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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위꽃은 무엇을 원하여 피어났나 What Did the Silphium Bloom to Desire? | |
|---|---|
| 장르 | 대체역사, 유럽사 |
| 현황 | 연재 종료 |
| 연재자 | 김현제 |
| 연재 시작 | 2025년 06월 08일 (연재 시작일로부터 +183일, 0주년) |
| 라이선스 | 저작권 제공 안함 |
개요
| H₃rḗḱs Dei̯u̯ós-kw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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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é widyéte, diwós suhₓnū! |
"원시 인도유럽인의 유목민 문화가 유럽의 주류 생활 양식으로 이어져 왔다면?"이라는 질문을 전제로 하는 대체역사 세계관.
소개
| 결코 두려워 말지어다! 비록 지금을 살아냄이 씁쓸하고 고될지라도 ◈ 하늘을 가로지르는 황금 전차를 모는 자가 누구뇨 물푸레나무 줄기가지 나날이 뻗어나가는 이 세상 달려가라! 그리고 싸울지어다 그러니, 그대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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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사
선사시대
마이코프인은 오늘날의 캅카스 산맥 지역에서 살아가던 최초의 인도유럽민족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유목민으로 추정되며, 유라시아 대륙 곳곳으로 퍼지면서 말과 마차를 유라시아의 여러 민족들에게 소개하였다. 5000년 전 마이코프인들은 캅카스를 떠났다. 남하한 집단은 거대한 반도 지역에 진출하여 선주민을 정복하고, 히타이트라는 강대한 고대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들을 아나톨리아인이라고 한다.
반면, 북상한 집단 즉 얌나야인은 광활한 초원에서 번성하고 동얌나야인 · 서얌나야인 · 북얌나야인으로 갈라졌다. 4500년 전 동얌나야인 중 일부가 헬라스 반도에 정착하여 아르브리인과 헬라스인의 조상이 되었으며, 나머지는 카스피해의 동쪽 연안 지역을 따라서 북상했다. 4000년 전 카스피 얌나야인은 또다시 분기하였는데 캅카스로 회귀한 집단은 하이크인, 아시아로 진출한 집단은 아리아인의 조상이 되었다.
동시대 서얌나야인 역시 분기를 겪었다. 서얌나야인 중 일부가 흑해 북안을 거쳐 이동하고 북방 설원 지역의 원주민과 혼혈을 이룬 뒤 아시아 내륙 지역으로 진출하여 토하르인의 조상이 되었으며, 나머지는 카스피해 북쪽의 초원지대를 거쳐 유럽으로 진출하여 켈트인과 라틴인의 조상인 킴메르인이 되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나뉘어진 것은 북얌나야인이다. 이들은 3500년 전 서유럽 방향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순서대로 스클라브인 · 유라테인 · 누르스라인의 조상이 되었다.
상고시대
상고시대는 쟁쟁한 유목민족들 간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시대였다. 한정된 목초지를 두고 피 튀기는 경쟁이 벌어졌으며, 기술과 문화는 오로지 전쟁에서의 승리를 우선시하여 발전하는 경향성을 띄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마차를 모는 전쟁의 신인 "신성한 쌍둥이"는 주신[1] 바로 다음의 신격으로 대접 받는 등 드높은 인기를 자랑했으며, 어느 민족 할 것 없이 강대한 군사력을 갈구하며 신성한 쌍둥이를 숭상했다.
2700년 전에는 유럽 최초의 유목 제국인 킴메르 왕조가 등장하였다. 킴메르는 서-남유럽 전역을 거느리고 압도적인 국력을 발휘하면서 유럽 문명의 초석을 다졌다. 파리시 · 트레베리 · 인수브레스 · 보이 · 로마 · 에르비스키 · 스코르디스키 · 세르디 등 유력한 씨족은 점차 제후(諸侯)화되었으며, 각 가문은 그들의 전통적인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인근 지역의 미개인들을 무자비한 말발굽 아래 복속시켜 나갔다.
