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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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리오 긴배 도프 공산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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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와르샤와 전쟁 정보

개요

1950년 6월부터 1951년 2월까지 약 8개월 동안 동아시아의 한반도에서 진행된 전쟁.

배경

1948년 중후반 한반도의 남과 북이 분단된 이래로 무력 사용에 대한 언급을 자제한 이승만과는 달리 북한의 수상 김일성은 무력을 이용해 한반도를 적화통일하겠다는 뜻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북한 정부가 수립된 직후부터 소련 서기장 스탈린에게 전쟁 허가를 요청하였지만 번번이 거절당하였다.[1]

하지만 1949년에 들어서며 국제정세가 극적으로 변하였다.  우선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였다.  1948년까지만 하더라도 핵폭탄을 보유한 국가는 미국이 유일했는데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또한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중국이 통일되어 공산권에 자신감이 붙었다.  결정적으로 주한미군이 철수하면서 한국을 지켜주던 마지막 안전장치마저 사라졌다.  결국 스탈린은 김일성의 요청을 수락했고 전쟁에 필요한 각종 무기를 대량으로 지원했다. 소련군 고문단이 북한군의 침공 계획 수립을 돕기도 했다.

전개

전쟁의 시작

1950년 6월 초부터 북한군은 기동훈련을 명목으로 후방에 주둔해있던 대규모 병력을 38선에 배치하였다. 25일 새벽, 북한군 각급 부대에 작전명 "폭풍"이 하달되었고 새벽 4시, 북한군은 38도선 전역에 걸처 기습적인 공격을 가했다. 38선 전역에서 북한군에 의한 수십 분의 준비포격이 이루어졌고 이후 T-34/85의 지원을 받는 보병부대가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북한군의 주력부대는 동두천, 포천 일대에 주둔한 7사단(사단장 김종오 준장)과 춘천 일대에 주둔한 6사단(사단장 유재흥 준장)을 공격했고 이외에도 개성, 강릉, 옹진 등 다른 지역에서도 공격을 퍼부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초동 대응

올 것이 왔구만...
이승만,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 30분 경
뭐라? 김일성개XX가!
김구,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 45분 경

육군본부에는 오전 5시 경 부터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보고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당시 당직사관이었던 육본 정보국 북한반장 김종필 중위는[2] 정보과장 유양수, 상황실장 박정희 등과 함께 북한의 침공 가능성을 주장해왔던 지라, 전선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규합한 후 국지전이 아닌 전면전이라 판단하였다.  김종필은 즉시 육본의 국장들을 호출하고 국방부, 국무원, 화령대[3]에 보고했다.

그날 새벽 5시가 조금 덜 된 매우 이른 시각에 깬 이승만 총통은 화령대 뒷뜰을 산책하다가 당직비서관의 다급한 보고를 받았다.  국무원에서도 당직 공무원이 소식을 전달받고 급히 총리 관저로 사태의 심각성을 알렸다. 김구 총리의 보좌관들은 김구를 깨울지말지 고민하다가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국무원 당직의 말을 듣고 김구를 깨웠다.  김구는 소식을 듣고 격분하였고 곧장 국무원 청사[4]로 향했다. 소식을 들은 이승만이 총리 관저에 전화했으나 김구는 이미 차를 타고 국무원으로 가고있었고 경교장에 남아있던 한 보좌관이 대신 전화를 받았다.  김구가 국무원으로 이동하고있음을 알게 된 이승만은 미국 대사관에 상황을 알릴 것을 국가안보실 차장에게 지시한 후 국무원으로 향했다.  국무원에서는 막 도착한 국방부장관 지청천이 기다리고있었다. 이읃고 이승만과 김구가 도착했고, 잠시 후에는 내무부장관 이범석과 중앙정보성장관 장택상, 육군참모총장 김홍일도 도착했다.  이승만은 도쿄에 있는 매카서에게 전화를 걸어 즉시지원을 촉구했다.

오전 8시, 국무원 청사에서 긴급 NSC가 열렸고 회의에서 정부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발령하기로 결정했다.  직후 주한미국대사 존 무초가 이승만을 찾아왔다.  무초는 상황을 물었고 이승만은 38선 전역에 걸쳐서 북한군이 공격하고있으며 더 자세한 전황은 아직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오전 10시 반에는 김구가 무초를 접견중인 이승만을 대신해 라디오 방송을 통해 북한의 침공과 비상계엄령을 알렸다.  또한 병력 및 보급품 수송을 위해 민간 차량과 선박을 징발할 수 있도록 전국의 모든 차량과 선박을 즉시 신고할 것을 명령하는 긴급조치 1호를 공포했다.

