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충신불사이군)


대한국의 황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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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慶熙宮 | Kyŏnghŭi-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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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 궁전
창건 대조선국 인조 1년(1623)
개축 대한국 태시 2년(1950)
주소 경성부 종로구 경희궁로 45
소유주 이황가
입주자 대한국 대황제대한국 황후
연락처 +82 01-3213-1111
경희궁 자정전

개요

경성부 종로구 경희궁로 45에 있는 대한국황궁 중 하나이자 정궁(법궁)이다. 광해군 재위 기에 새로 지은 3궁(인경궁, 자수궁, 경희궁[1]) 중 한 곳이며 인조 시기부터 철종 시기까지 이궁으로 기능했던 곳이다.

광해군의 명으로 1617년(광해군 9년)에 착공하여 1623년(인조 원년)에 완공했다. 조선 후기 동안 정궁인 창덕궁에 이은 제2의 궁궐로 양대 궁궐 체제의 한 축을 담당했다. 많은 왕들이 경희궁에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거처하면서 창덕궁이 지닌 정궁으로서의 기능을 일정 부분 나눠서 수행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경복궁의 동쪽 궁궐인 창덕궁 + 창경궁을 지칭하는 '동궐'과 대비시켜 경복궁의 서쪽 궁궐을 뜻하는 서궐西闕로 불렀다. 규모로 보자면 경복궁 크기의 2/3를 넘는 영역이 경희궁에 속했고, 경성 한양도성 서쪽 성벽 일부와 한양 서북부를 대부분 차지하던 거대한 궁궐이었다. ' 경희궁은 한양의 궁궐 중 유일하게 흔적도 없이 완전히 파괴 되었다. 흥선대원군 시절에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90%)이 헐렸고, 이후 경희궁 터에 방치되어 있던 잔여 전각 5개가 통감부 시기 외부에 매각되어 사실상 허허벌판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1946년, 태평양 전쟁황궁 사건 이후 정궁인 덕수궁이 폐허가 되어 건흥황제가 임시 정궁의 역할을 하며 대대적 중건과 복원이 시작되었다. 이후 태시황제가 공식적으로 경희궁을 법궁으로 선포함에 따라 대황제의 공식적인 거주지가 되었다.

명칭

경희궁(慶熙宮)이라는 명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48년에 붙여진 호칭으로, 1617년 착공해 1620년 완공되었다. 건립 이래 140여년간 경덕궁(慶德宮)이라 불리어 왔으나, 영조가 1760년(영조 36년)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정원군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쳤고 이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경희궁은 경희궁이라는 명칭 이외에도 창덕궁과 창경궁이 동궐로 불리던 것처럼 경희궁은 서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경희궁에서 대황제가 대권을 행사하는 곳을 자정전(御所)이라고 부른다. 각종 공식행사와 정무를 보는 궁전과 궁내부 청사 등도 경희궁에 있다.

역사

연원은 1616년 광해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당 부지는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원종)의 저택이었지만 왕기가 흐른다 하여 광해군이 그 부지를 몰수하여 별궁인 경덕궁(慶德宮)[2]을 짓게 했다. 1617년 착공해 1620년 완공되었다. 건립 이래 140여년간 경덕궁이라 불리어 왔으나, 영조가 1760년(영조 36년)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정원군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쳤다.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 후기 동안 정궁 창덕궁+창경궁과 더불어 양궐체제하의 이궁으로써의 역할을 했다. 건립된지 3년만인 1623년과 1624년 인조반정이괄의 난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이 연이어 전소되자 왕의 거처로 바뀌어 창경궁이 중건될 때까지 임시 정궁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전각은 헐려 창덕궁창경궁 중건 공사에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조선 후기에 많은 왕들이 경희궁을 이궁으로 애용했다. 특히 이곳에서 태어난 숙종은 경희궁에 대대적인 개보수를 실시했다. 이후 영조는 치세의 거의 절반을 경희궁에서 보냈다고 한다. 또한 정조 즉위식도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다만 19세기에 이르러 경희궁은 그 사용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헌종철종은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창덕궁에서만 머물렀다. 광무황제 즉위 직후에는 경복궁 중건 공사를 위해 5개의 전각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훼철되면서 사실상 궁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광무 5년(1901) 이전에 촬영된 경희궁 숭정전 사진
(프랑스어 교사인 샤를 알레베크가 제작한 사진 엽서의 사진)

이처럼 경복궁 중건을 위해 경희궁의 대부분이 철거되면서 사실상 궁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숭정전을 비롯하여 살아남은 전각 5채는 이후 사신 접대 등 행사 용도로 간간히 사용되었을 뿐이었다.

