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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이로스 Ήπειρος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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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기 | 문장 | ||||||||||||||||||
상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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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
이곳에서의 문명은 파라테티스 해에서 이루어진다. 파라테티스해는 바다면서도, 염도는 흑해와도 유사하다. 파라테티스해는 지리적으로 세 바다로 이루어진다. 지금의 헝가리쪽으로 들어간곳은 "토로(τολό)", 가장 큰 가운데 바다는 "아키아(Αρχία)", 가장 동쪽의 큰 바다를 "탄티아(Τάντια)"라 한다. 지금의 지중해는 대충 뭉뚱그려 "옥시토시아(οξυτοκία)" 라고 하는데, 그나마 문명과 가까운 바다로서 아드리아 해 부근을 "오스포스(Όσπος)", 그리고 에게해~키프로스 부근의 바다를 "니사코스(Νισάκος)"라 한다. 옥시토시아 해 부근은 대부분 식민도시인 경우가 많다.
인류가 거주하는 구역으로는 북방구, 남방구 그리고 니코사스와 그 부근의 민족인데, 북방구의 민족으로는 에펠로스, 남방구의 민족으로는 룩소르가 있다. 에펠로스의 룩소르는 본래 같은 뿌리의 민족이었으나 현재엔 서로 다른 민족단위로 분화되었다. 니코사스의 민족은 대체로 뭉뚱그려서 "사카스테(Σακάστε)" 라 통칭하는데 사카스테는 지금의 메소포타미아 지방까지도 포괄한다. 메소포타미아는 현재 이민족들이 난발하는 지방으로 기름진 땅이란 사실은 세계에 밝은 이라면 알고있지만 접근하기 어려운 땅 정도이다.
실제로 교류가 가능한 지역은 니코사스의 일부 지역에 불과하다. 또한 유럽에 존재하는 비문명 야만족도 존재하는데, 에스파냐~잉글랜드~갈리아 지방은 대체로 "아스투리아(Αστούρια)"라 부르고 그외 독일이나 발트에 해당하는 지역은 대충 "우스타리아(Ουστάρια)"라 부른다. 지금의 지브롤터라 부르는 곳은 사실상 세상의 끝으로 여겨져 "코토레아(κοτολέα)" 라 불리며 미지의 영역이다. 지형적으로는 지금의 그리스와 불가리아를 통틀어 "에스탈리아(Εσταλία)"라 부르고, 아나톨리아는 "옵티마르시아(οφτιμάρσια)"라 불린다.
실제로 전쟁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은 토로해 지역으로 토로해 위쪽에 에펠로스 본진인 에페이로스가 존재하고, 지금의 보스포루스 해협이라 할만한 아키아의 내해에 룩소르의 본진인 룩시아르가 존재한다. 아키아까지는 여러 도시국가들이 산재해 있으나, 탄티아는 사실상 미개척지역이라 보는것이 합당하다.
니코사스엔 사실상 유일하게 교류하는 지방도시인 비빌로스가 있다. 이외 에펠로스의 주요 독립 도시로는 에페이로스, 아이올로스, 파텔라시스, 라켈리아가 있다. 룩소르의 주요 독립 도시로는 록시아르, 에오론, 오모폴론, 니아필로르, 비산테가 있다. 에펠로스는 북방의 개척지를 통한 농업이 강력하며, 룩소르는 남방의 모든 무역망을 지배하는 상인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다만, 룩소르에 속하는 비산테는 바로 코앞에 남하를 노리는 에펠로스의 식민도시인 에톨로스가 있어 간접적으로 남방 무역에 간섭한다.
역사
에펠로스, 룩소르 두 민족은 지금의 불가리아쪽에 거주하던 단일 민족집단이었고, 이때 그들을 스스로 "필-로스(Φιλ-Ρος)" 라 칭하였다. 필과 로스가 각각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알 수 없다. 대체로 필로스라 합쳐 말한다. 이때 같은 민족이었다는 의미는 단일국가란 의미는 아니었다. 이때에도 여러 산재한 도시들의 연합에 가까운 형태였고, 신분제를 바탕으로 한 귀족공화정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체였다.
