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의정총리대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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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석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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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33대 의정총리대신 김이석 金二席 | Kim Yi-Seok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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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8년 11월 9일 (75세) |
함경북도 청진목 청암방 교원동 (現 함경북도 청진부 청암방 교원계) | |
사저 | 함경북도 청진부 김씨고택 |
현직 | 사회민주당 상임고문 제53대 민의원 의원 사회민주당 청진부 제3선거구 지역위원장 |
재임기간 | 제33대 의정총리대신 |
2011년 4월 29일 ~ 2012년 5월 8일 | |
서명 | |
링크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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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제국 제33대 의정총리대신 취임 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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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아픈 손가락 길동성 |
대한제국의 33대 의정총리대신. 제n대 부총리 겸 내무대신을 지냈고 유시민 총리의 후임으로 의정총리대신을 지냈다. 현재는 14선 민의원으로 중앙정치와 멀어져 본인의 지역구인 청진 제3선거구 관리에 전념하고있다.
생애
금수저
명문가 출신으로 아버지는 청진부의 오랜 토후이며 민정당 소속으로 6선 의원을 지낸 김현기, 어머니는 민정당 부총재를 지낸 고 이기붕 의원을 딸인 이강희였다.
서경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졸업한지 얼마지나지 않아 함북지역 신문사인 함경일보 기자로 입사했다. 가문의 힘으로 1976년에는 취재1팀 팀장으로 고속승진하였으며, 32살이 되는 1980년에는 취재부 부장으로 최연소 부장이 되었다. 32세에 산업통상대신을 지내던 박봉환의 주선으로 함북관찰사를 지내던 유석기의 딸인 유기옥과 결혼하였다. 취재부 부장이 된지 1년이 되지않아 부편집장으로 승진하였으며, 1981년 편집장으로 승진한뒤 함경일보에서 퇴사했다.
퇴사 후에는 아버지 김현기의 정책보좌관이 되어 정계에 처음으로 입문하였고, 아버지 김현기가 당내 파벌경쟁에서 밀려 정계를 은퇴하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84년 청진 제2선거구에 민정당 공천을 받고 출마하여 당선되며 국회에 입성하였다. 세습정치인치고는 정계입문이 늦은 편이였는데, 이는 김이석 본인이 함경일보에서 일하는것을 꽤나 즐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민정당에서의 활동
당선 직후 민정당 부대변인에 임명되어 얼굴마담으로 인지도를 쌓았으며, 김대중 의정부 공격의 선봉에 섰다. 또한 동시에 김종필 총재의 비서실장을 맡아 실무적인 경험도 쌓았다. 특히 김종필은 김이석을 특히나 아껴서 김종필 의정부이 출범하자 3선에 불과한 김이석을 관방대신에 임명하는것 역시 고려했다고 한다. 김이석이 민정당 소장파 10인과 함께 사회당으로 탈당할때는 김종필가 무척이나 아쉬워 했으며, 김이석 의정부이 출범하면서 민정당이 전방위적으로 의정부을 압박할때도 "자중하는것이 좋겠다"라며 원로로서 말리기도 했다.
연달아 3선에 성공하고 김종필 의정부이 출범하면서 신임 관방대신으로 고려되었으나 너무 선수가 적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대신 당내 보수파의 추천으로 관방부대신이 되었으며, 김종필 의정부의 강경한 대중정책을 알리며 말을 쎄게하는 보수정치인으로 인기를 얻었다. 민정당 내에서도 반일, 반중성향의 강경 민족주의자로 주목받았고 북중국의 유엔가입 절대엄금, 남중국에 대한 경제재제를 통한 핵개발 중단, 최악의 경우에는 선제 타격까지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종적에 대해 김이석은 본인의 자서전인 <그건 원래 김이석을 경험하신 분들의 기준이고요 : 김이석 자서전>에서 "조금 띄어주니 내가 막 나갔다."며 "지금은 저런 생각을 하고있지 않다. 어떻게 하면 선제 타격같은 생각을 했을까, 라는 후회를 할 뿐이다."라는 구절을 남기며 당시의 행적에 대해 후회하고 자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정주영 의정부 출범 이후에는 점차 성향이 온건해졌고, 권영길 의정부이 출범할때 즈음에는 당내 소장파에 속할정도로 온건해졌다. 이로인해 자연스럽게 초기 정치활동을 도왔던 유신정우회 인사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졌으며 이회창 총재가 일국회를 설립하자 합류하면서 유신정우회와는 완전히 결별했다. 하지만 일국회 내에서도 주류에 속하지 못하고 겉돌다가 노무현에 대한 공세가 강화되자 여야협치를 주장하며 일국회에서 탈퇴하였다.
사민당 입당
민정당이 사민당 공빈정책연구회와 손잡고 노무현 의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발의하자 "정도가 있는데 그걸 넘었다"라고 이회창 총재를 비판하며 민정당을 탈당한뒤 김부겸, 이부영, 이우재, 안영근, 김영춘, 산영군 등과 함께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였다. 이들은 슬립낫으로 불리며 열린정치연구원 인사들의 격한 환영을 받았다.
