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 (불꽃놀이)

[ 소개 ]
모두다 한자리에 모여 부르는 노래소리 흥겨워
나비처럼 모닥불 춤추면 불꽃놀이 밤은 깊어가네
맘에 맘을 엮어서 어울리면
하늘엔 불꽃들이 수를 놓네
꽃불 따라 마음도 올라가면
이 세상 모두가 아름답네
"불꽃놀이"는 "한반도가 중립국으로 남는다면?" 이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브위키의 대체역사 세계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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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화국 대통령_(불꽃놀이)
조선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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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이우 이정

이우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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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화국 초대 대통령
이우 | 李鍝
이름 이우(李鍝)
출생 1912년 11월 15일
경기도 경성부
(現 한성시 종로구역)
사망 1992년 12월 14일 (향년 80세)
한성시 종로구 운현궁
묘소 홍능
재임기간 초대 사회공화당 의장
1949년 6월 30일 ~ 1992년 12월 14일
제2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1945년 9월 3일 ~ 1946년 2월 8일
조선임시민정위원회 위원장
1946년 2월 8일 ~ 1947년 2월 21일
조선민정위원회 위원장
1947년 2월 22일 ~ 1948년 9월 9일
초대 조선공화국 대통령
1948년 9월 9일 ~ 1992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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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부모 아버지 의친왕 이강
어머니 수인당 김흥인(修仁堂 金興仁)
형제자매 12남 9녀 중 차남
배우자 박찬주
자녀 장남 이청
차남 이종
삼남 이정
종교 유교 (성리학) → 무종교 (무신론)
신체 156cm, 46kg
최종 당적 틀:사회공화당 (불꽃놀이)
아명 성길(成吉)
아호 염석(念石)
상운(尙雲)
상훈 조선공화국영웅 (4회)
대훈위금척대수장 (6회)
대훈위이화대수장
소비에트연맹영웅(1회)
레닌훈장 (3회)
자유독립훈장 1등급 (2회)
적기훈장
군사 경력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복무 일본 육군
1933년 ~ 1941년
소련군
1941년 ~ 1945년
보안대
1945년 ~ 1948년
조선방위군
1948년 ~ 1992년
최종 계급 대위 (일본 육군)
소령 (소련군)
보안대사령관 (보안대)
방위군원수 (조선방위군)

개요

조선공화국의 구황족이자 군인 출신 정치인.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생애

출생과 청년기

이우는 1912년 경성부에서 의친왕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우가 만 4세 때인 1917년 3월 23일 흥선대원군의 장손 영선군의 양자가 되어 양부 영선군 이준용이 갖고 있던 공(公)의 지위를 계승하여 어렸을 때는 '이우 공자'로 불렸고, 운현궁에 양자로 입적하여 공위를 계승한 뒤에는 '이우 공(公) 전하'로 불렸으며, 의친왕 계열의 이복 여자 형제들은 '운현궁 오라버니'로 불렀다.

이우는 일제에 순종적이었던 형 이건과 달리 이우는 일제에 반항적이었고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웠기 때문에 의친왕의 총애를 받았다. 일제에 반항심을 가지던 이우는 점차 무장투쟁과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평범한 왕공족으로 남을뻔 했던 이우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에 대한 반발심이 강했던 이우는 일본인을 아내로 맞기를 극도로 싫어했고, 조선인과 결혼하기를 고집했다. 일제가 이우를 일본 황족인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사와코(北白川宮佐和子) 여왕과 결혼시키려 하자, 선수를 쳐서 친일파 박영효의 서손녀로 박일서의 딸인 박찬주와의 결혼을 확정한다. 일본이 혼사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전에 이우 쪽에서 박찬주와의 결혼을 기정 사실로 만들어버렸다. 친아버지 의친왕도 친일파라도 일본인과 결혼하는 것보다야 낫다고 생각했기에 성사된 약혼이라고 한다. 일본은 크게 화를 내고 약혼을 깨뜨리려고 했지만, 박영효가 겨우 일제를 달래고 설득했기 때문에 무사히 결혼했다고 한다. 박찬주와는 결혼 전에 조선과 일본에서 몰래 데이트를 하거나 연애편지도 주고받았다. 부부 금슬도 좋아서 매년 결혼기념일이면 뉴 그랜드 호텔 양식부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고 한다.

