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아름다운 나라)

Curio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9월 13일 (화) 19:06 판
쿠리오 긴배 도프 공산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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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나라 세계관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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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제국
كشور شاهنشاهی ایران
Keshvar-e Shâhanshâhi-ye Irân
국기 국장
مرا داد فرمود و خود داور است
그가 나를 심판할 제, 나에게 정의를 행하라 하시리라
상징
국가 황례포
국화
수련[1]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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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년 건국
  • 1935년 이란으로 개칭
  • 1963년 1차 백색혁명
  • 1979년 SATO 가입
  • 1990년 2차 백색혁명
  • 2006년 OECD 가입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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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테헤란
최대 도시
테헤란
면적
1,648,195㎢
접경국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튀르키예, 이라크, 쿠웨이트,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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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7,256만 명
밀도
44명/km2
인종
페르시아인 61%
아제르바이잔인 16%
쿠르드인 10%
기타 13%
공용어
페르시아어
지역어
아제르바이잔어, 쿠르드어
종교
국교
없음 (정교분리)
분포
시아파 이슬람교 56%, 조로아스터교 7%, 수니파 이슬람교 4%, 기독교 2%, 기타 9%, 무종교 22%
군대
이란군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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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개
429개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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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다당제, 단원제, 단일 국가, 성문법주의(대륙법계), 지방자치제
민주주의 지수
6.65점(결함있는 민주주의)2022년
국가 원수 (황제 (샤한샤))
팔라비 3세
정부
요인
수상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 )
국회의장
하심 카메자르니
대법원장
알리 모흐네르
여당
, ,
원내 야당
, , , , 틀:쿠르드당, 틀:아랍 사회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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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GDP
(명목)
전체 GDP
$2조 310억
1인당 GDP
$28,000
화폐
공식 화폐
리알 (Rial)
ISO 4217
IRN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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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대
UTC +3
도량형
SI 단위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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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수교현황
1962년
UN 가입
1945년
무비자 입국
한국인→이란: 90일
이란인→한국: 90일
주한대사관
서울수도시 노원구
ccTLD
.ir
국가 코드
IRN, IR
전화 코드
'
위치

작업 예정

개요

서아시아에 위치한 입헌군주국으로, 서아시아 최대의 강국이다.

역사

팔라비 1세 치하

페르시아 쿠데타와 건국

페르시아(카자르 왕조)는 1910년대 러시아 적백내전과 소련과 영국의 개입 등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페르시아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고 카자르 왕조의 권위는 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추락했다. 이러한 혼란 상황에서 코자크 여단의 여단장이었던 레자 칸이 1921년 영국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왕과 수상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스스로는 전쟁상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레자 칸은 1923년까지 페르시아 전역을 돌며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다.

1923년, 수도로 돌아온 레자 칸은 수상에 임명되었고 국왕은 해외로 망명해야 했다. 레자 칸은 이웃 국가인 터키(튀르키예)에서 무스타파 케말이 했던 것처럼 페르시아를 공화국으로 만드려고 했으나 내부의 반발로 인해 레자 칸의 페르시아는 군주국이 되었다. 1925년, 제헌의회가 레자 칸을 샤(왕)로 옹립하여 카자르 왕조가 멸망하고 팔라비 왕조가 수립됐다.

개혁 정책

1930년대 테헤란

팔라비 1세로 즉위한 레자 칸에 의해 급진적인 개혁이 시행되었다.

현대적인 교육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테헤란에는 이란 최초의 대학인 테헤란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많은 이란 학생이 정부의 지원으로 적절한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팔라비 1세의 16년 치세 동안 공장의 수는 17배, 고속도로의 길이는 7배가 늘어났으며 이란 횡단 철도가 건설되었다. 또한 결혼법을 개정하고 대부분의 공공장소에서 여성 출입을 막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는 등 여성의 권리가 제도적으로 보장됐으며 차도르 착용이 금지되었다.

