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장:Valdemaro Ligioni/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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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침략자들과 토호렬신, 장개석 비적무리를 타도하고 인민을 해방하자!
공농병학은 굳게 단결하라! 인민의 고혈을 착취하며 연명하는 구세태를 무산계급의 혁명으로 징벌할 때가 왔다!
력사를 퇴보시키는 인민의 원쑤 자본계급 반동파를 타도하고 철저히 청산하자!

만주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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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인민공화국
Маньчжурия Народная Республика | 滿洲人民共和国
국기 국휘
Пролетарии всех стран, соединяйтесь!
全世界无产者,联合起来
만국의 무산자여 단결하라!
상징
국가 팔로군 혁명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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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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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묵덴 직할시
면적 1,191,000km²
내수면 비율 2.4%
접경국 러시아의 기 러시아
중국의 기 중화인민공화국
대한제국 (한나라)의 기 대한제국
인문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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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약 61,000,000명 추정 (1990년)
민족구성 한족 %, 만족 %, 로씨야인 %, 조선족 %, 기타 %
인구밀도 명/km²
출산율 0.95명 (1990년)
기대 수명 74.8세 (2022년)
공용 언어 로씨야어[1], 중화어[2]
공용 문자 끼릴 문자, 한자
종교 국교 국교 없음 (국가무신론)
분포 무신론 %, 그리스도교 %, 불교 %, 도교 %, 기타 %
군대 없음 (당군으로 공농적위군 존재)
주둔군 만주 주둔 쏘련군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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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행정구역 1직할시, 3독립시[3], 6주
세포행정구역 n개 군 n개 현, n개 시
자치행정구역 3자치주(옌볜, 후룬부이르, 푸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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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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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초기 사회주의계획경제, 토지국유제, 집산주의
후기 사회주의국가자본주의
명목
GDP
전체
1인당
GDP
(PPP)
전체
1인당
수출입액 수출
수입
통화 만주 폐 (幣), 칼얀(Цаыийан), Ҵ
이중가격화폐 만주 화 (貨), 울린(Үыин), ¥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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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연호 서력기원
시간대 UTC+9
도량형 SI 단위
날짜 형식 yyyy년 m월 d일
yyyy. m. d. (CE)
운전석
(통행방향)
왼쪽(우측통행)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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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가입 1945년 10월 24일[5]
유엔회원국
승인 여부
수교국
만주공산당 중앙당사의 로비 그림

만주공산당

계파

만주공산당의 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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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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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로군 혁명가(-1963)

팔로군 혁명가
революционер 8-й армии
八路军革命歌


중어 로어
지위 만주인민공화국의 국가
채택일 1951년 8월 18일
작사 공목(公木, 1910~1998)
작곡 정률성(郑律成, 1914~1976)
개사자 리위재(李伟才, 1914~19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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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流兩萬五千里
2만 5천리의 철류는
直向一個堅定的方向
올곧은 방향으로 나아가네
苦鬥十年,鍛鍊成一支
10년 고투로 단련해 하나되 뭉친
不可戰勝的力量
꺽을수 없는 힘이로다,
一旦強虜寇邊疆
오랑캐 변경 넘어
慷慨悲歌上戰場
비분한 노래로 전장에 나가리
首戰平型關,威名天下揚。
평형관 첫 전투에서 천하에 위명을 떨쳤도다
首戰平型關,威名天下揚。
평형관 첫 전투에서 천하에 위명을 떨쳤도다
嘿!
헤이!
遊擊戰,敵後方,剷除偽政權,
적 후방에서 유격전벌려, 괴뢰정권을 소멸하고
遊擊戰、敵後方,堅持反掃蕩,
적 후방에서 유격전벌려, 반소탕을 견지했으니
鋼刀插在敵胸膛。
적의 심장에 철검을 꽂았도다
鋼刀插在敵胸膛。
적의 심장에 철검을 깊이 꽃았도다
巍峨長白山,滔滔鴨綠江,
우뚝 솟은 장백산, 힘찬 압록강,
誓復失地逐強梁。
강적으로부터 실지(失地)를 수복할 것을 맹세한다.
爭民族獨立,求人類解放,
민족의 독립과 인류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는,
這神聖的重大責任
신성한 이 중대한 책임이
都擔在我們雙肩。
우리의 어깨우에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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АРМИЯ ВОСЬМАЯ!
팔로군!

Солнце свободы, вздымай свой стяг!
자유의 태양이여, 기발을 높이 추켜들라!

Смело в поход мы шагаем
우리는 용감히 진군의 길에 나서노라.

Гулко грохочет твой грозный шаг!
우렁차게 울려퍼지는 장엄한 발걸음!

Армия боевая восьмая
전투의 군대, 영용한 팔로군!

Трубы победы, мы братые ребята!
승리의 나팔소리 높이 울리고, 우리는 한마음 한뜻의 전우들!

Страх нам неведом, нам нет преград!
두려움을 모르고 그 어떤 난관도 우리를 막지 못하리!

По дороге, напевая, мы идём вперёд!
노래를 높이 부르며 우리는 앞으로 전진한다!

Боевое знамя нам дал народ,
인민이 우리에게 전투의 기발을 안겨주었고,

К нему нас родина ведёт!
조국은 그 기발 따라 우리를 이끌어주네!

Чу! Слышишь урагана бой?
들리는가? 폭풍우 같은 전투의 함성이!

Эта восмая, мчится в бой!
팔로군이 적진을 향해 돌진한다!

Иди товарищ с этой песней гордой смелой,
동무여, 이 긍지높고 용감한 노래를 부르며 나아가자.

Ах, и захвачиков гони за наши уделы!
침략자들을 우리의 강토에서 몰아내자!

Мы ещё с вами загуляем,
머지않아 우리는 승리의 기쁨을 함께 누리리.

И пусть горит сняет солнце,
찬란한 태양은 더욱 밝게 비치고,

Вольново Китая!
자유로운 새 중국이 솟아오르리!

8월 18일 일본제국주의패망기념 만주해방일의 소-만 친선을 위한 음악회에서 개사된 팔로군군가가 합창으로 불렸고, 이후 이 노래에 향수와 공감대를 가지고 있는 혁명원로, 간부들과 중국과는 다른 정체성을 필요로하던 당시 시대적상황이 맞물려 인터나쇼날가를 국가겸 당가로 사용하던 실정에서 국가로 지정하게 하였다. 국가지정을 계기로 제목을 팔로군 혁명가로 명칭을 바꾸었다. 다만 만주인민군에선 군가라고 칭한다.

중어로 제정된 국가와 로어로 제정된 국가가 따로 있으며, 중어화자가 고숭덕 시대 이후 급격히 줄어들면서 나중엔 로어로만 불리게 되었다.

인터나쇼날가 (1963-1991)

인터나쇼날가
Интернационал
国际歌


중어 로어
지위 만주인민공화국의 국가
만주공산당의 당가
채택일 1963년 n월 nn일
작사 원곡 외젠 포티에
작곡 피에르 드게테르
개사자 로어
중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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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流兩萬五千里
2만 5천리의 철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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АРМИЯ ВОСЬМАЯ!
팔로군!