한편으로 남부의 반도 지역들은 목축에 맞지 않는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외세의 침략에도 취약하여 일상적으로 약탈 피해가 일어났지만 중앙과 산맥으로 가로 막혀 정부의 통제력이 미치기 어려웠다. 이러한 문제는 단순한 무력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성과 지성에 의한 보다 체계적인 정치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이내 철학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2500년 전 헬라스 반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고전시대
킴메르의 남부 일대에서는 헬라스 철학의 정치전략을 받아들이면서 향토 특색에 맞지 않던 유목민 문화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바로 라틴인의 기원이다. 라틴인은 생활 양식을 농경으로 전환하여 밭과 농장을 일구기 시작했으며 이윽고 지중해를 접한다는 이점과 풍부한 토산물을 중심으로 활발한 대외무역을 개진하기에 이른다. 무역도시에서 출발한 라티움은, 이내 유럽과 외세를 연결하는 창구가 되었다.
2000년 전, 북아프리카의 세력들로부터 수입한 "실피움"이 소개되자 유럽은 충격에 빠진다. 실피움은 아위속의 식물로서 그 향이 무척이나 독특할 뿐만 아니라 춘약 · 정력제 · 피임약 · 낙태약 등 성적으로 유의미한 효과를 띄었기 때문에, 그 매력이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기회를 포착한 라티움은 수입 물량을 전부 확보하고 유통량을 조절하면서 유럽 일대를 쥐락펴락하기 시작했다. 일개 향신료를 무기화한 것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불만이 터져나왔다. 당연한 이치였다. 라티움의 횡포를 참지 못한 인접 세력들이 선전포고하면서 희대의 촌극이 벌어졌는데 이를 "아위꽃 전쟁"이라고 부른다. 아위꽃 전쟁은 대를 이으며 장장 100년 동안 이어졌지만, 정작 실피움 과수확으로 점차 씨가 말라버린 탓에 종극에는 전쟁의 의미가 흐려지며 유야무야 종전되었다. 득보다 실이 더 컸던 전쟁으로 인해 유럽은 300년의 정체기를 겪어야 했다.
남유럽 국가들의 전성기가 지나고 찾아온 정체기는, 달리 보면 다시금 찾아온 유목 제국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예전의 킴메르만큼 뛰어난 통솔력을 발휘하는 국가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나마 킴메르의 직계 후손인 켈트가 그 아성에 근접했지만, 동남유럽을 제패하며 쟁쟁한 라이벌로 올라 선 사르마트나 북유럽에서 밀고 내려오는 신흥 세력들로 하여금 그 위세를 완전히 떨치는 데 있어 분명한 한계를 보여주었다.
사르마트가 동남유럽을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정신 문화의 힘이었다. 비록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기는 했지만, 인두세 납부를 전제로 복속한 이민족들의 종교적 자유를 너그러이 인정하는 포용력 있는 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게다가 군에 입대하여 공적을 세우면 지배계층으로 진입할 수 있고 유공자를 다수 배출한 민족에게는 자치권까지 부여하는 등 유동적인 사회구조를 띄었기에, 피지배층의 충성도를 충분히 끌어낼 만 했다.[2]
중세시대
약 1500년 전, 북아시아의 강성한 유목민족인 수오미족과 사미족이 유럽으로 유입되었다. 이를 "사메 대이동"이라고 부른다. 해당 사건으로 인해 북유럽의 스클라브인 · 유라테인 · 누르스라인들은 유럽 내륙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되었으며, 켈트와 사르마트가 양립하던 균형이 서서히 깨지기 시작한다.
특히 스클라브와 유라테는 혈맹을 맺고 사르마트를 공략하여 전면전을 벌였는데, 오랜 평화로 인해 군사력이 무뎌진 나머지 사르마트의 성벽들은 너무나 쉽게 격파당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전선에 직접 나섰던 사르마트 국왕을 비롯하여 여러 정부요인의 연이은 전사로 정치 권력에 공백이 생겼고, 그로 인해 내부 결속력마저 느슨해지자 사르마트 내의 힘있는 자치령들은 중앙정부의 통제로부터 떨어져 나가며 독립을 선포하였다. 새로이 독립한 아르브리 자치령 · 헬라스 자치령 · 하이크 자치령은 내실을 다지는데 집중하였기 때문에 스클라브와 유라테 역시 더 이상의 인명 소모를 원하지 않았다. 사르마트는 수도 인근의 국소한 지역으로 축소되며 간신히 멸망을 면했고, 사방의 영토를 뜯어먹은 인접국들은 이때의 소득을 양분 삼아 살을 불려나갔다.