강력한 세속화 정책 역시 시행되었다. 모스크에서 기도할 때 바닥에 앉는 것이 금지되었고[2] 종교적으로 여성들에게 가해지던 억압이 대부분 철폐되었다.[3]

정치 시스템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과학기술적 발전과는 별개로 정치에서는 큰 혁신이 발생하지 않았다.

1905년 이래로 이란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가 정착되었으나 그리 민주적이지는 못했다. 내무부가 의원 후보의 명단을 작성하였으며 이 명단은 선거관리위원회에 전달되어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이들이 주로 의원에 당선되었다. 고로 의회는 황제의 허수아비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1935년에는 국호가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변경되었다.

2차 세계대전

근위대를 사열하는 팔라비 1세

이란은 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에 가입하지는 않았으나 연합국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이에 연합국은 이란이 은밀히 추축국에 동조하고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품었고, 1941년 8월, 영국군과 소련군이 각각 남쪽과 북쪽에서부터 선전포고도 없이 이란을 침공했다. 이란군은 무능하게 붕괴하였다. 이란군 장교들은 비밀리에 영국군에 협조하였으며 심지어는 이란군 총사령관 아흐마드 나크자반은 영국에 항복하려 하기도 했다.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팔라비 1세는 군에 전투 중지 명령을 내리고 연합국과의 협상에 돌입했다. 당시 이란에는 상당한 수의 독일인들이 있었는데[4], 연합국은 이란 정부에 이들을 영국과 소련에 인계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소련에게 인계되는 것은 곳 죽음을 의미한다고 본 독일인들은 이란 정부에 도움을 청했고 샤의 명령으로 이들은 대부분 무사히 이란을 탈출했다. 이에 소련은 반발하였고 영국은 그의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의 황위 계승 지원을 조건으로 팔라비 1세에게 퇴위를 요구하였다. 이 요구를 받아들인 팔라비 1세는 퇴위하였고 영국과 소련이 이란을 점령하였다.

팔라비 2세 치하

연합군 점령하 이란

1941년 팔라비 2세가 이란의 새 샤한샤로 즉위하였으나 영국과 소련이 이란 전역을 점령하고 있었기에 실질적으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연합국은 이란을 보급품 운송의 주요 경로로 활용하였다. 1943년, 연합국은 1946년까지 이란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하였고 1945년 종전과 함께 영국군은 이란에서 철수하였다. 하지만 소련군은 철수를 거부하였고 이란의 서북부에 2개의 친소 괴뢰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자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소련에 철군을 요구하였고 소련은 등 떠밀려 철군을 하게 되었다. 친소 정부는 붕괴했고 이란 서북부는 다시 중앙정부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모사데크 내각

모사데크 내각(1951~1953). 오른쪽에서 넷째가 모사데크다.

1951년, 이전에 비해 공정하게 치루어진 총선에서 중도좌파 성향의 국민전선이 전체 79석 중 30석을 확보하여 이란 국민의회 원내 1당이 되었고 국민의회는 국민전선 중도좌파 세속주의 성향의 모하마드 모사데크를 수상에 임명하였다. 모사데크는 취임 직후부터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펼쳤다.

모사데크는 실업보상법과 토지개혁법 등을 통과시켜 복지를 강화하는 동시에 샤의 권한이었던 전쟁상과 이란군 총사령관의 임명권을 총리에게 옮기려 하는 등 샤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또한 영국의 소유이던 영국-이란 석유회사의 유전들을 국유화했다. 원래는 영국-이란 석유회사와 이란 정부 간의 석유 양허는 1993년 만료될 예정이었지만 모사데크는 이를 취소하고 영국-이란 석유회사의 모든 자산을 국가에 귀속시켰다. 모사데크는 1951년 6월 21일의 연설에서 이란을 "이란에 있는 모든 석유의 정당한 소유자"라고 주장하며 그의 정책을 정당화했다.