신 타이틀(PC)

 인민해방의 리상을 향하여
만주일몽 · 滿州一夢
본 문서는 《만주일몽》 세계관의 문건이다. 무단수정을 금하며, 책임자 이외의 편집을 제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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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

  • 혁명전사 (1927~1931)

주로 중국공산당의 동북지역 조직. 또다른 뿌리로는 조선인의 고려공산청년회, 항일유격대. 코민테른의 국제혁명 노선(파벨 미프), 러시아 볼셰비키의 개입과 러시아인들 (보이틴스키, 콘스탄틴 로진스키[7])

주활동 : 철도, 광산, 농민,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의 초기 노동운동 중심의 운동, 중국공산당, 코뮌테른과의 접촉

혁명의 중심과제 : 계급혁명, 토지혁명 (토호렬신에게서의 독립), 인민계몽
  • 만주사변과 제국주의 침략 (1931)
혁명의 중심과제 : 각종 사회개혁적 혁명과업 -> 항일투쟁

이시기 항일유격대(1932~1935)의 조직. - 양정우 (楊靖宇, 1905~1940) - 남만 항일투쟁 - 주보중 (周保中) - 동만 항일투쟁 - 리조린 (李兆麟) - 북만 항일투쟁

동북항일연군으로의 통합 (1936) 제1로군 남만 양정우 (楊靖宇, 1905~1940) 제2로군 동만 주보중 (周保中) 제3로군 북만 리조린 (李兆麟)

만주 혁명 제1세대, 1940~1942년경 큰 피해로 소련 망명. 이시기 중국공산당의 지휘를 받으며 중국공산당과 역사와 가치관 공유

  • 소련 진공작전(1945)

중국혁명의 중심세력인 팔로군과 당중앙에서 동북으로 대거 파견, 가오강을 중심으로 한 팔로군과 동북의 정신적 역사 공유, 소련의 진주

모스크바 유학파(28인의 볼셰비키 계열) 가오강을 중심으로 한 친소 실무파 동북항일연군 출신 혁명가

인물들은 스탈린의 결단에 의해 만주의 소련 위성국 건국에 참여. 가오강은 소련의 제1극동방면군 사령관 키릴 메레츠코프과 접촉,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키릴 메레츠코프와 하바롭스크에서 비밀리에 회담을 가짐. 당시 볼셰비키 계열과 마오의 당중앙은 이미 당중앙측의 절대우위가 되었고, 이에 불만이 있던 일부와 가오강의 권력욕, 스탈린의 동북 점령의 필요성 (주된 목적은 아직 부족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다른 대안인 만주 철도 이용)을 기반으로 국가설치 의도.

이에 동북국의 불순한 의도를 파악한 당중앙은 묵덴으로 진운(陳雲)과 팽진(彭真)을 파견, 표면적으로는 산업과 행정을 점검하지만, 실제 임무는 가오강의 충성도와 소련의 의도를 확인해 옌안에 보고함. 동북에서 독자적인 권력형성을 부분적으로 발견했으나 결정적 증거는 발견하지 못함. 지나친 소련과의 접촉을 질타당함. 동북국은 곧 개편되어 동북인민정부가 되나, 중국공산당측 간부를 중책이 아닌 연락대표에 임명하며 영향력 축소.

중국의 지나친 강대화를 우려한 스탈린과 동아시아 방면 담당자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의 모택동에 대한 노선 의심은 동북인민정부를 경제원조와 군사지원을 통해 중앙이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친소파 인물을 침투시킴으로 동북과 중앙을 느슨히 만들고, 시간순서로 '동북국과 소군정(1945~1946)->지방인민대표회의 개최, 만주인민행정위원회(1946년 말~1947년)->만주인민정부(1947)' 순으로 단계를 올림.

계속해서 중국에 자원과 인력을 제공하며 밀접하게 지원하나, 이후 중국 화북상황에 따라 1947~1948 건국.

연표

연도 사건 주요 인물 의의
1927 난창혁명 이후 중국공산당 동북조직 확대 중국공산당 동북지방조직 만주 공산주의 운동의 시작
1927~1931 혁명전사 중국공산당 동북조직, 고려공산청년회, 코민테른, 볼셰비키 계급혁명·토지혁명·노동운동
1931 만주사변 일본 관동군 혁명의 중심이 항일투쟁으로 전환
1932~1935 항일유격대 조직 양정우, 주보중, 리조린 지역별 항일유격전 전개
1936 동북항일연군 창설 양정우, 주보중, 리조린 항일세력 통합
1940~1942 항일연군의 붕괴와 소련 철수 주보중, 리조린 등 만주 혁명 제1세대 형성
1945년 8월 소련의 만주 진공 스탈린, 바실렙스키, 메레츠코프 대체역사의 분기점
1945년 팔로군·동북항일연군 세력 결집 가오강, 주보중, 리조린 혁명 제2세대 형성
1945년 하바롭스크 비밀회담 가오강, 바실렙스키, 메레츠코프 만주 독립 구상 시작
1945년 말 진운·팽진 동북 파견 진운, 팽진 중앙의 동북 감찰
1945~1946 동북국과 소련군정 가오강 독립 준비 1단계
1946년 말~1947년 만주인민행정위원회 설치 가오강 예비정부 수립
1947 만주인민정부 출범 가오강 사실상 독립정부
1947~1948 만주인민공화국 건국 가오강, 주보중 소련 위성국 성립

건국후 역사

정책

  • 사회주의인민경제건설노선 (토지개혁 & 생산증강운동)

고강시대, 핵심 정책으로 경제의 재건 및 토지개혁이 골자다.

  • 사회주의문화건설 제1차 통국인민평의회 결정안 (인민식자운동)

고강시대, 고숭민을 위원장으로 조직된 운동으로 인민의 식자율을 증강시키는 운동이다.

  • 트로쯔끼당 사건

고강시대, 첫번째 대규모숙청 사건으로 당내 수정주의자 축출을 명분으로 정치범을 처벌하는 특별구역인 굴라크가 설치된다. 이시기엔 전문정치가들을 정리하는 사업의 성격이 짖었다. 이시기 만주의 주류파벌중 하나였던 국제파(国际派, 국외에서 중국의 독립운동을 벌인 파벌. 소련과 관련있는 이들은 코뮌테른에 속해 소련파로 여겨졌으며, 이들은 서유럽과 미주 등지에서 활동하여 리버럴한 경향이 있음.)를 몰아낸다. 이때 일본과 관련있는 이들도 처벌당한다. 이때 일본인 아내를 둬서 처벌당한 경우도 있었다. 이후 몇몇은 사후복권을 받는다. 어쩌다 하나 걸린 격으로 실제로 트로쯔끼주의자들이 있기는 했었다.

