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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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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 주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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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그냥 내놓으라고 해서 말을 안 들으면 목소리를 좀 높이면 될 것이고, 고함을 질러도 안 되면 총을 몇 발 쏘면 돼. 그저 그뿐이야. 이건 무척 쉬운 일이라고.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
1939년 11월 30일 러시아가 핀란드를 침공하여 발발한 전쟁. 1945년 3월 13일까지 지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로 간주된다. 당시 대한제국에서는 노분전쟁(露芬戰爭)으로 불렀다.
정식으로는 핀란드-러시아 전쟁/러시아-핀란드 전쟁이라고 부르지만, 대부분 겨울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러시아가 핀란드를 침공하자 다급해진 핀란드는 독일제국의 라이히스팍트에 가입한다.
배경
핀란드는 1150년 제1차 핀란드 십자군 이래로 스웨덴 왕국의 영토였고, 1809년 이후에는 러시아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1917년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자 핀란드는 독립을 선언하고 핀란드 내전에 돌입했고,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이 이끄는 백군이 독일 제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승리했다.
1920년 핀란드와 러시아는 두 국가의 경계선을 확정하는 타르투 조약(Treaty of Tartu)을 맺었다. 핀란드는 도시 페차모(Petsamo)와 북극해에 접한 항구 하나를 얻어냈다. 이후에도 국경 갈등은 지속적으로 있어왔지만, 어쨌든 명목상으로나마 러시아-핀란드의 국경선은 확정되었다.
하지만 사빈코프는 러시아 내전 동안 핀란드 지역을 상실한 것에 대해 많은 실망을 한 그는 이곳을 계속 탐냈다. 1930년대 초반 성공적으로 러시아 정상화를 이룩하고 빠른 경제 성장을 일궈낸 그의 눈에 핀란드는 먹기 딱 좋은 놓치기 아까운 고기처럼 보였을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광대한 영토를 잃은 상태였다. 때문에 사빈코프는 어떻게든 영토를 확장시켜야된다는 강박에 시달렸고, 그는 프랑스 코뮌이 독일을 치자 독일이 북유럽에 신경쓸 겨를이 없을거라고 생각하고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완전히 회복할 목적으로 핀란드 전체를 다시 러시아가 차지하려고했다.
1939년 러시아는 페트로그라드 일대의 안전 확보 등을 명목삼아 핀란드에 대대적인 영토 할양 및 조차를 요구하였다. 러시아가 핀란드에게 제시한 요구는 다음과 같다.
- 핀란드와 소련 국경 부근의 주요 공업지대 카리알라(Karjala)와 라플란드(Lappland) 지방 등을 포함해 약 2,300km2에 해당되는 영토의 할양.
- 수르사리(Suursaari) 섬 등 핀란드 만의 4개 섬과 올란드 제도를 할양.[1]
- 투르쿠(Turku),[2] 코트카(Kotka), 항코(Hanko), 헬싱키(Helsinki),[3] 비푸리(Viipuri)[4] 등 발트해에 속한 보트니아 만과 핀란드 만을 접하고 있는 주요 항구에 대한 소련군 주둔권 및 조차 권리 보장.[5]
이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퀴외스티 칼리오 핀란드 대통령은 러시아 대변인에게 "안 되오."라고 짧고 굵게 대답했다.
그러자 러시아 측 대표인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이제 내 역할은 끝났소. 나머지는 러시아군이 말할 것이오."라고 반 협박조로 대답한 뒤 러시아로 돌아갔다. 사빈코프는 핀란드가 요구를 거절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전쟁을 하기 위해 일부러 무리한 요구를 했고, 회담이 결렬되자 즉각 전쟁에 돌입할 태세에 들어갔다. 러시아는 이 시점에서 이미 핀란드를 병탄할 의도를 갖고 있었다.
핀란드는 당시 2차 벨트크리그에 대한 중립을 선언하고 러시아의 위와 같은 조치에 독일, 스웨덴에 도움을 청하여 중립을 유지하려 하였으나 일이 잘 안되어 결국은 실패하였다. 그리고...
