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TE TO '76

ROUTE TO '76
LAST DAYS OF THE WORLD
장르 대체역사
참여자 ASPIE
연재 시작일 2024년 1월 8일
(연재 시작일로부터 +838일, 2주년)
상징 색 검은색 (#000)
저작권 CC-0

개요


EIN LANDSKNECHT BIN ICH VON NATUR,
나는 날 때부터 용병의 기질을 타고나,

UND DÄCHT' AN KRIEG UND WANDERN NUR.
오로지 전쟁과 방랑만을 생각했네.

SCHLÜG' SELBST MEIN GLÜCK IN SCHERBEN...!
그저 내 손으로 내 행복을 산산조각 내버릴 뿐...!

ROUTE TO '76ASPIE제이위키이브위키에 동시 연재 중인 대체역사 장편 세계관이다.

소개



희곡— 벨 에포크라는 달콤한 이야기가 막을 내렸습니다.

언젠가 전승으로만 들려오던 동화 같은 이야기가, 천상의 선율이 나지막이 귓가를 어루만지는 듯한 황홀감이 온 유럽을 휘감았던 그 희곡 속에서, 누군가는 이를 막간의 광시곡으로 치부했고 누군가는 인류의 추수곡이라 믿었습니다. 그럼에도 인류는 눈앞의 잔을 비우는 데에만 취한 채, 끝없으리라 맹신한 연회의 한복판에서
아스라이 짙어드는 그림자조차 끝내 외면하고야 말았습니다.

비곡— 세계대전이라는 잔혹한 이야기가 막을 내렸습니다.
선과 악, 희망과 절망이 뒤엉켜 잿빛 안개가 나지막이 종막을 속삭이는 듯한 재앙이 온 유럽을 휘감았던 그 윤무곡 속에서, 영웅들은 한 줌의 재가 되어 바스라졌으며 번영의 정원은 잿더미 아래 묻혀버렸습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도 메마른 입술로 한 모금의 빛을 갈구하는 인류의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자명하고도 필연적인 하나의 결말이 있으니—
인류는 닿을 수 없는 낙원의 문 앞에서, 기꺼이 세상의 모든 등불을 꺼뜨릴 것입니다.

흐트러지게 금잔화가 피어날 때까지 말입니다.

ROUTE TO '76: 최후의 나날들

상세

자세한 내용은 'ROUTE TO '76/설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시대 구분

휘황기 ⇒ 1차 세계 대전 ⇒ 전간기 ⇒ 2차 세계 대전 ⇒ 냉전기


휘황기

휘황기로 불리는 황금태엽 시대는 빈 회의 이후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시점까지 약 백 년간 지속된 시기를 가리킨다. 나폴레옹 전쟁의 종결과 함께 유럽 대륙에 비교적 안정적인 평화 체제가 수립되었고, 이 장기적 평화는 과학 기술 발전의 토양이 되었다. 전자기학, 열역학, 화학 등 기초과학 분야에서 전례 없는 속도로 기술적 장벽이 제거되었으며, 이러한 성과는 아틀란티스라는 단일 거점에 집약되는 양상을 보였다. 아틀란티스는 본래 소규모 관측소에서 출발하였으나, 국제 과학 자유 구역으로 지위가 격상된 뒤 과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는 기업국가로 전환되었다. 유럽 전역의 과학자와 기업가들이 이곳에 집결하면서 기술 혁신이 연쇄적으로 발생하였고, 아틀란티스는 휘황기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거점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휘황기는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 초기 휘황기는 패러데이, 배비지, 러브레이스 등 개인 연구자 중심의 발견이 주도한 시기로, 순수 과학적 탐구가 기술 발전의 주된 동력이었다. 이 흐름이 전환된 계기는 비스마르크의 해임과 프랑스-러시아 동맹의 성립이었다. 이 두 사건을 기점으로 유럽 열강 간의 군비 경쟁이 본격화되었고, 초기 휘황기에 축적된 과학적 성과가 군사 부문으로 급속히 흡수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후기 휘황기의 시작이다. 후기 휘황기에는 군사적 수요에 의해 전신, 전력, 내연기관 등 핵심 기술의 보급이 대폭 가속화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 사례가 헬라오스 시의 성장이다. 누아디부 연구 단지를 거점으로 발전한 헬라오스 시는 1897년 기준 상주 인구 19만 명에 달하는 국제 과학 도시로 성장하였으며, 인류 최초의 과학 도시로 기록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시기에 축적된 군사 기술과 열강 간의 긴장은 해소되지 않은 채 누적되었고, 이는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귀결되었다.