숭정전의 경우에는 창살로 장식된 문들을 모두 떼어내 수원화성의 연무대(동장대)처럼 군사사열이나 행사를 위한 목적으로 개조되기도 했다.이 시기 버려진 경희궁은 호랑이표범들이 몸을 숨기던 주요 서식지 중 하나였다.

광무황제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당시 황궁이었던 경운궁(덕수궁) 영역을 북서쪽으로 대대적으로 확장했다. 그에 따라 경운궁과 경희궁 궁역의 거리가 가까워졌다.[3]경운궁 확장 공사가 1차로 끝나가던 시점인 1901년(광무 5년)에 덕수궁과 경희궁을 잇는 홍교[4]라는 다리가 세워졌다. 당시 경희궁 영역에는 전각 5개만 남아 있는 상황이었지만, 홍교로 덕수궁과 연결된 덕분에 대한제국 시기에 경희궁에서 국가행사가 개최되기도 했다.

그러나 융희 원년(1907) 광무황제퇴위당하고 새로 즉위한 융희황제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경운궁 정궁의 지위를 상실했고, 경희궁 사용 빈도 또한 현저히 줄어들다. 통감부 신문로의 교통 흐름을 막고 있던 홍교를 융희 2년(1908)에 철거했다.

경운궁과 연결했던 운교. 돈의문에서 신문로 방향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1910년 11월에는 조선 내 일본인들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경희궁 터 동남쪽 부지로 이전해 왔다.

1915년에는 신문로를 새로 건설하면서 정문인 흥화문을 남쪽으로 이건했다.

이후 19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 일제는 경희궁에 남아 있는 다섯 개의 전각들을 순차적으로 매각했다.

정전인 숭정전 1926년 일본 사찰이었던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가 매입한 후 법당으로 마개조하여 사용했다.

정문인 흥화문은 일본 사찰인 유붕사[5]에서 매입하여 유붕사 산문으로 활용했다. 광복 이후 경희궁 복원 작업이 시작되면서 경희궁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렇게 1930년대 초에 이르러 경희궁 전각은 100% 완전히 원래 자리에서 사라졌다.

1943년 ~ 1944년에는 비행기를 이용한 폭격에 대비해 왕과 왕비의 처소인 융복전회상전이 있던 위치에 황실 전용의 방공호를 설치했는데, 인근의 경성중학교 학생들까지 강제 동원하면서 대규모로 축조했다.

지상부는 폭격을 견딜 수 있도록 두께 3m에 달하는 콘크리트 외벽으로 만들어져 있다. 대형 돔을 만든 후 그 위에 흙을 덮었으며, 지하 2층 터널형 구조이다. 총 면적은 1379m²로, 길게 뻗어나 있는 통로 양옆으로 방 10여 개가 나란히 있다.

이후 1944년 이후, 연합국의 경성 폭격이 시작되자 건흥황제에 의해 장서각과, 여러 서양식 건축물들을 공터로 남아있던 경희궁에 이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46년, 태평양 전쟁황궁 사건 이후 정궁인 덕수궁이 폐허가 되어 건흥황제가 거처를 경희궁안에 존재하는 장서각에 기거하며 경희궁이 사실상 정궁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경희궁의 대대적 중건과 복원이 시작되었다.

같은 시기, 내각에서는 '경희궁지 복원계획'를 세우고 1947년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하였다. 이후 1948년부터 본격적인 경희궁 중건과 복원이 시작되었다.

당시 강력한 공권력과 황실의 위엄을 앞세운 이 공사는 사실상 패전 직후 경희궁터를 정궁으로 '재창조'하는 계획을 비교적 순조롭고 빠르게 진행할 수 있는 여력을 만들었고, 1950년대 초반에는 사실상 중건 계획이 완료 되었다.

이후 태시황제가 공식적으로 경희궁을 법궁으로 선포하는 조서를 내림에 따라 대황제의 공식적인 거주지가 되었다.

일반참하

시설

관광

기타

  1. 초창기에는 경덕궁. 후술하겠지만 영조 때 이름이 바뀌었다.
  2. 경희궁의 원래 이름
  3. 제국 시절 경운궁의 부지는 지금보다 북서쪽으로 더 넓었기 때문에 경희궁과 상당히 가까웠다.
  4. 무지개다리라는 뜻이다. 운교라고도 불렀는데 이 쪽은 구름다리.
  5.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위한 사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