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개요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복귀하지 못함
오키나와가 독립하여 "류큐 공화국"으로 존속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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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명칭
디자인
외주에 맡길것이다.
역사
- 1946.01.29. 이즈 제도 반환
- 1952.02.10. 도카라 열도 반환
- 1953.12.25. 아마미 제도 반환
→ 미국 정부의 폭거로 인해 아마미의 경제 사정 악화, 독립 요구 여론 폭증
미국 정부는 류큐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민심을 자국으로 돌리기로 결정하였음.
1950년대
- 1956. 시마구루미 투쟁 (島ぐるみ闘争) 발발. 오키나와현민 약 15만명이 모여 대규모 집회 가져. 미국 측은 국무장관이 직접 오키나와를 방문, 오키나와 국민들에게 사죄하고 보상하는 태도를 보여 민심을 잠재움. 그러나 동시에 뒤에서는 복귀 단체들을 탄압함.
1960년대
- 1960. 시마구루미 투쟁에서 자신감을 얻은 오키나와현민들에 의해 오키나와 조국복귀협회(복귀협; 후키쿄 沖縄県祖国復帰協議会)가 출범했음.
본 역사에서는 초당적인 협력을 얻은 단체였으나, 미국 정부의 이간질로 인해 일부 보수 단체만이 지원. 또한 사쿠라들이 폭탄 테러를 일으키는 등 과격 행보로 미군은 잘못됐지만 독립운동은 너무 과격하다는 여론을 조성시키는데 성공함 (민족분열통치) - 베트남전쟁 발발. 린든 B. 존슨, JFK는 贊전파로 오키나와 반환에 소극적 태도 보임. 이때까지 오키나와의 역할은 "불침 항모"
- JFK 행정부에서는 오키나와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정치 공작을 일으킴. 친일 성향의 교원노조(오키나와 반환 여론 형성에 중추적 역할)에는 미국의 사쿠라를 보내서 분쇄시킴
- 오키나와 내 민심 안정 작전. 오키나와 사대당 등 극좌 성향 반미와 극우 성향 반미를 동시에 탄압, 친미 보수 및 리버럴을 지원했음 (오키나와의 리버럴 운동은 조금 찾아봐야할듯.) 확실한건 사대당과 인민당 등 좌파 정당들은 힘을 잃을 것임
- 美 국무부는 일본의 잔학 행위를 널리 알리며(1945년 전쟁으로 인구 1/4이 사망), 오키나와 내 반일 성향을 가진 일부 단체들을 지원하였음
- 1968년 초대 주석 선거에서 선거 공작을 통해 복귀협의 지원을 받았던 야라 조뵤 屋良朝苗 낙선. 반환에 신중론~회의론이었던 니시메 준지 西銘順治 오키나와 민주당 후보가 51.9% 대 48.1%로 당선됨
1970년대
- 1972년, 닉슨 행정부에서 친미 어용 독립 정부를 성립시켰음. 일본에게 돌려주는것보다, 어용으로 남기는게 나을 것이라는 판단 하임
정치
문화
외교
경제
기타
참고한 매체
한국측 자료
- 위키백과 - 오키나와 반환을 상세히 설명한 자료
- 아틀라스 뉴스 - 그냥 대강 이해하는데만 사용
- [file:///C:/Users/User/Downloads/KCI_FI002084303.pdf 오키나와의 외교적 특수성을 다룬 해외 논문 / 번역됨]
일본측 자료
- 미일안보조약과 오키나와 반환
- 니시메 준지 1968 주석선거 후보자
- 독립에 핵심적 역할을 한 야라 쵸보 前 오키나와 주석
- 1970. 코자 폭동 (최대의 반미 시위)
- [https://kotobank.jp/word/%E6%B2%96%E7%B8%84%E7%9C%8C%E7%A5%96%E5%9B%BD%E5%BE%A9%E5%B8%B0%E5%8D%94%E8%AD%B0%E4%BC%9A-169917 코토방크의 복귀협 관련 자료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자세한 자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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