  • 사회주의문화건설 제2차 통국인민평의회 결정안 (봉건부패문화소탕운동)

고강시대, 전국적으로 식인풍습, 노예, 매음굴 등 각종 반사회적이거나 봉건잔재에 해당하는 것들을 몰아내는 운동이었다. 정치적 목적보다는 혼란한 사회를 이용한 범죄자들을 몰아내는데 일조했고, 이때 잡힌 유명한 산적이 바로 니탕개. 인육을 공급하던 산적으로 사형 후 효시되었다.

  • 탈우상투쟁

고강시대 말기, 1956년 제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쇼프가 이오시프 스탈린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개혁분위기가 돌자 1957년부터 자신의 우상화 정책을 수정하는 정책을 펼쳤다. 1958년 초 공산당의 중책이었던 리립삼이 소련의 등을 업고 "우상숭배같은 봉건문화가 우리 사회주의에 스며든건 스딸린놈의 무지함 때문이다." 라며 요구한것이 그 본격적인 촉발이 되었다. 탈우상투쟁의 일환으로 가슴의 표장(뱃지)에 마르크스,레닌의 표상도 없어지고 낫과 망치만 남게된다. 그 외에 우상화 삐라가 줄어드는(완전히 없어지진 않았다. 여전히 주석이 가장 크게 그려졌다.) 정도에 그쳤다.

  • 이상기후

주보중 시기 자연적 요인으로 기상 조건이 좋지 않았으며 예년보다 수확량의 감소를 겪었다.

  • 프룬제 사건

주보중 시대, 프룬제 군관학교를 유학한 군장교들을 대상으로 일어난 숙청사건. 원래 정치군관과 야전군관이 확실히 나누어지고, 정치군관인 총정치사령이 통수권과 군령권을, 그외의 군정권을 총참모장이 행사하고 있었으나 인사권에 간섭하려는 조직적 움직임이 보이자 이들을 축출한다. 이를 명분으로 소련파의 군통제권을 동북연군파가 견제하게 된다.

  • 사회주의문화건설 제2차 통국인민평의회 결정안 (고등교육육성운동)

고숭민 시대의 사업, 고등교육과 중등교육을 강화하는 것으로 고등교육의 육성을 추구했다. 이는 그의 명치대학 경험이 시발이 되어 전국의 3대 도시에 각각 3대 대학이 건설되었다. 주로 대도시에 건설된 이유는 정책적 효용성과 더불어 파괴된 기존 대학등을 재건하여 활용하는 방향을 잡았기 때문이다. 각각의 특성화된 대학을 건설하고(할빈리공대학, 창춘법정대학, 뤼다해사대학), 중앙 묵덴의 종합대학(묵덴인민대학)으로 구성하였다.

  • 사회주의문화건설 제n차 당중앙결정안 (아편퇴치운동)

고숭민 중후기에 시작하여 리립삼때까지 이어진 운동. 아편을 퇴치한다는 명목 하에 시작하여으나 리립삼 시기 봉건부패문화소탕운동의 후속 운동으로 반체제인사색출과 범죄자 색출을 목적으로 한 사업이었다.

  • 백가쟁명

주보중 시대까지 이어지던 국가주석의 불가침적, 우상화적 정책을 폐기하고 다양한 비판적 목소리를 허용 및 장려하는 정책을 고숭민 시기에 펼쳤다. 이시기 고강에게 투옥되었던 정치범들의 첫번째 재심이 이루어졌다.

  • 대이주사건

반우파투쟁 시기부터 점점 늘어나던 망명자들이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시기 급증하여 통제가 불가할 정도로 들이닥친 사건이다. 대략적 통계밖에 하지 못했는데, 대략 500만~1천만명이 국경을 넘어왔다. 이시기 급증하는 인구를 부양할 능력을 초과하며 기아자가 급증하는 등 원래 잉여생산이 이루어지던 지역에서 소련의 구원미를 받을 정도로 급격한 사회적인 동란을 겪었다.

  • 사회주의문화건설 제n차 당중앙결정안 (도서혁명화사업)

리립삼 시대의 통제, 사상검열 정책. 이후 그가 인텔리 좌파 지식인들의 집단지도체제인 만주의 정치를 독선주의로 반역하려는 혐의로 책잡히는 계기가 된다. 이는 지식인들의 대규모 반발을 사며 그의 말년을 피곤하게 했다.

  • 반혁명투쟁 (반우파투쟁)

리립삼 시대의 반대파 탄압정책, 이시기 리립삼에 반대하는 많은 인텔리들이 잡혀갔으며 자아비판과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다만 리립삼 본인이 그토록 모택동을 싫어했기 때문에 자신의 우상화에 반한다는 이유로 체포하진 않았다.[8] 다만 본인의 노선을 반대하는건 매한가지로 별 희안한 죄명으로 유배를 보냈다. 주보중 시기엔 처형이 몇몇 있었으나 리립삼 시대엔 공개처형 대신 각지의 특별구역(굴라크)를 설치하였다.

  • 사회주의인민경제총공노선 (급진적 공업화, 도시화 추진)

리립삼 시대의 주된 노선으로, 스탈린주의를 모방하여 급격한 경제성장과 공업화를 추구하였다. 실제로 일정한 성공은 거두었으나 심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리립삼시대엔 자신이 노동상으로 근무할떄 형성한 노동정책을 완성했으나 경공업의 부족함으로 소비재의 미비, 노동통제로 인한 사회적 피로가 누적된다.

  • 사회주의인민경제개조총노선 (실용주의 경제노선)

림풍시대에 시작하여 풍중운시대까지 이어진 경제노선으로, 급격한 중공업 후유증을 완화하고 생활수준의 일정보장을 위해 경공업에도 투자하며 균형을 맞추려 로력했다. 중공업의 투자비율을 조정한 정도이다.

  • 반평운동(反平)

림풍시기 이루어진 리립삼때의 여러 정치범, 사상범들에 대한 대규모 재심과 복권사업을 벌였다.

  • 맹동주의 종파 사건

풍중운시대, 질서유지를 명분으로 리립삼 노선의 폐기 및 사상적 축출, 계열인물 숙청. 마지막 대규모 숙청이다.

  • 소-만 핵미사일 배치 협약 (1978)

풍중운 시대의 소련과의 밀착. 계획경제의 전성기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의 깊은 유대를 과시하며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굉장한 충격을 준다.

  • ㅇㅇ

백학림 시대의 무리한 경제발전사업, 기울어가는 공산권에서 계획경제와 배급경제를 유지하려는 최후의 발악이었다. 이양반이 유능한것도 아니라서 잘 안됬을듯.

  • 글라스노스뜨(공개성 강화)와 뻬레스트로이까(개혁과 구조조정)

백학림 말년, 1989년 시위대의 요구에 이끌려 제기되던 정책으로 랑경춘이 이를 추진하였다.

  • 1991년 데모끄라찌체스까야 레볼류찌야 (민주혁명)

뉴후루 아이싱고브가 만주민주공화국을 건국하며 사회주의 체제의 종말을 알렸다.

