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내셔널리즘 집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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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민족기 |
Український націоналізм / Ukrainian Nationalism
개요
우크라이나의 내셔널리즘 대해 다루는 문서이다.
역사
유럽
언어와 문화로 전래된 민족성은 코사크 시절부터 존재했으나, 근대적 의미의 우크라이나 내셔널리즘이 떠오른 것은 19세기부터이다.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치하에 있었는 동할리치나는 우크라이나인이 다수를 차지하였는데,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전쟁에 자극을 받은 우크라이나인 엘리트들이 우크라이나 내셔널리즘의 부흥을 시작하였다.
1차 세계대전으로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자 러시아 제국령이었던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에 기반한 우크라이나인 민족국가인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동할리치나)의 민족주의자들 역시 우크라이나인 민족국가인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하지만 정치적 혼란 등으로 인해 두 민족국가는 구소련과 폴란드에 의해 멸망, 분할되었다. 이후 구소련령 우크라이나에서는 홀로도모르로 인해 우크라이나 민족 정체성이 큰 타격을 받았다. 한편, 폴란드령 동할리치나에서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OUN)으로 대표되는 극우 민족주의가 발흥했다. OUN은 동할리치나에서 쿠반과 캅카스에 이르르는 거대한 우크라이나 민족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며 폴란드인, 유대인,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테러를 저질렀다.
2차 세계대전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구소련에 맞서기 위해 나치독일과 협력하고자 했으나, 나치독일 역시 우크라이나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민족주의자들은 나치독일과 구소련 양쪽 모두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구소련 등의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구소련군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서면서 유럽에서의 우크라이나 내셔널리즘 운동은 큰 타격을 받았다.
1980년대 데탕트의 분위기 속에서 구소련의 지도자 고르바초프가 사회 자유화 정책을 시행하자 물밑에 잠겨있던 우크라이나 내셔널리즘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레오니드 크라우추크, 빅토르 유셴코 등의 일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 독립을 목표로 활동하였고 마침내 우크라이나 독립여뷰를 묻는 투표가 유크라이나에서 개최되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독립투표에서 독립안이 부결되고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주권공화국이 되어 소비에트 주권공화국 연합, 일명 신소련에 합류하면서 또다시 독립은 좌절되었다.
극동
19세기 러시아 제국은 새로 획득한 시베리아와 극동 영토를 개척하기 위해 유럽 영토의 슬라브인을 극동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폈다. 이중에는 우크라이나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있었다. 극동으로 이주한 우크라이나인들은 주로 하바리우스크와 볼로디스히드(당시 명칭은 블라디보스토크) 등에 정착했다. 20세기 초 기준으로 연해주 인구의 40% 이상이 우크라이나인일 정도로 우크라이나인의 극동 이주는 활발했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에서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러시아 제국을 전복하면서 러시아 전역은 혼란에 빠졌다. 본토 우크라이나에서 민족주의 엘리트들이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자 이에 자극받은 극동의 우크라이나인들 역시 우크라이나 민족국가인 우크라이나 극동 공화국을 건국했다. 이 신생 공화국에는 우크라이나 전통의 사방위 색상 전통에 따라 녹색 우크라이나 혹은 녹색 쐐기(젤레니 클린)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국의 지원을 밭은 녹우크라이나는 본토 우크라이나와의 정치적 통합을 원했지만 본토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외세의 침공과 내부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겪다가 결국 구소련에 완전히 병탄당하며 우크라이나 통합 계획은 무산되었다. 본토 우크라이나와 독자노선을 걸을 수 밖에 없게 된 녹우크라이나는 구소련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내셔널리즘 부흥에 매진했다. 모든 학교에서 우크라이나와 수업이 의무화되었으며 모든 공문서는 우크라이나어로만 작성되었다. 또 좌우파에 상관 없이 녹우크라이나의 주요 정치 세력들은 모두 우크라이나 내셔널리즘을 적극 지지하였다. 녹우크라이나 정부가 유럽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망명정부를 암암리에 지원하기도 하였다.
1940년, 구소련의 침공으로 제3차 극동전쟁이 발발하면서 극동에서의 우크라이나 내셔널리즘은 위기에 처했다. 구소련군이 물밀듯이 쳐들어오며 녹우크라이나 전역을 점령하자 녹우크라이나 정부와 민족주의자들은 한국 본토로 피신하였고 녹우크라이나군도 계속해서 구소련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앵커리지 조약으로 녹우크라이나가 구소련에 병탄되면서 한국땅으로 피신했던 우크라이나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망명정부를 세웠다.
녹우크라이나 망명정부는 한국땅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을 규합하고 구소련령이 된 녹우크라이나에 대한 내셔널리즘 선전활동을 계속하였다. 194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망명정부의 유격대가 녹우크라이나로 침입하고 녹우크라이나에서 민족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구소련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녹우크라이나에서의 내셔널리즘 운동은 구소련 당국의 극심한 탄압으로 큰 피해를 입고 완전히 지하화되었다. 한편, 만주에서 만주 내전이 발발하자 만주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만주 정부군과 손을 잡고 구소련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 반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1980년대가 되며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에 따라 사회 분위기가 비교적 자유로워졌고 구소련령 녹우크라이나인 극동 SSR에서 우크라이나 내셔널리즘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녹우크라이나 망명정부의 지원을 받은 이들 내셔널리즘 세력은 녹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요구하였다. 본토 우크라이나와 달리 훨씬 더 나중에 구소련에 병합된 녹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 정체성이 본토 우크라이나보다 훨씬 짙었고, 덕분에 1991년에 치러진 독립 투표에서 독립 68%, 잔류 32%의 결과가 나오면서 녹우크라이나는 독립하였다.[1]
현황
녹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SSR
기타 지역
관련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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