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탈리아 (필연)

틀:역사의 필연

이탈리아 왕국
Regno d'Italia
(1946~1986)
남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
Repubblica Socialista dell'Italia Meridionale
(1986~1987)
국기 (1946~1986) 국장 (1946~1986)
남이탈리아_(필연)
국기 (1986~1987) 국장 (1986~1987)
F.E.R.T.
사보이 왕가의 표어 (1946~1986)
Pace, Lavoro, Socialismo, Democrazia
평화, 노동, 사회주의, 민주주의 (1986~1987)
상징
국가 왕의 행진곡 #
(Marcia Reale d'Ordinanza, 1946~1986)
국제가 #
(L'Internazionale, 1986~1987)
국화 데이지
역사
이탈리아 통일 1861년 3월 17일
생제르맹 조약 1920년 7월 16일
남이탈리아 왕국 성립 1946년 6월 12일
초봄의 혁명 1986년 3월 15일
북이탈리아와의 통일, 멸망 1987년 9월 2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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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로마 (Roma)
북위 41°53′36″ 동경 12°28′58″
최대 도시
면적 132,073km2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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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968만 3,945명 (1946년)
1,803만 6,332명 (1986년)[1]
기대수명 69.6세 (1976년)
공용어 이탈리아어
종교 국교 로마 가톨릭 (1946~1986)
국가 무신론 (1986~1987)
구성 가톨릭교 94.3%, 무종교 및 기타 5.7% (1946)
가톨릭교 63.2%, 무종교 33.3% (1976)
가톨릭교 45.3%, 무종교 51.5% (통일 직전)
군대 이탈리아 왕국군 → 기능 정지[2]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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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부르주아 독재, 의회민주제, 다당제 (1946~1970, 1983~1986)
전제군주제, 파시즘, 형식적 다당제 (1970~1983)[3]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민주집중제, 직접민주제 (1986~1987)
국성 사보이아 (Savoia) → 군주제 폐지
역대 국왕 움베르토 2세 (1946~1983)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4세 (1983~1986)
역대 대통령 오스카 슈나이더 (1986~1987)
역대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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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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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본주의시장경제사회주의 경제
총 GDP $576억 (1976)
1인당 GDP $3,200 (1976)[4]
통화 이탈리아 리라
ccTLD
.si
국제 전화 코드
+39
국가 코드
IT, SIT, RIT, 380

개요

남이탈리아(이탈리아어: Italia Meridionale)는 1946년부터 1987년까지 41년 간 존재했던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국가이다. 정식 국명은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어: Regno d'Italia)이었으며, 1986년 남이탈리아 국체전환 국민투표를 통해 남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이탈리아어: Repubblica Socialista dell'Italia Meridionale)으로 체제를 전환한 후 1987년 북이탈리아와 통일되어 현재의 이탈리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흡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이탈리아 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탄생한 국가로, 수도는 로마였다. 북 이탈리아의 경우 반빨치산 파르티잔, 특히 이탈리아 공산당의 중심으로 수립된 공화국인 반면 남 이탈리아는 파시즘 정권인 이탈리아 왕정을 계승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였다. 북쪽으로는 북위 37도선을 경계로 북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마주했으며, 영토는 라치오, 아브루초, 캄파니아, 풀리아, 바실리카타,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사르데냐 등 8개 주로 구성되었다.

남이탈리아는 41년간의 역사 동안 입헌군주제와 형식적 의회민주주의를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왕권과 군부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있었으며, 특히 1970년대 후반부터 1983년까지는 사실상의 군사독재 체제를 경험했다. 이후 1985년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1986년 국체 전환하며 왕정을 폐지했고, 1987년 연방 헌법 개정을 통하여 북이탈리아에 흡수통일되어 멸망하였다.

역사

초기 (1946~1957)

개국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이탈리아 반도는 연합국의 점령 하에 놓였다. 1946년 초,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이탈리아 반도 역시 분할 점령의 대상이 되었다. 3월에 체결된 얄타 협정에 따라 이탈리아는 로마 북쪽 3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할되었다. 북부는 소련과 반파시스트 파르티잔의 영향 하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고, 남부는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는 왕정 체제가 수립되었다.