우리의 외국과의 오랜 협상은 (...) 지금까지 아무 성과도 없었다. 석유 세입으로 우리는 예산 전액을 충당할 수 있고 우리 국민의 빈곤, 질병, 낙후와 싸울 수 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고려사항은 영국 기업의 영향력을 제거함으로써 부패와 음모를 척결하고 (...) 경제적, 정치적 독립을 달성하리라는 것이다.
모하메드 모사데크

하지만 모사데크가 추진한 일련의 정책은 국내외에서 수많은 적을 만들었다. 국내에서는 지주들과 기업가, 공장주들의 복지정책에 반발했고 팔라비 2세는 모사데크가 자신의 권력을 제한하려 한 것을 괘씸히 여겼다. 이슬람 성직자들은 모사데크의 세속화 정책에 분노했고 또한 영국은 이란 정부가 자국의 주요 석유회사를 통으로 국유화한 것에 대해 이란 정부에 크게 항의했다. 더군다나 영국-이란 석유회사가 석유 관련 인력을 철수시키자 이란의 석유 생산량은 1/24배로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이란 정부의 세금 수입이 크게 감소했고 수출이 큰 폭으로 줄어들었으며 불경기가 찾아왔다.

경제난과 영국의 압박이 심화되자 모사데크 내각은 두 가지 카드를 꺼내들었다. 첫 번째는 수상 귄력 강화이며 두 번째는 소련과의 우호였다. 모사데크는 국민의회를 압박하여 법률안 제정권 등을 포함한 비상대권을 6개월간 부여받았고 이 기간은 곧 12개월 연장되었다. 또한 모사데크 내각은 한 때 서북 이란 문제로 이란과 큰 분쟁을 겪었었던 소련에 접근했다. 소련의 힘을 빌려 영국을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비대해진 수상의 권한은 민주주의자들로 하여금 그를 독재자로 여기게 만들었으며 소련과의 접촉은 소련의 라이벌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결국 1953년, 팔라비 2세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친위쿠데타를 일으켰고 지지 기반을 잃고 분열된 상태였던 모사데크 내각은 허무하게 붕괴했다.

1차 백색혁명

모사데크를 실각시켜 권력을 장악한 팔라비 2세는 모사데크의 개혁을 변형하여 백색혁명이라고 불리는 대개혁에 착수하였다.

케르만샤의 정유공장 (1970)

이란 정부는 '경제계획'이라 불리는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는데, 이는 소련의 경제계획이나 한국의 경제개발계획과 유사하였다. 이란은 페르시아만의 막대한 석유를 활용해 대규모의 석유 수출을 하였으며 석유 수출을 통해 확보된 자금은 산업 개발, 교육, 교통 인프라 확충 등에 투자되었다. 하지만 석유에 국가경제를 의존하던 리비아나 사우디아라비아와는 달리 비석유산업이 이란의 경제 성장을 주도했다. 1963년부터 1978년까지 이란은 연평균 10%의 경저성장을 이룩했다. 이 시기 이란은 한국, 터키, 중화민국 등과 함께 대표적인 친서방 신흥국으로 분류되어 수십 년 내로 선진국에 진입할 것이라는 전망을 받았다.[5]

1차 백색혁명이 철저히 자본가 위주로 진행되었다는 통념과는 달리 빈곤층을 위한 각종 정책 역시 도입되었다. 지주 중심의 토지 제도를 타파하기 위한 토지개혁이 실시되어 정부는 모스크와 지주들에게 돈을 지급하고 땅을 강제로 매입하였으며 매입된 땅은 400만 명의 소작농들에게 분배되었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해줄 노동법이 팔라비 2세의 주도로 제정되기도 했다.

여성 인권 역시 서구권에 비견될 정도로 크게 향상었다. 여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되는 등 여성 참정권이 보장되었으며 여성의 사회 참여가 증가했다. 도시에 거주하는 여성들은 부르카나 히잡을 쓸 의무가 없었고 남성 보호자 없이 외출할 수도 있었다. 정부공무원, 학교 교사, 의사 등 전문직종에도 많은 여성들이 진출하였으며[6] 1960년대 초에는 이란 최초의 여성 국무상이 탄생하기도 했다. 여성의 옷차림새도 자유로워져 이란 여성들의 패션은 당대의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와 비교해서도 손색이 없었다.

