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안 왕국 국왕 | |
|---|---|
|
[ 펼치기 · 접기 ] | |
| 역대 올리비안 국왕 | ||||
|---|---|---|---|---|
| 코스타 1세 | 파타나샤 하파시 | → | 알고레이 하파시 | |
| 올리비안 왕국 4대 국왕이자 신민을 배반한 왕 파타나샤 하파시 | ||||||||||||||||||||||||
|---|---|---|---|---|---|---|---|---|---|---|---|---|---|---|---|---|---|---|---|---|---|---|---|---|
| 왕호 | 파타나샤 Patanaxa | |||||||||||||||||||||||
| 출생 | 1884년 8월 28일 | |||||||||||||||||||||||
| 오이리일라 왕국 오이리(Oiri) | ||||||||||||||||||||||||
| 사망 | 1916년 7월 22일 (향년 33세) | |||||||||||||||||||||||
| 오이리일라 왕국 오이리(Oiri), 아랑(Aran) | ||||||||||||||||||||||||
| 묘소 | 마뮤트 사원 | |||||||||||||||||||||||
| 재위기간 | 올리비안 왕국의 왕세자이자 대행 | |||||||||||||||||||||||
| 1912년 1월 3일 ~ 1912년 2월 1일 | ||||||||||||||||||||||||
| 제4대 올리비안 왕국 국왕 | ||||||||||||||||||||||||
| 1912년 2월 1일 ~ 1915년 12월 25일 | ||||||||||||||||||||||||
| 올리비안 왕국의 황제 | ||||||||||||||||||||||||
| 1915년 12월 25일 ~ 1916년 7월 22일 | ||||||||||||||||||||||||
|
[ 펼치기 · 접기 ]
| ||||||||||||||||||||||||
개요
제4대 올리비안 왕국의 국왕이자, 전제군주제 시대를 열은 왕. 키가 훤칠하고 훈훈한 외모를 가져 한때 국민의 지지가 컸지만, 국민의 신임을 배반하고 군부를 동원하여 친위쿠테타를 통해 전제군주제 및 보수제국주의적 국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공화파가 득세하여 국정이 사실상 마비와 가까운 상황에서 친위쿠테타를 통해 상당수 제거하였다는 점 및 영국의 침략을 방어하고 국토를 보존하였다는 점에서 의외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평가
대다수 사람들은 파타나샤 하파시 왕을 애초에 신민을 배반한 왕으로 인식하고 있어 전반적으로 나쁜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시위대를 일부 학살하고 개헌을 통해 그동안의 성장 기반을 완전히 무너뜨려 민생이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반대로 해당 국왕을 존경하는 사람들도 존재하는데, 이들은 파타나샤 키즈라고 불리고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즉위 당시 공화파와 사회주의자들이 계속해서 증가하여 사회적으로 혼란이 가중되는 와중에 군부를 동원하여 이들을 숙청하고 안정적인 체제를 수립하였다. 또한 영국의 무차별적인 침입을 방어하는데 성공하고 전략적 협상을 통해 국토를 회복한 데에 대해 영국과 싸워 승리한 국가라는 이미지를 얻어냈다.
심지어 그가 암살당하자마자 왕당파와 공화파 간 내전(한달 내전)이 발생하고 12.30 쿠테타가 몇 년 뒤 발생하는 등 다시금 혼란이 발생하여 국가의 존속이 위태로워졌었다. 이에 따라 파타나샤 키즈는 그가 없었다면 진작 국가는 무너졌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여담
파타나샤 하파시 왕의 아들인 산토스 파냐 하파시는 힐데가르트 대비와 맞서 '아들인 엘게나스 하파시와 함께 상왕 쿠테타를 일으켜 반미 국가를 수립하려 했다. 그러나 힐데가르트 대비가 최종적으로 승리하였고 12.30 쿠테타에서 공산주의자 및 공화주의자를 척결하면서 국가의 정상화에 성공하였으며, 페드루 6세의 즉위로 마침내 파타나샤의 잔재는 사라졌다.
- ↑ 역대 국왕의 배우자 중 최초로 오이리 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