1946년 6월 12일, 공식적으로 이탈리아 왕국을 계승하는 남이탈리아 왕국이 선포되었다. 초대 국왕에는 사보이아 왕가의 움베르토 2세가 즉위했으며, 수도는 로마로 정해졌다. 초대 총리에는 전쟁 중 반파시스트 활동을 벌였던 가톨릭 정치인 프란체스코 데 갈로가 임명되어 기독교민주인민연합 정부를 이끌었다. 건국과 동시에 실시된 1946년 제헌의회 선거는 남이탈리아의 정치 체제를 결정하는 중요한 선거였다. 총 5개 정당이 경쟁한 이 선거에서 데 갈로가 이끄는 기독교민주인민연합이 77석(44.8%)을 획득하여 제1당이 되었다. 그러나 단독 과반에는 실패하여 이탈리아 사회민주당(23석, 13.4%)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공산주의자 인터내셔널 남이탈리아 지부가 55석(32.0%)을 획득하여 강력한 제1야당으로 부상한 것이었다. 이는 전후 경제적 혼란과 사회적 불안 속에서 좌파 이념에 대한 상당한 지지가 존재했음을 보여주었다. 이탈리아 공화당(11석)과 시칠리아 인민당(6석)은 각각 반왕정 세력과 지역주의 세력을 대변했다. 이에 따라 데 갈로 총리는 취임과 동시에 경제-정치적 안정을 요구하는 '반공 친서방 노선'을 명확히 했다. 1947년 체결된 이탈리아-미국 상호방위조약을 통해 미군의 나폴리, 타란토 기지 주둔을 허용하고, 경제적으로는 마셜 플랜의 수혜국이 되어 전후 복구에 박차를 가했다.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자 인터내셔널 남이탈리아 지부를 견제하기 위해 '국가안보법'을 제정했고, 교육 정책에서는 가톨릭 교육을 강화하여 종교적 보수주의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다. 경제 정책에서는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하되, 주요 기간산업은 국가가 관리하는 혼합경제 모델을 채택했다.

반공 정권의 강화

남이탈리아 건국 초기의 가장 심각한 위기는 1948년 3월의 페루자 위기였다. 북부 공산 정권이 로마 라인 경계 지역인 페루자에 대해 기습적인 군사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북부군은 소련제 주피터 미사일로 4일간 페루자를 포격했고, 이에 남이탈리아 왕국군과 미군이 연합하여 대응했다. 이 사건으로 양측 합계 262명의 군인이 사망하고 민간인 43명이 희생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비록 남이탈리아가 영토 방어에 성공했지만, 분단 체제의 군사적 대립이 현실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후 양측은 '페루자 협정'을 체결하여 군사분계선을 공식화하고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한 핫라인을 설치했다.

뒤이은 1949년 9월에 발생한 로마 노동자 항쟁은 남이탈리아 초기 사회의 계급 갈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국영철강공사 노동자 마르코 로시의 산업재해 사망을 계기로 시작된 이 폭동은 5일간 계속되었고, 15만 명의 노동자와 시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발전했다. 항쟁 과정에서 정부군과 시위대 간의 무력 충돌로 47명이 사망하고 234명이 부상했다. 데 갈로 정부는 이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으로 규정하고 강경 진압했지만, 실제로는 전후 경제적 불평등과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가 폭발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남이탈리아 사회의 깊은 계급 갈등을 보여주었고, 이후 정부의 노동 정책 전환에 영향을 미쳤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을 계기로 남이탈리아 재무장 논란이 불거졌다. 미국의 압박으로 데 갈로 정부는 '왕국 방위력 강화법'을 제정하여 국방비 3배 증액, 의무복무 기간 연장, 3개 기갑사단 신설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코민테른을 비롯한 좌파 세력과 평화주의자들이 격렬히 반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대 총선과 3대 총선에서 공산당이 참패하고 기민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은 반공 정권의 공고화를 위한 토대로 비추어졌다.

1955년 4월 17일 제3대 총선데 갈로 내각 9년의 성과에 대한 국민적 평가였다. 선거 결과는 모든 예상을 뒤엎고 기독교민주인민연합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기민당은 106석(61.6%)을 획득하여 남이탈리아 건국 이래 최초로 단독 과반을 확보했다. 반면 사민당은 43석에서 32석으로, 공산당은 31석에서 19석으로 크게 후퇴했다. 이는 '안정과 번영을 통한 공산주의 위협 극복'이라는 데 갈로의 메시지가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특히 페루자 포격전에서의 성공적 방어와 마셜 플랜을 통한 경제 회복이 기민당에 대한 신뢰를 높였다.

정권의 위기와 산타마리아 체제(1957)

1955년 압승의 여세를 몰던 데 갈로 정부는 1956년 마치니 내무장관 부패 스캔들로 큰 타격을 입었다. 알베르토 마치니 내무장관이 나폴리 항만 운송업체들과 결탁하여 정부 계약을 특혜 배정하고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야당 지도자인 조반니 에스포지토 사민당 당수도 같은 업체들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었다. 에스포지토는 구속되었고, 사민당은 루치아 비안코를 새 당수로 선출하여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했다. 이 사건은 '깨끗한 정치'에 대한 국민적 요구를 높였고,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을 확산시켰다.

