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초 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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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1968 S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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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관 소개 ]
세계를 바꾸는 것은 달을 탐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혁명을 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로 후퇴하지 않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달을 비롯한 나머지 것들은 덤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 루이 알튀세르 (1918~1990) –


레프 트로츠키의 미국 이민과 미국의 사회주의 대혁명, 그리고 뒤따르는 사회주의와 제국주의 진영의 냉전 구도를 다루는 대체역사 세계관입니다.
독일의 제1차 세계 대전 승리, 러시아 혁명의 실패, 미국의 사회주의 대혁명 등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1922년부터 2022년까지의 장대한 역사를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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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unist 1968, 2022
멕시코 인민 민주 공화국 초대 대통령
프란시스코 "판초" 비야
Francisco "Pancho" Villa
본명 프란시스코 비야
Francisco Villa[1]
출생 1878년 6월 5일 (44세)
멕시코 합중국 두랑고 주 산후안델리오
국적 멕시코 합중국 (1878~1922)
멕시코 인민 민주 공화국 (1922~)
현직 멕시코 인민 민주 공화국 대통령
멕시코 혁명당 서기장
재임 기간 초대 대통령
1922년 1월 9일 ~ 현직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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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마리아 루스 코랄 (1892~現)
자녀 알베르토, 돌로레스
학력 없음
신체 177cm
종교 가톨릭[2]
소속 정당 멕시코 혁명당
약력

개요

¡Esta es una revolución para el pueblo mexicano!
¡Viva la revolución! ¡Viva la liberación! ¡Viva el socialismo!
이것은 멕시코 인민들을 위한 혁명입니다! 혁명 만세! 해방 만세! 사회주의 만세!

멕시코 혁명당 창당사
¡Los que están contra la revolución, halaguen a los capitalistas! ¡Estoy hablando de ustedes, Cabróns!
혁명에 반대하는 자들은 자본가들한테 아부나 떠라 하십시오! 너희 씹새끼들 말하는거다!

멕시코 혁명당 반대 시위에 대한 인터뷰에서

멕시코 인민 민주 공화국의 혁명가, 군인, 정치가. 멕시코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인 멕시코 혁명을 주도하였으며 이후 세워진 멕시코 인민 민주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생애

초기 생애

판초 비야는 1878년 6월 5일 멕시코의 두랑고 주 산후안델리오의 라 코요타다 목장의 가난한 소작농 집안에서 호세 도로테오 아랑고 아람불라(José Doroteo Arango Arámbula)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농사일을 한다고 공식적인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목장 주변 성당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며 스페인어와 간단한 산수 등을 배웠다. 이후 그의 아버지가 죽고 나서 학교도 그만 두고 소작농, 정육점 노동자, 건설 노동자로 일하였다. 1894년에 그는 치와와 주로 이사하였는데, 자신의 여동생이 농장주에게 강간 당한 후 살해된 것을 알게 된 후에 다시 두랑고로 돌아오게 되었다. 두랑고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여동생을 강간한 농장주를 죽이고, 농장의 말을 훔쳐 근처 시에라 마드레 옥시덴탈 산맥에서 유랑하며 산적이 되었다.

1902년, 그는 폭행 및 가축절도 혐의로 농촌 경비대에 체포되었다. 재판에서 사형은 면했지만, 군대로 보내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포르피리오 디아스 정권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입대한지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탈영하였다. 그 이후 치와와 주로 도피하였고, 산적 생활을 계속하였다. 1903년에는 장교 한 명을 죽인 후에 말을 훔치었고, 지주와 자본가들의 농장과 집을 털어 소작농과 주민들에게 나눠주는 것으로 명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프란시스코 비야(Francisco Villa), 판초 비야(Pancho Villa)[3]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멕시코 혁명군

1910년, 멕시코 대선에서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농민들의 지지를 받던 프란시스코 마데로를 투옥시키고 당선되자, 마데로를 중심으로 하여 그의 지지자들이 봉기를 일으키게 되었다. 판초 비야는 소작농 출신으로서, 지주와 자본가들을 우대하고 소작농들을 농촌 경비대 등의 정책으로 탄압하는 디아스 정권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었고, 자신이 그동안 함께한 산적들과 소작농들과 함께 봉기에 가담하였다.

북부 지역은 비야와 파스쿠알 오로스코에 의해 빠르게 점령되었고, 남부 또한 에밀리아노 사파타를 중심으로 혁명군이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었다. 거기에 시우다드후아레스나 치와와 같은 주요 도시들이 혁명군에게 넘어가면서, 1911년 5월 21일, 포르피리오는 마데로와 시우다드후아레스 조약을 체결한 후 프랑스 파리로 망명하였다.

5개월 동안 프란시스코 데라바라가 대통령직을 대신 수행하고, 새 대선이 치뤄지면서 프란시스코 마데로는 멕시코의 새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멕시코 혁명당

프란시스코 마데로의 집권 이후, 마데로는 토지 분배 등에 정책에서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고, 자본가와 지주들의 영향력에서 멕시코는 벗어날 수 없었다.[4] 이에 남부의 농민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던 에밀리아노 사파타아얄라 계획을 선언하여 토지 재분배를 주장하였는데, 판초 비야는 이에 관심을 가지고 토지 재분배를 포함한 좌익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특히 파스쿠알 오로스코와 북부에 있던 마곤주의자[5]들의 영향으로 판초 비야의 세력은 빠르게 좌경화되었다.

그런 도중 1912년 4월 3일, 마데로의 노동조건 개혁 반대로 인해 파스쿠알 오로스코는 붉은깃발군(Colorados)를 조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마데로는 이에 빅토리아노 우에르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게 했는데, 북부를 장악하고 있었던 판초 비야에게도 그를 도우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판초 비야는 이미 오로스코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었기에 1912년 6월 13일, 붉은깃발군으로 전향을 선언하며, 마데로를 향해 반기를 들었다.

멕시코 혁명

비판 및 논란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멕시코 혁명당 1912 -

선거 이력

여담


  1. 출생 시 이름은 호세 도로테오 아랑고 아람불라 (José Doroteo Arango Arámbula).
  2. 냉담자이다.
  3. 판초는 프란시스코의 애칭이다.
  4. 실제로 마데로는 대지주 출신이었다.
  5. 리카르도 마곤이 주장한 아나코 공산주의 사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