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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11월 경 흥선대원군과 개화파 세력이 계속해서 개화정책<ref>물론 이때까지 '개화정책'이라 해봐야 기껏해야 서양식 무기를 약간 도입하고 한성어학당에서 외국어 교육을 하는 등이 중심이었고 서양식 무기 도입 자체는 "선진화된 무기 도입을 통해 양이에게 복수"한다는 변명거리라도 있었기 때문에 반발이 덜했으나, 1873년 교련병대 창설과 프랑스 교관 초빙, 최익현 유배 사건과 이 과정에서 대원군파 관료들이 고종을 반협박하는 모습 등을 통해 불만이 많은 상태였음</ref>을 추진하자 이에 분노한 척화파 세력과 권력을 노린 민씨세력이 지방의 유림세력까지 동원하여 조정의 흥선대원군파 관료들을 대대적으로 탄핵, 대원군파 관료들이 저항하였으나 이미 사전에 반대파와 손을 잡은 고종에 의해 박규수 등 대원군파 관료들이 대거 실각하거나 유배를 가며 정국이 전환됨<ref>이 과정에서 대원군 측에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가진 기록이 여럿 있으나, 이때에 대원군의 정치적 권력기반 내지 집권정당성은 '임금의 생부'라는 위치에서 오는 초법적 명분이었기 때문에 고종이 직접 나서서 대원군파를 숙청하는 사태에 공식적으로 손을 쓸 도리가 없었음</ref>. 이후 척화파였던 홍순목이 영의정의 자리에 오르고 이외 척화파 관료들과 민승호, 민겸호, 민태호 등 민씨세력 등이 조정의 중직에 올랐으며, 유배를 갔던 최익현 또한 고조의 신임을 받아 우부승지의 관직에 오르며 조정에 입각함. 통리기무아문은 폐지되었으며, 군제 또한 다시 오군영 체제로 회귀하여 교련병대는 훈련도감에 소속됨<ref>원래 조정 일각에서는 '감히 양이에게 군사를 맡길 수 없다'는 논리로 프랑스 교관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교련병대를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척화파들도 강한 군대의 쓸모는 알고 있었고 여기에 더해 프랑스가 보상금을 요구해와 존치하는 방향으로 결정됨. 다만 척화사상으로 인해 척화파 정권 하에서 되려 구식군인인 오군영을 우대하고 교련병대를 상대적으로 무시해 교련병대의 원성을 삼.</ref> | 1874:11월 경 흥선대원군과 개화파 세력이 계속해서 개화정책<ref>물론 이때까지 '개화정책'이라 해봐야 기껏해야 서양식 무기를 약간 도입하고 한성어학당에서 외국어 교육을 하는 등이 중심이었고 서양식 무기 도입 자체는 "선진화된 무기 도입을 통해 양이에게 복수"한다는 변명거리라도 있었기 때문에 반발이 덜했으나, 1873년 교련병대 창설과 프랑스 교관 초빙, 최익현 유배 사건과 이 과정에서 대원군파 관료들이 고종을 반협박하는 모습 등을 통해 불만이 많은 상태였음</ref>을 추진하자 이에 분노한 척화파 세력과 권력을 노린 민씨세력이 지방의 유림세력까지 동원하여 조정의 흥선대원군파 관료들을 대대적으로 탄핵, 대원군파 관료들이 저항하였으나 이미 사전에 반대파와 손을 잡은 고종에 의해 박규수 등 대원군파 관료들이 대거 실각하거나 유배를 가며 정국이 전환됨<ref>이 과정에서 대원군 측에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가진 기록이 여럿 있으나, 이때에 대원군의 정치적 권력기반 내지 집권정당성은 '임금의 생부'라는 위치에서 오는 초법적 명분이었기 때문에 고종이 직접 나서서 대원군파를 숙청하는 사태에 공식적으로 손을 쓸 도리가 없었음</ref>. 이후 척화파였던 홍순목이 영의정의 자리에 오르고 이외 척화파 관료들과 민승호, 민겸호, 민태호 등 민씨세력 등이 조정의 중직에 올랐으며, 유배를 갔던 최익현 또한 고조의 신임을 받아 우부승지의 관직에 오르며 조정에 입각함. 통리기무아문은 폐지되었으며, 군제 또한 다시 오군영 체제로 회귀하여 교련병대는 훈련도감에 소속됨<ref>원래 조정 일각에서는 '감히 양이에게 군사를 맡길 수 없다'는 논리로 프랑스 교관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교련병대를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척화파들도 강한 군대의 쓸모는 알고 있었고 여기에 더해 프랑스가 보상금을 요구해와 존치하는 방향으로 결정됨. 다만 척화사상으로 인해 척화파 정권 하에서 되려 구식군인인 오군영을 우대하고 교련병대를 상대적으로 무시해 교련병대의 원성을 삼.</ref> | ||