필로스 시대엔 대체로 모든 언어가 통용되었으며 교류와 왕래가 자유로웠다고 여겨진다. 이때 시대의 기록으로는 당시 그리고 현재에도 전설적인 영웅으로 추앙받던 영웅인 사로스의 여정을 기록한 《사로스 서사시》가 유일한데, 그 기록도 온전치 않다. 사로스 서사시에서 옅볼 수 있는 점은 언어가 통용되었고 그들은 청동기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상업이 존재하였다. 사로스 서사시는 특별하게도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언급이 유난히 많은데, 이는 과거에 아주 제한적인 마법이 사용되었다는 증거로 여겨지기도 한다. 현재 시대에는 초자연적인 현상, 즉 마법이라 할만한 것은 인간의 인지를 조작하는 능력, 즉 일종의 언변술이나 궤변술, 혹은 최면술과 같은 부분이며 물질에 작용하는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필로스 시대에 있어서 몇차례의 내전은 존재했던것으로 보인다. 문헌상 확인 가능한 최대도시는 "세살르디아(Σεσάλδια)" 인데, 이는 현재에도 축대만 남은 세살르디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아무튼 세살르디아와 어떠한 이유로 인해 전쟁을 했던 큰 세력을 가졌던 도시인 도시인 즈베스타이라 전쟁은 무려 한 세대라 할만한 10년이 넘게 이어졌는데, 이 전쟁이 지금의 에펠로스-룩소르의 분열, 즉 대분열을 가져온 직접적 원인으로 보여진다.
필로스 시대는 여러 방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첫째.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지 않은점, 둘째. 상업이 존재했던것, 셋째. 외부세계와 접촉한것, 넷째. 유의미한 수준의 자연철학이 등장한 것. 다섯번째. 문자와 기록을 남길 정도의 문명화가 되었다는 점에 있어서 주목해야 한다.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지 못한점은 길을 닦는 기술이 거의 전무했고, 단순한 수준의 교량만을 건설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또한 정치적으로 항상 분열된 상태였다. 상업은 이러한 교통의 악조건속에서 등장했는데 대체로 사람이 걸어서 다니는 상업이 이루어졌고 외부세계와 접촉함은 자연스레 상업을 발전시켰다. 또한 정치권력은 상업을 금권정치로서 이용하였다.
유의미한 수준의 자연철학이 등장한 것은 다섯번째의 문명화와 큰 연관성이 있다. 최초의 문자기록은 지금의 아나톨리아에 위치했던 민족집단인 "실라시아(Σιλασία)"와 관련이 있다. 실라시아는 청동기를 씀은 물론이요, 조직화된 사회와 수직적 체제를 통해 도시국가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왕국에 가까운 수준의 체제를 갖추었던 당대의 강대국이었다.
실라시아인들은 스스로를 실라지(Σίλαζι) 라고 칭하였고, 스스로의 문자는 실로포노(ξυλόφωνο)라 하였다. 이들의 문자는 단순한 선과 점으로 구성되었는데, 일종의 군사기호로서 사용되다가 이들의 체제 상 군인과 시민의 경계가 허물어져 있었기에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군인들은 이 군사기호를 확장시켜 상업에 활용하였고, 기호로서의 최초의 문자를 사용하였다. 음소를 가진 문자는 니사코스에서 발명된것으로 여겨지는데, 이것을 확장해 일종의 언어체계를 만든것은 파텔라시스의 선조격 도시국가인 메시니아에서 니사코스에서 유입된 점토판에 문자를 찍어 남긴 영수증, 그리고 기둥에 적힌 각인을 통해 이들이 음소문자를 사용하였으며[2], 현재에 사용하는 문자의 직계 조상격 언어를 사용하였음이 명확하다.
이러한 언어의 발달은 선대의 기억을 후대에 남길 수 있었으며, 이러한 인문학적 발전은 실라시아, 메시니아가 멸망한 후에도 필로스에서도 언어를 가질 수 있게 한 직접적인 근거가 되었다. 메시니아는 현재 필로스의 선조중 하나로 여겨진다. 가장 많이 계승된 종교/철학적 사상은 물활론으로, 메시니아의 마르셀루스가 주장하였다. 그는 종교적 신비주의자로 해가 뜨고, 해가 지는것은 천체가 살아있기 때문이라 말하였다. 그리고 태양과 달의 위계를 주장하였는데, "바라볼 수 없는 것." 은 더 숭고한것이라 생각하였다.
따라서, 맨눈으로 볼 수 없는 태양은 더 숭고하고, 바라볼 수 있는 달은 태양보다는 못하다고 보았다. 또한, 이분법적인 물질이해를 가지게 했는데, 바라볼 수 있는것과 없는것으로 나누며 물질은 그 자체에 깃든 영혼과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으로 나뉜다 보았다. 이때엔 종교와 철학이 아주 혼합된 형태였는데 이는 곧 태양을 숭배하는 생각을 변호하기 위해 철학적인 사유가 발생하였고, 곧 태양의 숭배가 목적이었다. 이때 근거로서 물활론이 이용되었다.