1939년 11월 26일, 러시아-핀란드 국경 지대의 마이닐라(Mainila)에서 러시아는 핀란드를 침략할 명분을 만들기 위하여, 마치 자신들의 국경 수비 초소가 핀란드군에게 포격을 당한 것 마냥 위장한 자작극을 벌였다.[6] 이에 러시아는 핀란드군의 포격에 대한 반격을 구실삼아 4일 뒤 핀란드에 전면적인 침공을 개시했다.
전개
핀란드군의 대비
러시아군의 진격
전세역전
러시아군의 재반격
핀란드군의 반격과 종전
결과
핀란드는 기존 영토의 약 50%에 달하는 영토를 러시아에게서 얻어냈다. 우주방어와 치밀한 외교전을 통해 조국을 구하고 오히려 새로운 영토까지 얻은 만네르헤임은 지금까지도 핀란드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당시 핀란드의 외교는 약소국이 현실주의 외교를 통해 강대국에게 승리를 거둔 사례로 정치·외교학 저서에서 널리 인용되고 있다.
전쟁 기간 동안의 핀란드군은 전사자 약 5만 5,000여 명, 부상자 8만 5,000여 명의 피해를 입었으며 소련군은 전사자 24만 7천 명, 부상자 36만 9천 명이라는 경이적인 인명피해를 냈다. 부대 병력의 30%가 사상으로 전투능력을 상실하면 즉각 후방 철수 및 재편성이 필요한 상황으로 간주하는데, 개전시 러시아가 투입한 병력이 54만명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서류상으로도 참패했던 셈이다. 또한, "핀란드인들은 전투종족"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이득을 얻은 이들이 또 있는데, 바로 사미족이다. 러시아군의 맹공에 핀란드가 북부 지역을 포기하고 남부지역에서 수비에 집중하자, 핀란드 최북단에 있던 사미인들은 사미 공화국을 만들고 러시아에 대항했다. 하지만 숲과 호수 사이에서 끝까지 대항했음에도 러시아군의 공세에 의해 42년~43년 사이에 사실상 와해되긴 했다. 그럼에도 전후에 그 공로가 인정돼 이후 자치권이 확대되었다.
한편 핀란드 국민들은 이 전쟁 이전까지는 핀란드를 사실상 속국 취급하다가 막상 핀란드 국경에서 전쟁이 터지자 중립을 표방한 이웃나라 스웨덴에 대해 큰 배신감을 느꼈다. 사실 스웨덴 역시 자원병을 파견하고 적지 않은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등 겨울전쟁에서 큰 도움을 주었지만, 이는 스웨덴 국민 개인 자격이었고 스웨덴 정부는 중립을 지켰다. 핀란드 입장에서는 600년 가까이 스웨덴과 러시아의 지배를 번갈아서 받다가 고작 겨울전쟁 20여년 전(1917년)에 독립했고 스웨덴이 중립을 유지한 것이 곱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2차 벨트크리그가 터진 이후 인터네셔널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노르웨이가 스웨덴을 멸망시켰을때 꼬숩게 생각한 국민도 몇몇 있었다고 한다.
이후
평가
기타
관련 링크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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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핀란드의 육지와 해상의 요충지를 비롯한 영토 상당수를 내놓으라는 그야말로 날강도 짓이다.
- ↑ 핀란드의 옛 수도이다.
- ↑ 현재 핀란드의 수도이다. 이 당시에도 인구와 도시 규모에 있어 핀란드의 최대 도시였다.
- ↑ 핀란드의 유서 깊은 제2의 도시로 당시 핀란드 경제의 중추인 남부 공업지대의 중심지였다.
- ↑ 대부분 약 30년에서 40년 가량이었으며 기간을 준수할 것인가도 미지수였기에 그 뒷일은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 ↑ 당시 핀란드군이 배치했던 야포 중 마이닐라에 사거리가 닿는 장소에 배치된 야포는 없었고, 러시아의 역사가 파벨 압테카르가 러시아군의 일일 보고를 열람한 결과 마이닐라 포격 사건 당시 러시아군의 주장과는 달리 인명 손실이 없었으며, 따라서 이 사건은 조작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니키타 흐루쇼프도 회고록에서 해당 사건은 그리고리 쿨리크 원수에 의해 계획되었다고 서술했고, 1994년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도 해당 사건이 러시아 측의 전쟁 도발 행위의 일부였다는 점을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