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유신 昭和維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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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 대체역사, 역사 |
참여자 | 공산1968 |
연재 시작일 | 2024년 11월 2일 (연재 시작일로부터 +16일) |
라이선스 |
개요
일본 작가로서는 최초로 이 자리에 섰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아름다운 일본의 나』라는 이름의 강연을 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아름답고, 또한 지극히 'vague'했습니다. 저는 지금 'vague'란 말을 사용했습니다만, 이는 일어로 '애매한' 이란 의미를 지닌 형용사입니다. (...) 이와 같은 과거에 얼룩진 쓰라린 기억을 가진 사람으로서, 저는 카와바타처럼 '아름다운 일본의 나'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 제가 저 자신에 대해 '애매한 일본의 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개국 이후, 120년 간 근대화를 계속해 온 현재의 일본은 근본적으로 '애매함(ambiguity)'의 양극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애매함'에 깊은 상처를 입은 표시가 뚜렷한 소설가로서 제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국가와 인간을 모두 갈라놓을 정도로 강하고 날카로운 이 '애매함'은, 일본과 일본인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표면화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근대화는 오로지 서구를 배운다, 모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아시아에 위치하고 있고, 일본인은 전통적인 문화를 확고히 지켜오기도 했습니다. 그 애매한 진행은, 아시아에 있어 침략자 역할로 일본을 몰고 갔습니다. 또 서구를 향해 전면적으로 개방되어 있었던 근대의 일본 문화는, 그러면서도 서구 측에게는 언제나 이해가 불가한, 혹은 적어도 이해를 지체시키는 어두운 부분을 온존시켜 왔습니다. 게다가 아시아에 있어서, 일본은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으로도 고립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 일본인은 그 자신이 애매함으로 분열되어 있다고 저는 말했습니다만, 그 고통과 상처로부터 (그들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을 그 무엇보다 간절히 바라기에, 저는 문학적인 노력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것은 일본어를 공유하는 이들에게 같은 방향으로 향하길 염원하는 저의 표현작업이기도 합니다. (...) 20세기가 기술과 고통의 괴물적인 발전 속에 쌓아놓은 피해를, 가능하다면 연약한 내 자신의 몸으로써 고통을 받아들이고, 특히 세계의 주변에 사는 사람으로서 여기서부터 전망할 수 있는 인류 전체의 치유와 화해에 어떻게 품위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휴머니즘적인 공헌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탐구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1] 오에 겐자부로, 『애매한 일본의 나』 (あいまいな日本の私, 1994년 노벨 문학상 수상 소감문) 中 |
쇼와유신(昭和維新)은 기타 잇키와 황도파가 기획한 2.26 사건과 순정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이후의 일본에 대해 다루는 공산1968의 대체역사 세계관이다.
상세
작가가 제이위키에서 쓴 설정인 우국의 재편 버전으로, 1936년 2.26 사건의 성공을 통해 기타 잇키와 황도파가 집권한 일본을 배경으로 한다.
실제 2.26 사건은 가장 중요한 쇼와 천황의 재가가 없었던데다, 지도자였던 아라키와 마사키의 무능으로 인하여 성공하지 못했다. 또한, 이념적인 기반 역시 대중에 알려진만큼 튼실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불리한 상황을 뒤집고 2.26 사건 당시 황도파가 더 유능하게 처신하여 고노에 후미마로[2] 등 다수의 군장교들을 끌어들이고 히로히토의 재가를 통하여 집권에 성공, 가상의 황도파 국가인 아련을 구성했다면 어땠을지를 가정해본 것이다.
2.26 사건(작중에서 "2월 혁명")을 성공시킨 황도파는 지도자 마사키 진자부로와 고노에 후미마로를 국무경으로 하여 사회주의 체제로 일본을 개변한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 고노에의 신체제운동이 사회주의적 요소가 있었을지언정 계급적 기반은 상류계급이었으므로 협동조합주의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 세계관에서, 도호쿠 빈농과 소작농이라는 계급적 기반을 가진 황도파는 부패한 군 수뇌부와 자이바츠를 상대로 한 계급투쟁을 벌여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를 실현하였다. 다만 이것이 공산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반공주의적 사회주의[3]이다.
