사고를 갖추게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한다. 고종도 그런 그녀를 싫어하지 않았는지 훗날 결혼식과 즉위식을 비롯한 각종 행사에 바이닝 부인을 주요 귀빈으로 초대했으며, 그녀가 미리견에 돌아간 이후에도 주미대한대사관을 통해 생일이면 항상 카드와 꽃다발을 보내줬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고종은 매우 괄괄한 성격이었다. 아버지 선친왕과 어머니 선친왕비를 포함한 선친왕가 전원이 온화한 성격인것에 반해 고종만 유독 괄괄한 성격이었다. 고종의 이런 괄괄한 성격은 증조부인 성조를 빼닮았다는 의견이 강하다. 실제로 아들인 연종과 물론 손자인 인덕황제도 선친왕가를 빼닮아 온후한 성격을 가졌다. 실제로 고종은 성조처럼 깡따구와 배짱이 두둑하고, 말빨이 뛰어나 어릴때부터 어른들과 말 싸움을 하면 한 마디도 지지 않았고, 이러한 성격 탓에 고종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리더십과 능력를 보였다. 강학원 중등과에서는 무리를 이끌고 패싸움을 벌여 세간의 이슈가 되기도 했고, 강학원 고등과에서는 학생들을 이끌고 고등과의 악습을 뿌리뿝고, 교내의 수구적인 교칙을 고치기 위해 학생운동을 주도하며 경신효황후에게 불려가 질책을 당하였으나, 고종은 오히려 당당하게 뻗대어, 대한에서 가장 독선적인 황후로 평가받던 경신효황후조차 고종의 괄괄한 성격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대학생 시절

장성한 고종은 관례적으로 황족들이 무조건 진학하는 강학원대학 대신, 대한제국 최고의 대학인 한성제국대학의 제1류, 법학부에 당당하게 진학한다.[6] 그렇게 진학한 대학에서는 매일을 술과 공족 신분을 믿고 동급생을 하대하는 공족들을 황족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줘패고[7], 황족의 신분을 통해 학교의 권위적 태도를 비난하며 학생운동을 벌였다.

1959년에 고종은 자신의 일생을 바꿀 만남을 하게 된다. 바로 부인인 혜승인황후와의 첫 만남을 가진 것이다. 전공수업을 위해 인문학부에 찾아간 고종은 평민인 혜승인황후와 우연히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고종은 어릴때부터 빼어난 외모를 가졌고, 대학에 진학할 당시 황실의 아이돌로 취급되었기에, 성대 여성들의 무수한 고백을 받았으나, 오직 혜승인황후의 고백만을 받아 사귀게 되었다고 한다. 결혼을 결심한 당시 여러 황족들과 공족들의 극렬한 반대를 받았으나, 고종이 "지희[8]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자, 황족으로써의 책임감도 없냐는 소리를 들었고, 격분하여 담배를 꼬나물고[9] "이럴바엔 폐서인 당하겠습니다."라고 뻗대었다. 이에 황실은 발칵 뒤집어졌고 혜승인황후는 주변의 엄청난 직ㆍ간접적 압력에 부담을 느껴 고종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이에 고종은 손을 붙잡고 "내 일생을 널 지키는데 쓰겠다"라며 청혼했다. 마침 한성제국대학을 취재하던 KBS가 이를 촬영하여 그날 저녁 뉴스에 대서특필 되었고, 신종이 그들의 입을 닫는 데에 결정타[10]를 날려줌으로써 1962년 결혼하여 화제가 되었다. 참고로 고종의 형제들은 모두 공족 가문의 자제와 결혼했다.

여담으로 대한에서는 당시로는 고가의 첨단 기계인 텔레비전이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흑백 TV로 중계되는 결혼식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앞다투어 TV를 구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00만대를 돌파했다고 한다. 또한 두 사람이 결혼 과정에서 겪은 우여곡절은 젊은 미남 황족과 아름다운 평민 여성이 우연히 대학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연애 끝에 결혼하게 된 아름답고 낭만적인 로맨스 이야기로 화제가 되었다.