마치니 스캔들로 정치적 위기에 처한 데 갈로 총리는 1957년 조기 총선을 단행했다. 1957년 3월 24일 제4대 총선에서 기민당은 85석으로 의석을 잃었지만 여전히 제1당을 유지했다. 선거 후 기민당 내에서는 새로운 지도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결국 마르코 산타마리아가 새로운 당수이자 총리로 선출되었다. 산타마리아는 데 갈로와 달리 "경험과 안정의 정치"를 내세우며 더욱 보수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그는 시칠리아 인민당과 연정을 구성하여 92석의 안정적 과반을 확보했다.

과도기 (1957~1964)

산타마리아 체제

1957년 3월 조기 총선 이후 집권한 마르코 산타마리아 총리는 전임자 데 갈로와는 확연히 다른 정치 스타일을 보였다. 데 갈로가 카리스마적 지도력과 적극적 개혁을 추구했다면, 산타마리아는 "검증된 경험과 점진적 안정"을 강조하는 온건 보수주의를 택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변화를 위한 변화는 혼란을 낳을 뿐"이라며 급진적 정책 변화를 지양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산타마리아는 시칠리아 인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92석의 안정적 과반을 확보했지만, 이는 지역주의 세력과의 타협을 의미하기도 했다. 로렌초 루소 시칠리아 인민당 당수는 연정 참여의 대가로 '남부개발부 장관'직과 시칠리아 지역에 대한 대규모 SOC 투자를 약속받았다. 이러한 지역 밀착형 정치는 향후 남이탈리아 정치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뒤이은 1959년 5월 14일 로마 제2대 민선 시장 선거는 1957년 총선 이후 변화된 정치 지형을 지방 차원에서 확인하는 계기였다. 이번 선거는 1954년과 달리 4개 정당이 모두 2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초박빙의 경쟁을 보였다. 기민당의 발렌티나 마르첼로(28.4%), 사민당의 라파엘레 콘티(26.9%), 공산당의 클라우디아 페라리(24.2%), 공화당의 마르코 산티니(20.5%)가 치열하게 경쟁했다.

결선투표에서 라파엘레 콘티가 51.7%로 승리하여 사민당 출신 최초의 로마 시장이 되었다. 이는 기민당의 전국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수도 로마에서는 여전히 중도좌파 세력이 경쟁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1949년 노동자 항쟁의 무대였던 트라스테베레에서 공산당이 여전히 강세를 보인 것으로, 로마 노동계층의 좌파 정서가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로마 시장 선거에서의 패배 이후, 산타마리아 내각이 직면한 두 번째 중대한 시련은 1961년 앙코나 미군 핵미사일 기지 설치 반대 투쟁이었다. 미국이 소련과 동유럽을 겨냥한 주피터 중거리 탄도미사일 15기를 앙코나 외곽에 배치하려 하자, 남이탈리아 전역에서 반핵 평화 운동이 폭발했다. 1961년 1월 12일 계획이 처음 보도된 후, 앙코나 시의회는 22표 대 8표로 '핵미사일 기지 설치 반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프란체스코 벤투라 앙코나 시장(사민당)은 "앙코나는 평화의 도시이지 전쟁의 도시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공산당의 안드레아 모레티 당수는 '앙코나 핵기지 저지를 위한 전국민 투쟁'을 선포했고, 2월 4일 앙코나에서 8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평화 집회가 열렸다.

특별히 주목할 점은 교황 요한 23세가 "핵무기 확산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명하며 간접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힌 것이었다. 가톨릭 교회의 우려 표명은 보수 가톨릭 유권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정부의 입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4개월간의 격렬한 반대 투쟁 끝에 3월 25일 최종 타협안이 도출되었다. 핵미사일 배치는 완전히 취소되고 대신 재래식 레이더 기지로 대체되었으며, 5년마다 기지 존속 여부를 재검토하기로 했다.

산타마리아 2기 체제와 체제의 위기

앙코나 투쟁의 여파는 1963년 4월 28일 제5대 총선에서 고스란히 나타났다. 이번 선거는 '평화와 자주성'이 핵심 쟁점으로 부상한 최초의 선거였다. 각 정당들은 앙코나 사건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명확히 제시해야 했다. 산타마리아 총리와 기민당은 "서방 동맹 내에서의 자주적 외교"를 내세우며 미국과의 동맹은 유지하되 종속은 거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공산당의 신임 당수 알키 세파르디 당수는"완전한 비핵화 선언"과 "남북 평화 통일 추진"을 공약했다. 사민당의 레오나르도 페라리 당수는 "점진적 복지국가 건설"을 내세우며 중도좌파 노선을 강화했다. 가장 주목받은 것은 이탈리아 공화당의 알레시아 비안키 당수였다. 그녀는 "새로운 정치, 깨끗한 미래"를 표방하며 정치 혁신을 강조했다. 특히 젊은 전문직층과 도시 중산층을 겨냥한 현대적 캠페인을 펼쳐 주목을 받았다.