마르셀루스는 태양숭배를 주장하며 메시니아가 태양을 일종의 살아있는 생명체로 인식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태양을 인격화시키는 특유의 문화가 나타나도록 종용하였다. 태양은 남자의 형상으로서, 온몸에서 빛이 나고, 망토를 매고, 쟁기를 든 모습을, 달은 여성의 모습으로 모자를 쓰고, 머리 뒤에는 푸른 불꽃이 일어나는 존재로서 형상화하였다.[3] 결론적으로 마르셀루스는 물활론을 통해 물질의 이분법적 구조와, 태양숭배사상의 준 창시자 격으로 여겨진다.[4] 메시니아 시대엔 주목할만한 점은 하나 더 있다. 바로 메시니아의 식민도시중 하나였던 메시나에서 주장된 유물론적 관점이다. 유물론을 확인할 수 있는 주장으로서 태양을 단순한 불덩어리라고 주장한 메시나의 크로토니아스는 오직 물질만이 자연세계에 있어 본질적으로 "존재" 한다고 확언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 보았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것과 보이지 않는것으로 나누며 물질에 생명이 있다 주장한 마르셀루스에게 크로토니아스는 설령 염소와 같이 살아 움직이는 것에 생명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지만, 하물며 나무와 돌같이 주체적으로 움직이지도, 생각하지도, 먹고 먹히지도 않는 존재들이 살아있다 주장하는것은 실로 말도 안되는 소리라 주장하였다. 물론 그는 생명까지도 물질에 의해 나타난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돌이나 나무가 살아있는게 아니듯, 태양도 그저 정해진대로 움직이는 불덩어리에 불과하다 여겼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태양이던 달이던 둘다 태양과 달이란 자연물, 즉 물질에 불과하였지 딱히 특별한 존재로 여기진 않았다.
하물며, 눈으로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게 있다 한다면 바다나 호수도 태양빛이 반사되어 보이면 빛이나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운데 그러면 온갖 물들이 다 숭고한 존재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껍질이 빛을 반사하여 눈으로 쳐다보기 힘든 벌레도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운데, 그렇다면 벌레조차 숭고한가? 이 문제에 마르셀루스는 제대로 된 답변보다는 크로토니아스를 메시니아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화답하며 두 주장은 서로 독립적이게 되었고, 그들의 제자들 또한 적대적이게 되었다. 메시니아 시대때 이로 인해 따로 전쟁과 같은 사건은 없었으나, 이 물활론과 유물론은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메시니아 시대의 유산은 필로스 시대로 이어지게 된다. 메시니아 시대와 필로스 시대의 시대적·지정학적 차이가 존재하는데, 이는 좌시하기 어렵다. 짚어보자면 필로스 시대엔 메시니아 시대보다 농경면적이 넓어졌고, 산맥으로 인한 지역적 고립이 더욱 강화되었다. 지금의 불가리아에 존재하는 두 큰 산맥인 발칸산맥과 릴라-로도포스 산맥은 각각 "스타제라스(Σταρζέρας)", "오폴로스(Οπόλος)" 라 불렀는데[5], 스타제라스와 오폴로스 사이의 "아스트리아(αστρία)" 지방은 강을 끼고 농경지대가 형성되었으나 도시국가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도시라던가 성채같은걸 다 산맥을 끼고 만들었다는 것에 있다.
즉, 농경지와 도시는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하물며 도시는 당시엔 난공불락이라 봐도 다름이 없던 산맥에 건설되었다. 때문에, 일종의 봉건제가 형성되면서도 동시에 독립적인 도시들간의 견제체제가 이어졌다. 그렇다고 과거에 중심지였던 메시니아나 옵티마르시아에서도 꾸준한 견제가 존재했기에 외부의 개입과 내부의 분열은 중앙집권화를 불가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지금의 마르마라해 부분이 평야로서 붙어있었기에 이곳이 여러 세력이 노리는 핵심 요충지로 통했다.
아스트리아 지방은 일종의 불균형이 나타났는데, 생산활동이 이루어지는 농경지와 사람이 거주하며 정치의 중심지가 된 성이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므로 남부의 성과 북부의 성은 농경지를 차지하기 위해 대부분은 국지적으로, 가끔은 전면적인 투쟁이 이어지기도 하였다.
