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하 (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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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아름다운 세상은 1945년 모종의 이후로 이승만에게 커다란 변화가 생긴 뒤 대한민국6.25 전쟁 승리 이외에도 역사적으로 거대한 변화가 왔을 때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이승만의 변화와 그 아래 태어난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 그 외에도 아름다운 세상을 자처하는 수많은 국가들의 정치와 사회, 문화, 경제적 변화를 다룹니다.


대한민국 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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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4대 총통
신기하
辛基夏 | Shin Ki-ha
출생 1941년 4월 27일(1941-04-27) (88세)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송암리
사저 광주광역시 북구 풍향동 23-14
재임기간 제14대 총통
2004년 12월 10일 ~ 2008년 12월 9일
서명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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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영산 신씨[1]
부모 아버지 신홍렬, 어머니 이묘현
형제자매 2남 3녀 중 차남
배우자 김정숙
자녀 슬하 2남[2], 2녀
학력 함평나산국민학교 (졸업)
조선대학교부속중학교 (졸업)
광주제일고등학교 (졸업)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 (법학 / 석사)[3]
한양대학교 대학원 (법학 / 박사)[4]
병역 육군 대위 예편 (군법무관)
종교 가톨릭 (세례명: 베드로)
소속 정당 자유민주연합
의원 선수 7
의원 대수 10, 11, 12, 13, 14, 15, 16
지역구 광주 전국비례구
약칭
공식 초상화

개요


대한민국 제14대 총통 취임 선서

대한민국의 제14대 총통.

약력

생애

출생 및 성장

신기하는 1941년 4월 27일,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송암리에서 출생했다. 부친 신홍렬(호: 춘강, 1905년생)은 지역에서 서당을 운영하던 한학자로, 유교 고전을 가르치며 후학을 교육하였고, 모친 이묘현(함평 이씨, 1904~2003)은 가정 내에서 자녀 양육에 주력했다. 2남 3녀 중 차남으로 자란 그는 유교적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신기하는 함평나산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광주로 유학하여 조선대학교부속중학교광주제일고등학교를 거쳐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진학했다. 학부 졸업 후, 1970년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에서 법학 석사 학위를, 1993년에는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생 및 청년 시절

인권변호사

정치 입문

1982년, 제10대 의정의원 선거에서 신기하는 국민회의 소속으로 광주 동구에 출마해 처음으로 국회에 입성하였다. 광주 동구는 전통적으로 민주국민당의 지지 기반이 강한 지역으로, 국민회의 후보로서는 당선이 쉽지 않은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신기하는 광주 지역에서 오랜 기간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지역사회에 일정한 인지도를 쌓아왔고, 당시 국민회의 주석이었던 김대중의 전략적 영입과 선거 지원이 결합되면서, 결과적으로 접전 끝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초선 당시 신기하는 법률가 출신이라는 점과 조용하고 학구적인 인상으로 인해 정계 적응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다. 그러나 국회 활동 초기부터 사회복지, 인권 문제 등에 대한 입장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며 해당 분야의 정책 입안과 토론에 주력하였다. 특히 학술적 접근을 기반으로 한 입법 활동은 동료 의원들과 언론으로부터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후 11대, 12대, 13대 의정의원 선거에서도 같은 지역구에서 연이어 당선되며 4선 의원으로 자리매김했다. 입법 활동 경험이 축적되면서 당 내 위상도 점차 강화되었으며, 특히 1994년에는 여당이었던 자유당의 원내총무에 임명되며 본격적으로 당 지도부의 주요 인물로 부각되었다. 원내총무 재임 시기에는 주요 입법 조정과 정당 간 협상에 참여하며 여당 내 중진 의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신기하는 김대중 정부 2기 후반부에 이르러 당 내에서 이른바 '김대중의 브레인'으로 불리며 정책 조율 및 전략 수립에 깊이 관여하던 중진 인물로 평가받았다. 이로 인해 언론과 정치권 일각에서는 그를 차차기 총통 선거의 유력한 후보군 중 하나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다만 당시만 해도 그는 스스로 총통 선거 출마 가능성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으며, 공식 석상에서는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원론적인 입장만을 유지하였다.