선거 결과는 예상보다 박빙이었다. 기민당이 57석으로 1당을 유지했지만 의석을 크게 잃었고, 사민당이 50석으로 2당을 차지했다. 그 외에는 공산당 30석, 공화당 31석으로, 4당이 비슷한 의석을 차지하는 완전한 다당제 시대가 개막되었다. 흥미롭게도 선거에서 아슬아슬한 1위, 진영 구도에서는 열세에 쳐친 산타마리아가 움베르토 2세 국왕의 중재를 통해 다시 총리로 선임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졌다. 범-반기민당 전선이 과반을 차지했지만 공화당은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했고, 공산당은 연정 참여보다는 '외부 지원'만을 검토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교착 상태에서 산타마리아가 "국민통합정부" 구성을 제안하며 전격적으로 나섰다. 그는 '퀴리날레 합의'를 통해 사민당, 공화당과 3당 연립 통합정부를 구성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선거에서 패배한 세력이 뒷거래를 통해 정권을 되찾는" 초유의 사건으로 많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동시에 남이탈리아 정치의 협상과 타협 문화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3당 연립정부는 남이탈리아 정치사상 가장 복잡한 권력 구조를 만들어냈다. 총리는 기민당의 산타마리아, 부총리는 사민당의 페라리, 외무장관은 공화당의 알레시아 비안키가 맡았다. 각 당의 정책적 지향이 달랐기 때문에 정부 운영은 끊임없는 조정과 타협의 연속이었다.

경제 정책에서는 사민당이 주도하는 복지 확대 정책이 추진되었다. 실업급여가 확대되고 공공의료 시스템이 강화되었으며, 대학 장학금 제도가 크게 늘어났다. 외교 정책에서는 공화당의 영향으로 평화 지향적 외교가 강화되어,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더욱 자주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내정에서는 기민당이 주도하는 안정 중심 행정이 유지되었지만, 3당 합의로 점진적 정치개혁도 추진되었다. 특히 지방자치제가 확대되어 더 많은 지역에서 민선 단체장 선거가 실시되었고, 언론 자유도 이전보다 확대되었다.

해빙기 (1964~1970)

베트남 전쟁 참전 결정과 사회적 균열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남이탈리아도 동맹국으로서 참전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은 NATO 회원국들과 아시아 동맹국들에게 "자유 세계 방위를 위한 연대를 촉구했다. 남이탈리아는 NATO 회원국은 아니었지만, 1950년대부터 구축된 긴밀한 미군 기지 협정과 경제 원조 관계로 인해 강력한 압박을 받았다. 1965년 6월 워싱턴을 방문한 조반니 루치아니 외무장관(기민당)은 딘 러스크 미 국무장관으로부터 "남이탈리아는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중요한 일원"이라는 참전 요청을 받았다. 이 문제를 놓고 3당 연립정부 내부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기민당은 "서방 동맹의 의무"를 주장했고, 공산당은 "베트남은 우리와 무관한 내전"이라며 반대했다. 사민당과 공화당은 각각 조건부 찬성과 강력 반대 입장을 보였다.

8월 5일 특별 각료회의에서 7시간의 격론 끝에 찬성 8표, 반대 6표, 기권 1표로 참전이 결정되었다. 파병 규모는 1개 여단 약 3,500명으로 정해졌고, 임무는 남베트남 정부군 훈련 지원 및 후방 기지 경비였다. 8월 12일 산타마리아 총리는 국민 담화를 통해 "베트남 평화 유지를 위한 국제적 노력에 동참한다"고 발표했다.

베트남 참전 발표는 남이탈리아 사회에 거대한 충격을 주었다. 1961년 앙코나 투쟁을 통해 반핵 평화 의식이 높아진 상태에서, 지구 반대편 전쟁에 남이탈리아 청년들을 보낸다는 정책은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공산당의 알키 세파르디 당수는 "이것은 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가담하는 범죄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했다. 9월부터 전국 각지에서 반전 시위가 연쇄적으로 벌어졌다. 특히 대학가에서는 '베트남 데이(Vietnam Day)' 시위가 확산되었다. 1965년 5월 2일 로마 대학교에서 시작된 시위에는 약 3,000명의 학생이 참여했고, "베트남에서 손을 떼라", "평화 없이는 공부도 없다"는 구호를 외쳤다. 주목할 점은 여학생들의 적극적 참여로,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연립정부 내에서도 균열이 깊어졌다. 알레시아 비안키 공화당 당수는 8월 15일 외무차관직에서 전격 사임하며 "양심에 따라 정부를 떠난다"고 선언했다. 공화당은 내부 논의를 거쳐 조건부 연정 잔류를 결정했지만, 파병 규모 축소와 전투 임무 제외 등의 조건을 관철시켰다.