인공시대 주석


만주 인민 공화국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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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고강 주보중 고숭민 리립삼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림풍 풍중운 백학림 랑경춘

아래 인물 설명은 챗지피티로 요약작성함.
혁명세대~ (건국, 체제형성)
초대 : 가오강 (1947-59, 12년/팔로파)
만왕. 1905년 산시성(陝西省) 출생. 1926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산시 혁명근거지와 장정을 거친 뒤 항일전쟁 시기 중국공산당의 서북 및 동북 공작을 담당하였다. 1945년 소련군의 만주 진주 이후 동북국의 최고책임자로 부임하여 소련군과 협력해 만주의 행정과 군대를 장악하였다. 1947년 만주인민공화국 건국과 함께 초대 국가주석으로 취임하였으며, 토지개혁·국유화·중공업 육성을 추진하여 사회주의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건국의 아버지이자 '만주혁명의 지도자'로 평가된다.
2대 : 주보중 (59-63, 4년/연군파)
1902년 윈난성 출생. 중국공산당 입당 후 동북으로 파견되어 항일유격대와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총지휘를 맡았으며, 일본군에 맞선 대표적인 항일혁명가로 이름을 알렸다. 전쟁 후에는 만주군 창설과 군사체계 정비를 담당하였으며, 가오강 사후 혁명 원로들의 추대로 국가주석에 선출되었다. 혁명 정통성 계승과 군의 안정에 주력하였다. 재임 기간은 비교적 짧았지만 건국세대의 마지막 지도자로 평가된다.
3대 : 고숭민 (1891, 高崇民, 63-68, 5년/무파벌)[9]
1891년 랴오닝성 카이위안(開原) 출생의 만주족 정치인. 청말과 중화민국 시기 교육계와 애국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동북 지역의 민주인사로 활동하였다. 일본 패망 이후 만주의 자치와 사회개혁을 지지하며 만주 정부에 참여하였고, 비공산계 애국세력과 혁명세력을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국가주석 재임 중에는 행정제도 정비와 산업기반 확충을 추진하며 혁명정부를 제도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친소원로 (프라하의 봄, 소련의 간섭)
4대 : 리립삼 (1899, 李立三, 68-71 3년/소련파)
1899년 후난성 출생. 프랑스 근공검학 운동에 참가한 뒤 중국공산당 초기 지도부에 합류하였으며, 코민테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대표적인 국제공산주의 계열 인물이었다. 당내 권력투쟁에서 실각한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가오강 정권의 정치고문으로 활동하였다. 국가주석 재임 중에는 소련과의 군사·경제 협력을 더욱 강화하였으며, 1968년 프라하의 봄 이후 소련의 대외정책에 적극 보조를 맞추었다. 말년에는 보수적 계획경제를 유지하는 데 집중하였다.
~행정관료 (그나마 존재하는 공산주의 국가로써의 전성시대)
5대 : 림풍 (1906, 林枫, 71-74, 3년/국내파)
1906년 헤이룽장성 출생. 초기부터 중국공산당 동북조직에서 활동하였으며,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쳐 동북 행정기관과 지방당 조직을 이끌었다. 건국 이후에는 지방행정과 경제계획을 담당하는 실무관료로 성장하였으며, 혁명 원로에서 기술관료 중심 체제로의 전환을 주도하였다. 재임 기간에는 산업관리의 효율화를 추진하고 국가행정기구를 정비하였다. 사실상의 마지막 혁명원로로, 행정관료 출신으로 정치력은 부족했으나 리립삼이 후퇴시켰던 교육과 경공업을 재건할 토대를 마련했다. 이후 풍중운의 무대를 깔아주는 역할에 그치며 물러나며 제2의 만왕시대가 시작된다.
6대 : 풍중운 (74-84, 10년/연군파)
제2의 만왕. 1908년 헤이룽장성 출생. 중국공산당 북만 조직의 핵심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항일유격대와 동북항일연군의 정치공작을 담당한 혁명 원로였다. 건국 이후에는 지방행정과 경제개발을 이끌며 만주 북부의 산업화를 추진하였다. 국가주석으로 취임한 뒤 철도망과 중공업 단지를 대대적으로 확충하여 만주인민공화국의 경제적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동시에 교육과 과학기술 육성에도 많은 투자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말기에는 경제 침체와 소련 경제의 둔화가 국가 운영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몰락기 (민국을 향하여)
7대 : 백학림 (84-89, 5년/연군파)[10]
1918년 함경북도 출생의 조선인 혁명가. 만주에서 항일유격대에 참가한 뒤 소련 제88독립보병여단에서 복무하였으며, 일본 패망 이후에는 만주 정부의 치안 및 국가보안기관 창설에 참여하였다. 이후 국가안전부장과 정치국 상무위원을 역임하며 국가안전 체계를 확립하였고, 1984년 국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재임 중에는 경제 침체와 민주화 요구에 대응하여 사회질서 유지와 제한적 경제개혁을 병행하려 했으나, 소련의 쇠퇴와 사회주의권 위기 속에서 체제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사실 이 인물은 당대 소련의 지도자인 고르바초프와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이미 취임할때부터도 인지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의혹이 있었고, 때지난 스탈린주의를 아직도 옹호하는 등 이미 늙을대로 늙어 새로운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인물이었기에 고르바초프는 개혁압력을 넣으면서도 퇴임을 압박했지만 끝내 자리를 지키는걸 보고 기대를 접었다, 이후 1989년 민주화시위가 불길같이 번지며 사임한다.
8대 : 랑경춘 (89-91, 2년/설정필요)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의 여파와 1989년 민주화 시위, 사회주의권 붕괴의 여파 속에서 국가주석에 선출되었다. 재임 기간에는 일당체제의 점진적 해체와 시장경제 도입을 추진하였으며, 주변국과의 관계 정상화에도 힘썼다. 1991년 만주인민공화국을 해체하고 민국을 건설한다.

시기 만주인민공화국 소련 시대적 특징
1947~1953 제1대 가오강 이오시프 스탈린 건국, 사회주의 체제 구축, 소련의 절대적 영향력
1953~1959 제1대 가오강 니키타 흐루쇼프 탈스탈린화 초기, 만주는 친소 노선 유지
1959~1963 제2대 주보중 니키타 흐루쇼프 혁명 원로 체제, 군과 당의 안정
1963~1964 제3대 고숭민 니키타 흐루쇼프 행정 제도화와 산업기반 확충
1964~1968 제3대 고숭민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브레즈네프 체제 출범, 친소 노선 강화
1968~1971 제4대 리립삼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프라하의 봄 이후 소련권 결속 강화
1971~1974 제5대 림풍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기술관료 중심 행정체제
1974~1982 제6대 풍중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산업화 완성, 계획경제 전성기
1982~1984 제6대 풍중운 유리 안드로포프 경제 침체, 개혁 논의 시작
1984~1985 제7대 백학림 콘스탄틴 체르넨코 노령 지도부의 마지막 시기
1985~1989 제7대 백학림 미하일 고르바초프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의 영향, 개혁 압력 증대
1989~1991 제8대 랑경춘 미하일 고르바초프 민주화와 체제 전환, 사회주의 체제 종말

위대하신 만주의 령도자 고 강 동지를 따르자!