12대 총통선 낙선과 재기

그러나 제12대 총통 선거를 앞두고 정치 지형이 급변하였다. 김대중 2기 정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국정 운영에 대한 지지율이 하락세를 보였고, 여권의 차기 주자로 거론되던 이기택, 한화갑 등 유력 정치인들이 잇따라 출마 포기를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당 내에서는 조직을 정비하고 선거를 이끌 수 있는 대체 후보를 긴급히 모색하게 되었으며, 신기하기 사실상 '추대' 형식으로 자유당의 총통 후보로 지명되었다.[5]

공식 선거운동 초기, 신 후보는 복지정책, 사회안전망 강화 등에서 명확한 입장을 제시하며 상대 정당인 민주국민당의 이회창 후보와의 차별화를 시도하였다. 특히 복지 및 사회 분야에서의 공약은 비교적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던 이회창 후보에 비해 진보적 이미지로 유권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러한 전략은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며, 초반 지지율 격차를 일부 좁히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선거 중반 이후, 이회창 후보 측은 신기하 후보의 정치적 배경을 부각하며 "신기하는 곧 김대중 3기"라는 구도를 형성하려는 선거 전략을 전개하였다. 이는 당시 김대중 정부에 대한 비판 여론과 맞물리며 유권자 사이에서 일정한 반향을 일으켰다. 반면 신기하 후보 측은 선거 초반부터 "신사적 선거운동"을 기조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공세에 대해 적극적인 반박이나 대응 없이 일관된 정책 중심 선거를 지속하였다. 이 점은 일부 언론과 정치 평론가들로부터 '프레임 대응 실패'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48.6% 대 42.5%로 이회창에게 패배하였으며, 이후의 행보는 비교적 신중한 정책 중심의 입법 활동에 집중되었다. 특히 대선 패배 이후 동교동계가 공중분해되고 이기택계한화갑계의 줄다리기로 당이 혼란에 빠지며 끝내 자유혁신당으로 개편되는 와중에도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2002년 15대 총선에서 험지 출신의 중립적이고 경험이 많은 비대위원장이 필요하다는 당 내 세력들의 강력한 요구로 인해 직을 계속해서 마다하다 끝내 비대위원장에 취임, 본인이 광주를 지역구로 두고 있던점에서 착안한 전국정당선언을 발표하며 만주 전역은 물론 평안권호남권까지 선전하는 정당이 될것이라 선언했다. 해당 선언의 파장은 그야말로 엄청났는데, 해당 선언에 의해 민국당을 "기독교를 이용하는 나쁜 지역주의 정당"으로 프레임화 하는데 성공했고, 여론조사에서 민국당에게 열세를 이뤄 범야권[6] 단독과반 저지조차 불투명하던 상황에서 상황을 역전시켜 자유혁신당 단독으로 전체 800석 중 452석을 얻는 파란을 일으킨다. 이에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그를 "선거의 제왕"이라는 칭호와 함께 총통 주자로 떠올렸고, 다시 차기 총통 주자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자유혁신당의 총선 승리 이후, 차기 총통 선거를 둘러싸고 당내 경쟁이 본격화되었다. 신기하 외에도 한화갑, 김기춘, 정동영, 김근태 등 복수의 주자들이 후보군으로 거론되었으나, 신기하는 비교적 안정적인 지지율 1위를 기록하며 유력 주자로 부상하였다. 특히 2003년 이후 이회창 정부가 여러 정책 혼선과 정치적 논란에 직면하며 지지율이 하락세에 접어들자, 대안 세력으로서의 자유혁신당과 신기하에 대한 기대가 점차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2004년 자유혁신당 전당대회에서 한화갑, 김근태 등을 제치고 총통 후보로 공식 지명되었다. 이후 부총통 후보로는 함흥 출신의 이강산을 지명하였다. 당시 상대는 서울수도시장이회창 1기 정부에서 노동부장관, 2기 정부에서 부총통으로 임기를 수행했던 최병렬. 당시 최병렬은 부총통에 당내 소장파로 꼽히던 오세훈을 지명하고 이회창 정부와 선을 긋는 모습으로 신기하의 지지율을 턱 밑까지 따라온 상태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선거운동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2004년 민국당 불법 대선자금 전달사건, 일명 차떼기 사건이 터지면서 최병렬이 자폭을 해버렸다. 최병렬은 모든것이 이회창 총통의 측근들 때문이라 주장했으나 당 내 비주류가 이 사건을 빌미로 최병렬을 비판하였으며, 오세훈도 최병렬이 대국민사과를 하지 않으면 사퇴하겠다는 등 민주국민당 전체가 흔들리면서 최병렬의 지지율은 폭락해버린다. 반면에 신기하는 강한 복지와 안정적 성장을 내세우면서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선거운동을 전개하였고, 덕분에 지지율은 50%대에서 안정적이게 유지되었다.