전후 최초의 황족 관료

법학부를 우등생으로 졸업[11]한 뒤 정부 관료의 길을 걷게 되는데, 졸업 이후에도 고종은 파격적인 길을 걸었다. 종친사환금지법[12]의 제약을 받지 않는 군관이 되는 대신, 종친사환금지법의 제한을 받는 고등문관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달라 청하여 또 한번 장안의 화제가 되다. 당시 황실에서는 한왕의 행동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으나 이종의 윤허를 받아 한성제국대학 재학 시절인 22살의 나이로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공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고종은 고시 합격자들의 선망인 경찰청 커리어에 지원하여 최우선적으로 선발되었고, 경시청 고등경찰과[13]의 특별고등경찰로 임용되어 정보계통 분야에서 주로 근무했다. 경찰 시절 고종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자 근황주의자로써 비 제도권 극우, 극좌 세력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고, 이종의 총애를 받아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1965년부터는 고등경찰과의 수장인 고등경찰과장으로 임명되어 경찰의 정보계통을 장악했으며, 1968년에는 경찰을 떠나 귀족원의 황족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하였다. 정계 입문 이후에는 황실의 개혁과 자유권의 확대를 외치며 귀족원의 보수파와 대립했으며, 귀족원의 리버럴 파벌의 중진이 되었다. 이후 1970년에는 이종에 의하여 대한제국의 정보를 총괄하는 안전기획부의 수장인 안전기획부장이 되었다.

9.18 사건

고종이 안전기획부장으로 재직하던 중 1971년 4월 19일 소황제가 독감으로 쓰러지고,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되자 개성에서 강씨 척족과 경신순황후를 규탄하는 데모가 발생한 상황에서 안기부장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자격으로 계엄 상황에서 수사 전권을 맡게되며 실권이 점차 고종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제경군(제친왕)이 연관된 정치자금 수사를 진행하던 중, 황태후였던 순황후와 충돌하였다. 이 당시 순황후는 소황제가 시한부 판정을 받은 상황에서 택현 제도를 신설하여 자신의 인척인 제경군을 차기 황사감으로 지지하던 상황이었는데 제경군과 함께 유력한 황사 후보였던 고종이 평소 험악한 사이였던 제경군을 적극적으로 수사함에 따라 고종과 친 고종파 문무관을 숙청할 의지를 드러냈다. 결국 고종과 친 고종파는 9.18 사건을 일으킨다.

고종은 나이 33세에 군사혁명 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고종은 자신이 거느리던 안기부의 감청을 통해 군과 내각, 황실을 비롯한 대한제국 안팎의 모든 정보를 손에 쥔 상태로 1972년 9월 18일 저녁 제경군을 정치자금 수사를 한다는 명분으로 체포하였고. 해군육전대 병력 일부를 시작으로 제2야전군 상당수와 제1야전군의 일부가 원수부의 통제에서 이탈하여 내각과 황궁을 비롯한 주요 기관 및 시설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실체를 드러냈다. 이는 고종을 구심점으로 하는 사회에 불만이 가득한 장교들에 의해 계획적으로 궐기하여 9.18 총격사건을 일으켰다.

KBS라디오방송국, 원수부와 참모본부(현 육군총사령부), 군부, 제6군관구사령부, 을2호 벙커(제 1지휘소로 사용), 경시청, 파출소, 중앙전화국, 한성부청, 도청, 발전소 등이 표적이 되었다. 수상관저와 소황제가 머물던 경희궁은 육군 특수부대(GDT)의 기습에 의해 점령되었고, 수상이었던 백두진을 비롯한 여러 각료들이 체포된다. 고종은 새벽 1시 경, 직접 각의를 개최하여 내각 총사퇴 및 비상계엄 전국확대에 대한 추인을 얻었고, 새벽 3시에는 체포당한 현석호 군부대신과 박정희 2군 사령관을 비롯한 통제부총장 이성호 제독, 공군사령관 김신 장군, 육전대사령관 김성은 장군과 함께 경희궁으로 향해 소황제로부터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제경군 체포동의를 관철시켜 대한제국을 장악했다. 오전 6시에는 직접 담화를 통해 민의원해산 및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백두진 내각의 총사퇴를 선언하였고, 내각, 제국의회, 대심원의 역할을 포함한 제국의 전권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가져왔다.

국가재건최고회의

9월 20일 아침 고종은 자신을 의장으로 하고, 박정희를 부의장으로 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발족하고 1973년 12월 31일까지 전국의 모든 정치인 활동을 일체 금지시키며 미국과 협상을 통해 정변의 추인을 얻은 뒤 9월 23일 종친과 국가재건최고회의, 귀족원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황사[14]에 봉해졌고, 정통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다시금 선친왕의 아들로 입적 되었다.[15][16]

동시에 민생 안정책으로 농가 부채 탕감, 농산물 가격 안정 정책을 실시해 농민들의 호응을 얻고 친 경신순황후파 황족과 강씨 척족을 상대로 한 혁명재판을 통해 개성 시위의 유발 책임자를 소탕, 부패한 고관대작들을 일거에 체포 후 조리돌림하며 국민과 지식인들에게도 지지를 얻었다.