총을 잡다

이우는 구황족들이 그랬듯이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 당시 이우는 공산주의자들과 어울리며 민족을 해방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공산당을 이용해야 한다는 필요를 느꺘다. 그러나 당시에는 삼엄한 일제의 경계 때문에 은밀하게 조선인 육사 생도들과 의기투합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공산주의자들과 밀지를 전달하는데 그쳤다. 이후 1935년 육사 45기로 졸업한 이우는 포병 병과 교육을 1년간 받고 1936년 도쿄 주둔 제8포병 연대에서 군 복무를 시작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에 소속 연대가 만주로 파견되어 1년간 근무했으며, 1938년 대위 진급 후 포병 학교 교관으로 전임했다가 동년 12월 육대에 입학했다.

칼을 돌리다

이우의 육대 입학 이후 극동 정세는 매우 빠르게 험악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39년 5월 할힌골에서 소련군과 일본군이 격돌하였고 일본 군이 패배하자 이우는 일본에게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고 판단, 추후 조선반도를 자신의 손으로 해방하기 위해 탈출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이우는 공산주의자들과 연락 빈도를 더욱 높히며 코민테른과 접촉하였고, 코민테른의 조력하에 탈출을 시도한다.

1940년 이우는 교통사고를 가장해 일본을 탈출하였고, 중국 공산당의 도움을 받아 소련으로 망명하는데 성공한다.

소련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한 이우는 소련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친소련 왕족이라는 소재를 놓칠 수 없던 소련 수뇌부에 의해 이 전대후무한 탈출 소식은 전세계에 대대적으로 공포되었다. 이전 까지만 해도 일제는 이우가 불의의 습격을 받아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지만 이우가 대놓고 스탈린과 접견하고 인터뷰를 진행하자 길길이 날뛰었다.

이우는 소련 망명이후 정식으로 소련공산당에 입당했고, 아직 대일투쟁에 나설때가 아니라는 판단하에 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고 스탈린의 동의를 얻는다. 이우는 자신을 좇아 탈영한 조선인 일본 육사 생도들과 함께 민족군대의 창설을 준비했다.

이는 이우 자신도 너무나 무리라고 보아 고려인들 일부를 자신이 직접 신원을 보증하여 붉은군대 간부로써 추천하는데 만족할 수 밖에 없었으나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자 천운이 찾아왔다.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고, 소련은 본격적으로 반파시즘 전쟁을 치르게 됐다. 그리고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소련 또한 대일전에 대해 고려하게 됐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 이후 소련은 항일무장투쟁 세력들을 자신들의 군대로 편입했는데, 그것이 바로 88국제여단이다.

1942년 소련 극동군은 이들을 ‘동북항일연군교도려’로 편성하였으며 얼마 후 ‘88독립보병여단’로 정식 편성한다. 이우 또한 자신의 파벌을 이끌고 88여단에 합류하여 조선인이 편재된 1대대장으로 임명되나, 다수를 차지히던 동북항일연군과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이에 이우는 보로실로프에게 동북항일연군 세력을 소련 공산당의 영도하에 두기 위해서는 88여단장에 자신이 필요하다는 편지를 작성하여 1942년 7월 88여단장을 꿰차는데 성공하고 소령 대우를 받게 된다. 이우는 88여단에서 자신의 입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고려인들을 대거 88여단으로 배속시키고 동북항일연군을 점진적으로 배제하여 88여단에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화 하는 한편 엄격한 군율을 세우고 적극적으로 러시아어를 배우며 소련군의 신임을 받게 된다.

해방자 붉은 공작

1945년 8월, 소련군은 만주전략공세작전으로 만주에서 일본군을 무찌르고 청진 등의 조선반도 북부 지역에 진입한 소련군은 8월 말경에는 조선반도 전역을 장악하였다.