선거 직전까지 내홍에 휩쌓인 민국당은 선거 직전에야 신기하가 판사 시절 부정한 돈을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공격했으나 판세는 바뀌지 않았다. 결국 선거 결과 신기하는 52.4%, 최병렬은 38.7%라는 득표율을 얻으며 큰 표차로 최병렬을 꺾고 총통에 당선되었다.

제14대 총통

신기하 총통은 2004년 제14대 총통 선거에서 당선된 직후, 전임 김대중 정부의 정책 기조를 상당 부분 계승할 것임을 밝히며 행정의 연속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취임 연설을 통해 "경제적 자유와 사회적 정의는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야 할 두 개의 수레바퀴"라고 언급하며 국정운영의 중심축을 시장 중심의 경제 활성화와 복지체계 강화에 두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그는 "증산과 수출이 곧 애국"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국내 제조업 및 수출산업을 중심으로 한 생산기반 확대에 주력하였다. 특히 수출입 관련 규제 간소화, 중소기업 수출보험제도 개선, 선진국 기준에 맞춘 금융 자유화 등을 단계적으로 시행하였다. 또한 기업환경 개선을 위해 법인세 인하 및 외국인직접투자 유치를 확대하였으며, 대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투자-고용 선순환 구조를 유도하고자 했다. 이로 인해 그는 자유주의 정당 출신 정치인으로서 비교적 재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지도자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복지정책 확대에도 강한 의지를 보였다. 공공의료 인프라 확충과 보건소 기능 강화, 지방자치단체와 연계한 기초생활보장제도 개편 등 하위 복지체계를 재정비하였으며, 고령화 사회 진입에 대비한 장기요양보험의 도입도 추진하였다. 특히 공무원연금국민연금의 통합은 당시 여야 간 강한 이견이 존재한 민감한 사안이었으나, 신기하 정부는 이를 강행 처리하며 연금제도의 형평성과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려 했다. 이는 장기적으로는 연금 재정의 안정성을 도모한 개혁이었으나, 단기적으로는 공무원 단체 및 보수 언론의 반발을 낳기도 했다.

신기하 정부의 이러한 친기업·친복지 병행 전략은 그 자체로는 정책적 균형을 도모한 시도였지만, 정부 재정 운용에 상당한 부담을 주었다는 비판도 병존했다. 전임 김대중 정부 시절 무분별한 국채 발행이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한국 경제의 외환 취약성을 증폭시킨 바 있어, 신기하 정부는 국채 발행을 통한 재정 충당을 최대한 억제하였다. 대신 국방예산을 단계적으로 감축하여 복지지출 재원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재정 건전성 유지에는 효과를 보였으나, 국방력 유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병력 감축, 장비 현대화 예산 삭감, 병영 환경 개선 지연 등이 누적되면서, 야당은 이를 두고 "복지를 위해 안보를 희생시킨 결정"이라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보수 언론에서도 "국방 포퓰리즘"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며 논쟁이 이어졌다.

신기하 정부의 외교 및 안보 정책은 대체로 신중하고 안정지향적이었다. 그러나 집권 초기부터 국제 정세의 급변으로 인해 어려움에 직면했다. 2004년 태국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며 동남아 지역 정세가 급변했고, 같은 해 오르도스에서 발생한 민주화 시위는 한반도 안보 불안과 맞물려 주요 이슈로 부각되었다.

