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Communist 1968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9월 13일 (금) 11:08 판 (→여담)

프랑스 국가사회주의 운동 초대 사무국장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Eduard Bernstein
출생 1850년 1월 6일
프로이센 왕국 쇠네베르크
사망 1931년 1월 15일 (향년 81세)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 몽파르나스 기차역
국적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 무국적 (국적 박탈)
묘지 없음[1]
종교 유대교 → 불명[2]
소속 정당 독일 사회민주당 (1872~1914)
무소속 (1914~1929)
프랑스 국가사회주의 운동 (1925~1929)
무소속 (1929~1931)
사상 개혁적 사회주의
프랑스 파시즘, 제국주의, 보수주의

개요

프랑스의 정치가, 사상가, 범죄자.

생애

초기 생애

1850년 쇠네베르크의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궁핍했던 어린 시절로 인하여 제대로 학업을 마치지 못했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그의 이해는 독학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1872년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해 프리드리히 엥겔스, 카를 마르크스, 페르디난트 라살 등의 사상가들과 교류하며 견문을 쌓았다. 엥겔스는 특히 그를 신임했는데, 유언 집행인 3인 중 한명으로 베른슈타인을 지명하기도 했다. 이후 사회주의자로서 활동하나 프로이센 주정부에에서 발부된 체포영장때문에 국내에서는 활동하지는 못하였다. 1881년, 카를 카우츠키와 함께 <에어푸르트 강령>을 저술했다.

수정주의자

하지만 그는 사상적으로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고, 특히 1880년대 이후 게오르크 헤겔에 대한 몰이해로 당 내에서 크게 비판받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러 권력 획책을 통하여 당권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반기를 든 자가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베른슈타인은 다른 사회주의자와 달리 헤겔은 물론 마르크스도 부정하였고 이러한 내용을 담은 여러 서간을 발행했다. 이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라는 책자를 발간, 베른슈타인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룩셈부르크에 평소부터 열등감을 갖고 있었던 베른슈타인은 에베르트, 카우츠키 등과 함께 룩셈부르크 축출을 모의했으나,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1903년 드레스덴 전당 대회에서 베른슈타인의 사상이 "수정주의"이자 "관료주의"라고 공개적으로 비판을 받음에 따라, 그는 당 내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더구나 그는 1914년 1차 대전을 앞두고 고조되는 유럽의 분위기에 찬동하여 당론을 어기고 국방비 증액과 전쟁 공채에 찬성표를 던졌는데, 이는 사회주의자들을 분노하게 하였다. 결국 그는 1914년 사회민주당에서 제명되었으며, 베른슈타인은 이후 독일 제국을 도와 전쟁에 찬성하는 선전물을 여럿 제작하였다.

1919년 1월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공산주의 혁명에 반대하며 우익 진압군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전황이 흑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는 네덜란드를 거쳐 프랑스로 도피했다. 1922년 설립된 라트 연방 정부는 그의 국적을 말소시켰다. 또한 궐석재판에서 제국주의 찬양, 프랑스 및 우익군과의 내통 등의 혐의로 징역 15년형을 인도받았다.

파시스트가 되다

그는 프랑스 도피 초기 까지만 하더라도 사회주의적 신념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내 제국주의와 세계전쟁을 지지하는 자신의 입장을 발전시켜 프랑스 파시즘 운동에 동참하는 역사의 죄를 짓게 되었다. 가장 큰 동기는 라트 연방에 대한 분노와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열등감이었다. 그는 자신을 내쫓은 독일 혁명정부에 복수심을 갖고 있었고, 이에 프랑스의 극단적 민족주의자들과 연합해 독일을 쳐부수기로 한 것이었다. 그는 샤를 모라스, 프랑수아 드라로크 등 극우 이론가들과 밀접히 교류했고, 독일을 침공해 루르 지역을 영구히 프랑스에 인도해야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으로까지 나아갔다.

그는 여러 극우 사상가들과 함께 프랑스 국가사회주의 운동을 창당했고, 그곳에서 사무처장을 맡으며 매국노 행위에 앞장섰다. 라트 연방의 민중들은 매우 분노했으며 그는 궐석재판에서 다시 국가반역죄, 파시즘 지지, 내란죄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럼에도 베른슈타인은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나라를 팔아먹는 행동에 더욱 앞장섰다.

몰락과 처절한 죽음

하지만 1929년, 그가 13~14세의 여아를 성추행했다는 결정적인 근거(편지)가 발견되자, 프랑스 파시즘의 동료들도 대중의 여론을 감안하여 그를 옹호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그는 사실상 출당되다시피 하며 자신의 당에서 탈당할 수 밖에 없었다. 베른슈타인은 이것을 모두 룩셈부르크의 모함이라 주장하며, 무죄를 주장하였으며 자신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소수의 극단적 민족주의자 뿐이었으며, 그는 프랑스의 독일인 커뮤니티에서도 외면받게 되었다.

1931년, 파리 몽파르나스 역에서 사고로 사망했다. 전속력으로 진입하는 기차에 치였는데, 이 사고로 몸이 산산조각났고 남아있는 가장 큰 파편이 가방을 쥔 손이었다고 한다. 역사학자들은 그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보낸 자객에 의해 떠밀려 사망했다고 추정한다. 사후에는 그나마 파시스트 동료들의 옛정으로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힐 수 있었으나 프랑스인들에게조차 경멸받았고, 1943년 2차대전 도중 파리를 점령한 붉은 군대에 의해 그의 묘가 철저하게 파괴되며 현재는 그 누구에게도 추모받지 못하는 상태로 전락했다.

평가

최악의 정치가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자로, 라트 연방에서는 현재도 매국노, 파시스트의 대명사로 칭해지고 있다. 현재도 그는 그 어느 정당이나 세력에 의해서도 복권되지 못하고 있다. 그의 매국적 행위로 인하여 독일어에서는 배신자, 매국노를 뜻하는 단어가 "베른슈타인"(Bernstein)으로 바뀌었을 정도였다.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의 당대회에서 굳이 그를 칭할 때에는 "에두아르트라 하는 자" "프랑스의 비열한 파시스트"라는 표현이 주로 쓰이는 등, 고위 정치인들이 그의 이름조차 언급하기 꺼려하는듯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냉전 중 미국을 위시로 한 제1세계에서조차 그에 대한 재평가는 금기시되었다.

어록

제국주의는 좋은 것이다. 제국주의는 미개한 식민지인으로부터 얻는 초과적 이윤으로 유럽의 선진 노동자들을 보호한다.
노동자의 선택은 제1차 세계대전 찬성이어야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미개한 슬라브 문명으로부터 게르만 문명을 지키는 예방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근래 독일에서 일어난 혁명은 그야말로 재난과 같았다. 인간의 얼굴을 한 저 야수같은 것들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로만스 문명의 선진 민족주의만이 답이 될 수 있다.
나는 13세, 14세의 어린 여자 아이가 좋다.
안돼!
유언

여담

  • 작가의 사심이 담긴 설정이지만, 사실 제국주의 옹호, 1차대전 참전 종용, 소련 비난 등은 작가의 날조가 아니며 실제 카우츠키, 에베르트, 베른슈타인이 한 망측한 행동들이었다.

  1. 파리의 페르 라셰즈 국립묘지에 묻혀있었으나, 1943년 파리를 점령한 붉은 군대가 그의 묘를 파묘했고 시신을 불태웠으며 묘지 비석은 인근 쓰레기장에 버려졌다.
  2. 말년에는 정신착란 증세로 인해 사탄 숭배로 빠져들었다는 증언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