아놀도 파르마니 치사 사건 (1966)

베트남 참전에 대한 반대 여론이 고조된 가운데 1966년 3월 18일, 팔레르모의 시칠리아 공과대학교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 도중 기계공학과 3학년 아놀도 파르마니(21세) 학생이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한 것이다.

파르마니는 카타니아 출신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청년으로, 뛰어난 웅변 실력과 카리스마로 동료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기술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과학기술이 전쟁이 아닌 평화와 인류의 번영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3월 18일 '베트남 파병 1주년 규탄 대회'에서 그가 준비한 평화 선언문을 낭독하던 중, 갑자기 투입된 기동대가 최루탄을 발사했다. 혼란 속에서 파르마니는 넘어진 후배를 일으켜 세우려다 카라비니에리 소위 프란체스코 브루토의 경찰봉에 연속 3차례 가격을 받았다. 그는 뇌출혈과 늑골 골절로 인한 내출혈로 당일 저녁 7시 15분 팔레르모 시립병원에서 사망했다. 담당 의사는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폭행"이라고 진단했다.

파르마니의 죽음은 전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3월 19일부터 남이탈리아 전역의 대학들에서 동시 추모제가 열렸고, 로마 대학교에는 1,200명, 나폴리 대학교에는 800명이 참석했다. 특히 그의 절친한 친구 루카 산탄젤로가 읽은 추도시 "아놀도여, 당신은 평화를 꿈꾸다 갔습니다"는 많은 학생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이는 베트남 평화운동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사민당 좌파 그룹을 이끌던 정치가 알레산드로 마르티니는 "살인자 정권"과의 결별을 선포하고 24년간의 사회민주당 생활을 청산하고, 4월 15일 로마의 테아트로 아르젠티나에서 베트남평화당 창당대회를 개최했다.

창당대회에는 약 1,200명의 당원과 지지자들이 모였으며, 이는 1946년 건국 이후 최대 규모의 좌파 정치 집회였다. 베트남평화당의 창당 강령은 5개 핵심 원칙으로 구성되었다: ①절대 평화주의 ②반제국주의 ③사회정의 ④생태주의 ⑤참여민주주의. 특히 "베트남평화당"이라는 당명 자체가 당시 최대 현안인 베트남 전쟁 반대를 명확히 드러냈다. 당의 지도부는 마르티니를 당수로, 줄리아 로시 전 사민당 의원을 부당수로, 루카 산탄젤로를 청년위원장으로 구성했다. 혁신적인 것은 "평화 서약제"와 "1리라 당비제"를 도입한 것이었다. 당원이 되려면 "모든 형태의 전쟁과 폭력을 거부한다"는 서약을 해야 했고, 당비를 미화 1달러로 고정하여 베트남 전쟁 희생자들과의 연대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창당 후 1년 만에 전국 45개 지부에 약 12,000명의 당원이 가입했으며, 특히 대학가와 지식인층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로마 대학교 철학과 교수 프랑코 포르티니는 "베트남평화당의 등장은 남이탈리아 정치 문화의 발전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1968년 혁명의 폭발

1967년부터 남이탈리아 전역에서 '68혁명'으로 불리는 대규모 반정부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베트남 전쟁 참전과 파르마니 사망 사건으로 축적된 분노가 폭발한 것으로, 학생, 노동자, 지식인, 여성, 청년이 하나로 뭉친 총체적 사회 운동이었다. 1967년 5월 2일 로마 대학교 '베트남 데이' 시위를 시작으로, 9월부터는 '자유대학교' 운동이 전국 대학가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기존의 권위주의적 교육 시스템을 거부하고 "모든 사람이 지도자"라는 원칙 하에 집단 지도체제를 구축했다. 주요 조직 원칙은 성별 균등 대표, 순환 책임제, 합의제 의사결정, 개방형 참여였다.

마리아 안토니에타 마치아로네 로마 대학교 사회학과 학생이 68혁명의 여성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녀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페미니즘 구호를 확산시켰으며, "여성도 인간이다"라는 구호 하에 성평등 의식을 크게 높였다. 1968년 1월부터 31일까지 벌어진 '로마의 붉은 1월'에서는 로마 대학교 본관 점거를 시작으로 나폴리, 바리, 팔레르모 대학교가 연쇄적으로 동조 점거에 들어갔다. 3월 18일 파르마니 2주기를 맞아서는 전국 35개 도시에서 동시에 추도 대행진이 벌어져 총 10만 5천 명이 참여했다.

