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셸

개요

라트 연방의 외교관, 정치가. 라트 연방의 연방 외무부장관 및 제12대 중앙서기국 서기장을 지냈으며, 제4대 최고지도자 직위를 지냈다. 서류상 최고지도자로 재임하긴 했으나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퇴진 이후 불과 3주 남짓만 최고지도자 직위를 대행한 것에 불과해 라트 연방 역사상 가장 임기가 짧은 최고 지도자였고 존재감도 크지 않았다. 그러나 1968년 위기 수습과 데탕트 외교에 있어 그의 역할은 작지 않다고 평가받는다.

생애

1919년, 프로이센 졸링겐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독일 혁명 이후 태어난 최초의 최고 지도자였다. 김나지움에서 대학 입학시험(아비투어)에 합격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징집되어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1942년,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에 입당했으며, 3년간 루프트바페에서 복무하였다.

종전 후, 그는 프로이센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최고 라트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관료로서 직위를 수행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961년 파울 요제프 괴벨스 의장에 의해 연방 경제개발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66년, 괴벨스 의장에 의해 외무부장관으로 보직을 옮겼으며, 외무장관으로 지내면서 온건파의 대표 격으로, 미국과의 외교적인 마찰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1968년 3월부터 8월까지 대중에 의한 반관료, 반수정주의 투쟁이 일어나자, 괴벨스 정권은 위기에 처했고, 끝내 1968년 8월 최고지도자 직위에서 사임함을 알렸다. 발터 셸은 괴벨스가 사임하는 것이 나쁜 선택이라고 생각했으나 공개적으로 이를 말리지 않았다. 서류상으로 최고지도자의 대리인이었던 셸은 법에 의해 최고지도자 직위를 승계했으며, 1968년 8월 8일부터 1968년 8월 30일까지 약 22일간 국가를 이끌었다.

셸의 직무는 조기 전당대회인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제21차 대회를 무사히 주관하는 것 뿐이었고 그 이외에 국가원수로서 남긴 족적은 크지 않았다. 대부분의 대학생과 시위대에게 있어 셸은 타도해야할 또다른 관료에 지나지 않았고, 그의 존재는 종종 무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셸은 시위대와의 대화를 중시하였으며 그들의 요구를 수용해 사회권과 환경권에 대한 보장을 새로운 법에 폭넓게 보장하도록 지시하였다.

당내 보수파는 얼굴마담으로서 그가 계속 최고지도자 직위를 맡길 원했으나 스스로 권력의지가 없었기에 거부했으며, 별다른 반발 없이 중도파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새로운 최고지도자이자 서기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외무장관 직책으로 돌아와 1972년까지 직무를 계속했다.

1972년 뮌헨 올림픽 참사가 터지자, 에르하르트는 서기장으로서 이를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직위에서 사퇴했다. 후임자는 재무상이었던 헤르베르트 프람. 발터 셸 역시 에르하르트와 함께 참사 저지 실패의 책임을 이유로 사임하였다. 외무장관으로서 6년이라는 기간을 재임하면서 미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최대한 중재하고자 했지만, 동시에 재임 기간 일어난 베트남 전쟁 문제에 관해서 단호한 입장을 보여 외교관들 사이에서는 폭넓게 지지받았다.

1981년 괴벨스 의장의 사후 잠시 명예직인 의장 직위에 오를 것을 제의받기도 했으나 스스로 거절했고, 정부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2016년 9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평가

소속 정당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