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보병사단 (빌레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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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보병사단
第七十五動員步兵師團
75. Infanterie-Division
적과 싸워 반드시 이기는 강한 철마부대
창설일 1차 창설: 1915년 5월 2일
2차 창설: 1939년 10월 21일
해체일 1차 해체: 1919년 2월 21일
상징명칭 철마(鐵馬)부대
소속 대한국 국군
상급 부대 제5군단
경례구호 단결
규모 사단
역할 비사시를 비롯한 요동도 남부 방위
사단장 참장 유정일
위치 요동도 긴배군 긴배면 긴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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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국 육군 제5군단 예하 제75보병사단. 별칭은 철마부대. 경례구호는 단결. 요동도 긴배군 긴배면 긴배리에 위치하고 있다.

역사

제1차 벨트크리그

제2차 벨트크리그

제2차 벨트크리그가 발발하고 한달 뒤인 국방계획 25호에 따라 1939년 10월 재창설되었다. 창설 이후 사단은 포항 일대의 방위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듬해 6월 일본군이 포항상륙작전을 전개하면서 일본군과 처음으로 교전한 사단이 되었다. 62고지 전투를 비롯한 일본군의 공세 속에서 사단은 분전하였으나 포항을 내주고 후퇴하였고, 뒤이은 울산 포위전에서 크게 파괴되어 구미로 철수하여 재편되었다. 그해 겨울 재편된 사단은 제1야전군 산하 2군단에 배치되어 추풍령 전투에 투입되었다.

1940년 11월 일본군이 추풍령 방어선을 돌파하자 75사단은 영동을 거쳐 대전으로 후퇴했다. 이듬해 1월 대전 전투가 끝날 때 쯔음 75사단은 인근의 부대들 중 그나마 전력이 온전한 몇 안되는 사단 중 하나였다. 사단은 전북에서 패퇴한 제27, 71 보병사단과 함께 26군단에 재배치 된 후 지청천의 2.27 공세에 참가했다. 일본군의 1선 방어선을 돌파한 사단은 일본 제41보병사단을 대청호에 몰아넣으며 선전했으나, 이내 일본 제7전차사단의 증원으로 후퇴했다. 이 시점에서 사단의 잔존 병력은 절반 밖에 되지 않았다.

공세가 실패한 후 사단은 수도군단에 재배치 되어 용인으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사단은 보충병들, 야전병원에서 회복한 병사들, 패잔병들을 규합하여 병력을 회복한[1]작계 2552호에 따라 안성 북쪽에 배치되어 일본의 천안-수원 공세에 맞서 분전했다. 당시 75사단을 상대한 것은 일본 제25, 56 두개 보병사단이었는데 이중 25 보병사단은 1개 연대가 궤멸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어 아예 최전선에서 철수할 정도였다. 그러나 본래 작계 2552호에 따라 이천에 배치되어야 했을 제3보병사단이 제때 도착하지 못해 대신 배치된 102 보병사단이 일본 제7기갑사단에 돌파 당하고 광주 일대까지 진출하자 사단은 포위될 위험에 처했다.

현대

  1. 이런 총체적 난국 속에도 75사단은 다른 부대들 보다 그나마 나은 편에 속했다. 이는 이미 당시 부터 사단이 정예로 평가 받고 있었기 때문에 더 나은 보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충이라고 받은 병력이 어중이떠중이 일 정도로 개판이었던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