5월에는 파리의 5월 혁명과 거의 동시에 '5월의 폭풍'이 남이탈리아를 휩쓸었다. 5월 6일 '로마 포위작전'에서는 학생과 노동자 약 50,000명이 총리관저를 포위했고, 5월 13일 '공장 점거의 날'에는 전국 주요 공장에서 동시 점거가 벌어졌다. 5월 20일 '여성의 날'에는 마치아로네가 주도한 여성 시위가 전국에서 동시에 개최되어 "전쟁 반대, 평등 요구, 해방 쟁취"를 외쳤다.

변혁 세력의 집권 (1968)

68혁명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치러진 1968년 4월 21일 제6대 총선은 남이탈리아 정치사를 바꾼 분수령이었다. 선거 결과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엄중한 심판이었다. 베트남평화당이 39석으로 급부상하여 원내 제2당이 되었고, 공산당도 37석으로 회복했다. 반면 기민당은 51석으로 급락했고, 연립여당인 사민당은 25석으로 반토막났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베트남평화당이 원외 정당에서 39석의 거대 정당으로 수직 상승한 것이었다. 이는 68혁명의 반전, 평화, 개혁 에너지를 고스란히 흡수한 결과였다. 알레산드로 마르티니는 선거 승리 연설에서 "아놀도 파르마니가 꿈꾸던 평화로운 세상을 이제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어떤 정당도 과반(87석)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좌파 3당 연합(베트남평화당 39석 + 코민테른 37석 + 사민당 25석 = 101석)이 유일한 과반 연정 구성 방안이었다. 움베르토 2세 국왕은 고심 끝에 알레산드로 마르티니 당수를 총리 후보로 지명했고, 5월 15일 국회 신임투표에서 찬성 101표로 남이탈리아 최초의 좌파 연립정부가 출범했다.

마르티니 총리가 이끄는 좌파 연정은 68혁명의 요구를 제도적으로 실현하려 했다. "평화와 개혁을 위한 국민 연대 정부"를 표방한 이 정부의 핵심 정책은 베트남 철군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1969년 3월 2일 좌파 3당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베트남 철군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 법은 "남이탈리아 왕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3개월 내에 전면 종료한다"는 내용으로, 미국과의 정면충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닉슨 행정부는 격분했고, 경제 원조 전면 중단, 보복 관세 부과, 군사 기지 재배치 검토 등 전방위적 압박에 나섰다.

사회 정책에서는 68혁명의 핵심 요구였던 교육 개혁이 추진되었다. 대학 입학 정원이 대폭 확대되고, 교수 평가제가 도입되었으며, 학생 참여가 보장되었다. 여성 해방 정책도 본격화되어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이 법제화되고,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를 위한 제도적 장치들이 마련되었다. 경제 정책에서는 사회주의적 성격의 개혁이 시도되었다. 주요 은행과 대기업에 대한 국가 통제가 강화되었고,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 실험이 시작되었다. 농지 개혁도 가속화되어 대지주의 토지를 소작농에게 분배하는 사업이 본격 추진되었다.

1차 납의 시대 (1970~1976)

미 제국주의의 압박과 왕궁 쿠데타 (1970)

마르티니 정부의 급진적 정책은 곧 심각한 외적, 내적 위기를 불러왔다. 미국의 경제 보복으로 1969년 하반기부터 남이탈리아 경제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실업률은 5.8%에서 9.2%로 급등했고, 물가상승률은 3.2%에서 7.8%로 치솟았으며, 리라화 가치는 12% 하락했다. 경제 위기는 연립정부 내부의 균열을 촉발했다. 사회민주당은 "미국과의 재협상을 통해 경제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며 철군 시기 연기를 주장했다. 코민테른은 "미 제국주의의 경제 공격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며 북부 및 제3세계와의 경제 협력 강화를 주장했다. 베트남평화당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평화의 원칙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1970년 들어서는 기민당과 군부 보수 세력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타마리아 전 총리는 "마르티니 정부의 무능과 독선이 국가를 파멸로 이끌고 있다"며 연일 정부를 비판했다. 왕국군 참모총장 프란체스코 로시니 장군은 비공개 석상에서 "국가 안보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며 군의 정치적 개입 가능성을 시사했다.

