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니치 하파시

역대 올리비안 국왕
엘니치 하파시 리바이 하파시
올리비안 왕국 1대 국왕
엘니치 하파시
Elnici Hafashi | Elnichi Hapassi
왕호 엘니치
Elnici
출생 1799년 11월 2일
포르투갈 제국 포르토(Porto)
사망 1882년 2월 11일 (향년 84세)
오이리일라 왕국 오이리(Oiri), 마뮤트(Mammut)
묘소 마뮤트 사원
재위기간 초대 올리비안 왕국 국왕
1868년 8월 22일 ~ 1882년 2월 11일
초대이자 마지막 오이리일라 공화국 총리
1862년 4월 20일 ~ 1868년 8월 22일
서명
[ 펼치기 · 접기 ]
가문 하파시 가문
이름 엘니치 후안 엔시나스 하파시
Elnici Juan Encinas Hapassi
배우자 엘리자베트 드 바비에르[1]
자녀 리바이 하파시, 라파엘 하파시,
하비에르 하파시, 모나카 하파시
아버지 코스타 엘프리모 하파시[2]
어머니 베티나 엔 오르웬[3]
형제자매 (알려지지 않음)[4]
장례식 1882년 3월 15일
오이리일라 왕국 마뮤트 사원
종교 가톨릭 [[1]]
신체 170cm대 초반 추정
학력 포르투갈 리스본 대학교
화폐 속 엘니치 하파시

개요

초대 올리비안 왕국의 국왕이자, 이전에 잠깐 존재했던 오이리일라 공화국의 초대이자 마지막 총리.

포르투갈의 영향력 아래 왕당파가 힘을 받고 제국주의가 유럽 대륙에 만연하자 공화국 내에서 왕정 선포에 대한 논의가 급격히 이루어졌다. 이때 당시 총리였던 엘니치 하파시는 독립군의 대장이었던 알 포테데르의 후손인 카를로 포테데르에 대항하여 내전을 진행했으며, 입헌군주제와 올리비안 민족주의에 따른 왕정 정부를 수립하는데 앞장섰다. 공화정에서 왕정으로 급격히 변화하면서 다만 독특한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이는 올리비안식 입헌군주제의 기초가 되었다.

올리비안식 입헌군주제의 기초를 완성하였으며, 독립 이후 왕국의 안정화를 이룬 왕으로 평가받는다.

평가

그는 리스본 대학을 졸업하여 나름 훌륭한 학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포르투갈 제국의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서 오이리 제도로 건너가 사업을 벌이던 사업가였기 때문에 재정에 대해 누구보다 학식이 뛰어났고, 포르투갈 부유계층의 오이리 족에 대한 탄압을 본 후 비밀리에 오이리일라 독립군을 지원하면서 임시 정부 수립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금방 독립 세력의 집중을 받았다.

내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후에 왕위에 오른 그는 재위 중에도 왕국의 안정화와 경제적 성장을 주도하였다. 특히 포르투갈로부터 친선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여 독립 이후에도 경제적 지원이 끊어지지 않도록 했고, 따라서 이를 기반으로 항만과 도로 등 여러 인프라 시설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의 왕위 세습에 대한 집착과 우상화 작업이 심화되면서 독립 세력과 영국인 잔존 세력으로부터 질타를 받기 시작하였다. 이는 사우스조지아 혁명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또한 왕궁 및 마뮤트 왕립 사원 등 왕실의 상징이 될 만한 건물들을 무리하게 준공하였다. 반면 독립군의 유해가 묻힌 마뮤트 국립 공원에 대해서는 기존 크기를 축소하여 지었고 되려 독립군의 흔적 일부를 지우려고 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가 왕국의 경제적 성장과 안정을 바탕으로 여러 개의 성과를 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고 따라서 아직까지도 대다수의 국민들은 엘니치 하파시를 초대 국왕이자 초대 총리로서 존경하고 있다. 또한, 오이리 족과 포르투갈인을 동일시하면서 남아있던 인종, 민족 간 차별 종식을 위해 힘썼고 이로써 올리비안인이라는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은 그의 최고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1. 파리 출생으로, 프랑스인, 바이에른인 간 혼혈인이다. 그녀는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왕실에 대한 나쁜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평생 왕비가 되길 거부하였음에도, 사망 후 왕비로 추존되었다.
  2. 할아버지의 본명을 그대로 엘니치의 장자이자 2대 국왕인 리바이 하파시는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코스타'로 지었다.
  3. 그녀의 이름을 본 따 '벤타나' 도시의 이름이 명명되었다.
  4. 1남2녀로 알려졌지만, 2녀 모두 엘니치가 즉위하기 이전에 모두 사고 또는 병으로 죽었다. 따라서 즉위 직후에는 그녀들의 이름이 남지도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