통국인민평의회 주석
직위개설 초대
고숭덕
제2대
주보중
만주 인민 공화국의 초대 주석
고강
Гао Ган | 高岗
본명 고숭덕 (高崇德)
출생 1905년 10월 25일
청나라 섬서성 미지현
사망 1966년 8월 17일 (향년 61세)
만주 인민 공화국 묵덴 직할시 주석궁

만주 인민 공화국의 주석
재임기간 1947 - 1959
전임: 직위개설
후임:주보중
재임기간 만주 인민 공화국 초대 국가주석
년 월 일 - 년 월 일
만주공산당 초대 서기장
년 월 일 - 년 월 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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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초혼 양지방(杨芝芳)
재혼 리력군(李力群)
자녀 슬하 1남 2녀
학력 용진소학당 (졸업)
횡산현제1고등소학당 (졸업)
섬서유림중학 (졸업)
중국민족대학 (명예학사/철학사)
묵덴인민대학 (명예석·박사/철학박사)
레닌그라드 대학교 (명예박사/철학박사)
종교 무신론(국가무신론)
정당 만주공산당
석경(碩卿)
고강(高岗)[11]
서훈
군사 경력
임관 중국공산당 정치위원
복무 중국공농홍군 제26군
1933년
정치위원
서북혁명군사위원회
1935년
부주석·총정치위원
팔로군
1937년
기병사령관
섬감녕진수연방군
1943년
대정치위원
동북군구
1940년 ~ 1947년
사령원 겸 정치위원
공농적위군
1940년 ~ 1947년
정치부사령(부원수급)
최종 계급 부원수 (공농적위군)
최종 보직 정치부사령
초상화[12]

개요

통국인민평의회의 초대 주석으로 부임하는 고강 주석

만주인민공화국의 초대 주석, 독재자. 만주를 12년간 통치하였다. 192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섬서성과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혁명가로, 초기 투쟁노선인 노동·농민·학생운동에 투신하였다. 이후 무장투쟁노선에 따라 섬서·감숙성 지역의 무장 유격대 활동을 지도하였으며, 이후 1936에 내몽골지역의 중국공산당 몽골 공산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해 10월엔 섬서·감숙성 소수민족 공산위원회 부서기를, 12월에는 서기를 맡았다.

항일투쟁이 시작된 후, 1937년 11에 팔로군 기병대 사령관을 맡았으며 1941년엔 중국 공산당 서북중앙국 서기를 맡았고 1945년 6월 중앙정치국의 위원으로 위촉받았다. 1945년 10월 말 동북지역으로 파견되어 근거지를 건설 후 하얼빈 전선 야전 사령관을 지냈다. 당해 하바롭스크에서 소련과 비밀회담을 진행하였고, 1946년 6월에 동북인민연합군 정치부위원과 중국공산당 동북국 서기를 맡았다. 이후 동북인민행정위원회를 설치하였고, 이후 동북국 제1서기, 만주인민정부 주석으로 차례로 취임하며 만주를 통치하였다.

이후 소련의 승인과 함께 만주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고, 통국인민평의회에서 초대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동시에 그는 만주공산당의 서기장을 겸임하며 최고지도자이자 권력자로 통치했으며, 통치시기를 일컫어 중국측에선 그를 만왕(滿王) 이라 칭했다. 통치시기 만주의 재건, 공업화와 토지개혁 사업을 지도했다. 그는 1959년까지 12년을 통치하며 독재를 계속하다가, 주석궁에서 의문의 이유로 사망했다. 대외적으로 과로로 인한 사망이라 알려졌다.

인민해방의 어버이 주 보 중 동지를 따르라.


통국인민평의회 주석
초대
고강
제2대
주보중
제3대
고숭민
만주 인민 공화국의 2대 주석
주보중
Чжоу Баочжун | 周保中
본명 해리원(奚李元)
출생 1902년 2월 7일
청나라 운남성 다리현
사망 1964년 4월 22일 (향년 62세)
만주 인민 공화국 창춘 독립시 창춘백구은병원

만주 인민 공화국의 주석
재임기간 1959 - 1963
전임: 고강
후임:고숭민
재임기간 만주 인민 공화국 2대 주석
년 월 일 - 년 월 일
만주공산당 n대 정치총사령
년 월 일 - 년 월 일
서명 파일:주보중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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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왕일지(王一知)
자녀 슬하 독녀
학력 대리현 고등소학교 (졸업)
운남육군강무당 (졸업 제17기/공병)
국제레닌학교 (졸업)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졸업/군사학)
종교 무신론(국가무신론)
정당 만주공산당
소황(绍璜)
서훈
군사 경력
임관 국민당 운남육군강무당 (제17기[13])
중국공산당 군사위원
복무 국민혁명군 제6군 제56연대
1926 ~ 1927년
부연대장
만주 항일유격대
1932 ~ 1935년
참모장·군사위원장
동북항일연군 제5군
1935 ~ 1937년
군장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1937 ~ 1940년
총지휘사령
소련 제88독립보병여단
1940 ~ 1945년
여단장
동북민주연군
1946 ~ 1947년
총사령
공농적위군
1947 ~ 1963년
총정치사령
최종 계급 원수 (공농적위군)
최종 보직 총정치사령

개요

만주인민공화국의 2대 주석, 만주 무장투쟁을 이끈 항일유격대를 조직하고 지휘하였다. 동북에서의 항일투쟁에서의 전쟁영웅이다. 본관은 중국 운남의 대리현으로, 바이족(白族) 출신이다. 원래 중국의 운남강무학당 출신이나, 운남성의 당계요(唐继尧)의 휘하에 있었다. 군벌정치에 환멸을 느낀 그는 광주의 국민혁명정부로 투신하여 북벌에 참여한다. 북벌시기 국공합작의 영향으로 반제국주의와 반군벌, 토지혁명에 공감을 갖고 장개석의 상해반란으로 인하여 중국공산당에 투신한다.

1928년 쏘련에서 유학 이후 동북으로 파견되어 동북의 항일무장투쟁의 지휘관이 되었고, 씨베리로 철수 이후엔 소련 제88독립보병여단의 여단장을 맡았다. 1945년 쏘련군과 함께 만주로 진공하여 지역을 빠르게 장악하였고 이후 만주의 군수지도자로써 임명된다. 고강의 통치 시기에도 감히 주보중을 넘어트릴 수 없을 정도로의 위용을 가졌었다. 그는 만주의 3대 건국세력인 팔로군파, 쏘련파, 동북연군파중 동북연군파의 수장이었으며, 전쟁영웅이었다. 고강의 통치 이후 주석으로 위촉되었고 5년간 통치하며 군내 반란세력을 척결하는 프룬제 사건을 일으켰다. 프룬제 사건 시기에 건국이후 첫번째로 공개사형을 집행하였다. 이후 공안조직 강화, 군조직 재편성, 봉건부패문화소탕운동을 완수 (이시기 마지막 대규모 비적이었던 흑룡강성의 흑패를 몰살했다.)하였고, 흑패의 수장이었던 일제의 탈영병 출신 소립원[14]을 척살했다. 이후 장춘의 병원에서 병사한다.

