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1968 | 리조니 | Arrondissments | 레스 어틀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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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공화국 大韓共和國 | Republic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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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애국가 |
수도 | 경성 (京城) |
총 인구 | 20,438,000명 (1930년) 23,435,000명 (1939년) |
정치 체제 | 공화제, 중앙집권제, 내각제 |
역대 대통령 | 안창호 (1930~1937) 김창암 (1937~1940) |
역대 수상 | 이동녕 (1930~1933) 이승만 (1933~1937, 1938~1940) 신채호 (1937~1938) |
경제 체제 | 국가주도 계획경제, 일부 시장경제 |
총 GDP | $36,800,000,000 상당 (1939년, PPP) |
1인당 GDP | $1,600 상당 (1939년, PPP)[1] |
통화 | 대한공화국 원 |
국제 연맹 가입 | 1930년 |
개요
1930년 대한제국 국체 투표를 통해 대한제국이 붕괴되고 세워진 공화국이다.
헌법상으로는 1930년부터 1945년까지 총 15년 가량 존속했으나, 이중 1940년부터 1945년까지는 제3차 한일전쟁으로 인해 주요 정부수반들이 만주로 망명해 자유대한 정부를 수립하여 정상적으로 헌법이 작동할 수 없었으므로 일반적으로 1공화국의 존속 시기는 1930년부터 1940년까지로 여겨진다.
상세
정치
고종 재위 말기 때부터 이미 유명무실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던 황권이 이때 들어 완전히 폐지되었으며, 황제의 자리를 대한공화국 대통령이 대신하게 되었다. 체제는 외양상 이원집정부제, 실질적 의원내각제로 대통령이 내치와 외치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내각수상이 전권을 행사했다. 이는 워낙 성급하게 황제 폐위와 공화정 전환이 진행된지라 황제의 자리를 대통령으로만 대체하고 실질적인 헌법 개정은 차차 하기로 협약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0년대 대한공화국의 복잡한 정치 상황은 헌법 개정을 어렵게 하였고 1945년 신헌법이 발효되어 대한 제2공화국이 출범할 때까지 대통령과 수상의 권한이 명확하게 나누어지지 못했다.
정치적으로는 중도좌파부터 우익까지 각종 정치 세력들이 참여한 대한국민당과, 그 후신인 자유당이 장악하는 일당우위정당제의 구도가 나타났다. 제1야당으로 사회주의자들과 좌익 세력이 뭉친 한인사회당이 있었으나 제1공화국 내내 좌익은 12회 총선 직후 수립된 신채호 내각을 제외하면 권력을 잡지 못했고 그 신채호 내각마저도 중도우익 세력의 비협조로 인해 극히 짧은 기간동안만 존속했다. 한편 1925년 고려공산당의 어지러운 계파갈등을 봉합하고 탄생한 조선공산당은 원산, 군산, 부산 등 항만 도시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지지 기반을 넓히며 1930년대 후반 기성 정치권을 위협했고 비슷한 시기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 같은 파시즘 정당도 등장했다.
우익 내에서도 이승만을 위시로 한 제왕적 대통령제 지지파, 안창호를 위시로 한 온건파, 조소앙을 위시로 한 우익 내 좌파, 일부의 황실 복귀파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였으므로 정치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안창호 대통령이 이승만이 총리에 오르자 이에 반발해 국민당을 탈당하는 등 안창호 계파와 이승만 계파의 갈등이 특히 심각하였다. 이는 정부가 1940년 일본제국의 선전포고에 부적절하게 대처하는 이유가 되었다.
2차 세계 대전 개전 당시, 총리였던 이승만이 한강대교와 한강철교를 폭파하고 신의주로 도망치면서 국가 안보가 마비되어 불과 6주만에 한반도 전역이 일본에 의해 점령되었다. 김창암 대통령은 결사 항전을 주장하며 조소앙을 총리로 임명, 합이빈 지역으로 정부를 옮겨 자유대한 정부를 수립했다. 한편 일본 정부는 사리원을 수도로 하는 사리원 괴뢰정부(정식 명칭은 대한국)를 설립하고 박중양 전 총리를 총통으로 삼았다. 자세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한반도 전역 문서를 참조.
중국과 미국, 소련의 지원을 얻어 자유대한 정부는 1945년 서울 진공 작전 등을 통해 한반도 전역을 해방시켰고, 제1공화국의 헌법은 신헌법으로 대체되어 제2공화국이 출범한다.