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은 휘황기 동안 축적된 기술력, 자원, 그리고 열강 간의 미해결 갈등이 동시에 분출된 전쟁이었다. 참전국 대부분은 단기간 내에 결정적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 예상하였으나, 실제 전쟁 양상은 이러한 전망과 전혀 달랐다. 군사 기술의 발전은 공격 능력만큼이나 방어 능력도 향상시킨 결과, 양측 모두 상대를 압도할 수 없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단기 결전이라는 초기 구상이 무너진 이후 전쟁은 장기 소모전으로 전환되었고, 어느 제국도 상대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없었던 반면 이미 투입한 비용이 지나치게 커 자발적으로 철수하는 것도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상태가 약 7년간 지속되었다.

1921년 체결된 베른 조약에 의해 전투 행위 자체는 종결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전쟁이 제기한 핵심 문제, 즉 유럽 대륙의 패권 귀속과 국제 질서의 향방에 대해 어떠한 결론도 제시하지 못하였다. 명확한 승전국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참전국이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을 뿐 그 대가로 얻은 정치적 성과는 없었으며, 전쟁 이전의 갈등 구조는 해소되지 않은 채 그대로 이월되었다. 이 미결 상태가 이후 전간기의 구조적 불안정으로 직결된다.

전간기

베른 조약 이후 약 20년간 지속된 전간기는 유럽 질서의 공백기로 규정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가 증명한 것은 어떤 단일 제국도 대륙의 패권을 독점할 수 없다는 사실뿐이었으나, 이 현실을 수용할 수 있는 정치적 합의는 어디에서도 도출되지 않았다. 전쟁 이전의 질서로 복귀하기에는 기존 체제의 손상이 지나치게 심각하였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에는 이를 주도할 세력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 구조적 공백은 대륙 전역에 걸쳐 복합적인 불안정을 초래하였다. 피지배 민족들은 민족 자결과 해방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보장하거나 강제할 승전국이 부재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요구는 제도적으로 실현될 경로를 갖지 못하였다. 기존 제국들은 여전히 지배적 권위를 주장하였으나, 승리 없는 전쟁을 치른 뒤에 그 권위를 뒷받침할 실질적 근거는 현저히 약화된 상태였다. 한편 전쟁의 충격과 기존 질서의 실패는 다양한 정치 이념의 동시다발적 출현을 촉발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념도 대륙 전체를 통합할 수 있는 지배적 위치를 확보하지 못하였고, 결과적으로 상호 모순되는 복수의 정치적 주장이 병존하는 만성적 불안정 상태가 전간기 내내 지속되었다.

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은 전간기 동안 축적된 미해결 갈등이 최종적으로 무력 충돌의 형태를 취한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과 베른 조약이 유예한 핵심 쟁점, 즉 유럽 대륙의 주도권 귀속과 전후 질서의 성격을 둘러싼 문제가 이 전쟁을 통해 결정되었다. 전간기 동안 외교적·정치적 수단으로 해결되지 못한 갈등이 더 이상 비군사적 경로로 처리될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한 결과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기존 제국 체제를 약화시키는 데 그친 전쟁이었다면, 제2차 세계 대전은 이 체제를 실질적으로 해체시킨 전쟁이었다. 수백 년간 유럽의 정치 구조를 규정해 온 왕조 체제가 붕괴하였고, 대륙의 정치 지도가 근본적인 수준에서 재편되었다. 전쟁이 종결된 시점에서 유럽의 기존 열강은 국제 질서를 독자적으로 주도할 역량을 상실한 상태였다. 전후 질서의 형성은 유럽 외부의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대서양 건너의 산업 대국과 유라시아 동부의 대국이 전후 유럽의 정치적 향방을 사실상 결정하게 되었다.

냉전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유럽은 독자적으로 대륙 질서를 유지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이 권력 공백을 채운 것은 두 개의 비유럽 세력이었다. 하나는 대서양 건너의 산업 대국이었고, 다른 하나는 유라시아 동부에서 혁명과 반혁명의 과정을 거쳐 체제를 재정비한 대국이었다. 이 양대 세력 간의 대치가 냉전의 기본 구도를 형성하였다.

냉전은 이전의 세계대전들과 근본적으로 성격이 달랐다. 직접적인 군사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으나 양 진영 간의 대결 자체는 중단되지 않았다. 경쟁의 형태가 변화한 것이다. 전장은 참호와 전선에서 과학 연구소와 미사일 발사대로 이동하였고, 양측은 상대를 직접 격파하는 대신 기술적 우위를 통해 자기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경쟁하였다. 이에 따라 로켓 공학, 핵 기술, 전산학 등의 분야에서 급속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로켓의 도달 고도가 지속적으로 상승하였고, 핵무기의 위력은 계속 증대되었으며, 전자 계산기의 연산 속도는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이러한 기술 경쟁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기계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기계가 단순히 인간의 지시를 빠르게 수행하는 수준을 넘어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사고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결정적 전환점은 1976년에 발생하고 만다.

영향을 받은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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