누르스라 역시 영토 확장을 목표했지만 켈트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거기다가 동방의 이웃 민족들이 생각보다도 빨리 큰 소득을 얻어내면서 누르스라의 입지는 벼랑 끝에 놓인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약 1300년 전, 위대한 발명가들은 참나무와 철판, 양모와 타르로 역사에 길이 남을 걸작품을 만들어냈다. 용머리가 달린 배 "랑스킵"을 탄 선원들은 험한 북해를 항해했고 이내 새로운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위기를 기회로 바꾼 모험심 넘치는 전사들을 "위킹가즈"라고 불렀으니, 이들이 바로 바이킹의 시작이었다. 바이킹의 팽창은 300년 동안 지속되었지만, 약 1000년 전 스클라브 왕조의 등장으로 저지당하고 만다.
스클라브 왕조는 동유럽은 물론이요 당대 켈트의 최대 도시였던 파리시의 턱끝까지 다다랐을 정도로 강대하였다. 이렇듯이 기마대를 위시한 스클라브군의 성취는 탁월했지만, 막상 피레네산맥과 알프스산맥을 넘지 못하는 등 천문학적 예산을 투입한 것에 비해 아쉬운 성적을 내면서 경제 상황을 악화시켰다. 결국 스클라브 왕조는 발트의 제후국들이 유라테 기사단국을 구성하며 분립되는 것을 시작으로 짧은 황금기를 맛보고 저물게 되었다.
이후 권력을 쥔 것은 라티움이었다. 라티움의 로마 제국은 스클라브의 잔존 세력을 동방으로 몰아내고 인본주의 철학에 근간을 두어 국정을 다스렸다. 500년에 이르는 로마 제국의 통치기는 전통적인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문명 혁명을 가져왔으며, 철학은 중세 유럽의 지배적인 시대정신이 되었다. 고등교육기관인 수사학학교가 전 유럽에 걸쳐 설치되었으며, 학황(學皇)이라고도 하는 총대학자의 지휘 아래 실력있는 인재들을 육성하였다. 다만, 엘리트주의 일변도의 사회구조 때문에 되려 인류애와 인간미가 결여되어 있었던 시대로 평가된다.
근현대
약 500년 전, 사르마트의 중흥으로 장차 유럽사 최대의 유목 제국이 되는 아리아 왕조가 창건된다. 사르마트의 첫 타겟은 과거 영광스럽던 시대에 주인을 배반한 역적들, 즉 아르브리 · 헬라스 · 하이크였다.
헬라스 반도의 뛰어난 기병들은 아리아에 용맹하게 맞섰지만 결국 패망하고, 조국을 잃은 이들은 용병 노릇을 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이때, 기병들의 유능함에 주목한 유라테 기사단국의 입법부가 고용에 직접 나서서 정예 기병 부대를 창설하였다. 유라테 기병대는 특징적인 날개 장식과 5m 차징랜스로 적군에게는 극심한 공포를 안겨주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군공으로 고용주에게 보은하였다. 이때의 성장을 기반으로 유라테는 연합왕국 체제로 거듭나게 된다.
원했던대로 하이크를 복속한 이후, 아리아 왕조는 몇 년 간 본토에 잠자코 머물렀다. 때문에 더 이상의 확장은 없으리라고 판단되었지만, 느닷없이 군사를 다시 일으켜 이란과 북인도까지 순식간에 집어삼키는 야욕을 보여주었다. 그제서야 위기감을 느낀 로마 제국은 무력 충돌에 부리나케 대비했지만 갈고닦인 전사와 백면서생 사이의 싸움이란 성립조차 되지 못했다. 스클라브와 달리 아리아는 알프스마저 넘어갔고, 로마를 함락시켰다.