+ 사진편집이 잘못된게 아니라 진짜 저렇게 생겼다.

저우바오중 (1946년 8월에 옌지에서 촬영)

만주인민의 스승


통국인민평의회 주석
제2대
주보중
제3대
고숭민
제4대
리립삼
만주 인민 공화국의 3대 주석
고숭민
Гао Чонгмин | 高崇民
본명 고은준 (高恩浚)
출생 1891년 11월 14일
청나라 봉천성 개원현
사망 1971년 7월 29일 (향년 80세)
만주 인민 공화국 봉천주 개원현[15]

만주 인민 공화국의 주석
재임기간 1963 - 1968
전임: 주보중
후임: 리립삼
재임기간 만주 인민 공화국 3대 주석
년 월 일 - 년 월 일
국무원 n대 수상
년 월 일 - 년 월 일
동북인민정부 초대 부주석
년 월 일 - 년 월 일
서명 파일:고숭민 자필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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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부친 고보여(高葆如)
모친 곽씨(郭氏)
계모 장씨(蒋氏)
배우자 리소질(李素质, 사별)
증소혜(曾昭惠, 사별)
왕계산(王桂珊)
자녀 슬하 5남 4녀
학력 봉천성립 농림학당 (졸업)
메이지대학 (졸업/정치경제대학)
종교 무신론(국가무신론)
정당 만주공산당
건국(健國)
숭민(崇民)
서훈
군사 경력
임관 공농적위군 정치군관
복무
공농적위군
1963 ~ 1968년
정치부사령(부원수급)
최종 계급 부원수 (공농적위군)
최종 보직 정치부사령

개요

만주인민공화국의 3대 주석, 만주에서 활동한 민주인사로 만주 양백기(鑲白旗) 계통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본의 메이지대학에서 유학하며 근대의 지식인이 되었고 귀국 후에는 언론인과 교육자로 활동한다. 이어 동북민치구진회(東北民治俱進會) 활동을 통해 동북의 지방자치와 정치개혁을 주장하였다.이후 1926년 장학량의 비서가 되었고 만주사변 이후 북경으로 망명, 중국공산당과 접촉한다. 이후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서 항일 통일전선의 인물로 활동하였다.

1945년 동북해방 이후 중국공산당은 그를 동북인민정부의 부주석으로 임명하며 파견하였고, 동북의 재건을 위하여 힘쓰게 된다. 이후 고강의 12년 통치시기 만주의 식자율 증진을 위해 노력했으며, 특별한 당파를 가지지도 않았고, 정통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으나, 당시 당내 국가원수로써 포용력과 집단지도체제가 강조되며 통국인민평의회에서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 시기에 만주의 정치체제가 정립되었으며, 고숭덕의 령도체제, 주보중의 군정체제에서 집단지도체제로의 이행이 이루어졌다. 고숭민이란 인물 자체에 대해서도 당파, 심지어 공산당과 국민당을 막론하고도 많은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가 초대나 2대처럼 실권자는 아니었으나 상징적 국가원수가 되는것에 대해선 불만은 적었다.[16]

이 시기 소련계 활동가들인 풍중운랑경춘(뉴후루 아이싱고브)과 노선의 마찰을 빚었다. 이후 문맹퇴치운동은 효과를 얻었으나 이후 프라하의 봄 사태로 인한 소련의 적극적 개입은 만주의 다소 독자노선과 지역주의적 노선을 견지하며 정통한 공산주의 계통 인사가 아니었던 고숭민을 견제하였고, 이후 자발적으로 은퇴하였다. 이후 고향인 개원현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노환(자연사)이다. 장례는 국가장으로 치루어졌다.

좌경모험주의가 좌익소아병이란 털난 변절자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가? 근데 난창봉기는 실패한게 맞음ㅋ


통국인민평의회 주석
제3대
고숭민
제4대
리립삼
제5대
림풍
만주 인민 공화국의 4대 주석
리립삼
Ли Лисань | 李立三
본명 리륭질 (李隆郅)
출생 1899년 11월 18일
청나라 호남성 예릉현
사망 1971년 7월 29일 (향년 72세)
만주 인민 공화국 묵덴

만주 인민 공화국의 주석
재임기간 1968 - 1971
전임: 리립삼
후임: 림풍
재임기간 만주 인민 공화국 4대 주석
년 월 일 - 년 월 일
만주공산당 n대 서기장
년 월 일 - 년 월 일
국무원 노동상
년 월 일 - 년 월 일
국무원 선전상
년 월 일 - 년 월 일
서명 파일:리립삼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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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부친 리창규(李昌圭)
모친 형씨(亨氏)
배우자 리행선(林杏仙, 사별)
리일순(李一纯, 이혼)
리숭선(李崇善, 이혼)
리사 키시키나 (Ли Ша Кишкина)[17]
자녀 슬하 2남 5녀
학력 프랑스 근공검학 운동[18]
국제레닌학교 (졸업)
종교 무신론(국가무신론)
정당 만주공산당
서훈
군사 경력
임관 공농적위군 정치군관
복무
공농적위군
1963 ~ 1968년
정치부사령(부원수급)
최종 계급 부원수 (공농적위군)
최종 보직 정치부사령

개요

만주인민공화국의 4대 주석. 만주의 가장 철저한 친소파였다. 중국공산당의 초기 지도자로, 난창 봉기의 실패 이후 실각하여 소련에서 생활하였다. 1945년 이후 중국으로 입국하였고, 소련의 지시로 화북에서 만주로 이동하여 만주인민정부와 만주공산당의 전신인 중국공산당 동북국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중국의 특사들의 활동을 은밀히 방해하는 공작업무를 맡았고 고강과 협력하여 비모택동 노선의 공산주의 국가를 계획한다.

건국 이후엔 만주공산당에서 당이론을 조직하는 책무를 맡으며 리론가로 활동하였고, 국무원의 노동상, 선전상을 거치며 중책을 맡다가 고강의 죽음 이후 고숭민 시대에 서기장에 오르며 자신의 입지를 확립하였다. 이후 집단지도체제에서 당의 우두머리격으로 활동하였으며, 아편퇴치운동을 계획하고 조직하여 봉건부패문화소탕운동의 후속 운동으로 발전시키며 사상범들을 색출하고 중국의 간첩들을 체포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후 프라하의 봄 사건 후에 소련의 압박으로 고숭민이 물러나며 통국인민평의회에서 4대 주석으로 위촉된다.

