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우파(중국) (민국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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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관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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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제국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망국의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노예로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중국국민당의 계파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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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우파 관련 둘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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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우파
國民右派
형성 1970년대 후반[1]
수장 왕후닝
정치적 이념 사회보수주의

국민보수주의
우익대중주의
중국 내셔널리즘
반공주의


역사적 :
우익권위주의
장제스 사상
경제적 이념

경제적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역사적 :
협동조합주의
국가자본주의
주요 정치인 리창
차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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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중국국민당 내의 강경우파 성향의 파벌이다.

역사

2010년대 이전

일반적으로 국민우파의 형성은 1970년대 후반, 즉 장제스 총통의 사망 이후 중국공산당이 집권하고 중국이 민주화 되어가던 시점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당시 국민당은 장제스의 아들인 장징궈 주석의 지도하에 탈 권위주의 기조를 이어나가고 있었고 저우언라이 총통을 필두로 한 공산당과의 합작인 일명 제3차 국공합작을 표방하며 공산당과의 협력을 통한 거국정부 구성 및 점진적인 민주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당시 장징궈 주석의 국공합작 정책에 반대한 국민당 골수 보수파들을 중심으로 기존 국민당의 강경한 보수주의 성향을 수호하려는 이른바 원류(源流) 운동이 당내에서 벌어졌고 이 운동이 현재 국민우파의 시조격으로 여겨진다.

국민우파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기록상 1989년이다. 당시 중국국민당은 첸치천 주석의 지도하에 롄잔, 쑹추위, 장쩌민 등의 인물들을 앞세워 개혁행보를 이어나가고 있었고 기존 개혁을 이끌던 장징궈 전 주석이 사망한 이후 더욱 강도높은 개혁과 중국공산당에 타협적인 모습이 이어지자 린양강과 하오보춘을 필두로 한 원류파들이 첸지천 주석에 반대하며 정치투쟁인 일명 2월 정쟁(二月政争)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린양강 당시 국민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이 기자회견에서 개혁파의 "수구파"라는 비판에 대해 스스로를 진정한 국민의 우파이자 국민당의 우파(真正的國民的右派,國民黨的右派)로 지칭하였고 여러 언론에서 줄여서 국민우파라고 보도하며 국민우파라는 명칭이 확립되었다.

이들은 1993년 신당(新黨)을 창당하여 이듬해의 국민대회 선거에 독자출마하였고 당시기준 총 3,045명 중 187명의 대의원을 확보하며 성공적인 데뷔를 하게된다. 그러나 1996년 신헌법하에 치뤄진 정부총통-입법위원 동시선거에서 당시 여당이던 사회당 후보들 보다도 국민당 후보들에 대한 비판을 강화하는 행보를 보이며 보수층의 미움을 얻었고 결과적으로는 국민당 총통후보이던 장쩌민의 낙선에 기여하는 희대의 팀킬을 저지르며 당세에 치명타를 입은 이후 2003년경 중국국민당에 흡수합당 되었다.

2010년대의 전성기

2024년 정부총통 선거 이후

현황

성향

구성원


  1. 국민혁명 시기의 후한민 파벌이나 국민정부-제1공화국 시기의 장제스 파벌의 형성을 국민우파의 형성시기로 보는 관점도 있으나 현재 대부분의 경우 국민우파의 형성은 실질적으로 장제스 사망 이후라고 간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