1950.6.25, 대전 임시국회[5]

오후 1시, 국회가 긴급히 소집되었다. 국회는 북한 규탄 결의안과 서울 사수 결의안 그리고 결사항쟁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폐회를 선언하기 직전 이승만이 출석하여 서울 사수가 불가능하다고 발언해 일부 의원들이 항의하면서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한 편, 육군참모총장 김홍일 소장은 휴가를 나건 모든 장병에게 자대 귀환을 명령하는 동시에 전선의 각급 제대에 회전을 피하고 지연전을 펼칠 것을 지시했다. 서울수도시장 이기붕은 시민들에게 피난 준비를 권고했다.

북한군의 남진

종류 국군 인민군
병력 8만 7천 명
틀:막대
19만 3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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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사포 134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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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2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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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격포 1,340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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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8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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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차포 250문
틀:막대
550문
틀:막대
전차 38대
틀:막대
24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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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기 33기
틀:막대
211기
틀:막대

위의 표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국군은 인민군에 비해 절대적인 열세였다.

국군은 38도선을 따라 구축해놓은 대전차 바리케이드로 북한군 전차의 진격을 가능한 저지하려 하였다.  실제로 춘천 방면의 국군 6사단(사단장 김종오 준장)과 문산 방면의 국군 1사단(사단장 정일권 준장)은 사흘 이상 위치를 사수하며 북한군을 저지하였다.  특히 6사단은 나흘 동안이나 춘천을 사수, 북한군 2군단(군단장 김광협 중장)의 진격을 차단해 국군 1군단을 우회포위하려는 북한군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하지만 북한군의 주공은 동두천-포천 방면이었다.  해당 지역의 7사단(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북한군 2개 사단과 1개 기갑여단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했고 국군 기계화여단(여단장 백선엽 대령)이 투입되어 소규모 기습을 감행한 후에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동해안 강릉을 방어하던 3사단(사단장 이성가 준장)은 북한군이 후방에 상륙하여 포위되었으나 포위망을 돌파,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며 지연전을 펼첬다.

대전의 정부[6]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한강-홍천강 이북에 소개령을 발령했다.

1950.6.29, 서울에 입성한 북한군 제9땅크여단 전차

6월 29일, 서울이 북한군 제9전차여단에 의해 함락되었다.  국군은 한강과 홍천강을 잇는 방어선을 형성하여 1군단(군단장 홍사익 중장)은 한강을, 2군단(군단장 이응준 중장)은 홍천강과 강원도를 방어하였다.  후방에 있던 국군 3개 사단이 전선에 투입되었으나 전력 격차는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한강-홍천강 방어선에서 국군은 10여 일 간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였다.

7월 5일에 개성 방면의 북한군 6사단(사단장 방호산 소장)이 한강 도하에 성공하여 김포 반도에서 국군 1사단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고 이후 북한군이 방어선 곳곳에서 돌파에 성공하면서 한강-홍천강 방어선이 붕괴하였다.  방어선 붕괴 후 국군은 미 공군의 공중 지원을 받으며 지연전을 수행했다.  7월 9일에 있었던 수원 전투에서는 국군 1사단(사단장 정일권 준장)과 기계화여단(여단장 백선엽 대령)이 반격하여 북한군 1개 연대를 궤멸시키고 전차 10여 대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동부전선에서는 강원도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활용하여 6사단과 3사단이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7월 중후반에 들면서 북한군은 천안, 충주를 점령하고 연기와 영주를 위협하였다.  이에 따라 연기군 바로 밑에 위치한 대전의 대한민국 정부는 부산으로 파천한다.  국군은 금강과 낙동강을 잇는 방어선을 형성했고 미 26사단(사단장 딘 소장)이 방어선에 합류하였다.

북한군의 보급선은 이미 늘어질대로 늘어진 상황이었고 미 극동 공군과 한국 공군의 공습은 안 그래도 위태롭던 북한군의 보급체계를 박살냈다.  북한군은 궁여지책으로 해로를 통한 보급을 시도하였지만 수송선을 띄우는 족족 제해권을 장악한 한국군 해군 구잠함들에게 침몰하였다.  결국 북한군은 대전을 코앞에 두고[7] 공세종말점을 맞이했다.

유엔군의 북진

1950.11.5, 초산을 향해 진격하는 국군 6사단

유엔군이 한반도에 속속히 도착하고 북한군의 진격이 금강-낙동강 방어선에서 최종 저지되자 유엔군 사령부는 반격을 준비한다.  유엔군 사령부는 전면 공세는 아군에게도 큰 피해를 줄 것이라고 판단하여 상륙작전을 계획한다.  문제는 '어디에' 상륙하는지였다.  의견이 분분하던 중 한국 해군 참모총장 손원일 중장이 북한의 수부인 평양이나 그에 인접한 진남포나 용강을 직접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매카서 원수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진남포 상륙작전을 계획하다.  작전명은 크로마이트(Chromite)로 정해졌다.