이후 약 3년간 통치하며 사회주의인민경제총공노선, 도서혁명화사업, 반혁명투쟁 등을 진행하며 소련식 공업경제로의 조급한 경제정책을 폈다. 이시기 당내 갈등이 잦자 도서혁명화사업으로 사상검열을 강화하였고, 반혁명투쟁으로 자신에 반대하는 지식계층등을 반동분자, 용우분자 등등 별 명목으로 유배시키며 권력을 다지려 하였다. 집권 3년차에 팔로군파에 의한 정치적 독선주의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해진 다음날 의문의 이유로 집무실에서 사망하였다. 사인은 음독자살로 인한 사망이라고 알려졌다.[19] 장례는 공산당장으로 치루어졌으나, 이후 그때 사상범으로 유배된 이들이 복권및 중용되며 풍중운시기에 사후비판 당하며 평가절하된다.

범부


통국인민평의회 주석
제4대
리립삼
제5대
림풍
제6대
풍중운
만주 인민 공화국의 4대 주석
림풍
Ли Лисань | 林楓
본명 정영효 (郑永孝)
출생 [][1906년]] 9월 30일
청나라 흑룡강성 왕꾸이현
사망 1977년 9월 29일 (향년 세)
만주 인민 공화국 묵덴 중앙인민대학병원

만주 인민 공화국의 주석
재임기간 1971 - 1974
전임: 리립삼
후임: 풍중운
재임기간 만주 인민 공화국 5대 주석
년 월 일 - 년 월 일
국무원
년 월 일 - 년 월 일
국무원
년 월 일 - 년 월 일
서명 파일:림풍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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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부친 ()
모친 ()
배우자
자녀 슬하 남 녀
학력 현 소학당 (졸업)
종교 무신론(국가무신론)
정당 만주공산당
서훈
군사 경력
임관 중국공산당 정치위원
복무
공농적위군
1963 ~ 1968년
정치부사령(부원수급)
최종 계급 부원수 (공농적위군)
최종 보직 정치부사령

개요

만주인민공화국의 5대 주석. 흑룡강성 출신으로, 1920년대 후반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만주의 지하조직에서 활동한 국내파 관료이다. 1945년 해방 이후 당조직을 거치며 천천히 승진한 관료체제 출신의 주석으로, 풍중운이 뒷배가 되어 주석이 되었다. 이후 사회주의인민경제개조총노선으로 경공업 등의 균형경제정책을 추구하였고, 반평운동으로 리립삼 시대까지 잡혀있던 여러 사상범, 정치범들을 재조사 및 사면, 복권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후 3년간 국내 치안 및 정치풍토의 질서를 다잡았으며, 풍중운의 의사대로 조용히 사임하며 유복한 말년을 보냈다.

두번째 만왕


통국인민평의회 주석
제5대
림풍
제6대
풍중운
제7대
백학림
만주 인민 공화국의 6대 주석
풍중운
Фэн Чжунюнь | 冯仲云
본명 풍사상 (冯仕祥)
출생 1908년 3월 18일
청나라 강소성 상주
사망 1984년 7월 27일 (향년 76세)
만주 인민 공화국 묵덴 직할시 중앙인민대학병원

만주 인민 공화국의 주석
재임기간 1974 - 1984
전임: 림ᅠ풍
후임:백학림
재임기간 만주 인민 공화국 6대 주석
년 월 일 - 년 월 일
만주공산당 n대 서기장
년 월 일 - 년 월 일
국무원 n대 수상
년 월 일 - 년 월 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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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설문(薛雯)
자녀 슬하 2남 3녀
학력 혜란중학 (졸업)
청화대학 (졸업/수학과)
종교 무신론(국가무신론)
정당 만주공산당
서훈
군사 경력
임관 중국공산당 정치위원
복무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1938년
총정치위원
소련 제88독립보병여단
1941 ~ 1945년
정치간부
공농적위군
1941 ~ 1945년
정치부사령(부원수급)
최종 계급 부원수 (공농적위군)
최종 보직 정치부사령

개요

만주인민공화국의 6대 주석, 10년간 만주를 다스렸던 인물로 만왕2세라고 불렸다. 만주인민공화국의 전성기, 즉 공산권의 가장 전성기 시대에 다스렸던 인물이다. 소련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말기의 국가엔 항상 꽉막힌 노친네가 앉아있는 법이지


통국인민평의회 주석
제6대
풍중운
제7대
백학림
제8대
랑경춘
만주 인민 공화국의 7대 주석
백학림
Пэк Хаклим | 白鶴林
출생 1918년 10월 17일
일본제국령 조선 평안남도 평원
사망 2006년 10월 5일 (향년 87세)
만주 인민 공화국 창춘 독립시 창춘백구은병원

만주 인민 공화국의 주석
재임기간 1984 - 1989
전임: 백학림
후임:랑경춘
재임기간 만주 인민 공화국 7대 주석
년 월 일 - 년 월 일
공농적위군 n대 총참모장
년 월 일 - 년 월 일
국무원 n대 내무상
년 월 일 - 년 월 일
서명 파일:백학림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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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진영화(陳英花)
자녀 슬하 1남 2녀
학력 평원보통학교 (졸업)
프룬제군사대학 (졸업/군사학)
종교 무신론(국가무신론)
정당 만주공산당
서훈
군사 경력
임관 중국공산당 정치위원
복무 동북항일연군 제6사
1936 ~ 1937년
전령병
소련 제88독립보병여단
1942 ~ 1945년
제1영 제1대대 3중대장
조선인민군
1945 ~ 1946년
제46연대장
공농적위군
1946 ~ 1948년
제12연대장
1948 ~ 1950년
제9사단장
1950 ~ 1954년
군사정진위원
1977 ~ 1980년
정치차선위원
1980 ~ 1984년
총참모장
1984 ~ 1989년
정치부사령
최종 계급 부원수 (공농적위군)
최종 보직 정치부사령

개요

만주인민공화국의 7대 주석. 평안남도 평원 출신으로, 동북항일연군 출신으로, 김일성을 따라 한반도 이북으로 이동하였으나 김일성의 전향, 박상희의 대구에서의 시위사건 이후 사망으로 조선지역의 국내파 조직이 와해되고, 설상가상 조선해방전쟁에서의 패배와 박헌영의 사망으로 완전히 패배하며 압록강을 월경하여 만주로 피신했다. 망명자에 대해 관대할 뿐더러, 혁명전쟁을 치르고 온 그는 자신이 이끈 46연대 및 패잔병 세력을 이끌고가 공농적위군에 편입되었고, 조선인으로 구성된 제12연대의 연대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사단장을 거치며 자리를 잡았고, 군사정진위원으로 선출되며 군-정의 정치체계에 편입된다.