결국 1970년 5월 10일, 움베르토 2세 국왕이 헌법을 위반하여 마르티니 총리를 일방적으로 해임하는 초헌법적 조치를 단행했다. 이른바 '왕궁 쿠데타'였다. 이날 오전 10시 30분 퀴리날레 궁에서 국왕은 마르티니 총리에게 "당신의 정책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파탄 나고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며 "헌법이 나에게 부여한 국가의 최종 수호자로서의 책무에 따라 오늘부로 총리를 해임한다"고 통보했다. 동시에 로시니 참모총장이 이끄는 군 병력이 로마 시내 주요 관공서와 방송국을 장악했다.

국왕은 즉시 대법원장 출신 조반니 레오네를 총리로 하는 '거국관리내각'을 임명했다. 왕궁에서 나온 마르티니는 베트남평화당 당사에서 라디오를 통한 '국민에게 드리는 마지막 연설'을 발표했다. 이는 왕궁 쿠데타에 대해 전국에서 격렬한 저항을 일으켰다. 5월 11일부터 코민테른과 전국노동조합연맹 주도로 전국 총파업이 시작되었고, 5월 12일부터 20일까지 로마에서는 연일 수십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로마의 봄'이라고 불렸다. 5월 15일 나폴리 항구에서는 시위대와 군경이 충돌하여 3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부상하는 유혈 사태도 발생했다.

그러나 군부의 강력한 진압과 레오네 과도정부의 비상계엄 선포로 시위는 6월 초에 강제 진압되었다. 마르티니를 포함한 좌파 지도자들은 '내란 선동죄'로 기소되었고, 베트남 철군법은 폐기되었다. 이로써 2년간의 짧은 좌파 연정 실험은 막을 내렸고, 남이탈리아는 '납의 시대'라는 암울한 터널로 접어들게 되었다. 1970년 5월 10일의 왕궁 쿠데타는 남이탈리아 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순간으로 기록되었다.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집권한 정부가 왕실과 군부의 결탁으로 무너진 이 사건은, 남이탈리아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동시에 이는 향후 15년간 지속될 권위주의 체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독재의 서막

1970년 5월 10일 왕궁 쿠데타로 집권한 조반니 레오네 과도정부는 "국정 안정과 조기 총선 실시"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좌파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고 보수적 질서를 재확립하는 데 집중했다. 레오네는 대법원장 출신의 법조인으로서 "법치주의 회복"을 강조했지만, 그가 말하는 법치는 기존 기득권층에게 유리한 질서의 복원을 의미했다. 과도정부는 즉시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고, 좌파 정당들의 활동을 대폭 제한했다. 베트남평화당은 "반국가 선동 단체"로 규정되어 사실상 활동이 금지되었고, 공산당도 엄격한 감시 하에 놓였다. 마르티니를 비롯한 좌파 지도자들은 '내란 선동죄'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고, 상당수가 실형을 선고받았다.

경제 정책에서는 마르티니 정부의 사회주의적 개혁들이 전면 폐기되었다. 국유화된 기업들이 다시 민영화되었고, 노동자 자주관리 실험은 중단되었다. 미국과의 관계 복원을 위해 베트남 철군법이 폐지되고 파병이 재개되었으며, 경제 원조와 군사 협력도 정상화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단기적으로 경제 안정에 기여했지만, 68혁명을 통해 분출된 사회적 에너지를 강제로 억압하는 결과를 낳았다. 왕궁 쿠데타 1년 후인 1971년 5월 2일 제7대 총선은 극도로 제한적이고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베트남평화당은 강제 해산되어 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고, 공산당은 알키 세파르디 당수가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상태에서 오스트리아계 이론가 오스카 슈나이더가 옥중에서 당을 이끌며 저항의 상징으로 출마했다.

선거 결과는 예상대로 기민당의 압승이었다. 조반니 레오네가 이끄는 기독교민주인민연합은 79석을 획득하여 원내 1당을 탈환했고, 사회민주당이 33석으로 제1야당이 되었다. 코민테른은 탄압 속에서도 38석을 확보하여 저력을 보여주었지만, 베트남평화당의 39석이 공중분해되면서 좌파 전체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레오네는 공화당과의 연정으로 98석의 안정적 과반을 구성하며 정식 총리로 취임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모든 형태의 반정부 활동을 엄단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검증된 리더십과 안정된 미래"를 강조하며 급진적 변화보다는 점진적 개선을 추구할 것임을 천명했다.

저항 세력의 등장: 붉은 여단

왕궁 쿠데타로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을 느낀 일부 급진 좌파 세력들은 무력 투쟁 노선으로 선회했다. 이 과정에서 68혁명의 핵심 인물이었던 마리아 안토니에타 마치아로네가 이끄는 '붉은 여단(Brigate Rosse)'이 가장 강력하고 극단적인 무장 단체로 부상했다. 마치아로네는 본래 68혁명에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페미니즘 구호를 확산시킨 평화적 여성 지도자였다. 그러나 왕궁 쿠데타를 목격한 후 "제도권 정치를 통한 사회 변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지하로 들어갔다. 그녀가 이끄는 붉은 여단은 1971년부터 은행 강도, 기업 임원 납치 등 산발적인 테러를 자행하며 세력을 키웠다.

