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大韓帝國 | Empire of Kore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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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제국은 동북아시아에 있는 국가다. 환태평양 경제동맹의 수장이자 군사조약인 방공협정의 지도국이다. 1867년 고조의 칭제건원으로 수립되었고, 1881년 한청전쟁으로 남만주를, 의화단의 난으로 타이완을 완전병합하였다. 1904년 한러전쟁으로 북만주와 연해주 일부를 획득하여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일본국의 급부상으로 경제적 지위가 흔들리고 있으며, 환태평양 공영권을 환태평양 경제동맹으로 바꾸어서 체제의 개편을 실행하였다.
2008년 황태자 암살사건이 벌어지면서 한중전쟁이 일어날 뻔했으나, 일본•소련•미국의 중재로 가까스로 전쟁은 불발되었다.
2017년 현재 대한제국의 군주는 건무황제 이본, 황후는 장율아이고, 황태자는 이평이다.
역사
임자사화
고조 이환의 치세에서 개화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된 이환은 심중에 강한 왕권을 향한 야망의 불씨를 지폈고, 영특한 머리로 조선을 바로세울 책략을 짜며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해 나아갔다.
성년이 된 후 이환은 세도가의 권세를 완전히 척살하기 위해 조정의 비주류 세력과 이환 본인의 친위세력을 키웠고, 결국 1852년 이환은 세도가를 정치적으로 몰아내기 위해 '이천투서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비변사를 혁파하고, 6조 직계제를 부활시키며 삼정이정청을 설립하는 등의 행보를 걸어갔다. 이에 반발한 김좌근이 종실의 대를 끊기 위해 암살을 모의하였으나, 이는 김문근의 읍소로 알려졌고, 결국 안동 김문은 그 세력이 산산조각났다. 이환은 이때 세도정치의 일을 교훈삼아 이러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권력구조를 개편하였고, 첩보 기관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이는 훗날 국왕 직속 친위세력의 양성으로 이어져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이룰 수 있게 하였다.
임자사화의 결과는 다른 일을 불러 일으켰는데, 충청도 보령으로 유배 간 김좌근의 조카 김병학이 천주학이 퍼지고 있음을 조정에 낱낱이 보고한 것이다. 이전에도 척사윤음 등의 어명을 내린 적이 있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임자사화의 불구덩이에서 천주교들은 멀쩡할 수 없었고, 왕권강화와 일전의 사화로 냉랭해진 사대부들과의 관계 개선을 목적으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1853년 이뤄진 계축박해로 인해 많은 천주교도들과 파리외방전교회 다블뤼 주교까지 사망하였다.
프랑스 선교사의 사망은 알음알음 퍼져 조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에 의해 본국까지 도착하였고, 프랑스는 <신앙의 자유>와 <탄압받는 형제>들을 구하기 위해 조선을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처음 제물포 항에 닿은 프랑스의 군함은 조선 조정에게 신앙의 자유와 개항장의 마련을 요구하였으나, 해안선 가까이 다가온 군함을 공격한 조선군 해안포에 의해 군함이 피해를 입고 후퇴한 후, 프랑스가 다시 더 많은 함대를 이끌고 침공하자 그제서야 신앙의 자유, 항구 지대의 개항 등 여러 조항을 담은 조불수호통상조약을 조선과 프랑스는 맺게 되었다. 조불수호통상조약의 뒤를 이어 조영, 조미 등의 통상조약까지 차례대로 맺은 조선은 비로소 국제사회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조선 내부에서도 무력에 의한 개항에 의해 척사파와 개화파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으나, 임자사화로 권위가 한껏 높아진 이환이 개화던 척사던 일단 더 많은 정보를 얻어야 한다고 진정시킨 후 청, 일본, 그리고 프랑스 및 여러 서방국가들에 시찰단을 보내어 정보를 수집하게 하였다. 일본 쪽에는 조선통신사의 부활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였고, 청나라에는 영선사를 보내었다. 각지의 외국으로 간 조선인 유학생들은 이러한 서양 문물에 충격을 받고, 개화를 지지하였으며 이환 또한 자신의 친위세력이자 이들 개화파들의 신문물에 대한 설명을 듣고 개화를 결심하였다.