1875:1월 5일 형조판서 민승호의 집에 의문의 폭탄상자가 배달되어 민승호 일가가 폭사함. 혼란스러운 와중 흥선대원군의 형 흥인군의 집에 알수없는 화재가 발생하고, 민겸호의 집에 자객이 침입했다가 사라지는 등 계속해서 친고종-반흥선대원군파 대신들에게 사고가 생기자 모두가 배후로 흥선대원군을 의심하였으나 아무리 권력에서 밀려났어도 감히 임금의 친부를 테러범으로 내몰 수 있을리가 없었고, 조정에서 잇따른 사고와 이에 대한 대응으로 혼란스러운 사이 2월 16일, 흥선대원군이 훈련도감의 교련병대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진격, 순식간에 창덕궁의 궐문들을 장악하고 궐내각사와 인정전, 내전을 장악하며 고종을 확보함. 이에 친고종파 관료들이 중앙군을 동원하여 반격에 나서려고 하였으나 대원군의 협박을 받은 고종이 반란세력을 인정하고 친고종파 관료들을 간신으로 선포하는 교서를 내리자 명분이 취약해졌으며, 그다지 친고종파 관료들에게 협조할 생각이 없었던<ref>대원군 체제 아래서 교련병대의 창설로 상대적으로 기존 구식군인들이 덜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긴 했으나 큰 차별은 받지 않았고, 오히려 대원군 실각 후 민씨세력 등 친고종파 인사들의 비리로 인해 친고종파에 대한 불만이 쌓여있는 상황이었음</ref> 오군영의 군졸들이 대원군파에 가세하여 친고종파 인사들이 죽거나 체포됨. 사건이 정리된 후 고종이 대원군을 공식적으로 섭정으로 선포하였으며, 실각되었던 대원군파 관료들이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고 간신으로 몰린 고종파 관료들이 유배를 가며 대원군파가 다시한번 정권을 장악함.(을해정난) | 1875:1월 5일 형조판서 민승호의 집에 의문의 폭탄상자가 배달되어 민승호 일가가 폭사함. 혼란스러운 와중 흥선대원군의 형 흥인군의 집에 알수없는 화재가 발생하고, 민겸호의 집에 자객이 침입했다가 사라지는 등 계속해서 친고종-반흥선대원군파 대신들에게 사고가 생기자 모두가 배후로 흥선대원군을 의심하였으나 아무리 권력에서 밀려났어도 감히 임금의 친부를 테러범으로 내몰 수 있을리가 없었고, 조정에서 잇따른 사고와 이에 대한 대응으로 혼란스러운 사이 2월 16일, 흥선대원군이 사전에 인맥과 자금 등을 동원하여 매수한 훈련도감의 교련병대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진격, 순식간에 창덕궁의 궐문들을 장악하고 궐내각사와 인정전, 내전을 장악하며 고종을 확보함. 이에 친고종파 관료들이 중앙군을 동원하여 반격에 나서려고 하였으나 대원군의 협박을 받은 고종이 반란세력을 인정하고 친고종파 관료들을 간신으로 선포하는 교서를 내리자 명분이 취약해졌으며, 그다지 친고종파 관료들에게 협조할 생각이 없었던<ref>대원군 체제 아래서 교련병대의 창설로 상대적으로 기존 구식군인들이 덜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긴 했으나 큰 차별은 받지 않았고, 오히려 대원군 실각 후 민씨세력 등 친고종파 인사들의 비리로 인해 친고종파에 대한 불만이 쌓여있는 상황이었음</ref> 오군영의 군졸들이 대원군파에 가세하여 친고종파 인사들이 죽거나 체포됨. 사건이 정리된 후 고종이 대원군을 공식적으로 섭정으로 선포하였으며, 실각되었던 대원군파 관료들이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고 간신으로 몰린 고종파 관료들이 유배를 가며 대원군파가 다시한번 정권을 장악함.(을해정난) | ||