마침내 1950년 9월 15일, 일본과 한국 곳곳에서 출발한 미군과 한국군 7만 5천 명의 병력이 해상에서 합류하여 진남포에 상륙하였다.  북한군 수뇌부는 김무정을 평양 방어 사령관에 임명하여 수도 사수를 시도하였지만 평양은 무력하게 함락되었다.[8]  김무정은 항복했다.

북한군 수뇌부가 혼란에 빠져있는 사이, 북한군의 지휘체계와 보급체계는 완전히 붕괴했다.  남포에 상륙한 유엔군은 나흘 만에 평양을 점령했고 금강-낙동강의 유엔군은 북진을 거듭하여 서울을 수복했다.

북한군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10월 말 북한군이 제대로 지휘할 수 있었던 부대는 평안북도 방면의 2개 사단과 영흥 방면의 1개 사단이 전부였다.  나머지 사단은 대부분은 38선 이남에서 싸우다가 퇴로가 막혀 궤멸되었고 잔존 부대는 방호산 소장의 6사단에 흡수되어 원산 방면으로 퇴각하고있었다.  북한군 지휘부는 2개 사단을 동원하여 청천강에 방어선을 구축하지만 백선엽 준장의 기계화여단, 신현준 대령의 해병연대 그리고 미군 제1기병사단에 의해 가볍게 격파된다.  11월 19일 기준 유엔군은 신의주, 초산, 혜산, 청진까지 북진하였다. 김종오 준장이 지휘하는 6사단은 연합군 최초로 압록강(초산)에 도달하였고, 그곳에서 압록강 강물을 퍼 수통에 담아 이승만에게 보냈다.

중공군의 개입

1950.12.2, 인민웨이브를 시전하는 인민지원군

한국 정부는 일찍이 중공의 개입을 우려했다.  한국 총통 이승만은 장면을 특사로 하여 베이징에 특사단을 파견하여 중공의 지도자 마오쩌둥에게 서로의 내정에 간섭하지 말자는 제안을 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하자면 중공이 압록강-두만강 이남의 북한 세력에 어떠한 형태의 지원도 하지 않으면 유엔군은 압록강-두만강 이북으로 진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확답을 주지 않았으나 북한의 다급한 지원 요청과 펑더화이의 파병 설득에도 불구하고 다소 머뭇거려 일단 국경선에 병력만 배치해두고 도하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11월 17일, 신의주가 유엔군에게 함락되자 마침내 인민지원군에게 압록강 도하명령을 내린다.

유엔군과 인민지원군 간의 첫 전투는 강계에서 벌어졌다.  한국군 7사단(사단장 유재흥 소장)과 중공군 180ㆍ181사단이 맡붙은 것.  6사단은 강계 점령에 실패했고 항공정찰에서 적의 추가 병력이 확인되자 남쪽으로 퇴각했다.  이틀 후, 중공군 9병단 12개 사단이 장진의 미 1해병사단, 7보병사단을 포위공격하였고 미군은 큰 피해를 입고 함흥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자칫하면 미군 2개 사단 + 국군 1개 사단 + α가 고립당할 뻔 했으나 대규모 중공군의 개입을 확인한 유엔군 사령부는 즉시 청천강-묘향산맥-성진강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중공군은 방어선을 향해 세 차례에 걸쳐 공세를 가했으나 연합군의 압도적인 화력과 중공군의 박살난 보급[9]으로 인해 번번히 격퇴당했다.