이때 농사를 하는 이들은 누군가는 자유인이었고, 누군가는 노예였으나 이들은 조직적인 군대에 저항할 바는 못되었고 이러한 농사에 있어서 정치적 불안은 농업이 크게 번성하지 못할 수준에 이을었고, 따라서 농업 생산성은 저조한 편이었다. 다만 이들도 가끔은 전쟁을 하지 않는 때가 있었는데, 바로 수확철에는 전쟁을 하지 않는 전통이 있었다. 이를 "우지말로스(Ουζίμαλος)" 라 표현하였다. 단어 자체의 의미는 도의적(道義), 공의적(公義) 이라는 뜻이었으나 이러한 도의적인 평화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이로서 이러한 전통은 도의적인것으로서 의무라던지 그런것은 아니었다. 또한, 이런 우지말로스적 전통은 하나 더 있는데, 이 아스트리아를 흐르는 강 "프라게노이(Φλαργένοι)" 의 관계시설을 파괴하지 않는 것인데, 웃기게도 이들이 이용한 프라게노이의 관계수로는 이들의 조상이 건설한것이었으나 만약 파괴한다면 복구할 능력이 없었기에, 이러한 전통이 생겨났다.[6]
필로스 시대에서 최초의 도시는 강의 어원이 되는 도시인 "프레기아(Φρέντια)"로 프레기아 시대에 강의 기초적인 관계수로가 생겨난 것으로 알려져있다. 필로스 시대의 세부 구분에서 프레기아는 중요한데, 프레기아때 나타난 특수한 종교적인 부분에 있다.
본래 존재하던 태양의 신격화 말고도 이젠 강의 신격화가 일어났다. 강은 그들에게 있어서 이젠 태양보다도 생활에 있어 더 가깝고, 또 중요했다. 마르셀루스가 태양의 신격화를 위한 근거로 사용한 물활론은 이젠 강의 신격화로서 이행되어야 했다.
이때 주요한 철학자로는 "테라노스(θεράνος)" 가 있다. 테라노스는 다음과 같은 연유로 물의 신성성을 주장하였다. 《물을 먹어야 사람이 살 수 있다.(필요성), 물은 세가지 형태로 자연에 무한하게 존재한다.(기체-고체-액체), 그리고 모든 세상의 물은 단일한 영혼을 지닌 위대한 존재다. (공간의 초월성)》 따라서 물은 없으면 죽고, 모든 공간에 무한하게 존재하면서도 모든 공간에서 단일한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큰 논란을 낳았다. 첫번째 이유인 필요성에 있어서 무조건 필요하다고 그게 무조건 신성한가? 물은 어디에나 있고 길가다가도 우물에서 퍼먹을 수 있는데 이렇게 우리 가까이 있는게 신성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는 태양과는 달리 우리와 가깝다는 점에서 중요성이 부각되면서도 신성성이라던가, 특별함은 누군가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두번째는 향후의 철학사에도, 또 당대에도 큰 이슈였는데 "물의 형태" 이다. 물은 자연상태에서도 액체로서, 고체인 얼음으로서, 끓여서 기체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형태가 변한것들도 동일한 물로 보아야 하는가? 와 같은 논란이 제기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물이 같은 영혼을 지녔다면 그럼 물의 본질은 영혼인가? 하지만 이 주장엔 선제조건으로서 어떠한 형태의 물이던, 아니면 공간적으로 분리된 물이던 다 같은 물이라는 논지가 기저에 깔려있다. 따라서 이 주장은 대체로 전자의 주장과 연동되는 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 논쟁은 그 자체로는 우리에게 유의미한 논쟁이라 보기엔 어렵다.
하지만 이 논쟁은 이전까지 없었던 새로운 논란을 맞이한다. 바로 상태는 변화하지만 실체는 영속하는 것, "아르케(αρχη)" 에 관한 것이다. 아르케 논쟁의 촉발이 의미하는 바로는 과거의 논쟁인 물의 형태 논쟁에서 물은 형태와 관계없이 동일한 속성인 물이란 것이 결론이 되었다. 물론 물의 연속적인 형태의 변화의 본질이 물 그 자체라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게 되었으나 공간적으로 분리된 물이 근본적으로 다 하나의 물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었다. 이를 공간의 초월성, 즉 "호포르(Χοπολε)" 에 관한 논쟁이다.
이후 필로스 시대의 후기는 모두 이 두 논쟁 가운데 있다. 아르케와 호포르의 관계는 분리되어있기도, 혹은 연동되어 있기도 하며 철학자들마다 서로 다른 견해를 보여왔다. 후기에서도 필로스 전기에서 이행기 시대에 있는 페누의 그라누비스는 태양을 아르케로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호포르와 아르케의 연동성을 주장했는데 단일성이라고도 보여질법한 주장을 하였다.
