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니드 슬리셴코 (개화)


녹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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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녹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
레오니드 빅토로비치 슬리셴코
Леонід Вікторович Слішенко
출생 1878년 3월 24일
러시아 제국의 기 러시아 제국 프리모르스키 지방
국적 러시아 제국의 기 러시아 제국
녹우크라이나의 기 녹우크라이나
사망 1943년 12월 6일 (향년 65세)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한성부
묘소 녹우크라이나 성 안드레아 국립묘원
임기 제5대 녹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
1932년 6월 ~ 193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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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제1 키예프 콘스탄티노프 군사학교
종교 녹우크라이나 정교회
복무 러시아 제국의 기 러시아 제국 육군
1908년 ~ 1917년
녹우크라이나의 기 우크라이나 극동군
1917년 ~ 1928년
최종 계급 중령 (❊❊) (러시아 제국군)
대장 (★★★★) (우크라이나 극동군)
주요 보직 러시아 제국군 제41보병사단 참모장
블라디보스토크 우크라이나군 사령관
녹우크라이나군 제1연대장
녹우크라이나 육군 제1사단장
녹우크라이나 육군사관학교장
녹우크라이나군 총참모장
녹우크라이나 육군 총사령관
녹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
참전 제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
시베리아 전쟁

개요

녹우크라이나의 명장. 제3대 우크라이나 극동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극동전쟁 당시의 하아무르 작전으로 유명하다.

생애

슬리셴코는 러시아 제국 프리모르스키 지방[1]의 한 우크라이나계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슬리셴코의 위로는 형이 두 명이나 있었기에 슬리셴코 가정은 소작 붙일 땅이 부족했다. 이로 인해 슬리셴코는 일찍이부터 아버지로부터 소작지를 물려받아 농사를 지을 생각은 접고 도시로 떠났는데, 어쩌다 보니 군사학교에 입학할 기회가 주어져 군인의 길을 걷게 됐다. 러시아 제국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한 슬리셴코는 여러 보직을 거쳤고, 최종적으로는 1917년 1월 중령으로 진급해 루마니아 전선의 제41보병사단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고 엄청난 수의 병사들이 군에서 이탈하자 러시아군은 뒤숭숭해졌고,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슬리셴코 역시 군대에서 이탈해 고향인 프리모르스키 지방에 돌아왔다. 마침 프리모르스키 등 극동 지방에서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했는데, 이 운동을 이끌던 극동 우크라이나인 국민의회는 군 장교인 슬리셴코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한다. 마침 스스로가 우크라이나인임을 자각하던 슬리셴코는 새 독립국 군대에서 대령 해볼 생각 없냐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곧 우크라이나계 주민들의 자경단 겸 준군사조직인 블라디보스토크 우크라이나군의 사령관에 임명됐다.

우크라이나 극동군이 창설되면서 슬리셴코는 육군 대령의 계급을 받았다. 러시아 내전이 본격화되고 적군이 백군을 몰아붙이며 동시베리아로 진출하자 한국군은 수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시베리아로 출병시켰고, 자칫하다간 적군에 의해 나라가 짓밟히게 생긴 녹우크라이나 역시 군대를 파견해 적군에 대항했다. 한국군은 녹우크라이나의 극동군에게 오호츠크 해로 이어지는 아무르 강 하류 유역의 작전을 요청했고, 극동군 사령부는 슬리셴코를 준장으로 진급시키고 녹우크라이나군의 야전 전력의 대부분인 1사단의 지휘를 맡겼다. 하아무르 작전이라고 이름붙여진 이 전역에서 슬리셴코는 두 달에 걸쳐 적군은 물론 극동군의 무장 해제 요구를 거부한 백군까지 완전히 소탕하였다. 이 공로로 슬리셴코는 영웅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슬리셴코는 1사단 일부 병력을 이끌고 제야 호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웠고 몇 년 후 중장으로 진급해 극동군 총참모장에 임명됐다. 그는 곧 대장으로 진급하여 육군 총사령관과 극동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여담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