전쟁의 끝

1951.1.9, 북한군을 포격하는 미군 제15야전포병대대

1950년 12월 10일부터 18일까지 있었던 중공군의 공세가 실패하자 이렇게 전선이 고착화되는가 싶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중공군이 1951년 1월 12일부터 중공군의 2차 공세가 개시되었는데, 공사 도중인 14일, 등화관제 실패로 인민지원군 사령부 위치가 유엔군에게 발각되었고 공습으로 사령원 펑더화이와 부사령원 쑹스룬 등 지휘부가 전멸한다.  지휘부가 사라진 중공군은 각 부대 지휘관 임의로 일부 부대는 공세를 지속하고, 일부 부대는 수비로 전환하고, 일부 부대는 퇴각하는 등 지휘계통이 붕괴했다.  마오쩌둥은 급히 예진잉을 신임 총사령원으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중공군은 각지에서 고립된 채 포위섬멸당하였고 잔존 부대는 무질서하게 퇴각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마오쩌둥은 마음이 급해졌다.  유엔군이 압록강을 넘어 북진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공 정부는 북한에 알리지 않고 연합국에 급히 회담을 요청하여 이전에 한국 정부가 제안한 안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중공의 고위 장군 녜룽젠과 외교부 부부장 천이가 협상을 위해 도쿄로 날아갔다.  한국 측에서는 외무부장관 임병직과 군수사령관 채병덕이 협상단 대표로 파견되었다. 유엔군 측에서는 미국 육군 중장 월튼 워커와 앨버트 웨드마이어[10]가 참석했다. 협상은 타결되었고(중난하이 밀약) 중공군은 전 병력을 압록강-두만강 이북으로 철수시켰으며 유엔군은 철수하는 중공군을 공격하지 않았으며 중공군의 철수가 완료되자 양측은 즉각 포로를 교환하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그런 와중에도 권력투쟁이 있었다.  남로당파와 연안파가 연합하여 김일성을 제거한 것.  당시 김일성이 이끌던 만주파는 김일성의 각종 병크와 핵심 맴버였던 김책의 전사[11]로 입지가 좁아진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최용건이 김일성을 배신하고 반대파에 연합하면서 김일성은 그대로 실각한다.[12]  신임 수상에는 박헌영이 추대되었다.  그런데 박헌영이 수상에 취임한지 이틀 만에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원 예진잉이 유엔군과 중공군 간의 평화조약 체결을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철군하기 시작했다.  박헌영은 노발대발하며 항의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고 중공군은 그대로 강을 넘어 철수간다.  중국이 북한을 아예 버린 것은 아니라서 박헌영, 김두봉, 최용건을 비롯한 북한군 수뇌부와 30만 명의 주민이 중공군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 연변에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그 임시정부가 흔히 연변 정권으로 불린다.

1951년 2월 15일, 이승만이 평양 군중 앞에서 평양 선언을 발표하면서 전쟁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하지만 바로 통일이 된 것은 아니었고 북한 지역은 잠시 유엔 산하로 편입되었다가 한 달 후 총선을 치룬 직후 38선 이북 지역의 행정권이 유엔군 사령부에서 대한민국정부로 이관되면서 분단 2년 반 만에 재통일되었다.

1951년 8월 15일에는 서울 천도와 동시에 통일경축전국민대회가 열렸다.

영향

한국은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남북한 도합 약 40만 명이 사망했으며 수백만 명이 고향을 떠났다.  경제도 피해가 컸는데 농업력의 11%, 공업력의 24%를 상실했다.  특히 37도선 이북의 피해가 컸는데 이는 전쟁의 무대가 37도선 이북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국은 중난하이 밀약을 통해 중국과의 약간의 신뢰관계를 구축한 상태였고 국방비를 감축하여  본격적인 경제개발을 시작한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위신이 깎였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중소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소련은 중국군 나름 정예라고 자랑하던 병력이 어이없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 중국과 유엔군 간의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는 의심을 하게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양국간의 관계는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훗날 동아시아 전쟁에도 영향을 미친다.

미국은 통일전쟁에서 큰 자신감을 얻었다.  단시간에 적은 피해로 남한의 공산화를 막았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체에서 공산주의를 축출하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의기양양해진 미국은 10여 년 후 베트남에 개입하였고 베트남 전쟁이 발발한다.

각주

  1. 거절이라기 보다는 보류라는 표현이 조금 더 정확하긴 하다.
  2. 원래는 당직이 아니었으나 자처했다.
  3. 당시 사용하던 대전의 임시 총통관저
  4. 현재의 대전광역시 시청
  5. 이승만의 "서울 포기" 발언에 항의하기 위해 일부 국회의원들이 연단 앞에 나가있다.
  6. 1948년 이래로 대한민국 정부는명목상 수도인 서울이 아닌 대전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 정부는 분단이 고착화될 경우 아예 대전에 눌러앉을 계획도 가지고있었다.
  7. 대전 서북쪽 방면에서 금강 도하에 성공하여 대전 15km 밖까지 전진했었다
  8. 김무정은 애시당초부터 평양 사수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으나 김일성이 억지로 임명했다.
  9. 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해 주간에는 보급대가 거의 이동하지 못했고 야간에도 시야 확보의 어려움으로 수송 차량들이 굼벵이 속도로 다녔다.
  10. 유엔령 북한의 군정장관을 맡는 그 아재다.
  11. 전선사령관으로 함주 전투를 지휘하다가 포탄에 피격당해 전사했다.
  12. 이후 어떠한 기록에서도 김일성에 대한 내용이 없는데 실각 직후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