2004년 노무현 총리 의정부불신임안이 가결될 당시, 야당의 탄핵안을 저지하기 위해 11일 밤샘농성을 벌인데 이어 1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도 탄핵안을 통과시키려는 민정당, 신한사회당 의원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등 탄핵안 가결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끝내 탄핵안이 통과되자 김 의원은 본회의 산회 직후 연단에 올라 "나는 오늘부터 이 더러운 민의원 배지를 떼겠다. 당장 의원직 총 사퇴를 하자."고 말한 후 제일 먼저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노무현 의정부이 의정부총사퇴를 선언하고 의회가 해산되며 열린 47대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이 압승을 거두고, 함북 내 유일의 보수정당의 우위지역으로 분리되었던 청진에서 고전하는것이 아니냐는 김이석 본인 또한 가문의 힘, 탄핵풍을 타고 선거구를 청진 제3선거구로 옮겨 당선되었다. 이후 사회민주당 제4정책조사회장, 수석최고위원을 역임했다. 2006년에는 당내 노동자그룹, 진보연구회 인사들이 노무현 의정부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고 야당을 비롯한 각지에서 조기총선 여론이 쇄도할때 가장 적극적으로 노무현 총리를 옹호하였다.
2006년 자폭총선에서 함경북도당 위원장을 맡으며 관북지역의 선거를 이끌었다. 하지만 선거기간 내내 노동자그룹의 선거지원유세 거부로 골머리를 앓았고, 결국 좌익 극우세 지역인 함경북도에서 4석을 민정당에 내주면서 사실상 참패했다. 청진에서도 본인을 제외하면 전원이 낙선했기에 이에 대해 책임을지고 함경북도당 위원장직에서 사임했다.
하지만 2008년경부터 친노가 재부상하고 2008년 사민당 전당대회에서 유시민이 의장에 당선되면서 함께 정치적으로 재기했다. 이떄 전당대회에서 유시민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덕분에 사민당 당부총재로 취임하였고 2008년 노무현 총선에서 당지도부와 함꼐 총선을 지휘하였다. 결과적으로 사민당이 전국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함경북도의 모든 의석을 석권하면서 사민당 내 유력주자로 떠오름과 동시에 총리주자에도 포함되기 시작했다.
부총리 시절
유시민 의장이 총리직에 오르면서 의정관방대신 겸 의정부총리로 취임하였다. 이는 관방부대신을 지냈던 이후 15여년 만이였다. 당시 관방대신으로 언급되던 후보자에는 김이석 말고도 이인영과 심상정이 언급되었는데, 아무래도 두 인사는 파벌도 맞지 않는 편이다보니 김이석이 관방대신으로 선임된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탁지대신 겸 부총리에는 이해찬이 다시한번 취임했다. 당시 국민참여연구회의 의정부 각료 점유율이 워낙 높아서 당 내에서 타계파의 반발도 있었으나, 워낙 당시 총선에서 이긴 요인이 국민참여연구회 인사들이였다 보니 얼마지나지 않아 쏙 들어갔다.
하지만 정작 재임시절은 난항 그 자체였는데 취임한지 5개월이 지나지 않아 북중국이 천안함을 포격하여 유시민 의정부이 추진하던 북중국과의 관계개선 사업이 전면 취소되며 북중국과의 관계가 박정희 의정부 시절급으로 악화되었고, 11월에는 마반산도 포격전이 벌어지며 유시민 의정부이 자신만만하게 내걸었던 북중국과의 관계개선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는 바람에 당시 관방대신이던 김이석이 수많은 기자들의 질문을 받아내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뱅크런으로 인해 저축은행들이 줄줄이 무너지고 한진중공업 측의 노동자 정리해고로 촉발된 노사갈등을 정부가 방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노동자들도 등을 돌리게된다. 이렇게 되자 숨죽이고 있던 노동자계열 회파들이 유시민 의정부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고, 결국 유시민 총리가 20석 넘는 의석이 걸려있던 2011년 상반기 재보궐 선거에서 패배하면서 불명에 퇴진하였다. 다만 당시 국민참여연구회가 당 내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의원의 표가 33%나 반영되는 의장선거의 룰 덕분에 김이석이 노동계 단일후보로 출마했던 노회찬을 아슬아슬하게 꺾고 의장에 당선되면서 총리에 취임하였다.
총리 시절
총리 취임 이후 곧바로 개각을 강행하였다. 부총리였던 본인이 총리가 된 상황에서 이해찬 부총리마저 유시민 총리와 함께 사퇴했다보니 대다수 의정부 각료가 공석인 상황이 발생해버렸기 때문에 개각은 필수적이였다. 가장 먼저 탁지대신 겸 의정부총리에는 김덕훈 의원을, 관방대신 겸 의정부총리에는 신철봉 의원을 임명하였다. 두 의원 모두 해당 분야에서는 전문가이지만, 선수는 낮아 부대신에나 임명될까 말까 했는데 부총리급 대신으로 발탁된것은 파격인사로 불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