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의정총리대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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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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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25대 의정총리대신 백기완 白基琓 | Baek Ki-w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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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2년 2월 29일 |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동 | |
출생 | 2021년 2월 15일 (향년 88세) |
한성부 종로부 연건방 한성대학교병원 | |
묘소 | 경기도 남양주목 화도읍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 |
재임기간 | 제36대 의정총리대신 |
1984년 6월 29일 ~ 1988년 9월 13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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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제국 제25대 의정총리대신 취임 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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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해방 백기완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해 썼던 마지막 말 |
대한제국의 제25대 의정총리대신.
약력
- 1954. ~ 1960. 농민·빈민·녹화운동
- 1965. 월남파병 반대운동
- 1967. 백범사상연구소 소장
- 1967.5 제30-41대 민의원 의원 (황해도 은율군->황해도 안악시·은율군)
- 1968.2 자유투쟁의원교섭회 대표
- 1980.5 광주투쟁본부 공동위원장
- 1980.12 노동자그룹 수장
- 1981.5 사회민주당 의장
- 1983. 민족통합민중운동연합 부의장
- 1984.6 ~ 1988.9 제25대 의정총리대신
- 1990.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고문
- 1997. 민족문화대학설립위원회 위원장
- 2000. <노나메기> 발행인
- 2000.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 2010. 노나메기 재단 고문
생애
생애 초기
1932년 1월 24일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아버지 백홍렬(白弘烈)과 어머니 홍억재 사이에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조부 백태주(白台周)는 장련면의 유지였다. 1922년 장연농민공제회의 초대 회장으로 재임했고, 1923년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회 장련지부 설립에도 참여했다. 부친 백홍렬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재직했고 장련청년회 집행위원, 장련청년동맹 검사위원을 역임한 인텔리였다. 두 부자는 1923년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에 수해와 지진 피해가 있었을 때와 1934년 삼남 지방 수재 당시에 의연금을 기부하고 구휼에 힘쓰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백태주가 공산당에 자금을 지원하다가 경무청에 발각되어 체포된 후 고문으로 옥사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4] 이로 인해 1942년 소학교를 중퇴한 백기완의 학력은 소학교 4학년에서 끝나게 된다.
재야 운동가 백기완
전후 1954년부터 농민운동 등 각종 사회운동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1965년에는 재야운동가로서 월남파병 반대투쟁에 함석헌·계훈제·변영태 등 재야 운동가들과 함께 참가했다. 2차 대전의 영웅이자 재야 정치인인 장준하와는 백범사상연구소 설립과 민족학교 운동도 전개했다. 그후 국제 개헌 운동 등 민주화 운동에 많은 활동을 했으며 이러한 활동덕에 사민당에서 영입제안을 받고 정계에 입문했다.[5]
총리 재임 시절
퇴임 이후
사망
백기완 의정부
평가
비판 및 논란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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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 제30대 민의원 의원 선거 | 황해 은율 | 27,844 (82.44%) | 당선 (1위) | 초선 | |
1968 | 제31대 민의원 의원 선거 | 22,364 (76.82%) | 재선 | |||
1970 | 제32대 민의원 의원 선거 | 20,980 (78.90%) | 3선 | |||
1972 | 제33대 민의원 의원 선거 | 18,102 (70.65%) | 4선 | |||
1974 | 제34대 민의원 의원 선거 | 황해 안악·은율 | 54,844 (62.74%) | 5선 | ||
1976 | 제35대 민의원 의원 선거 | 59,564 (65.31%) | 6선 | |||
1977 | 제36대 민의원 의원 선거 | 52,657 (62.45%) | 7선 | |||
1978 | 제37대 민의원 의원 선거 | 53,129 (57.67%) | 8선 | |||
1982 | 제38대 민의원 의원 선거 | 63,450 (69.69%) | 9선 | |||
1984 | 제39대 민의원 의원 선거 | 68,044 (66.85%) | 10선 | |||
1986 | 제40대 민의원 의원 선거 | 71,007 (71.23%) | 11선 | |||
1988 | 제41대 민의원 의원 선거 | 57,222 (64.02%) | 12선 |
소속 정당
소속 회파
어록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묏비나리> 중 |
국민여러분. 이 민주주의라는게 다른게 아닙니다. 양심있고 능력있는 사람이 살수있는 세상을 만드는것이 민주주의입니다. 제25대 의정총리대신 취임사 중 |
이것봐 이명박이, 나 백기완이야. 내 말좀 들어. 분리라는게 뭐야? 이명박 의정부의 민족정책을 비판하며 |
그러니까 노회찬 의장 민중적인 자부심과 민중적인 배짱을 갖고 소신대로 한번 해보시오! 영면 직전 노회찬 의장 후보 지지선언을 하며 |
여담
- 문재인이 사민당 비대위원장 시절 김창암, 박정희의 묘역을 참배하자 "문재인 어린 놈이 말야"라고 말하며 격분하였다고 한다. 그는 박정희 의정부 시절 정치탄압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 열렬한 국어순화론자로, 위에 언급한 축구 용어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되도록 순우리말을 썼다고 한다. 덕분에 분명 한국어로 말하는데 주위에서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그래도 꾸준히 밀던 단어 중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 등과 같이 성공적으로 사회에 안착시킨 것들도 있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