역대 대통령
역대 총리
대수 | 이름 | 소속 정당 | 차수 | 임기 | 재임 일수 | 의회 대수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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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일 | 종료일 | ||||||||
17 | 이동녕 李東寧 |
대한국민당 | 2차 | 1930년 12월 1일 | 1933년 8월 30일 | 2년 274일 | 9대 | ||
18 | 이승만 李承晩 |
대한국민당 | 2차 | 1933년 8월 30일 | 1934년 6월 13일 | 286일 | 10대 | ||
19 | 자유당 | 3차 | 1934년 6월 13일 | 1937년 11월 24일 | 3년 166일 | 11대 | |||
20 | 신채호 申采浩 |
한인사회당 | 1차 | 1937년 11월 24일 | 1938년 8월 2일 | 250일 | 12대 | ||
21 | 이승만 李承晩 |
자유당 | 4차 | 1938년 8월 2일 | 1939년 8월 16일 | 1년 15일 | |||
22 | 5차 | 1939년 8월 16일 | 1940년 6월 22일 | 312일 | 13대 | [2] |
경제
그야말로 대 혼란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공업, 농업 기반은 제대로 복구되지 못했고 막대한 인력 손실도 신생 공화국의 경제를 어렵게 만들었다. 국가 채무는 1931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의 35.8%에 달했다. 하지만 전쟁 물자의 보급을 위해 구축된 현대적인 인프라 시설은 국내 상업의 호황을 가져왔고 이에 이동녕 총리는 계획경제를 통해 대한공화국의 경제를 점진적으로 회복시키려 한다. 후임 이승만 총리는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개선함과 동시에 미국, 중국으로부터 일정부분의 원조를 받아 경제 성장을 이룩하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1940년 1공화국이 멸망할 때까지 대한공화국의 정책 기조는 이동녕 총리의 정책과 큰 변함을 보이지 않았다.
1929년 미국 대공황 이후 세계 여러 국가들이 타격을 입었지만 수출 중심의 경제가 아니었던 대한 제1공화국은 그 여파에서 비껴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일본의 금해금 정책으로 급변한 엔화의 환율은 원화의 경쟁력을 잃게 만들었다. 또한 한국의 가장 큰 무역 거래 대상이었던 일본이 농업과 공업, 금융업 가릴것 없이 쇼와공황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으면서 한국의 경제 사정은 악화되었다. 이승만 내각은 다나카 내각의 금해금에 발을 맞추기 위해 마찬가지로 원화의 평가를 절하하는 방식으로 중국, 일본과의 무역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국내 구매력이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했고 이는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 하락을 의미했다. 전국에서 파업이 끊이지 않았으며, 당대 인기를 얻던 공산당은 이런 혼란한 사회 분위기를 부추겼다.
1937년 남포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남포 총파업이 발생하자 이승만 내각은 기마부대를 동원해 파업을 강경진압, 183명의 사망자와 403명의 부상자를 내는 대참사를 일으켰고 결국 이승만은 선거에서 패배해 실각한다. 그러나 새로 설립된 신채호 내각 역시 무능한 대처로 민심을 잃었고 이승만이 권좌에 복귀하며 근본적인 사회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 사회적인 불만이 1930년대 후반 지속적으로 고조되었다.
외교
안창호 대통령은 미국과의 외교 관계 개선을 내세우면서 중국, 일본과 점진적인 동맹을 맺고자 하였다. 후임 김창암 대통령은 안창호보다도 강력한 우익 내셔널리스트적인 성향으로, 중국국민당과 연대하여 일본의 군국주의와 소련의 공산주의를 동시에 견제하고자 하였고, 따라서 이승만 총리의 친미적 외교 정책에 힘을 실어주는 모습을 보였다. 좌익 세력은 노골적인 친소를 내세우지는 않았으나 조선 민족의 내셔널리티를 보존하기 위해 중립적인 반파시즘 외교를 표방해야함을 주장했다. 한편 박헌영을 위시로 한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적극적인 동맹을 통해 자주적인 노동자 자치 국가를 설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평가
황실이 다스린 구체제에서의 객관적 정세는 1차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수행이었다. 허나 현재의 신대한 공화국 체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단계의 적기임을 힘있게 주장하겠다. 10년, 20년이 걸리더라도 조선 인민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볼셰비키 국가를 수립할것이며 그 이후로는 발전에 따라 혁명의 제3단계인 공산주의의 혁명으로 전환돼야 할테이다. 박헌영, 1937년 남포 총파업에서의 지지 연설 |
- ↑ 비슷한 시기 일본제국과 비슷했다.
- ↑ 한강보도교 폭파 사건과 이승만 총리 국외 도피 사건으로 인한 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