1972년 3월 10일에는 미국 초정으로 백악관을 방문하여 닉슨 미국 대통령과 민정이양, 자유민주주의 수호 및 공산주의에 대처하기 위한 군사협력 분야 등에 관한 회담을 나누었다. 1972년 5월 21일에는 소황제를 비롯한 황족들이 조속히 민간에 정권을 넘겨야 한다며 얘기한 것을 동아일보가 "조속한 민정 회복 필요"라는 제목으로 1면에 보도한 적이 있는데, 검열을 안 받고 이게 신문에 실려 동아일보 편집국장, 정치부 차장, 기사를 쓴 기자를 비롯한 정치부 기자 등이 연행되고, 소황제와 환담한 황족들이 최고회의에 끌려가고, 비서성에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고종의 지시하에 안기부에서는 정치학, 법학, 경제학, 교육학 등 학자들과 안기부 간부를 포함한 21명으로 구성된 대외문제연구소를 설립한다. 여기서는 고종의 평소 신념에 맞게 민주주의 질서의 정착과, 부패한 사회 체제의 개혁, 정치질서의 재편등을 목표로 각종 연구가 진행되는데, 기존의 전제군주제적인 대한국 국제 하에서 민주주의 체제의 휘약성 해소와 사회체제의 부패 해결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연구소에서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적인 새 헌법과 선거 제도를 고안해야 한다는 계획서를 작성한다. 이에 따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공식적으로 귀족원과 함께 제헌문제위원회를 설립하여 신헌법에 대한 논의에 들어갔다.

한편 1972년 10월 8일에는 쌍십절을 압둔 중국이 북부전선에서 대규모 포격 도발을 감행하였으나, 초전박살을 외친 한경왕에 의해 남경을 비롯한 중국의 대도시와 요동 전역의 군사요충지가 공습으로 피해를 입었다. 이때 포격도발에 대한 응징으로 고종은 민심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렇게 닌심과 권력, 군권을 모두 장악한 고종에게 두려움에 떨던 소황제는 병환에 차도가 보이지 않아 국사에 진념하기에 어렵다는 명분으로 양위의 뜻을 밝혔다, 이에 고종은 관례적으로 3번 거절하고 양위를 받아들여 연호를 성녕(咸寧)으로 하여 대한제국의 제5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재위 초기

즉위 초의 모습

고종은 즉위 직후 계엄령을 거두고, 신 헌법을 제정할 것을 밝혔다. 동시에 고종은‘월남 전쟁의 월남 정책’에 따라 파병 병력의 완전 철수를 선언한다. 이에 따라 제국군 잔류 부대의 철수를 지시한 칙령에 의해 1972년 12월 23일 후발대 118명이 항공편으로 철수함으로써, 월남에 주둔하였던 모든 부대가 철수를 완료하였다.

1972년 12월 12일 고종은 김정렬의 후임으로 박정희을 내각총리대신으로 하는 박정희 내각을 구성하였다. 12월 20일에는 서민 필수품을 중심으로 하는 물가안정을 지시, 24일에는 점차적인 물가통제의 해제, 성장을 기조로 하는 장기경제개발계획의 합리적 추진, 절약 장려, 수출 진흥을 골자로 하는 경제시책 4원칙을 발표한다.

1972년 12월 24일 고종은 담화를 통해 귀족원과 내각의 주도하에 새로운 헌법을 만드는 작업을 착수하였다. 이 상황 속에서 고종은 낡디 낡은 대한국 국제를 폐기하고, 바이마르 헌법과 프랑스 헌법을 뼈대로 삼은 입헌군주제 개헌안[17]을 국민투표에 부쳐 91.5% 지지로 통과시키고 1973년 2월 17일 귀족원의 명예직화와 민의원의 권한 확대, 최고재판소 신설과 위헌심사권 도입등을 뼈대로 하는 새 헌법을 공포하고, 내탕금을 하사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고 정치질서의 개편에 돌입한다. 1973년 민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은 경제발전의 성과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얻어, 총선에서도 크게 승리하여 의석의 62% 이상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고종의 즉위 초기를 정치적으로는 개헌과 정치질서의 재편이 주목받는 다면 사회적으로는 범죄와의 전쟁 선포가 널리 알려져 있다. 1973년 10월 13일 옥음방송으로 발표된 이 정책으로 인해 당시 사회적으로 기승을 부리던 각종 강력.조직범죄는 철퇴를 맞았다. 범죄와의 전쟁 선포 이후에 실제적으로 강력범죄 발생율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무엇보다 대한에서 조직폭력 범죄가 거의 뿌리가 뽑혔다는 점은 고종의 업적이다.

