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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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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1944년 11월 20일, 태평양전쟁 도중 대한민국의 제18대 국무총리인 김창암이 대한청년적위대 단원 김천호 일당에게 백주대낮에 살해된 사건. 전개1944년 11월 20일,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은 막바지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날 역시 김창암 총리는 관저에서 나와 기자들과 짧은 질의응답을 하고 총리부 청사로 출근하기 위해 집 앞에서 대기하던 관용차를 탔다. 차가 이동하던 중 다른 차 한 대가 김참암이 타고 있던 차를 들이박았다. 다행히도 김칭암 총리와 운전기사가 가벼운 부상을 입은 걸로 끝났고 사고 직후 두 명의 청년이 사고 현장에 모여든 인파 속에서 나와 차로 접근하더니 김창암 총리와 일행이 차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 순간, 그 두 명의 청년은 품 속에서 기관단총을 꺼내 김창암과 김창암의 보좌관인 선우진[4], 운전기사에게 총을 난사했다. 특히 암살범들은 김창암에게만 최소 30여 발을 쏘았다. 사람들이 급작스러운 총격에 놀라 흩어지자 암살범들은 도망쳤다. 보좌관 선우진과 운전기사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으나 김창암 총리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김창암을 살해한 범인 2명은 도주하였으나 사건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장경찰들의 총격을 받고 사살되었다. 범인과 배후경찰은 사살된 남자들의 지문을 통해 그들이 과거 대한공산당 산하조직인 대한청년전위대에서 활동하다가 수감되었었던 이들이라는 것을 확인했고, 곧 대한공산당을 사건의 배후라고 판단, 수사를 시작하였다. 영향각주 | |||||||||||||||||||
치올코우스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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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1936년 녹우크라이나 서북부 치올코우스키에서 벌어진 한국-녹우크라이나 동맹군 대 소련군의 전투. 한-녹오 동맹의 승리로 끝나면서 연해주 지방의 분쟁이 잠시동안 멈췄다. 배경
러시아는 해양 진출을 위해 대대로 부동항을 손애 넣고 싶어 해왔다. 극동에서 러시아가 보유하고있던 항구 중 그나마 가장 부동항의 가까운 항구도시는 연해주 프리모리예 지방의 볼로디보스토크[1]였는데, 러시아 내전 이후 한국과 일본이 연해주 지방에 완충지대를 두기 위해 극동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이 건국한 녹우크라이나를 지원하자 녹우크라이나 영토가 된 볼로디보스토크를 상실했다. 이에 소련은 부동항을 확보하고 극동에서의 입지를 다지고자 녹우크라이나를 병합하려 하였다. 한국의 입장에서 녹우크라이나는 일종의 방파제였다. 공산주의의 확산을 경계한 한국 정부는 국민회, 자유당, 사회당, 민주당 내각을 가리지 않고 녹우크라이나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안창호 내각은 소련으로부터의 증대되는 위험에 맞서 녹우크라이나와 동맹을 맺고 4만 여 명의 병력을 녹우크라이나 영내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전개1939년 5월 11일, 소규모의 소련군 기병대가 녹우크라이나군 국경 초소를 기습하얐으나 격퇴되었다. 신문에도 짤막하게만 보도될 정도로 하찮은 수준의 교전이었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국경에서의 긴장감이 높아졌고, 양측은 점점 더 많은 병력을 국경에 배치했다. 결과영향 | |||||||||||||||||||||||||||||||||||||||||||||||||||
- ↑ 당시 명칭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