*공식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이 폐지된 통리기무아문을 대신하여 군국기무처를 설립, 개화파 이유원을 영의정에 임명하고 군국기무처 총재로 삼았으며, 박규수를 좌의정에 임명하고 부총재로 삼아 군국기무처의 실권을 맡김<ref>영의정이 좌의정보다 높고 군국기무처에서도 영의정 이유원이 총재로서 좌의정 겸 부총재 박규수보다 높았으나, 전통적으로 영의정은 실권을 가진 재상보다는 명예직에 가까웠기 때문에 군국기무처의 실질적 운영은 좌의정인 박규수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게 되었음</ref>. 이외 김홍집 등 박규수와 친분이 있던 젊은 개화파들이 관직에 임명되며 조정에 입각함. | |||
*공식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이 폐지된 통리기무아문을 대신하여 군국기무처를 설립, 개화파 이유원을 영의정에 임명하고 군국기무처 총재로 삼았으며, 박규수를 좌의정에 임명하고 부총재로 삼아 군국기무처의 실권을 맡김<ref>영의정이 좌의정보다 높고 군국기무처에서도 영의정 이유원이 총재로서 좌의정 겸 부총재 박규수보다 높았으나, 전통적으로 영의정은 실권을 가진 재상보다는 명예직에 가까웠기 때문에 군국기무처의 실질적 운영은 좌의정인 박규수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게 되었음</ref>. 이외 김홍집 등 박규수와 친분이 있던 젊은 개화파들이 관직에 임명되며 조정에 입각함. 또한 이때 정권의 안정성을 위해 우호적인 세력을 확보하고 각 지방과 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측면에서 보부상들이 중심이 된 혜상공국(惠商公局)이 군국기무처 직속에 설립됨.<ref>이 혜상공국은 국내 상인들에 대한 상표(商標, 상업허가증)의 발급과 상업세 징수 뿐만 아니라 화적과 불법 상인들을 단속하는 치안업무 또한 수행하며 사실상 경제-치안을 아우르는 거대 조직으로 기능함. 혜상공국의 장관인 구관당상(句管堂上) 등 중앙기구 지도부는 본래 정부에서 임명하였지만 혜상공국의 실질적인 운영은 보부상들이 주도하는 지방조직이 장악함.</ref> | |||
*:대원군파가 군국기무처를 통해 국정의 전권을 장악하며 박규수 주도하에 근대화 정책이 강화되어 통리기무아문 설립 이래 양성된 한성어학당의 외국어 능력자와 유학파 일부 등을 등용하여 서구식 교육<ref>수학, 과학, 서양어 등</ref>을 시작. 기존 개화파 관료 등용이 주로 박규수의 개인적인 친분관계 등에 의한 천거로 이루어져 개화파를 크게 양성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문제로 인해 과거제에 양무과(洋務科)를 설립, 양인 모두에게 응시자격을 부여하여 개화론자들이 성리학 공부에 관계 없이 관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종친과 양반 자제들에게도 서구식 교육을 하기 위해 수학원이 설립됨. 또한 공업화를 위해 광산업을 장려하였으나, 채광기술의 문제와 예산부족 등의 문제에 더해 근대화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측면에서 주로 서구열강국가들에게 채굴권을 판매하여 실제로 국가주도의 채굴산업이 활발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음. | *:대원군파가 군국기무처를 통해 국정의 전권을 장악하며 박규수 주도하에 근대화 정책이 강화되어 통리기무아문 설립 이래 양성된 한성어학당의 외국어 능력자와 유학파 일부 등을 등용하여 서구식 교육<ref>수학, 과학, 서양어 등</ref>을 시작. 기존 개화파 관료 등용이 주로 박규수의 개인적인 친분관계 등에 의한 천거로 이루어져 개화파를 크게 양성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문제로 인해 과거제에 양무과(洋務科)를 설립, 양인 모두에게 응시자격을 부여하여 개화론자들이 성리학 공부에 관계 없이 관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종친과 양반 자제들에게도 서구식 교육을 하기 위해 수학원이 설립됨. 또한 공업화를 위해 광산업을 장려하였으나, 채광기술의 문제와 예산부족 등의 문제에 더해 근대화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측면에서 주로 서구열강국가들에게 채굴권을 판매하여 실제로 국가주도의 채굴산업이 활발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음. | ||