1975년부터 월간경제동향보고와 수출진흥확대회의라는 두 회의가 매월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이 회의들은 대황제의 주재하에 관료, 기업인과 업계 관련자,학자들이 참여해 물가와 경상수지 등 거시경제와 국내외 시장의 동향과 수출정책을 다루었다. 42년이나 매월 두 개의 대규모 경제 회의를 개최한 나라는 세계의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없었고, 매번 두 회의를 주관한 고종은 거듭된 회의 과정에서 최고 수준의 경제전문가로 훈련되어 갔다.

재위 중반

재위 말기

퇴위와 태상황

호랑이 등에서 내리다

고종은 2017년, 정확하게 재위 45년만에 퇴위하여 황태손 이연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황으로 물러났다. 이는 대한의 황제들 중 유일하게 자의로 퇴위한 황제[18]이기도 한데 고종이 존경하는 증조부 성조의 46년 치세라는 기록을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즉위식 당시 태손인 이연이 아직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아 태손의 계급인 원수 계급장이 부착된 제복을 착용했는데, 고종이 자신이 입은 제복의 대원수 견장을 손수 떼어 태손의 견장 자리에 달아주고 자신이 쓰던 원수봉을 태손의 손에 들려준 후에 "성상, 이 대한을 잘 부탁드립니다."하고 절하니 그 자리에 있던 대신들과 장성이 고종의 손주 사랑에 감동하였지만, 이연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르고 체통을 지키기 위해 울음을 꾹 참는 모습이 생중계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상황이 된 이후 태상황과 관련된 헤프닝이 있는데, 본래 인덕황제와 대신들은 고종을 퇴위 이후 태상황으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재위 시절부터 번거로운 예식과 권위의식을 껄끄러워 했던 고종은 이를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고종을 존경하던 이연은 할바마마께서 태상황이 되시질 못할 바엔 차라리 황위를 물려받지 않겠습니다.라며 버텼고, 고종은 태종이 퇴위 이후 상왕에서 태상왕으로 모셔진 것처럼 나중에 높이라고 이연을 설득하였고, 결국 정확히 즉위 45주년인 2017년 11월 27일, 황태손이 연호를 인덕(人德)으로 하여 즉위하게 된다.

퇴위 이후 인덕황제는 계속해서 고종을 태상황으로 높히고자 하였으나, 상황에 만족하며 태상황이라는 칭호를 부담스러워하던 고종은 이를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인덕황제와 대신들이 자꾸만 태상황 칭호를 논하자 태상황 할바엔 차라리 한왕으로 돌아가겠다.라며 버텨 손자와 대신들의 골을 썩혔다. 결국 인덕황제가 그렇게 태상황이 부담스러우시다면, 정종 순효대왕의 전례를 들어 태상황이 아닌 노상황(老上皇)으로라도 올리게 해달라고 설득하였고, 고종은 노상황도 싫다며 거부하였으나, 노상황으로 올린 이후에는 태상황 얘기를 안하겠다는 인덕황제의 설득에 속아 결국 노상황으로 격상되었다.

하지만 인덕황제는 고종이 노상황 칭호를 받은 이후 태상황으로 높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계속해서 설득했다. 결국 인덕황제와 대신들의 간곡한 설득과 애원에 질린 고종은 마지못해 1년만에야 태고광무신성요순소열태상황[19](太高光武神聖堯舜昭烈太上皇)의 존호를 받게 된다. 이때 태상황의 칭호를 받으며 독한놈, 이 나이든 할애비를 이렇게 고생시켜야겠냐라며 푸념하기도 했다.

고종은 이연이 황제가 된 이후로도 군권은 여전히 자신이 쥐고 있었고 일부 분야에 대해서도 대리청정을 하였다. 또한 고종은 중국과의 영토 분쟁에서 적극적으로 강경 대응을 주문하고, 네아토 구성국과의 결속을 위해 여러번 순방을 다니는 등 주도적으로 활약했다. 이렇게 고종은 태상황이 되어서도 대한제국의 안정과 손자 이연의 황권 안정을 위해 노력했고, 말년에는 계절에 따라 황성과 서경, 남경과 동경을 오가며 당구와 사냥을 즐기는 등 즐겁게 여생을 보내기도 했다. 게다가 자신이 후계자로 삼은 이연의 뛰어난 자질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이에 만족하는 말도 남겼으며, 순방 도중 일본의 내대신 도쿠가와 이에히로가 이연을 극찬하자 크게 기뻐하기도 했다.

