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홀츠먼 (비바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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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대통령

미연합국 대통령
제43대 미국 부통령
엘리자베스 홀츠먼
Elizabeth Holtzman
출생 1941년 8월 11일(1941-08-11) (83세)
미국 뉴욕주 뉴욕시 브루클린
거주지 미국 뉴욕주 뉴욕시
재임 기간 제43대 부통령
1987년 1월 20일 ~ 1997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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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아버지 시드니 홀츠먼
어머니 필리아 라비츠 홀츠먼
배우자 독신주의자
혈통 러시아계 미국인, 유대계 미국인
종교 유대교
소속 정당 민주당
의원 선수 4 (하원)
2 (상원)
의원 대수 93, 94, 95, 96 (하원)
97, 98, 99, 100, 101 (상원)
지역구 뉴욕주 제16구 (하원)
뉴욕주 클래스 3 (상원)

개요

미국의 정치인, 법조인.

1989년부터 1997년까지 총 8년간 테드 케네디 행정부의 부통령직을 역임하였으며, 그 이전에는 재선 미국 상원의원(뉴욕주 / 1981~1989)과 5선 하원의원(뉴욕 16구 / 1973~1981)을 역임했다. 미국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여성 부통령이다.

이력

  • 1972.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예비선거 뉴욕주 대표단
  • 1973. 1. 뉴욕주 제16구 연방 하원의원 (~1981)
  • 1981. 1. 뉴욕주 연방 상원의원 (클래스 3 / ~1989)
  • 1989. 1. 제43대 미국 부통령
  • 1995.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예비선거 후보
  • 1996.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후보 (민주당 / 낙선)

생애

청년기

1941년 8월 11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러시아 이민자 출신 변호사인 시드니 홀츠먼과 헌터 칼리지 러시아문화학과 교수인 필리아 라비츠의 딸로 태어났다. 러시아계 가정에서 자랐지만 유대계였고 어릴 때 히브리어 학교에 다녔다. 이후 에이브러햄 링컨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그곳에서 1958년 학생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61년, 홀츠먼은 래드클리프 칼리지에서 미국사와 문학을 전공했고 우등생으로 졸업하였으며 4년 후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하였다. 당시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 정원 500명 중 여성이 15명 밖에 없었는데 홀츠먼이 그중 하나였다고 한다.

당시 미국 대학가는 진보적인 학풍에 물들어있었는데 홀츠먼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이끈 조지아 주 흑인 민권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전미 유색인종협의회(NAACP)의 법률 변호 및 교육 기금 형성을 위해 활동했다. 로스쿨을 졸업하고 뉴욕 주 변호사협회에 가입한 후에도 인권변호사로 일했고, 진보 성향 뉴욕 시장 존 린지는 그런 홀츠먼을 심상치 않게 봐주어 1967년 문화국 연락담당관으로 홀츠먼을 임명했다. 몇년 후 홀츠먼은 뉴욕주 민주당 지부 위원회에 가입하기 위해 공직을 떠났다. 홀츠먼은 1970년 뉴욕주 민주당 지부 위원회에서 꽤 고위 인사로 활약했고, 2년 후인 197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좌익 성향 후보자인 조지 맥거번을 지지하는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민주당 전당대회(DNC)에 참석하기도 했다.

하원의원

엘리자베스 홀츠먼은 맥거번과 테드 케네디의 당내 진보파의 지지를 업고 뉴욕주 제16구의 하원의원 선거의 민주당 예비선거에 출마한다. 16구 하원의원은 당시 25선의 최선임 하원의원이자 사법위원장 이매뉴얼 셀러(Emanuel Celler)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홀츠먼의 승리를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홀츠먼은 젊은 여성과 반전좌파, 유색인종의 표를 규합하여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셀러 의원을 꺾고 후보로 공천을 받았다. 1920년대부터 50년동안이나 이 지역에서 하원의원을 지내온 셀러는 지역구에 사무실도 안둘 정도로 지역구 관리에 소홀했는데, 이를 홀츠먼이 파고든 것으로, 아직까지도 이 기록은 경선에서 낙천한 가장 높은 선수의 현직 의원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뒤이은 본선에서는 16구 자체가 민주당에 아주 유리한 선거구였던 탓에 손쉽게 당선되었는데 이때 그녀의 나이가 31세에 불과했는데, 이는 역대 여성 하원의원 중 최연소의 기록을 깨는 것이었다.[1]

홀츠먼 의원은 경력을 살려 하원의원 재임 기간 동안 사법위원회에서 활동했는데, 국제법에 관한 소위원회 의장을 역임했고 특히 워터게이트 사건을 비롯한 보수파 공격에 두각을 드러냈다. 1972년 대선 직후 홀츠먼은 미국 뉴욕 동부지방법원에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의회의 승인 없이 전쟁을 확대했다며 위법 소송을 제기하였다. 지방법원은 닉슨과 국방부 측에 불리한 판결을 내렸는데, 이를 두고 닉슨 행정부에서 참모총장을 지낸 제임스 슐레진저가 연방대법원에 항소를 걸었고 이를 슐레진저 대 홀츠먼(Schlesinger v. Holtzman)이라고 한다. 연방 대법원은 닉슨 대통령이 의회의 승인 없이 중립 지역인 캄보디아에 공습을 명령한 것은 헌법 제2조를 위반한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로 총 200건 넘게 자행된 "비밀전쟁"의 역사는 종지부를 내렸고, 이는 미국이 평화주의적 외교정책을 펼치는데 역사적 전환점이 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사법위원회 의원으로서 홀츠먼은 워터게이트 사건에 가장 맹렬하게 대처한 의원 중 하나였는데 이 때문에 홀츠먼은 초선 의원이었는데도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불과 30대에 불과했던 홀츠먼 의원은 민주당 내 급진파의 영웅이 되었고, 닉슨을 포함한 워터게이트 사건의 실무자들이 구속됨에 따라 홀츠먼의 입지는 더욱 올라갔다. 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 사망한 필립 하트 부통령의 자리를 대체할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고려되기도 하였다.