18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무역에서 척사파의 말대로 손해만 무지막지하게 볼 줄 알았던 조선은 뜻 밖에 상품을 얻어내었는데, 홍삼이 아편 치료에 큰 효과를 보인다고 알려지면서 청나라에서 크나큰 수요가 생겼다. 이 덕분에 재원을 마련한 조선은 미국, 프랑스 등에서 방직기계와 총기, 화포 등을 들여오면서 근대화의 길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차근차근 발전하던 중, 1861년 함경도 사냥꾼들이 조선 국경지대 인근 범월인들이 함경 고을을 노략질하자 두만강을 넘어 이들을 토벌한 사건이 일어났다. 가뜩이나 아편전쟁과 내부적으로 불안을 겪고 잇는 와중에 제1의 번국이라 불리는 조선에게 이런 굴욕을 겪자 청은 저 자신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조선에게 강경한 통첩을 날렸고 이를 거절하자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는 엎치락 뒤치락 하였지만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그를 전면적으로 운용한 조선의 승리로 끝나였다. 전후 맺은 조약에서 조선은 중국의 번국에서 독립적인 국가로 상승하였으며 남만주에 그 세력을 뻗치게 되었다. 1863년 공식적으로 통백도, 용강도, 요안도(현재 심요도 남부지역)를 설치한 것은 조선이 반도에만 갇혀있지 않겠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전 후에 얻은 이득은 이것만은 아니였는데, 청나라에게서 받아온 막대한 자금은 조선의 근대화 자금이 되었으며 이제 걸림거리가 없는 개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전쟁 후 칭제의 요청이 빗발같이 쏟아지자 왕은 3년 뒤 1867년 10월 11일 환구단을 쌓고 연호를 영락으로 하여 즉위를 하였다.
고조 이후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에 영락황제는 기존에 보수파의 반대로 느리게 진행하였던 개화를 대대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새 부대에는 새 술을 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개화파로 공직을 채웠으며 서역과의 인재교류, 신식 학당 설치 등을 하면서 신생 대한제국을 근대 국가로 만들어나갔다.
크고 작은 일이 격동기 속에 있었지만, 계속되며 발전되던 대한은 1875년 황제가 과로 및 지병으로 쓰러지며 태자가 대리청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877년, 이환이 사망하자 황태자 이정은 연호를 태시(太始)으로 하여 즉위하며 영락시대의 종말과 건흥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영락황제의 묘호는 고조(高祖)로 결정되었다.
한편, 일본에서 유신을 주창하던 이들은 막부의 공세 하에 완전히 토벌되었고, 대한제국은 내부 단속과 대(對)청관계에 집중하게 되면서 동쪽 일본과는 친선 관계, 우호적 중립을 유지하게 되었다.
고조가 천붕을 겪은 이후, 1880년 청나라는 이때를 기회라 여기고 군대를 소집해 조선을 침공하였으나, 황제의 적통인 태시황제가 지휘하는 대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결국 한국군에게 요양회전에서 패배하게 되며 청군은 붕괴되었다. 러시아 극동군 또한 청이 무너질 때 독자적으로 개입하여 북만주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하여 천진(톈진)에서 요하-송하 선 이남은 대한에게 할양, 북만주는 러시아에게 관할권을 넘겨준다는 협정을 맺게 되었다.
1883년에는 류큐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자 쇼타이 국왕이 대한제국에게 망명하였다. 이때 류큐를 보호국으로 삼고 태평양으로의 길을 열어야겠다 생각한 황제는 쇼타이 국왕을 다시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 류큐에 신식군 1연대를 파병해 반란군을 쓸어버리고 류큐를 보호국화 하였다.