붕어

고종은 상황으로 물러난 이후 병권과 일부 권한을 섭정하며 인덕황제의 치세를 공고히 다졌으며 중국과의 국경분쟁에서 단호한 모습을 보이며 존재감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황후인 현인성황후가 승하한 이후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2019년 4월 13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붕어한다.


  1. 자식은 없고 남편과는 사별했다고 한다.
  2. 개신교 종파 중 하나. 평화주의와 전쟁반대가 주요 모토 중 하나인 교파로, 양심적 병역거부도 지지하는 입장이라고 한다.
  3. 본래 고종의 휘는 '경' 이었으나, 즉위 이후 피휘를 위해 한자는 그대로 쓰되, 휘의 발음을 '경' 에서 '산' 으로 고쳤다.
  4. 혼자서 목욕물 받기를 바이닝 부인에 의해 처음 해봤다고 한다.
  5. 고종은 이러한 개방적인 성격 탓에 황족들이나 콧대 높던 공족들과 갈등이 잦았다고 한다.
  6. 당시 황족들이 무조건 진학했던 강학원대학으로 가지 않은 것은 선친왕이 '얘 성격에 거길 보내면 황족과 공족들이 뻣대는거 고치겠다고 쟤들 다 두들겨 패겠다'싶어 그랬다고 한다.
  7. 한번은 친구들이 고종을 빼놓고 술자리를 벌였는데, 이를 알고서는 잠긴 문을 오함마로 부시고 열어 결국 술자리에 참가했다.
  8. 혜승인황후의 휘
  9. 현대 대한도 그렇지만, 이 당시에는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는 것을 매우 무례하다고 여기던 시대였다. 심지어는 그 황실에서.
  10. “황실에도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11. 당시 정부가 강요하던 군상주권설이 아니라 군상기관설을 추종해 다시 한번 황실을 발칵 뒤집었다.
  12. 이 법은 경조 시대 사라진 법이었으나, 한소전쟁 이후 의화군의 의지로 부활하였다. 옛 법에서는 5촌 이내의 종친의 정치, 관직 참여를 금하는 법이었지만 신 종친사환금지법은 의화군의 강력한 의지로, 8촌 이내의 종친의 관직 진출 범위를 황족회의 위원과 추밀고문, 귀족원 황실의원, 그외의 명예직과 무관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 제한한 법이었지만 고종의 즉위 이후인 1975년 폐지된다.
  13. 고종 즉위 이후 개편되어 일부는 법부 공안조사청으로 분리되었고, 다른 부분은 경시청 공안과로 분리되었다.
  14. 황사(皇嗣)는 황실예전에 따른 황위 계승자를 뜻하는 칭호이다.
  15. 본래 고종은 창순군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나 황사로써 황위를 계승할 경우 향렬과 촌수 문제가 고종의 발목을 잡았다. 사실 고종은 국가와 군대를 완벽하게 장악했기에 이러한 문제를 무시해도 그만 이었지만 사실상 황위 찬탈의 형식으로 황위를 계승하였기에 정통성에 민감했고, 이러한 재 입적까지 단행한 것 이었다.
  16. 이에 따라 대궁의 봉사손으로는 형인 이광이 낙점되었고, 창순군의 아들로 이광이 입적되어 이광의 후손들이 대궁을 계승하고 있다.
  17. 대한이 입헌군주국이기는 하지만 대황제는 국사 전반에 막강한 권한이 존재한다.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에 비견되는 황제의 권한과 기존부터 황제가 국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해왔던 한국의 정치적 특성에서 비롯되었다.
  18. 생전 퇴위한 황제는 소황제와 고종이 있지만, 소황제가 사실상 반강제로 퇴위한 점을 감안하면 자의로 퇴위한 황제는 고종이 유일하다.
  19. 이연이 올린 시호를 풀어서 설명하자면 태고는 매우 높다는 뜻이고, 광무는 한나라를 재조한 세조의 시호이다. 신성은 신성하다는 뜻 그대로이며, 요순이라는 시호는 고종의 치세가 요순에 버금가는 태평성대였다는 의미이며 소열은 고종의 덕과 공훈이 계한의 소열제에 버금간다는 극찬을 담은 시호이다. 한마디로 고종은 매우 신성하며 그 치세와 업적은 한나라 세조와 소열제에 버금가며 요순에 버금갈 정도로 성군이었고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군주라는 의미를 담은 존호로, 손자인 이연의 고종에 대한 존경심을 한눈에 보여주는 존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