교육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 1967년부터 1977년까지 대학의 수는 7개에서 22개로, 고등학교의 수는 47개에서 200개로 증가하였다. 수많은 이란 대학생들이 팔라비 2세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과 유럽 등 서구권 국가들로 유학을 떠났다. 농촌 지방에서는 초등학교들이 건설되었고 대규모 문맹 퇴치 운동이 벌어졌다. 문맹 퇴치 운동은 군대의 주도로 이루어졌기에(!!) 문맹 퇴치 강좌를 이수한 이들은 '지식의 군대'라고 불렸다.

1970년대 테헤란

각 지역의 주요 도시는 현대적으로 정비되었다. 도시를 관통하는 곧은 포장도로가 닦였고 버스와 트램 등 대중교통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도시에는 공원, 극장, 병원, 마트 등 각종 편의시설과 생활필수시설들이 들어섰다. 기존의 대도시가 정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역할을 분담할 신도시들도 지어졌다. 이 바둑판 모양의 신도시들은 황제의 도시(شهر امپراتور: 엠페라투르 샤르)라고 불렸다.

이란 경제당국과 팔라비 2세는 석유가 무한정 나올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석유나 가스를 제외한 다른 에너지에 눈독을 들였는데, 바로 원자력 발전이었다. 1967년에는 테헤란 핵연구센터가, 1974년에는 이란 원자력기구가 설립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이란의 원전 연구는 탄력을 받게 되었다.  1975년, 이란 정부는 독일의 지멘스사와 원자력 발전소 건설 계약을 체결했고 1980년 원전 '부셰르 1호기'가 건설 완료되면서 이란은 중동 최초의 원전 보유 국가가 되었다.  이란 정부는 장기적으로 약 20개의 윈전을 운용할 계획이었다.

외교

냉전 시기 이란은 친미 반공을 외교 정책의 기본 방향으로 잡았다. 미국으로부터 전투기와 구축함 등의 무기를 구입했고 미국의 대외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하지만 이란은 소련과 완전히 척을 지지는 않아 팔라비 2세가 소련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정상회담을 가지기도 하였으며 3세계와의 외교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다.

이란은 서아시아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다.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 미국의 비호를 바탕으로 서아시아 최강국으로 성장한 이란은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반서방주의를 내세운 이라크, 시리아 등과 대립했다. 이란은 이에 그치지 않았고 1979년에는 파키스탄, 데칸 등과 함께 미국의 비호 아래 SATO를 창설하면서 남아시아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세속주의와 민족주의

팔라비 2세는 1967년 10월 26일, 기존 였던 자신의 칭호를 샤한샤, 즉 황제로 격상하고 성대한 대관식을 치렀다.  이 대관식에서 황후 파라는 1500개가 넘는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을 썼다.  또한 페르시아 건국 2500주년 행사를 매우 큰 규모로 거행해 자신이 페르시아의 적통을 계승한 후계자라는 것을 과시했다.  또한 이 행사에는 또다른 목적이 있었는데, 바로 이란에 세속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1800년대 카자르 왕조 이란이 쇠퇴하면서 많은 이들이 이란 쇠락의 원인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아쿤자데, 케르마니 등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란의 세속적 정체성을 내세우며 이란 사회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고있던 이슬람교가 비판받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있어 이슬람 시대 이전의 이란은 문명으로, 이슬람 시대 이후의 이란은 야만으로 받아들여졌다. 팔라비 2세는 그들의 의견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팔라비 2세는 이슬람 이전 시대의 명군인 키루스 대왕메 대한 우상화를 실시했다. 키루스의 무덤이 정비되어 주요 유적지가 되었으며 팔라비 2세의 자서전 '조국을 위한 임무'(영어: The Mission For My Country)에서 키루스는 '세계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사람 중 하나'로 묘사되었다. 페르시아 건국 2500주년 기념 행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추진되었던 것이다.

