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전차전 (빌레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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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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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일본인민공화국의 항복 |
9월
제2차 벨트크리그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김제 전차전
Die Schlacht von Gimje
金堤戦闘
제2차 벨트크리그전광 작전의 일부
날짜
1943년 11월 1일~1943년 11월 3일
장소
대한국 전라북도 김제시
교전국 대한국 일본인민공화국
지휘관 권준[1]
류경수[2]
신철휴[3]
박일우[4]
이종건[5]
요시다 신[6]
호시노 도시모토[7]
오카다 다스쿠[8]
토아먀 히로미치[9]
오자키 요시하루[10]
병력 44,200명
전차 208대
자주포 72문
장갑차 206대
포 152문
대전차포 17문
45,920명
전차 256대
포전차 32문
장갑차 225대
포 72문
속사포 52문
피해규모 전사 1,052명
부상 2,785명
전차/자주포 92대
장갑차 51대
각종 포 52문
항공기 24대
전사 1,281명
부상 3,052명
전차/포전차 145대
장갑차 81대
각종 포 85문
항공기 18대
결과
대한국의 승리
영향
일본의 전라도 전선 붕괴
105 전차 사단의 221호차 '대호'

개요

김제 전차전은 제2차 벨트크리그 도중 1943년 11월 1일 부터 3일까지 대한국 국군과 일본 인민군 간의 김제 평야 일대에서 전개된 전투다.

한국군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한 일본군의 역습에서 비롯되었으며, 양측 도합 400대[11]가 넘는 전차가 투입된 아시아 사상 최대의 전차전이었다. 이만한 가공할만한 전력이 투입된 것은 유럽전선에서도 리사 전투론세 전차전 정도 밖에 없다.

서론


1943년 말 일본군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대성공으로 끝난 남방작전은 막대한 점령군을 필요로 하며 일본군의 역량을 소모시키고 있었고, 창더 전투에서의 격전은 더 이상 중국군이 예전만 같지 않다는 것을 실감 시켰다. 태평양에서는 미군이 서서히 전세를 뒤짚고 절대방위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모든 전선에서 수세에 밀리고 있던 와중 김제 전차전은 사실상 일본군의 마지막 발악이었다.[12]

일본군은 최소한 삼남 지방만큼은 사수해야했으며, 만약 한반도의 모든 지역에서 축출된다면 중국과 동남아를 향한 보급선이 방해받으므로 더 이상 전쟁 수행이 불가능 했다. 이러한 목적으로 전북 부터 경북까지 걸쳐 형성된 방어선이 세이시로선[13]이었으며 이 방어선의 붕괴는 사실상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전광 작전이 전개되면서 전북 지역의 방어선은 맥없이 무너졌다. 수십만의 한국군이 돌파구를 통해 방어선 안쪽으로 비집고 들어왔고 그 선봉에는 2개 전차사단, 1개 공정사단, 1개 기보사단으로 구성된 제7기동군단이 있었다. 이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배치된 일본의 '기갑군'은 일본군의 최대 기갑전력이었으며 한국군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역습을 가한 곳은 한반도 최대의 평야 김제 평야였다.

3일 동안 김제에서는 양측 600대에 달하는 기갑전력이 맞부딪히며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양측 모두 손꼽는 정예병력만을 동원하였으므로 한치 물러섬도 없는 호각이었다. 하늘에서는 압록강 방공전 이후 역량을 키운 한국 공군과 일본 공군 간의 수십대가 넘는 전투기의 도그파이팅이 펼쳐졌다. 그러나 이틀째 진행된 공세에서 일본군은 김제시 중심부를 앞에 두고 주저앉았으며 그날 밤 한국군의 역습에 좌익이 무너지면서 삼일째 정읍으로 철수했다.

이 삼일 간의 격전에서 일본군은 한국군의 발전된 역량을 여실히 체감했다. 특히 한국 전차군의 역량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이 전투에서 19식 3호 전차 흑표 중전차는 평균적으로 네대의 일본 전차를 격파했고 많으면 10대가 넘었다. 흑표 쇼크가 절정에 이르면서 일본 전차병들은 흑표와의 교전을 피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 전투 이후 일본은 다시는 이만한 규모의 전차를 단일 전투에 동원할 수 없었다.

역습이 실패하면서 전라도 전선은 끝장났다. 잔존 일본군은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며 경상도로 후퇴하기 바빴고 노령산맥 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하여 전남 일대라도 사수하려던 17방면군은 그대로 한국군의 공세에 찢겨버렸다. 전선이 완전히 붕괴하는 와중에 대본영은 경상도 공세를 저지하는 1 방면군의 선전에 고무되어 지난 전쟁과 같이 경상도 일대만큼은 사수 할 수 있으리라 낙관적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전라도가 무너진 와중에 북쪽과 서쪽에 걸쳐 경상 수복을 위해 대전열을 이루기 시작한 한국군을 상대로 후퇴할 곳 없는 대한해협이라는 배수진을 치고 있었고, 전라도가 수복되며 활동량이 급증하기 시작한 한국 해군에 의해 보급선이 방해 받기 시작했다. 결국 7개월 후 신멸 작전이 전개되며 조선파견군은 완전히 끝장났다.

  1. 7기동군단장
  2. 105 전차사단장 대리
  3.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
  4. 20전차사단장
  5. 제2공정사단장
  6. 기갑군단장
  7. 1전차사단장
  8. 2전차사단장
  9. 교도전차여단장
  10. 19보병사단장
  11. 자주포까지 합하면 거의 600대에 육박한다.
  12. 물론 전세 반전을 위한 노력은 패망 직전까지 지속되었으나 대부분 작전 계획 단계 부터 이미 파국이 예견되었다. 그나마 대륙타통작전은 겉으로 보기엔 전선을 크게 돌파하고 중국을 벼랑까지 몰아붙힌 것 처럼 보였으나, (애초에 작전 목표 자체가 망상에 가깝긴 했지만)본래에 작전 목표에 비하면 턱도 없었고 확보한 점령지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채 중국군의 공세에 다시 밀려나기 시작했다.
  13. 방어선을 계획한 17방면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이름을 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