1899년 의화단의 난이 일어났을 때 한인이 피해를 입자 분노한 조정은 서방과 손을 잡고 청나라로 진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1901년 맺은 신축 조약에서 타이완을 식민지로 가져오는 성과를 얻어낸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대한의 성장을 방해하던 세력, 러시아가 마지막으로 남아있었는데 결국 1904년 한국군의 선공을 시작으로 한러전쟁이 발발하였다.
모두가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결과는 정 반대로, 대한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는 러시아 극동군의 무능과 비정상적으로 육군에 투자한 한국군의 특성이 결합되어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 전쟁을 끝으로 모든 열강과 맺어진 불평등조약은 완전히 청산되었으며, 대한은 북해도와 해삼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대전쟁
1907년 한일회맹을 개최하여 공식적으로 대한제국과 일본국은 중립관계에서 벗어나 경제 협력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1914년에 태시황제는 열종(烈宗)의 묘호를 받으며 승하하여 그 태자가 원광(元光)을 개원하며 즉위하였다. 원광황제의 정책은 반륙연양(反陸連洋), 즉 대륙세력을 막아내고 태평양 일대에서의 국가 협력을 최우선으로 택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1917년 발생한 대전쟁은 그 정책을 잘 말해주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 사후 즉위하게 된 프란츠 페르디난트 카이저의 대관식 당시 루마니아 테러리스트가 성 이슈트반 대성당을 테러하면서 이중제국과 루마니아의 전쟁으로 시작하게 된 대전쟁은 곧 러시아, 독일, 프랑스, 벨기에, 대영제국, 이탈리아 등 서구 열강들을 끌어들이면서 '세계대전'으로 퍼져나갔고, 이 대전쟁에 대한제국은 직접적으로 개입하게 되면서 반륙연양이라는 대명제에 도달하였다.
육군 제10사단과 해군 2전단이 유럽으로 파견되었으며, 특히 낭시 방어전과 브뤼셀 수복전에서 활약하며 한국군은 위명을 떨쳤다. 러시아 제국은 전쟁을 버티지 못하고 1919년 붕괴하였지만,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이탈리아 또한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되면서 라인강을 밟게 되었다. 결국 1921년, 독일 제국의 카이저 빌헬름 2세의 명의로 항복이 선언되면서 장장 4년 동안 이어진 세계대전은 끝나게 되었다.
1919년 붕괴한 러시아는 곧 공화혁명도 모자라 최초의 공산국가 건설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독일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재건,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까지 벌어지게 되는 등 전 세계적인 재앙이 발생하게 되었다.
전 후 처리로 유럽의 형세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독일은 라인란트의 분리독립, 엘자스-로트링겐의 상실과 포젠과 카토비츠 일부의 폴란드 할양, 홀슈타인의 덴마크 할양 및 군대 제한과 배상금까지, 막대한 경제적인 부담을 안게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와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로 나뉘게 되었다. 하지만 발흥한 공산세력과 세르비아의 확장을 경계하면서 오스트리아는 '도나우 연방'이라는, 오스트리아-슬로베니아를 본토로 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군주를 동군연합으로 둔 채 사실상 독립국의 지위를 갖는, 현재로 보면 '영연방'과 같은 기구를 용인하면서 발칸의 혼란은 그나마 잠재워지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원하는 것을 거의 대부분 얻게 되었다. 달마티아의 병합이라는 무리수는 이뤄질 수 없었으나, 티롤과 리예카, 크로아티아 영향력과 발칸의 중재자 역할을 맡을 수 있게 되면서 이촌소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였다. 프랑스는 독일의 파편화는 달성할 수 없었지만, 라인란트의 분리와 알자스-로렌의 획득을 이루어내었다.
