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진보정치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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º 1987년 6월: 1987년 6월 민중 항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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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불어민주당 (2017.05.10. ~ 2022.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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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 (2022.05.10. ~ 202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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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진보정당 | ||||
|---|---|---|---|---|
| 통합진보당 | → | 진보당 | → | 현재 |
| 진보당 | |
|---|---|
| 한문 명칭 | 進步黨 |
| 영문 명칭 | Progressive Party |
| 슬로건 | 자주·민주·통일의 조국을 향하여 |
| 고유 번호 | 615-82-91105 |
| 창당일 | 1997년 11월 24일 (국민승리21) |
| 당명 변경 |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 2011년 12월 13일 (통합진보당) 2014년 12월 19일 (진보당) |
| 대표 | 신창현 / 3선 (19·21-22대) |
| 원내대표 | 장지화 / 3선 (20-22대) |
| 사무총장 | 장진숙 / 초선 (22대) |
| 정책위의장 | 송명숙 / 초선 (22대) |
| 대통령 | 김재연 / 제21대 |
| 이념 | 진보주의, 좌익민족주의 |
| 스펙트럼 | 중도좌파 ~ 좌익 |
| 국회의원 | 161석[1] / 300석 (53.6%) |
| 광역자치단체장 | 11석[2] / 17석 (64.7%) |
| 기초자치단체장 | 104석 / 226석 (46.0%) |
| 광역의회의원 | 452석[3] / 872석 (51.8%) |
| 기초의회의원 | 1,564석 / 2,988석 (52.3%) |
| 당색 | 붉은색 (#D6001C)
|
| 청년조직 | 청년진보당 |
| 대학생조직 | 전국대학생위원회 |
|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 | |
| 정책연구소 | 진보정책연구소 |
| 당 기관지 | 너머 |
| 노동조합 |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민주노총) |
| 농민조직 | 전국농민총연맹 (전농) |
| 통일조직 |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범민련) |
| 국내 연대 조직 |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
| 한국진보연대 | |
| 정당연합 | 수구청산 원탁회의 |
| 당원 수 | 5,567,300명 (2026년 10월 기준) |
| 권리당원 수 | 2,306,738명 (2027년 1월 기준)[4] |
개요
대한민국의 진보 정당. 1987년 6월 항쟁 당시 주축이 되었던 민주화운동 조직들의 통일체인 전민련이 합법정당 노선에 따라 창당된 정당인 국민승리21을 모태로 하고 있다. 2016-2017년 박근혜 퇴진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2022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문수를 대통령으로 배출해 여당으로 도약했다. 2027년 치러진 대선에서 김재연을 다시 당선시키면서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역사
민통련에서 전민련으로 (1985~1989)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설립은 1985년 전두환 정권의 억압적 통치에 맞서 학생운동, 종교계, 재야인사들이 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개별적으로 산발적인 저항을 전개하던 각 부문 운동이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반정부 투쟁을 위해 통합된 연대체 구성에 합의하였고, 1985년 3월 29일 23개 재야단체가 참여하여 민통련이 정식 출범하였다. 민통련은 민주화·통일·민중생존권 확보를 3대 목표로 설정하며, 기존의 온건한 재야운동을 넘어서는 급진적 민중운동 노선을 표방하였다.
6월 항쟁 시기 민통련의 역할은 매우 결정적이었다. 1987년 4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반정부 여론이 급격히 고조되자, 민통련은 각계각층의 저항 세력을 결집시키는 핵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6월 10일 국민대회를 기점으로 전국적인 시위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민통련은 현장 투쟁의 조직화와 대중동원에서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학생운동과 시민사회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통해 항쟁의 지속성과 확산성을 보장하였다.
뒤이은 민주헌법쟁취국민본부(국본)의 성립은 6월 항쟁의 심화 과정에서 보다 광범위한 연대체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이루어졌다. 1987년 5월 27일 종교계를 중심으로 한 온건 개혁세력과 민통련을 포함한 급진 민중운동 세력이 대연합을 이루어 국본이 출범하였다. 국본은 직선제 개헌과 민주헌법 제정을 핵심 목표로 설정하며, 명동성당을 거점으로 한 종교계의 도덕적 권위와 민통련의 조직력이 결합된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를 통해 중산층과 시민사회의 광범위한 참여를 이끌어내며 6월 항쟁을 전국민적 저항운동으로 발전시키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였으며,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국본 단일 후보인 김영삼의 당선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6월 항쟁 이후 노동자 대투쟁의 전개는 한국 사회운동사에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전국적으로 3,749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하며 360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하는 대규모 노동운동이 분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어용노조 체제가 붕괴되고 민주노조 건설 운동이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울산 현대그룹, 부산 신발산업, 창원 기계공업 지역 등에서 지역 단위의 연대투쟁이 조직되었다. 동시에 농민운동, 빈민운동, 학생운동 등 각 부문별 계급·계층 운동이 독자적 조직력과 투쟁력을 획득하며 성장하였고, 이들은 보다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노동계급 뿐 아니라 다른 계급 계층에서도 저항 운동이 전개되었다. 1989년 3월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성립되었고, 11월에는 전국빈민연합이 창설되었다.
이러한 민주화 이후 계급·계층 운동의 성장과 사회변혁 요구의 심화를 배경으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 1989년 5월 15일 창립되었다. 전민련은 기존 민통련의 3대 목표를 계승하면서도 노동자·농민·빈민 등 민중계급의 이해를 보다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진보적 통일전선 조직으로 성격을 명확히 하였다. 130여 개 단체가 참여한 전민련은 민족민주운동의 통일전선체로서 반미자주화, 민중민주주의, 조국통일을 3대 강령으로 설정하며, 기존의 자유주의적 민주화 운동을 넘어선 사회주의적 지향을 내포한 진보적 변혁운동의 중심체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로써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이 단순한 정치적 민주화를 넘어 사회경제적 민주화까지 포괄하는 총체적 변혁운동으로 발전하는 조직적 기반이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