뉴욕주 상원의원

1980년, 홀츠먼은 뉴욕주를 대표하는 미국 상원의원으로 출마했다. 당시 경선에서 맞붙은 상대는 그가 과거 상관으로 모셨던 존 린지 뉴욕시장이었는데, 큰 차이로 린지 시장을 꺾고 상원의원 후보로 공천을 받게 되었다.[2] 상대는 현직 4선 공화당 의원 제이컵 제비츠(Jacob Javits)였는데 제이컵 제비츠는 공화당 소속 답지 않게 상당히 좌파적인 견해를 보인 것으로 유명했다. 두명의 진보 후보자가 출마하자 이에 반발한 공화당 보수파는 1970년 상원의원 선거에 나왔다가 떨어진 제임스 L. 버클리를 후보로 옹립했다. 이 때문에 공화당 지지자들의 표심이 분열되어 홀츠먼이 제이컵 제비츠 의원을 불과 1%p 차로 꺾고 승리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홀츠먼은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활약하며 상원 국제법 전문가로 활약했는데 이 때문에 마이크 록펠러 행정부 시절 UN 대사를 지낸 진 커크패트릭과 충돌도 하고 협력도 하는 사이였다. 홀츠먼은 진 커크패트릭의 현실주의적 개입주의 외교 노선이 국제법 위법 소지가 있다고 생각해 커크패트릭 대사의 주장에 자주 딴지를 걸었다. 홀츠먼은 상원 외교위원장으로서 남미 독재정권과 이스라엘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고 김대중의 구명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또 일본과 독일의 전쟁범죄자들을 처벌해야한다는 소신을 강하게 가지고 있어 나치 전범자들을 미국 국내에서 추방하도록 하는 법을 앞장서 제정하였고, 1984년에는 남미에 숨어있는 나치 전범들을 찾는 미국 상원 조사단의 일원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1984년 대선에서 진보파를 대표하는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상대 후보자는 중도파의 월터 먼데일 전 부통령, 온건파의 게리 하트 상원의원, 급진좌파 성향의 제시 잭슨 목사 등이 있었고, 먼데일의 리더십에 대한 의심으로 여론조사에서 1위가 수시로 바뀌었다. 그러나 조지 맥거번 대통령이 예상과 달리 월터 먼데일 부통령을 지지하였고 민주당의 정신적 지주였던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도 홀츠먼 대신 먼데일을 지지하였다. 또 변화를 바라는 청년 세대의 표심이 하트로 분산되었고, 유색인종의 표는 잭슨 목사로 분산되었다. 그 결과 홀츠먼은 최종 3위로 예비선거에서 낙마한다.

1986년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알 다마토(Al D'Amato)와 맞붙었다. 알 다마토는 이탈리아계 이민자 출신으로 만만치 않은 후보자가 되었지만 당시는 마이클 록펠러 정권에 대한 피로감이 높아졌을 때라 여론조사와 달리 53% 대 45%라는 제법 큰 차이로 다마토를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부통령

1988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내에서 지지율 12%를 기록하는 등 차기 대권주자로 언급되었지만, 케네디 대통령의 막내 동생인 테드 케네디가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며 출마하자 홀츠먼은 출마를 고사하고 테드 케네디를 지원했다. 테드 케네디는 압도적인 격차로 상대 후보자들을 제압하고 민주당 후보자로 지명을 받았다. 당시 부통령 후보로는 딕 게파트 하원의원, 제럴딘 페라로 하원의원, 조 바이든 상원의원, 게리 하트 상원의원 등이 거론되었는데 테드 케네디는 진보적인 소신과 외교 활동으로 유명했던 홀츠먼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홀츠먼은 양당에서 배출된 첫번째 여성 부통령 후보였다.

현임 조지 부시 부통령은 폭 넓은 외교 활동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케네디 가문의 이름과 공화당 8년 집권의 피로감을 이길 수는 없었고, 1988년 대선의 승자는 테드 케네디 대통령 후보와 홀츠먼 부통령 후보에게 돌아간다. 이로써 홀츠먼은 미국 최초의 여성 부통령이 된다.

대통령 출마와 실패

그 이후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율 (득표수) 당선 여부 비고
1972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 뉴욕주 제16구 민주당 96,984 (65.58%) 당선 (1위) 초선
1974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 74,010 (78.89%) 재선
1976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 93,995 (82.87%) 3선
1978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 59,703 (81.89%) 4선
1980 미국 연방 상원의원 선거 뉴욕주 2,699,652 (44.88%) 초선
1986 미국 연방 상원의원 선거 2,378,197 (53.03%) 재선
1988 1988년 미국 부통령 선거 미합중국 47,150,815 (51.38% / 306명) 초선
1992 1992년 미국 부통령 선거 52,460,308 (56.91% / 506명) 재선
1996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47,485,434 (48.74% / 253명) 낙선 (2위)

여담

  • 실존 인물이다. 1980년 뉴욕주 상원의원 후보로 출마했으나, 좌파 성향의 공화당 현직 의원 제이컵 제비츠 의원이 경선 결과에 불복하고 제3지대 출마를 감행하는 바람에 진보 표가 분산되어 알 다마토 공화당 후보에게 1%p 차이로 패배하고 정계에서 사실상 물러났다.
  1. 수십년 후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가 이 기록을 깼다.
  2. 린지는 1975년 뉴욕시 구제금융 사건의 원인제공자로 평가가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