*:이외에도 청과 일본, 미국, 프랑스 등에 영선사와 수신사, 보빙사를 파견했는데, 이를 기점으로 이후 유학파 및 관료들 사이에 대원군의 지원을 받아 왕권중심의 체제를 지지하며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집중하는 온건개화파와,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해 전면적인 사회제도의 개혁을 요구하는 급진개화파가 분화되기 시작함.<ref>다만 초기에는 이 구분 자체가 모호하였으며, 근대화가 대원군 주도로 이루어진 특성상 한동안 급진개화파의 수와 정치적 영향력은 온건개화파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었음</ref> | *:이외에도 청과 일본, 미국, 프랑스 등에 영선사와 수신사, 보빙사를 파견했는데, 이를 기점으로 이후 유학파 및 관료들 사이에 대원군의 지원을 받아 왕권중심의 체제를 지지하며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집중하는 온건개화파와,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해 전면적인 사회제도의 개혁을 요구하는 급진개화파가 분화되기 시작함.<ref>다만 초기에는 이 구분 자체가 모호하였으며, 근대화가 대원군 주도로 이루어진 특성상 한동안 급진개화파의 수와 정치적 영향력은 온건개화파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었음</ref> | ||
1877년 군국기무처를 이끌던 좌의정 박규수가 사망하자 개화파 정권은 박규수의 문하였던 김홍집과 박정양에게 양분됨. 김홍집이 좌의정으로서 군국기무처 부총재의 지위를 이어받아 정책을 주도하고, 박정양은 우의정으로서 군국기무처 회의원에 임명되어 보좌하는 형식이었음. | |||
1878.10.21: 3년동안 정권을 유지하며 정치적 안정성과 함께 근대화를 추진하는데 기반이 될 관료조직을 어느정도 양성해낸 흥선대원군 정권에서 체제를 공고화하고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무인경장(戊寅更張)을 선포함. | 1878.10.21: 3년동안 정권을 유지하며 정치적 안정성과 함께 근대화를 추진하는데 기반이 될 관료조직을 어느정도 양성해낸 흥선대원군 정권에서 체제를 공고화하고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무인경장(戊寅更張)을 선포함. | ||
*:-군제개혁이 단행되어 고종 친정기에 부활하였던 오군영이 다시 혁파되고 금위영<ref>궁내부 소속으로 국왕의 근접경호 담당</ref>과 시위영<ref>궁궐과 한성의 경비를 맡은 중앙군</ref>, 진위영<ref>지방군</ref>이 설치되어 삼군영 체제가 확립되었으며, 군무아문 산하에 군사병마학당(軍師兵馬學堂)<ref>훗날의 육군무관학교</ref>과 수사해방학당(水師海防學堂)<ref>훗날의 해군무관학교</ref>이 설립됨. 학당의 교관은 기존 교련병대와 달리 미국에서<ref>대원군파가 정권을 잡기는 했지만 프랑스가 병인양란으로 인해 대중적 인식이 좋지 못한 것을 의식함.</ref> 초빙하였으며, 기존에 교련병대만을 서양식 군대로 양성하던것을 금위영과 시위영 전체에 확대하여 서양식 군사훈련을 받도록 함.<ref>진위영은 재정상의 문제 등으로 인해 구식군인으로 남음</ref> | *:-군제개혁이 단행되어 고종 친정기에 부활하였던 오군영이 다시 혁파되고 금위영<ref>궁내부 소속으로 국왕의 근접경호 담당</ref>과 시위영<ref>궁궐과 한성의 경비를 맡은 중앙군</ref>, 진위영<ref>지방군</ref>이 설치되어 삼군영 체제가 확립되었으며, 군무아문 산하에 군사병마학당(軍師兵馬學堂)<ref>훗날의 육군무관학교</ref>과 수사해방학당(水師海防學堂)<ref>훗날의 해군무관학교</ref>이 설립됨. 학당의 교관은 기존 교련병대와 달리 미국에서<ref>대원군파가 정권을 잡기는 했지만 프랑스가 병인양란으로 인해 대중적 인식이 좋지 못한 것을 의식함.</ref> 초빙하였으며, 기존에 교련병대만을 서양식 군대로 양성하던것을 금위영과 시위영 전체에 확대하여 서양식 군사훈련을 받도록 함.<ref>진위영은 재정상의 문제 등으로 인해 구식군인으로 남음</ref> | ||