황도파는 통제파와 달리 친중국, 반소 성향이었다. 이에 따라 중일전쟁은 물론 미일전쟁(=대동아전쟁, 2차 대전)도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소련을 침공하는 북방출병이 있었다. 몽골을 합병하는데에는 성공했지만, 당시 일본의 여러 군사적 상황을 보자면 소련을 1대 1로 이기는건 불가능하다. 소련이 1939년 독일 침공을 우려해[4] 몽골을 내주고 대신 물자 지원을 받는다는 식의 조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소련과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매듭지었다.
2차 대전 이후, 친소파 사회주의자와 반소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 간의 대립으로 정치가 굴러가게 된다. 전자는 현실의 사회당 좌파, 후자는 현실의 사회당 우파[5] + 자유민주당[6]이라고 볼 수 있다. 1965년까지는 스즈키 모사부로의 공산주의파가 우세했다가, 이후 니시오 스에히로를 중심으로 한 현실의 사회당 우파 쪽이 브레즈네프처럼 스즈키를 축출하고 보수적인 정권을 이어나간다.
스즈키 사후 다나카와 후쿠다가 경쟁하다가, 혼란이 이어지고 고르바초프 포지션으로 도이 다카코가 투입, 다당제 개혁과 시장경제 도입을 추진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부작용으로 조선과 만주, 몽골이 독립하며 국력이 쇠락했고, 경제난까지 겹치며 2003년 대만까지 독립해 아련이 결국 붕괴하고만다는 설정이다. 구 정권의 경우 보수파는 자민당, 개혁파는 민주당이나 민사당 등으로 흩어진 상태.
아련에 대한 설명
우선, 공산주의 국가는 아니다. 소련을 많이 참조하긴 했지만 직접적인 모티브는 유고슬라비아이다.[7] 즉, 공산주의라기보다도 노동자 자주관리, 국가자본주의에 가깝다.
다만 사회주의는 맞다. 현실의 통제파와 다른 형태의 사회주의, 즉 순정사회주의를 추구한다. 파시즘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황도파는 자이바츠의 타도 등 계급투쟁적 노선이 선명하였으므로 현실의 슈트라서주의와 어느정도 더 비슷한 면이 있다.[8] 즉, 사회주의와 파시즘의 짬뽕이고 여기에 부분적으로 공산주의적인 요소를 넣은 것이다.
전반적으로 유고슬라비아와 제3세계 비동맹 사회주의 국가, 즉 인도나 리비아, 이라크, 이집트 등에서 많은 모티브를 따왔다. 여러 점을 종합해보자면 이집트와 가장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주요 문서
여담
- 처음에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의 스핀오프 세계관인 대동아 공영권의 공산주의 버전으로 기획되었다. 그러나 설정을 쓰면서 점차 흥미를 갖게 되어 진지한 기타 잇키와 황도파 중점 세계관으로 변모했다.
- ↑ 요약하자면 야스나리는 서양과 구분되는 일본만의 고유하고 상대적인 미학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실상 20세기 일본이 저지른 야만이 그러한 고유한 일본 문명의 미학으로 은폐되어왔다는 것이다. 야만을 동양적인 것으로 은폐하면서 그것을 서양적으로 실현시킨 일본 역사와 문명은 그렇기에 애매함(ambiguous)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러한 애매로 입은 상처는 오로지 인류 보편적인 휴머니즘으로서 치유될 수 있다는, 오에 특유의 주장이 담긴 강연이다.
- ↑ 실제 2.26 사건 이전까지 황도파에 꽤 우호적인 정치가 중 한명이었다.
- ↑ 쉽게 말해 무아마르 카다피나 사담 후세인을 생각하면 된다.
- ↑ 통념과 달리 스탈린과 소련공산당 지도부는 독소불가침 조약 체결 직후부터 히틀러의 소련 침공 가능성을 극도로 높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 ↑ 이 역시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사회당 우파의 직접적인 뿌리는 대정익찬회와 고노에 후미마로의 신체제 운동이다. 에다 사부로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했다.
- ↑ 기시 노부스케, 호소카와 모리히로, 스즈키 젠코 등이 모두 초기에 사회당에서 정치를 시작했거나 혹은 사회당을 통해 정계에 입문하고자 했다.
- ↑ 특히 민주화 이후의 전개는 대놓고 유고슬라비아를 배낀 것이다. 잘 알려져있는 사실은 아니나 무려 2006년까지 유고슬라비아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연방, 이른바 신유고연방으로 국체를 존속했기 때문이다.
- ↑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계급협조적인 모습을 더 많이 띄었다. 사실 파시즘이라는 서구의 철학으로 일본의 정치를 딱딱 맞춰 설명할 수 없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