또한 전임 정부가 파병한 이라크 주둔 국군 전투부대의 장기화 문제도 신기하 정부의 주요 외교·국방 이슈였다. 신기하 정부는 군내 사상자 증가와 국민 여론 악화를 고려해, 2006년 철군을 결정하였으나, 이 역시 양 진영의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보수진영은 "국제적 신뢰를 훼손하는 무책임한 결정"이라 비판했고, 진보진영은 "철군이 지나치게 늦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신기하 정부가 이념적으로 명확한 지지 기반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

2008년 하반기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는 신기하 정부의 국정운영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국제 금융시장으로 확산되면서 한국 경제 역시 급격한 수출 감소, 주가 폭락, 실업률 증가 등 다방면에서 충격을 받았다. 신기하 정부는 경기부양책, 유동성 공급, 중소기업 금융지원 강화 등 대응책을 마련하였고, 한중일 통화스왑 확대 및 IMF와의 협의 등 국제적 협조도 추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 불안 심리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으며, 정부의 초기 대응이 선제적이지 못했다는 지적과 함께 대통령 지지율은 급격히 하락하였다. 이에 따라 여당 내에서도 책임론이 제기되었고, 야권은 이를 기점으로 조기 정권 교체론을 본격화하였다.

결국 신기하는 2008년 말 재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총통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퇴임 연설에서 "국민의 인내와 협력에 감사하며, 후임 정부가 안정적 국정 운영을 이어가길 바란다"고 밝히고, 정계 일선에서의 활동을 당분간 중단할 것을 시사하였다.

재선 실패와 퇴임 후

신기하는 2008년 총통직에서 퇴임한 후 한동안 공식적인 정치 활동에서 물러나, 광주 자택에서 조용한 생활을 이어갔다. 이후 약 7년간의 정치적 은둔기를 거친 그는 2015년경부터 학술 세미나 참석, 회고록 발간, 언론 기고 등을 통해 대외 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정계에서는 그를 한마음자유당 최고상임고문으로 추대하였고, 이를 수락하며 당 내 상징적 원로 인사로 복귀하였다.

이듬해, 정인규 정부에서 성폭력 게이트가 발생하면서 한마음자유당은 비상대책 체제로 전환되었고, 신기하는 이에 대응하기 위한 비상대책 전체회의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회의에서 그는 당 지도부의 미온적 대응을 강하게 비판하며, "정치적 책임 회피는 용납될 수 없다"고 발언하고 정인규 당시 총통에 대한 즉각적인 제명 조치를 촉구하였다. 해당 발언은 여론의 주목을 받았고, 당 내 인사들 사이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직후 신기하는 정계 은퇴 의사를 밝히며, 정치적 영향력 행사로부터 완전히 손을 떼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어 그는 한마음자유당을 탈당하고, 장제원 당시 국회의원의 권유로 동서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로 임용되어 학계로 활동 영역을 옮겼다.

이후 정치권으로의 복귀 제안이 이어졌으며, 특히 자유민주연합 측의 요청에 따라 총통상임고문직 제안을 수락하고 자민련에 복당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교단을 옮겨 서울여자대학교 행정학과 석좌교수로 재직하면서, 주로 정책학과 지방행정 분야 강의 및 연구 활동에 집중하였다. 이후로는 정당 활동보다는 학술 활동과 공공 정책 자문 등 비정치적 영역에서 제한적인 공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신기하 정부

평가

비판 및 논란

선거 이력

소속 정당

어록

여담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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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당공파(草堂公派) 30세 기(基) 항렬.
  2. 장남 신영록, 차남 신상록
  3. 석사 학위 논문 : 損失補償(손실보상) : 正當(정당)한 補償(보상)의 內容(내용)을 中心(중심)으로(1970).
  4. 박사 학위 논문 : 憲法上(헌법상) 公共福利(공공복리)에 關(관)한 硏究(연구) : 그 개념의 해석과 적용을 중심으로(1993).
  5. 부총통으로는 장춘 출신 호중량을 지명했다.
  6. 자유혁신당, 주권사회당, 녹두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