*:-군사병마학당과 수사해방학당의 설립으로 인해 무과가 폐지되고 이후부터 무관직은 군사병마학당과 수사해방학당의 교육 후에 제수하도록 정함. 다만 | *:-군사병마학당과 수사해방학당의 설립으로 인해 무과가 폐지되고 이후부터 무관직은 군사병마학당과 수사해방학당의 교육 후에 제수하도록 정함. 다만 두 학당의 입학은 다음해인 1879년에 시작되었으며, 군사병마학당과 수사해방학당의 교육기간은 설립당시 규정상 2년이었기 때문에 무과 폐지 조치는 실질적으로 3년 후인 1881년부터 시행됨. | ||
*:-의정부의 6조가 혁파되었으며 8아문<ref>내무아문(일반 국가행정, 지방업무), 외무아문(외교통상업무), 탁지아문(재정업무), 법무아문(사법), 학무아문(교육업무, 과거시험 관리), 공무아문(국가토목사업), 군무아문(군사업무), 농상아문(농업, 상업 등 국가경제)</ref> 체제로 개편됨. 삼정승 체제는 남아 수장인 영의정을 필두로 | *:-의정부의 6조가 혁파되었으며 8아문<ref>내무아문(일반 국가행정, 지방업무), 외무아문(외교통상업무), 탁지아문(재정업무), 법무아문(사법), 학무아문(교육업무, 과거시험 관리), 공무아문(국가토목사업), 군무아문(군사업무), 농상아문(농업, 상업 등 국가경제)</ref> 체제로 개편됨. 삼정승 체제는 남아 수장인 영의정을 필두로 좌의정 김홍집이 외무(직접 겸임), 농상<ref>농상아문대신의 경우 혜상공국의 구관당상을 겸임하도록 정함. 본래 관료가 임명되었으나 상업업무를 사실상 혜상공국에서 전적으로 관할하며 농상아문대신 직위가 유명무실화 되었으며, 후에 보부상이 혜상공국을 장악하며 보부상들이 농상아문대신을 역임하게 됨</ref>, 탁지, 군무아문을, 우의정 박정양이 내무(직접 겸임), 공무, 법무, 학무아문을 지휘하도록 하였음.<ref>자세히 보면 영의정은 사실상 권력이 없고 좌의정이 근대화 추진에 필요한 정책결정권한(외교, 재정, 경제, 군사)을 쥐고 우의정이 국내행정사무를 맡고 있음을 알 수 있음. 따라서 이때 사실상 좌의정인 김홍집이 의정부의 최고권력자로서 대우받음.</ref> 또한 이때 승정원 등 국왕비서기구와 종친담당기구가 통폐합되어 궁내부로 독립하여 의정부와 분리되며 왕실/국정업무를 담당하는 기관들이 완전히 분리되었으며, 이로인해 고종의 국정개입 여지가 완전히 차단됨.<ref>물론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전제군주국가인 조선에서 국왕인 고종이 고작 행정기관 분리로 국정개입이 불가능해진다는건 말이 안되는 이야기지만, 이시점에서 고종은 을해정난의 영향으로 창덕궁에 사실상 유폐된 수준이었기 때문에 비서기구의 분리만으로 국정개입의 여지를 상실시킬 수 있었음.</ref> | ||
*:-행정체계가 개편되며 경찰제도 또한 개편되어 일본의 경시청을 모방하여 기존의 좌우포도청이 합쳐져 내무아문 산하에 경무청이 설립됨. 일반적인 치안업무 뿐만 아니라 감옥, 집회 관리와 더불어 한성부의 호구조사 업무와 보건, 환경미화 업무 등을 담당하며 한성부의 행정업무 또한 수행함. | *:-행정체계가 개편되며 경찰제도 또한 개편되어 일본의 경시청을 모방하여 기존의 좌우포도청이 합쳐져 내무아문 산하에 경무청이 설립됨. 일반적인 치안업무 뿐만 아니라 감옥, 집회 관리와 더불어 한성부의 호구조사 업무와 보건, 환경미화 업무 등을 담당하며 한성부의 행정업무 또한 수행함. | ||
