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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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1-3대 내각수상 김일성 金日成 | Kim Il Su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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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2년 4월 15일[1] | |||||||||||||||||||||||||||||||||||||||
평안남도 평양부 용산면 하동 칠골 (現 평양시 룡산구역 칠골1동) | ||||||||||||||||||||||||||||||||||||||||
사망 | 1956년 9월 8일 (향년 44세) | |||||||||||||||||||||||||||||||||||||||
평안북도 구장군 우현리 묘향산 기슭 | ||||||||||||||||||||||||||||||||||||||||
재임기간 | 초대 내각수상 | |||||||||||||||||||||||||||||||||||||||
1948년 9월 9일 ~ 1951년 9월 12일 | ||||||||||||||||||||||||||||||||||||||||
제2대 내각수상 | ||||||||||||||||||||||||||||||||||||||||
1951년 9월 13일 ~ 1954년 9월 8일 | ||||||||||||||||||||||||||||||||||||||||
제3대 내각수상 | ||||||||||||||||||||||||||||||||||||||||
1954년 9월 9일 ~ 1956년 8월 2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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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의 제1-3대 내각수상.
약력
- 1934. 동북인민혁명군 제3단 정치위원
- 1936.3.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정치위원회 위원
- 1936.7.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단장
- 1941.12.7. 소련 극동군 제88독립보병여단 제1대대장
- 1945.10.13.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집행위원
- 1945.12.18.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 1946.2.8.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
- 1946.2.15. 민족주의민주전선 북조선지부 위원장
- 1946.6.22. 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
- 1946.8.28. 북조선로동당 책임비서
- 1948.9.9. ~ 1951.9.12.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초선 / 북조선 / 북조선로동당)
- 1948.9.9. ~ 1951.9.12. 초대 내각수상
- 1949.7.1. ~ 1956.8.2.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1950.7.4.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 1951.9.13. ~ 1954.9.8.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재선 / 조선로동당)
- 1951.9.13. ~ 1954.9.8. 제2대 내각수상
- 1954.9.9. ~ 1956.8.2. 제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선)
- 1954.9.9. ~ 1956.8.2. 제3대 내각수상
생애
유년 시절
1912년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김형직(金亨稷)은 조선국민회를 결성한 독립운동가이자 한의원을 운영하던 의사였으며 어머니인 강반석(康盤石)은 독실한 개신교 신사로 평양에 위치한 칠골교회의 집사[4]였다.
3.1운동이 발발한 1919년 만주 지린성 푸쑹현(撫松縣)으로 이주해 팔도구소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1923년 초에는 김형직과 함께 평양으로 복귀해 창덕소학교에서 1925년까지 공부한다. 이후 1925년엔 다시 만주로 건너가 그 곳의 푸쑹소학교를 졸업한다. 그의 아버지인 김형직은 공산주의자는 진료도 받아주지 않았던 독실한 반공주의자였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에게 미움을 산 그는 1926년 공산주의자들에게 암살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1925년부터 화성의숙에서 공부하던 그는 1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조부모의 밑에서 자라면서 1926년은 화성의숙을 중퇴하고 1927년부터는 만주 쑹화강에 위치한 육문중학교에서 수학한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을 가르치던 중국인 교사 샹위에(尙鉞)로부터 공산주의를 접하게 된다.
1929년 5월엔 조선공산청년회에 가입하여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 육문중학교에서 퇴학당하게 된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그는 차츰차츰 공산주의에 몸을 담기 시작한다.
항일 무장투쟁
해방정국 시기
평양시환영군중대회에서 모습을 보인 김일성 |
초대 내각수상
내각 조직 기념 단체사진[5], 1948년 |
8월 종파사건으로 인한 몰락
의문의 죽음
박헌영이 사주한 암살?
사후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성격
여담
- 유년 시절에 사용하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현재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김일성이란 이름은 그가 항일운동을 하던 1930년대 즈음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가족 관계
- 조부 김보현 (1871 ~ 1955) / 조모 리보익 (1876 ~ 1959)
- 아버지 김현직 (1894 ~ 1926) / 어머니 강반석 (1892 ~ 1932)
어록
국제정세도 우리에게 유리합니다. 제2차세계대전후 국제반동세력은 심히 약화된 반면에 국제민주력량은 급속히 장성강화되였습니다. 특히 작년에 중국혁명이 승리함으로써 세계의 정치적력량관계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중국혁명의 승리로 국제민주력량은 더욱 강화되였으며 국제반동세력은 심히 약화되였습니다. 중국혁명의 승리는 리승만괴뢰도당에게도 심대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지금 장개석도당은 리승만괴뢰도당을 도와줄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쏘련과 중국을 비롯한 세계의 수많은 나라 인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받고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조선전쟁 개전 당시 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비상회의에서 한 연설 《결정적인 반공격으로 무력침범자들을 소탕하자》에서 |
죽음을 무릅쓰고 포화 속에서 전진한 우리 인민군 장병들에게 그런 즐거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동무는 잘 알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인민군의 민간인들을 향한 약탈 및 강간에 대해 항의한 조선로동당 경상남도당의 조직부장 안병화(安炳華)에게 |
야, 이 새끼야! 작전이 잘못되면 나뿐만 아니라 너희도 책임이 있어! 제1차 거제 상륙작전 당시 김일성의 잘못된 계획으로 작전에서 대패한 것에 대한 최용건과 최현의 항의에 적반하장으로 잉크병을 던지며[6] |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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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 - 1945 | 입당 | |
1945 | 창당 | |
1945 | 조선공산당 남북 분당 | |
1945 - 1946 | 창당 | |
1946 - 1949 | 합당 | |
1949 - 1956 | 합당 | |
1956 | 제명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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