이 당시 이우와 88여단은 치스차코프 대장이 지휘하는 제25군에 배속되어 한반도 해방에 나섰다. 88여단과 25군 일부는 일본군과 헌병대·경찰을 무장해제시키면서 계속 남쪽으로 진격하여 8월 28일에는 경성을 점령하고 9월 초순 제주도를 제외한 조선반도 전 지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조선반도 점령 과정에서 소련군의 도움이 있었지만, 이우는 구황족이라는 권위와 함께 직접 조선반도를 해방한 민족의 해방자라는 압도적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이와 함께 이우의 유일한 무력이었던 88여단은 조선인들을 현지 모병하여 급속도로 팽창하는데 성공하였고, 조선반도 장악이 완료된 시점에서는 1개 사단정도의 규모를 갖추게 되며 소련군을 제외하곤 조선반도에서 대적 할 수 없는 강력한 군벌이자 조만식과 함께 소군정의 지지를 받는 잠룡으로 급부상한다.

건국 준비

이 당시 조선반도의 실질적인 지배 세력인 건준은 좌우파가 모두 망라되었는데, 여운형이 8월 18일에 테러를 당해 8월 25일까지 정양하고 있자, 우익의 김병로, 김약수, 백관수 등은 해방 직후 현실 정치의 중심인 건준을 장악하고 본인들 입맛에 맞게 개조하고자 하는 뜻을 보인다.

이 당시 일어났던 내부적인 분열, 그리고 총독부의 공작과 한민당의 공격 등 외부적인 문제, 그리고 테러는 여운형을 쇠약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결국 1945년 8월 31일, 여운형은 건준의 집행위원회를 소집하여 사직 의사를 표명하였다.

바로 이 시점에서 이우가 조선반도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우는 표면적으로는 건준에 숙이고 들어가는 입장이었지만, 구황족이자 소련 수뇌부와 군부의 전폭적 신뢰를 받으며 조선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한 이우를 막을 수 있는 세력은 없었다.

이우는 건준을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 일색으로 개편하고 직접 위원장에 취임하며 건준을 홀라당 집어삼켰다. 이후 조선에 부르주아 공화국을 세우려던 스탈린은 당초 유력한 조선의 지도자감으로 여긴 조만식이 소련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유지하자, 소련의 충실한 하위파트너로써 소련공산당과 붉은군대의 전폭적인 신뢰와 구황족이라는 명망, 조선에서 제일가는 무력까지 갖춘 이우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우는 이 기류에 적극적으로 편승하여 소군정을 통한 점진적 건국을 주장했고, 스탈린이 결국 이우를 선택하자 본격적으로 건국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우는 포고령을 발표하여 자신의 88여단과 소련군을 제외한 모든 무장단체를 해산하였고, 이들중 자신을 따르는 인원들과 88여단을 모체로 보안대를 창설했다.

이우는 인민위원회를 활용하면서 행정을 안정화시켰고, 강력한 물가통제 정책으로 경제도 안정화시키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자신의 반대파와 반대파가 될지도 모를 인사들을 친일 혐의로 대거 탄압하고 신의주 반공학생사건 등 반소 활동 또한 탄압하였으며, 조선의용군이 압록강 근처까지 진군해 들어오자 보안대를 통해 이들을 무장 해제시켰다. 1945년 12월 김두봉과 김무정을 비롯한 조선독립동맹(연안파)가 일부 귀국하여 1946년 2월 조선신민당을 세웠으나, 이들은 이우의 적극적인 방해로 맥을 추릴 수 없었다.

1946년 2월 건준을 조선임시민정위원회로 개편한 이후 이우의 의도대로 고려인들이 차츰 조직을 장악해나갔다. 이후 이우는 빠른 속도의 개혁을 진행해 나갔다. 조선임시민정위원회가 세워진 1946년 2월부터 토지 개혁법, 8시간 노동제, 주요 산업의 국유화령 등이 제정되었으며, 신민족유일당 정책을 통해 조선신민당을 비롯한 좌익, 한독당과 우익 정당, 중도 정당을 모두 자신이 창당한 사회공화당에 통합시켜 정당정치를 형해화 한다.

이후 1947년 2월 조선민정위원회라 세워지고, 단독 정부 수립 작업이 진행되어 1948월 2월경에는 조선방위군이 창설되었다. 이후 건준때부터 존재하던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통해 총선 실시를 결의한다. 첫번째 최고회의 선거이서 이우와 사회공화당은 부정선거와 압도적인 파급력으로 압도적인 의석을 차지했고, 이우는 부르주아 공화국식 헌법을 제정하고 '조선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정권을 수립하였다.

사망

사건사고 및 논란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틀:사회공화당 (불꽃놀이) 1949년 - 1992년 창당
사망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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