그는 "만물의 근원은 태양" 이라고 말한다. 그는 실로 추상적이고도 신비스러운 언어와 표현을 사용하였기에, 어떤 진의로서 말한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적어도 그가 의미하고자 한 의미로서 "아르케" 로서의 태양은 시작으로 말미암아 끝이 이것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는 태양이 모든것의 근원인 이유로 "빛"을 말한다. 모든것은 빛을 통해서만 볼 수 있고, 관찰될 수 있다. 우리가 인지하는것도 결국엔 빛에 의해서이다. 시각은 온전히 의지하고 있지만 청각이나 미각, 촉각이나 후각과 같은 다른 감각은 어떻게 태양에 의해 나타난다는 말인가? 그는 태양은 우리의 영혼에 빛을 비추어 우리가 모든 활동을 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존재라 말하였다. 우리가 밤에 달이 뜨고 잠을 자는 이유도 태양의 생명력을 받지 못해 모든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단순한 감각에 지나지 않고, 빛은 그 자체로 이 우주를 떠받드는 광대한 힘으로 구상된다. 그는 태양을 수식할때 즐겨 쓰는 표현으로 "우주의 눈(κοσμικό μάτι)" 이라 말한다. 대지 위의 모든것은 태양을 의지하며 가장 뜨거운 존재이며, 동시에 무한한 생명력을 가진 태양은 온 세상의 망라사방을 다 아우르는 권위를 가진것이다. 동시에, 태양은 모든것을 통찰할 수 있다 말한다. 그 근거로서 사계절이 나타날때에 들어나는 태양의 변화를 말한다. 사계절이 나타날때 들어나는 태양의 변화로는 낮의 길이나 빛의 밝기 등이 있는데, 이는 각 계절이 필요함을 태양이 알고있으며 우주의 눈으로서 우주를 통찰하고 우주의 안녕을 위한 균형자이자 절대자로서의 신적 존재라는 의미이다.
이런 자연적인 설명 말고도 그는 물활론적 세계관을 통해 "생명력(ζωτικότητα)"을 설명한다. 모든 물질은 각자의 본질적인 실체가 있다. 그 실체로 그라비누스는 이를 영혼이라 말하는데, 이 영혼은 태양을 통해서 생명력을 공급받는다. 생명력을 공급받는 존재들인 자연은 그 자체로 풍성하고, 또 영화롭다. 더불어 만물의 본질인 영혼에 생명을 주는 존재로서 이 생명을 받지 못한것들은 그 자체로 병들고 추해지는데, 그 근거로 박쥐를 말한다. 박쥐는 그 자체로 추하고 끔찍하게 생겼다고 규정하며, 둥굴속에 있는것들이나 흙속에 파묻혀있는것들은 이 태양의 생명력을 받지 못하는 하등한 존재라 계급을 규정짓는다.
실체인 생명과 형태인 육체는 생명이 일종의 화로처럼 계속 불타올라야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생명력도 과하면 안된다고 한다. 조화로운 상태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한데, 태양이 지고 뜨는 이유는 바로 과도한 생명력을 공급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물이 넘치면 과하다 하듯, 그리고 체온이 너무 더우면 열사병으로 죽을 수도 있듯이 생명력이 제 분수를 넘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태양은 그 무엇보다 뜨거우면서 생명력이 가득한 존재이기에 숭배의 대상이 될만하다는것이 페누의 그라누비스가 주장한 아르케이다.
이후 태양이 아르케라는 주장은 태양이 아닌 빛이 그 아르케로서 일종의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보면 질료가 된다는 주장으로 발전한다.[7] 또다른 주요 주장으로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라고 주장한 이노시스의 아플로시스가 있다.
- ↑ "명령하다" 라는 뜻의 "Ρέω"와 접미사 "νος"가 합쳐져 명령하는 사람이란 뜻이었으나 이후 관직의 이름이 되었다.
- ↑ 다만, 이때의 문자체계는 문자 자체에 부여된 숫자의 의미, 그리고 단순한 문자열의 의미 수준이다.
- ↑ 이당시 남성은 농사와 전쟁의 의무가 있었으므로 농사를 상징하는 쟁기, 그리고 전쟁을 상징하는 망토가 그 대표적인 상징이다. 또한, 여성은 남성을 돕는 존재로서 묘사되며 달이 태양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투영되어 나타났다.
- ↑ 이전부터 있던 태양숭배를 논리적으로 증명한 최초의 인물이기에, 사실상 태양숭배사상을 재창조한 인물로 평가된다.
- ↑ 현재에도 동일한 어원의 이름으로 불린다.
- ↑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들이 한번정도는 통일된 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로서의 질료(hyle)가 아닌 세상의 근본 원자로서의 질료에 가깝다. 형이상학적 발전은 이후 수백년 이후의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