그러나 대전쟁 이후는 혼란 그 자체였다. 대한제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은 경제적 호황을 이루어내게 되면서 강력한 열강으로 발돋음하게 되었으나, 유럽의 경우에는 달랐다.
전간기
동아시아에서, 특히 대한제국에서는 쭉 전쟁이 없이 평화가 유지되었기에 대전쟁 이후부터 평화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중국대륙과 유럽대륙은 크나큰 혼란 속에 빠져있었다. 중국에서는 국민당이 북벌을 시작하며 북양정부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하였고, 중원대전마저 이겨내며 사실상 군벌들을 제압하면서 통일을 이루어내었다. 유럽에서는 폴란드&리투아니아-소련 전쟁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동맹의 승리로 이어지게 되었고, 유제프 피우스트스키의 강력한 주장 하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이 결성되었다. 갓 독립한 핀란드는 소련의 침공을 받아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한편 라인란트는 콘라트 아데나워를 중심으로 프랑스와의 밀접한 접촉을 이어나가며 독일과의 분리라는 충격을 최대한 줄이고 있었고, 독일은 빌헬름 2세의 항복 이후 공화정으로 전환되었으나 경제적 안정을 겪으면서 평시와 비슷하게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1929년 경제 대공황 이후 유럽에서 독일 공화국의 정치는 다시금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고, 헝가리와 보헤미아, 슬로바키아가 도나우 연방에서 탈퇴하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영향력만 유지한 채 중앙유럽에서의 패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양극단의 정쟁이 심화되었고, 결국 독일은 1933년 NSDAP가 집권하게 되면서 유럽에서는 다시금 전운이 퍼져나가게 되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장제스의 중앙군이 사실상 내전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초공에 성공하였고, 대한제국은 연해주 트란스아무르 러시아 공화국을 후원하면서 소련과의 대립각을 빚어내고 있었다.
1938년, 덴마크 최후통첩 이후 슐레스비히가 독일국에게 할양되었고, 193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붕괴와 동시에 독일과 소련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약을 맺으면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켰다. 이후 혼란 속 오스트리아 제국에 쿠데타를 사주하자 NSDAP의 독일은 스트레사 전선의 최후통첩을 받게 되었고, 결국 1930년 '흑색상황'을 발동시키며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라인란트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흑색상황과 동시에 오스트리아는 독일에게 사실상 넘어갔고, 낫질작전이 발동하며 베네룩스 3국과 프랑스가 침공받기 시작하였다. 당시 수상으로 등극한 프랑수아 드라로크는 샤를 드골 준장의 기갑군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며 벨기에 인근에서 독일군의 기갑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하였고, 이탈리아 왕국은 오스트리아의 완전병합을 저지하며 독일의 군대를 알프스에 묶어두는데 성공하며 2차 대전쟁을 질질 끌게 만들었다. 1941년 세르비아는 유럽 열강들이 한눈을 판 사이 보스니아를 강제병합하려 시도하나, 곧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협공을 받으며 대전쟁에서 할양된 영토를 죄다 토해내게 되었다.
1943년, 독일의 패전이 기정사실화되자 소련 또한 독소불가침 조약을 깨면서 독일을 침공하게 되었고, 결국 1944년 독일의 베를린에서 NSDAP 고위 당원들이 소련군에게 체포 및 처형되면서 독일국은 완전히 패망하였다.
2차 대전쟁으로 알려진 이 전쟁의 결과로 라인란트는 프랑스에게 병합되었고, 오스트리아 제국은 뷔르템베르크와 바이에른을 병합하며 '남독일 연방', 프랑스 공화국은 서북부 독일을 하나로 묶어 '북독일 연방공화국'을 만들었다. 폴란드와 프로이센 지방은 소련의 괴뢰국이 수립되게 되었으며, 프로이센 지방에는 '프로이센 사회주의 공화국', 리투아니아와 발트 3국은 소련의 본토로, 폴란드에는 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며 철의 장막이 펼쳐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