붉은 여단의 이념적 기반은 "무장 투쟁만이 유일한 해방의 길"이라는 극좌 혁명론이었다. 이들은 남이탈리아를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규정하고, 왕정과 기득권층을 "민족 반역자"로 낙인찍었다. 특히 아놀도 파르마니의 이름을 딴 '아놀도 파르마니' 코만도를 조직하여 평화 운동의 상징을 폭력 투쟁의 명분으로 전용하는 논란을 일으켰다. 1971년부터 1972년까지 붉은 여단은 주로 상징적 타겟에 대한 공격에 집중했다. 미군 기지 인근 시설 폭파, 친정부 언론사 습격, 보수 정치인들의 차량 방화 등이 주된 활동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레오네 정부에게 "무력으로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을 제공하는 역설적 효과를 낳기도 했다.

붉은 여단은 조직의 명운을 걸고 1974년 10월 28일 바리에서 승부수를 던졌다. 마치아로네가 이끄는 약 80명의 정예 대원들이 '바리 도시 해방구' 전략에 따라 4개 조로 나뉘어 바리 시내 주요 거점을 동시 공격했다. 이를 바리 민중 항쟁이라 한다. 오전 8시, 이들은 점거한 RAI 바리 지국을 통해 '인민 라디오 바리' 방송을 시작했다. 마치아로네는 "바리의 노동자, 학생, 시민 동지들이여! 오늘 우리는 부패한 자본가와 파시스트 국가의 억압에 맞서 봉기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공포에 질려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노동조합은 즉각 "붉은 여단의 폭력은 노동자의 투쟁 방식이 아니다"라며 총파업을 거부했다.

시민들의 호응을 얻는 데 실패한 붉은 여단은 바리의 구시가지인 바리 베키아로 집결하여 농성전에 들어갔다. 정부는 즉시 바리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왕국군 제7보병사단과 카라비니에리 대테러 특수부대를 투입했다. 29일부터 30일까지 이틀간 바리 베키아에서는 남이탈리아 역사상 전례 없는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10월 31일 오전, 완전히 포위된 붉은 여단 잔당 20여 명은 산 니콜라 대성당으로 후퇴하여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오후 2시 대테러 특수부대의 성당 진입으로 30분간의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진 끝에, 마치아로네는 총알이 떨어진 기관총을 끌어안은 채 생포되었다. 체포 당시 그녀는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4일간의 바리 봉기로 정부군 383명, 붉은 여단 238명, 민간인 409명 등 총 1,030명이 사망했다. 바리 봉기의 실패로 붉은 여단은 사실상 괴멸되었고, 핵심 지도부와 정예 대원 대부분이 사망하거나 체포되면서 조직의 구심점을 완전히 상실했다.

독재 정권의 공고화 (1974~)

바리 봉기 진압의 성과를 등에 업고 치러진 1974년 11월 15일 제8대 총선은 '공포 정치' 속의 관리된 선거였다. 마치아로네에 대한 사형 선고와 집행이 선거 불과 12일 전에 공개적으로 진행되어 '국가에 대항하는 자의 최후'를 국민들에게 각인시켰다. 공산당은 해산되었고, 주요 지도부 상당수가 북부로 월북했다.

선거 결과는 기민당의 압승이었다. 조반니 레오네 총리가 이끄는 기독교민주인민연합은 100석을 차지하며 1955년 이후 19년 만에 단독 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는 '납의 시대'의 공포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질식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유권자들은 폭력과 혼란에 대한 반작용으로 안정을 택했지만, 그 대가는 강력한 권위주의 정부의 등장이었다. 이 선거는 향후 10년간 이어질 기민당 장기 집권 시대의 서막을 열었고, 남이탈리아 사회에 깊은 정치적, 사회적 상흔을 남겼다.


  1. 1970년대 이래 저조한 출산율과 북으로의 이민으로 인해 인구가 꾸준히 감소했다.
  2. 1986년 3월 15일 이후 기능을 정지하였으며, 1986년 5월 이후 소비에트군과 북이탈리아 인민군이 주둔하였다.
  3. 납의 시대 기간 이탈리아 기독교민주인민동맹을 제외한 사회주의 야당 대부분이 국가보안법으로 금지당하며 실질적인 일당제가 시행되었다.
  4. 동시기 북이탈리아($5,700)의 5~60% 수준이었으며 1960년대 중반 이후 지속적으로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