증폭되는 사회 혼란

반황정 쿠데타

팔라비 3세 치하

내우외환과 극복

2차 백색혁명

탈냉전과 신냉전

정치

샤한샤와 황가


이란 제국 샤한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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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어에서 는 왕이라는 뜻으로 샤한샤는 왕중앙, 즉 황제를 의미한다. 샤한샤는 이란 헌법상 이란의 국가원수로, 막대한 권한을 보장받는다. 샤한샤는 이란군 육해공군을 통솔하고 국민의회를 해산할 수 있으며 수상과 국민의회가 비준, 동의한 외교조약이나 국민의회에서 가결한 법률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수 있다. 또한 내각 각료와 대법원 대법관,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임명하거나 파면할 수 있으며 범죄자를 사면, 복권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막강한 권한은 팔라비 3세의 2차 백색혁명 이후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샤한샤와 황가는 사실상의 얼굴마담으로 국민의 구심점 역할을 맡고있다.

국민의회


이란 국민의회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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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크라바르 내각 (2021.8.28~)
여당 (287석)

자유당
163석

입헌당
95석

녹색운동
29석
야당

이슬람 민주당
127석

노동당
75석

무슬림 전선
32석

아제리 민족당
21석

쿠르드 동맹
13석

좌파당
7석
무소속 9석
재적 560석

이란 국민의회(National Iranian Congress)는 이란의 입법기관이다. 국민의회의 뿌리는 1906년에 설립된 국민협의회의(National Consultative Assembly)이며, 팔라비 3세의 제2차 백색혁명 당시 현재와 같은 구조로 재편되었고 명칭도 변경되었다.

의원의 임기는 4년으로, 지역구 의원 280명과 광역비례대표 280명으로 구성된다. 총선은 4년마다 치러지는 것이 원칙이나, 황제의 명령이나 의회 혹은 내각의 의결로 예정보다 빨리 총선이 치러질 수도 있다.

국민의회는 수상을 선출하거나 불신임을 제청할 수 있으며[7] 수상이 지명한 내각 각료에 대한 임명을 거부할 수 있다. 또한 당연하게도 법률의 제정, 개정, 폐지를 의결할 수 있고[8] 필요시 내각에 대한 감사를 시행할 수 있다. 일반 법률안의 경우 제정, 개정, 폐지를 의결하기 위해서는 재적 인원 과반수 이상의 출석과 출석 인원 과반수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며 헌법 개정늘 의결하기 위해서는 재적 의원의 2/3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

특정 정당이 과반을 달성한 적이 없어 항상 연립내각 체제로 운영된다.

의장은 여당 혹은 연립여당의 최대 정당의 최다선 의원이 맡는 것이 관례이며 부의장은 각각 여당측 의원과 야당측 의원이 맡는다. 의장이 직무를 수행할 수 없거나 의장직이 공석일 경우 여당측 부의장이 의장의 권한을 대행한다.

과거에는 상원도 존재해 양원제로 운영되었으나 상원이 2차 백색혁명으로 폐지되어 단원제의 형태가 되었다.

수상과 내각

경제

사회

종교

문화

교육

외교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

이라크와의 관계

미국과의 관계

아태연합과의 관계

군사

여담

  • 쿠리오의 첫 이브위키 오리지널 문서이다.

각주

  1. 출처
  2. 대신 의자를 사용토록 했다.
  3. 다만 일련의 세속화 정책은 이슬람 성직자들의 큰 반발을 불러왔다.
  4. 독일 외교공관 직원들과 그 가족들
  5.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6. 그 예로, 1968년 당시 이란의 원자력 과학자 네 명 중 한 명이 여성이었다.
  7. 제청하는 대상은 당연히 샤한샤
  8. 이 의결이 효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 역시 샤한샤의 수결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