*:- | *:-과거시험 체계 하의 양무과 시행만으로는 근대화에 필요한 관료집단을 모집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주장으로 인해 각 아문 산하에 전고국(銓考局)을 두고 각 아문대신이 주관하는 시험에 따라 참외관(參外官) 이하의 관원을 자유롭게 선발할 수 있도록 정함. 추천 등에 의해 뽑힌 후보자를 간단한 시험을 치르게 하고 관리로 임용하며 빠르게 인력을 충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사실상 음서나 다름없는 제도였기 때문에 승진에 한계가 있었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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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중앙정계에서 온건개화파에 비해 힘이 밀린 급진개화파가 청과의 관계를 해소하고 자주국화를 주장하며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설함. 김옥균과 서재필이 주도하였으며, 주로 친미, 친일 성향을 보임 | 1880:중앙정계에서 온건개화파에 비해 힘이 밀린 급진개화파가 청과의 관계를 해소하고 자주국화를 주장하며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설함. 김옥균과 서재필이 주도하였으며, 주로 친미, 친일 성향을 보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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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01454F; color:#fff;" | 원인 | ! style="background:#01454F; color:#fff;" | 원인 | ||
| colspan="2" | | | colspan="2" | '''[[한인헌태왕|흥선대원군]]의 정권 장악 시도'''<br>-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정치적 갈등<br>-흥선대원군의 개화정책 시도에 대한 척화파의 반발<br>-민씨척족과 척화파의 친대원군파 숙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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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01454F; color:#fff;" | 교전세력 | ! style="background:#01454F; color:#fff;" | 교전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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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1" width="40%" | | | colspan="1" width="40%" | 훈련도감<br>장어영 | ||
| colspan="1" width="40%" | | | colspan="1" width="40%" | 교련병대<br>훈련도감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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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01454F; color:#fff;" | 피해 | ! style="background:#01454F; color:#fff;" | 피해 |
2024년 11월 22일 (금) 19:59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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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
고종 즉위 후
1863:고종 즉위 및 대원군 섭정체제 시작
1864~:서원 철폐, 비변사 폐지 등등. 경복궁의 중건은 이루어지지 않음.