다음 차례는 켈트와 누르스라였다. 상대가 해상 환경에 취약한 유목민족이었으므로 켈트는 브리튼섬, 누르스라는 툴레섬으로 넘어가 겨우 국체를 보존하였지만 대부분의 영토가 아리아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어서 아리아군은 윌란 반도를 다리 삼아 스칸디나비아로 진출하지만, 경험해본 적 없는 추위로 인해 더 이상의 북진은 포기하고 유라테와 스클라브를 공략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스클라브는 수백 년 전에 얻은 교훈이 있었던 까닭에 유럽 내에서의 갈등 상황을 최대한 피하려는 민심이 지배적이었고, 결국 매국노들이 반란을 주도하여 국왕을 시해하고 아리아에 주권을 넘긴다. 한편으로 대륙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유라테는 끝까지 항전했으며 가장 오랜 기간 치열하게 전투를 치른 끝에 아리아의 부마국 지위를 가진 반종속국이 되었다.
위와 같이 아리아는 끝없는 정복사업으로 유라시아에 걸친 대국이 되었다. 다만 철학의 중심지였던 라티움을 우대하거나, 토하라를 끼고 동쪽 국경이 닿아있던 명과 청 등 중화제국과 긴밀히 교류하면서 융성한 문화를 이룩하는 등 그간의 유목 제국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그럼에도 제국의 시대는 약 200여 년에 그쳤으며, 위대한 정복자들은 고향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국가 목록
| 21세기 유럽의 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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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 누르스라 제국 : 크누트 왕조가 다스리는 게르만인의 민족 국가. 수도는 키오프만하운, 최대도시는 스톡홀름, 통치체제는 입헌군주제, 국가원수는 국왕, 정부수반은 총리이다. 이들은 바이킹의 직계 후손들로서 내륙 지역에서는 기마 민족인 켈트인이나 발트-슬라브인과의 경쟁에서 밀려나 바다로 시선을 돌릴 수 밖에 없었지만, 오히려 이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어 굳건한 해양 군사 제국을 건설하는데 성공했다.
- 사메 연방 : 우랄인의 민족 국가. 수도는 투르쿠, 최대도시는 헬싱키, 통치체제는 민주집중제 · 연방제, 최고지도자는 총서기, 국가원수는 국가주석, 행정수반은 정부수석이다. 북아시아에서 이주한 수오미족과 사미족을 원류로 삼으며, 아직까지도 순록 유목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민족주의에 기반한 왜곡된 역사관을 진지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많아 사회문제로까지 번져가고 있다.
- 유라테 연합왕국 : 발트인의 민족 국가. 수도 및 최대도시는 리가, 통치체제는 입헌군주제, 국가원수는 국왕, 행정수반은 추밀원장이다. 유라테는 과거 기사단국이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당시에 운용하던 기병대는 아직까지도 용맹함의 심볼로 통할 정도로 유럽 전역에 기세를 떨쳤다.
서유럽
- 켈트 합중국 : 켈트인의 민족 국가. 수도는 파리시, 최대 도시는 누아다, 통치체제는 대통령중심제 · 양원제 · 연방제, 국가원수 및 행정수반은 대통령이다. 유럽의 비옥한 평야지대 대부분을 영토로 가지고 있어 풍부한 경제생태계를 자랑하며, 실제로 국가의 중심 대도시 역시 서부에 편중되어 있다. 다만 대내적으로는 정치적 혼란이 극심한 국가로, 월경지인 서남부 지역은 오랜 세월 동안 본토와 단절되면서 별개의 문화 정체성을 구축한 끝에 분리주의 세력이 극성을 부리며, 동부 지역은 기독교인이 많이 산다는 이유로 주요 국가 사업에서 소외되어 개발이 지지부진한 관계로 반정부 정서가 들끓는 상태이다.
- 나파로아 왕국 : 바스코네스인의 민족 국가. 수도 및 최대도시는 이루냐, 통치체제는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및 행정수반은 국왕이다. 피레네산맥에 걸쳐 있는 보잘것없는 소국이지만, 역사적으로 이베리아 반도에 끼친 정치적 영향이 어마어마하다. 일각에서는 나파로아를 중심으로 이베리아연방을 건국하여 유럽 판도를 재편하자는 주장까지 나온다.