이후 봉건부패문화소탕운동의 실무자로 활동하며 정치보안의 전문성을 인정받았고, 내무상으로 취임하며 국내 정치세력에 대한 감시와 검열업무를 맡았다. 이때 남춘봉의 제11사단과 백학림의 12사단[20], 내무국의 보안사령부 특작부대가 연합하여 무단강주에서 토벌작전을 개시해 니탕개를 붙잡아 묵던으로 압송을 성공한 전공이 있다. 압송당시 백학림이 책임지고 보안을 맡았는데, 니탕개와 관련된 흑룡강주의 조직적 범죄집단인 흑패(黑牌)에서 구출하려 습격했으나, 이를 막아내었다. 이후 창춘에서 처형을 집행했다.

봉건부패문화소탕운동을 주도적으로 집행하여 명성을 얻은 이후 국무원의 사회안전관련에서 근무하다가 1980년 총참모장으로 임명되며 제복군인으로써 최고의 자리를 얻었고, 이후 풍중운의 급사 이후 마지막 혁명원로[21]로써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사회질서 유지와 제한적 경제개혁을 병행하려 했으나 소련의 쇠퇴와 사회주의권 위기 속에서 체제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당시 소련의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여 소련과 불화를 겪었고, 내부적으로도 시대착오적 정책과 인지능력의 의심이 제기되며 결국 1989년 민주화시위가 벌어지며 사임해야 했다. 사실 1983년 시기에 이미 노망이 들어 맛이 갔다는 소리가 돌았으며, 같은 말 하고 또 하고 몇분 간단히 말한다고 해놓고 몇시간을 헛소리를 하는 등 맛이 가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이꼴을 보았던 남춘봉의 《추산기록》에서 회고하기를 "치매노인을 데려다가 앉히는 꼴이 참 어느나라 노인네가 꼴에 왕이랍시고 기어가듯 앉는꼴과 비슷했다" 라며 "저사람 집무실은 묵덴이 아닌 백구은병원이어야 했었다." 라고 회고했다. 그와 사사건건 대립했던 정치군관으로 정치사령이었던 복철재는 그의 취임을 반대하며 "아침에 뭐 먹었는지도 모르는 노친네가 쏘련 서기장 이름이라도 기억하겠냐" 라고 말했던 기록이 속기록에 있다. 그리고 실제로 쏘련 대사 앞에서 서기장의 이름을 틀리게 말했다. 스딸린이라 했었다고...

민국


만주민주공화국의 대총통
직위개설 초대
뉴후루 아이싱고브
제2대
남춘봉
만주민주공화국의 초대 대총통
뉴후루 아이싱고브
Ниархуру Айсингов | 钮祜禄 爱星阿
본명 랑경춘(狼庆春)[22]
출생 1922년 11월 2일
중화민국 흑룡강성
사망 2010년 1월 11일 (향년 82세)
만주민주공화국 묵던 수도시 국립 묵던대학교병원

만주 민주 공화국 초대 대총통
재임기간 1994 - 1998
전임: 직위개설
후임:남춘봉
재임기간 만주 인민 공화국 8대 주석
년 월 일 - 년 월 일
만주공산당 제20대 서기장
년 월 일 - 년 월 일
국무원 n대 부수상
년 월 일 - 년 월 일
서명 파일:뉴후루 아이싱고브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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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부친 니어후루 와이란(鈕臥爛)
모친 니어후루 백하(鈕帛夏)
배우자 뇨후로바 루드밀라(狼人愛)
자녀 슬하 2남 1녀
학력 프룬체 사관학교(졸업 / 군사학)
국립묵던대학교(졸업 / 3회)
종교 만주정교회 (세례명: 라도네주의 성 세르기)
정당
경춘(慶春)[23], 로사(老舍)[24]
로사(老舍)[24]
서훈
군사 경력
최종 계급 부원수 (공농적위군)
원수 (만주군)
최종 보직 정치부사령 (공농적위군)
대총통 (만주군, 국가원수)
공식 초상화

개요

만주민주공화국의 초대 대총통, 만주인민공화국의 마지막 주석.

  1. 주 국어 위치
  2. 고숭덕시대 이후 병용 공용어 위치
  3. 할빈, 창춘, 뤼다 3개 시
  4. 후기 다당제가 승인되었던 1달 남짓까지도 계속 집권정당이었다.
  5. 중국 동시가입
  6. 쏘련의 모스크바 국립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에서 유학해 적기합창단의 작곡가를 맡았던 인물로, 로어로 리웨이짜이(Ли Вэйцай)라고 불렸다.
  7. 가상의 하얼빈 철도조합 활동 볼셰비키로 설정.
  8. 고숭민시기에 탈 우상화 정책의 반동으로 국가지도자를 추숭하는 포스터가 배포되곤 했었다.
  9. 일본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공산주의자, 독립성과 친소련의 노선을 저울질하다가 프라하의 봄을 목격한 소련의 압박으로 경질.
  10. 증언에 따르면 현실에서도 85년 즈음에 역임한 사회안전부장때 이미 맛이 간 상태였다 하니 몰락하는 공산국가를 상징할 수 있음.
  11. 혁명가들이 흔히 쓰는 가명으로 쓴 이름으로, 사실상의 이름이다.
  12. 말년의 모습이다. 이 사진을 촬영하고 나서 1년 뒤 의문사한다.
  13. 운남군 입대
  14. 일본 이름은 小笠原(오사가와라)로 그의 성씨가 세글자여서 그냥 이름처럼 썻다고 한다. 당시 비적들의 언어인 중어로는
  15. 은퇴 후 고향에서 사망했다.
  16. 대표적으로 반대한 리립삼은 그의 사상적인 이유로 반대했지, 다른 면에 있어선 지도자의 품격과 자격이 있는 인물이라고 인정했다. 이후 그가 자발적으로 은퇴한 이후 사소한 소외는 이루어졌지만 타국에서 벌어지던 본격적인 정치보복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17. 본명은 엘리자베타 파블로브나 키슈리나(Елизавета Павловна Кишкина)이며, 리샤(Ли Ша)는 결혼 후의 러시아어 애칭이자, 동아시아 지역에서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
  18. 특별한 교육기관에 속하는게 아니었고, 근공(勤工) 일하며 검학(俭学) 공부하는 유학 운동이었다.
  19. 이때를 회고한 마지총의 말로는 누가 독을타 먹인것 같았다고 했다. 피부색이 보통 사람색이 아니고, 시신 부검을 할때에 보니 손발의 끝이 검게 썩은듯 보였다 했다.
  20. 당시 사단장은 리두익이다. 백학림과 매우 친분이 두터운 인물이라 사실상 백학림의 지시를 따랐다.
  21. 당시 혁명원로들은 매우 고령이 되어 거동이 불가할 정도인 사람들이 대다수였으며, 활동이 가능한 사람중 로어화자는 거의 없었다.
  22. 중어식 이름이다.
  23. 그를 거두어준 신부가 그를 가르키며 "경사스러운 봄이다."라고 한것에서 착안한 것이라 한다. 이후 그의 중어식 이름에서 쓰였다.
  24. 24.0 24.1 자와 호를 겸하여 사용하였다, 필명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