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종 순황제 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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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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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3대 황제
사종 순황제 | 使宗 純皇帝
출생 1915년 8월 3일
황성 한성부 황실병원
즉위 1923년 2월 27일
황성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천붕 1939년 12월 9일 (향년 24세)
황성 한성부 경복궁 태극전
능묘 소릉(昭陵)
재위기간 대한제국 황태자
1920년 9월 19일 ~ 1923년 2월 27일
대한제국 제3대 황제
1923년 2월 27일 ~ 1939년 1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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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준(鎨)
부모 부황 선종 효황제, 모후 공정효황후
형제자매 동생 선경공주
황후 경신순황후
학력 강학원 유치원 (수료)
강학원 초등과 (졸업)
강학원 중등과 (졸업)
강학원 고등과 (졸업)
병역 대한제국군 육해공군 대원수
종교 유교 (성리학)
아명 동명(冬明)
운풍(雲風)
전호 대흥전(大興殿)
묘호 사종(使宗)
존호 容靖齊幕恪哲淸達
(용정제막각철청달)
시호 도정무문돈견광양순황제
(悼正武文敦堅光襄純皇帝)[1]
연호 태시(太始, 1924~1939)

개요

대한제국의 제3대 황제. 휘는 준(鎨)이며, 연호는 태시(太始), 묘호는 사종(使宗), 시호는 순황제(純皇帝)이다.

선종 효황제의 유일한 적장자로 선종의 나이가 당시로써는 고령인 33세에 1915년 8월 3일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아버지 선종을 빼닮아 학문에 능하고 예술에 조예가 깊었고, 5살때 황태자에 책봉된다. 그러나 부황 선종이 1923년 귀족원 개회사를 위해 마차를 타고 귀족원으로 향하던 도중 만주족 테러리스트의 폭탄 테러로 사망하여 7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된다.

유년기 명석한 모습을 보여주어 백성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으나, 섭정이자 작은 할아버지인 명친왕과 통치관에 대해 대립하며 정치와 치국에 대한 흥미를 거두고, 예술과 주색잡기에만 전념하였다. 당시 사종의 치세는 정치적으로는 귀족원과 명친왕의 갈등이 치열하였으나, 경제적으로는 1차 대전 전후의 경제적 호황으로 인한 태평성세가 열린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고 그 바람이 미국을 건너 대한제국으로 건너오자 경제는 순식간에 파탄 상태에 이르렀다. 이를 바탕으로 사종은 명친왕의 섭정을 거두는데 성공했지만, 정치에 흥미를 잃은 사종은 선대 황제들처럼 주도적으로 해결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이를 내각에 일임한체 고서적 수집에만 몰두했다. 그러나 내각으로써도 이 전례없는 경제적 광풍을 해결할 묘책이 딱히 존재하지는 않았을 뿐더러, 명친왕이 반쯤 식물화한 의회는 그저 소모적인 논쟁만을 벌일 뿐이었다.

결국 이를 타개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여럿 발생한다. 극소수 공산주의자들의 암살이나 폭동, 민권론자들의 시위가 대표적이었으나 군부의 일부 소장파 장교들도 이러한 시도에 관심이 다분했다. 1931년 몽강사변을 시작으로 1932년의 2.15 사건과 같은 군부의 지휘체계 무시나, 쿠데타 음모가 여럿 적발되었다. 그러나 이때마다 경시청과 특무대의 빠른 대처로 사건을 무마하였으나 이는 단지 임시조치에 불과하여 1933년의 5.16 사건을 막지는 못했다.

5.16 사건으로 권력을 잡은 김좌진은 대한제국을 하나의 병영으로 탈바꿈 시켰다. 김좌진은 서백리 출병 당시 러시아 사회의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붉은 군대가 철저한 규율과 감투정신을 가지고 있음에 놀라, 소련이 산업화를 진행하기 전에 빨리 시베리아를 정복해야 한다는 대소주전론자가 되었고 1939년 지속적으로 벌어지던 한국과 소련의 국경분쟁은 결국 양국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어 한소전쟁이 발발한다.

그러나 김좌진의 환상과 다르게 전황은 흘러간다. 해전에서는 제국 해군이 큰 우위를 점했지만 지상전에서는 제국 육군이 소련군에게 대적하기 어려웠다. 결국 개전 이후 빠르게 소련군을 타격하고 시베리아를 정복한다는 김좌진의 계획과 달리 개전 초기부터 제국군은 소련 육군에 궤멸적 타격을 입어 연해주와 몽강을 빼앗기고 한반도 마저 위험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몰렸다. 그러나 환친왕이 패닉에 빠진 김좌진을 대신하여 본토 주둔 대한제국군과 패잔병, 경찰과 후비군을 총동원하여 압록강 방어선을 수호하고, 폴란드 침공을 준비하던 소련의 필요성에 의해 양국은 요동과 연해주, 화태를 소련에 할양하는 종전 협상을 채결한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이 수탈하던 물적-인적 자원도 급감해 한국 경제도 큰 타격을 받았다.

한소전쟁의 패배와 이로 말미암은 경제적 타격으로 큰 충격을 받은 사종은 2개월이 채 안되어 사망했다. 황위는 삼촌 환친왕에게 돌아갔고, 사종은 숙부 환친왕에게 부디 성군이 되어달라 부탁했고 환친왕은 조카의 마지막 부탁을 성실히 이루어낸다.

생애

출생

즉위

사망

가족관계

어록

대중 매체에서

기타

상훈(賞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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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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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완전한 시호는 사종용정제막각철청달도정무문돈견광양순황제(使宗容靖齊幕恪哲淸達悼正武文敦堅光襄純皇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