- 타르테소스 왕국 : 투르데타니아인의 민족 국가. 수도 및 최대도시는 카디스, 통치체제는 입헌군주제, 국가원수는 국왕, 행정수반은 국가수상이다. 대표적인 친아프리카 진영의 구성원으로서 북아프리카의 국가들과 손을 잡고 지중해의 출입로를 제멋대로 틀어막고 있다. 국영기업인 항로통제공사가 무역선들에게 뜯어내는 통행료는 타르테소스 왕실의 주요 수입원이며, 이러한 현상을 빗대어 해적왕이라는 멸칭까지 등장한 상황이기에 왕실에서는 이미지 탈피를 위해 부던히 노력하는 중이다.
남유럽
- 라티움 공화국 : 라틴인의 민족 국가. 수도 및 최대도시는 로마, 통치체제는 의원내각제 · 양원제, 국가원수는 대통령, 정부수반은 총리이다. 전유럽에 민주화 열풍을 촉발시킨 1789년의 라티움 혁명이나, 1799년 제1통령으로 집권하여 조국을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은 나폴레오네 디부오나파르테 등으로 인해 최초의 근대적 민주국가로서의 자부심이 엄청나다. 영토는 모나코 회랑과 코르시카-사르데냐 섬을 중심으로 크게 나뉘는데, 동라티움은 국가의 중심지인 반면 서라티움은 이베리아연방의 잠재적 영토로 간주되는 등 여러모로 켈트 합중국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다.
- 아르브리 왕국 : 알바니아인의 민족 국가. 수도 및 최대도시는 두러스, 통치체제는 입헌군주제, 국가원수는 국왕, 정부수반은 총리이다. 디나라산맥의 지세를 따라 형성된 국가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국토 대부분이 산간지역이지만, 15세기의 군사 지도자인 제르지 카스트리오티가 외세를 상대로 결사항전하며 지켜낸 영토가 굳어져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 국민 정서의 척추로 기능하고 있다. 헬라스, 하이크와 함께 유럽교회회의의 구성국이다.
- 헬라스 공화국 : 그리스인의 민족 국가. 수도 및 최대도시는 아테네, 통치체제는 의원내각제 · 단원제, 국가원수는 대통령, 정부수반은 총리이다. 서양 철학의 발원지이지만 고대 사르마트 제국의 지배로 기독교화된 이후 독실한 종교국가가 되었다. 온화한 기후와 아름다운 풍경으로 관광업이 발전해 있지만 그 외의 산업이 부실하여 국가부도위기까지 몰린 적이 있기도 하다. 아르브리, 하이크와 함께 유럽교회회의의 구성국이다.
동유럽
- 스클라브 제국 : 류리크 왕조가 다스리는 슬라브인의 민족 국가. 수도는 노브고로드, 최대도시는 모스크바, 통치체제는 입헌군주제, 국가원수는 황제, 정부수반은 내각대신이다. 아리아 왕조의 멸망 이후 정통 왕정이 복고되었지만 지지도는 그다지 높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나마도 연속된 실책으로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에서 나오는 생산력마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 사르마트 공화국 : 사르마트인의 민족 국가. 수도 및 최대도시는 알라니아, 통치체제는 이원집정부제 · 단원제, 국가원수는 대통령, 정부수반은 총리이다. 역사상 2번이나 강대한 유목 제국을 건설하였으나 현재는 동유럽의 그냥저냥한 중견국으로 남아있다. 주변에 기독교 국가들이 많은 것에 비해 이곳에서는 종교 인구 자체가 절멸 수준인데, 이는 사르마트가 극단적인 세속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 하이크 연방공화국 : 아르메니아인의 민족 국가. 수도 및 최대도시는 자우지카우, 통치체제는 대통령중심제 · 단원제, 국가원수 및 정부수반은 대통령이다. 기원전 321년 아르메니아 왕국의 건국 이래 2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러 차례 국체가 바뀌면서 적통을 이어오다가, 20세기 초 안드라닉 오자냔이나 가레긴 느주데흐 등의 군벌이 주도한 혁명에 의해 민주화를 이룩하였다. 아르브리, 헬라스와 함께 유럽교회회의의 구성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