1866:제너럴 셔먼호 사건, 병인박해, 병인양란
- 10월 3일 프랑스 해군이 정족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에 의해 1차 패배, 이후 10월 9일 전열을 재정비한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에 2차 공세를 가해 양헌수를 포함한 조선군이 전멸하며 정족산성이 함락됨. 정족산성마저 프랑스군에 함락되며 강화도 전역이 프랑스의 점령하에 떨어지자 조정에 불안감이 휩싸였으며, 서원철폐 행보로 인해 조정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유림세력이 기회를 노려 대원군의 입지를 흔들고자 척화론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며 조정을 압박함. 그러나 대원군이 역으로 이를 받아 전국에 근왕군 모집을 촉구하며 결국 유림세력들도 이에 동참해 의병들을 이끌고 한성에 당도했고[1], 11월 17일 중앙군과 근왕군이 프랑스군이 주둔중이었던 강화도를 공격하여 상륙에 성공, 사상자와 피해가 다수 발생하였으나 압도적인 머릿수에서 오는 수적우세로 결국 프랑스군을 강화도에서 몰아냄. 이때 프랑스 원정군이 거의 전멸을 당하며 겨우 살아남은 로즈 제독이 본국에 이 사실을 보고하고 원정대가 궤멸당했다는 소식이 프랑스에 퍼지자, 국가 위신의 실추를 우려한 나폴레옹 3세가 1월 13일 선전포고를 강행하며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됨. 한편 조선은 강화도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낸 후 추가 원정이 올것을 대비하여 근왕군을 강화도에 주둔시키고 성곽과 방어진지를 재건, 증축하는 작업을 개시함.
- 1867:3월 1일, 7천명 규모의 프랑스 해군함대가 서해로 진입해 강화도를 재공격, 포격전을 통해 정족산성과 당시 조선이 재건했던 초지진을 불바다로 만든 후 강화도 남부에 상륙하며 북상하던 도중 광성보에서 이곳에 주둔한 강화도의 조선 근왕군을 맞닥뜨리며 전투가 벌어짐. 근왕군의 격렬한 저항이 있었으나 압도적인 화력차이로 인해 순식간에 광성보가 함락당한 후 프랑스군이 계속해서 진격하자 정족산성과 초지진에 이어 광성보까지 무너져내렸다는 소식을 들은 근왕군이 강화산성을 포기하고 김포의 문수산성으로 대피, 이 과정에서 뒤쳐진 부대가 프랑스군에게 따라잡혀 궤멸적인 피해를 입음(강화산성 전투). 강화도 전역이 다시한번 자신들의 손에 떨어지자 자신감을 얻은 프랑스군이 3월 15일 문수산성에 상륙을 시도, 문수산성 일대가 초토화되는 결과를 낳았지만 조선에서 중앙군이 충원되며 점령에는 실패함(제2차 문수산성 전투). 강화도 전역이 프랑스에게 점령당하고 문수산성은 비록 지켜냈지만 초토화당했으며, 강화도 점령 과정에서 근왕군이 강화산성을 포기하고 후퇴했다는 소식까지 전해지자 조정은 큰 충격에 빠짐. 군사를 더 모집해서 강화도를 수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당장 동원 가능한 동원력에 한계가 발생, 프랑스군의 강력한 화력을 본 근왕군들 또한 섵불리 강화도 상륙전에 나서기를 꺼려하며 대치상태가 지속됨. 이 상태에서 프랑스가 주기적으로 조선 본토를 향해 포격도발을 하고 프랑스 함선이 한강 하구까지 진입했다가 강화도로 복귀하는 등의 일이 벌어지자 조정은 점점 불안에 빠졌으며, 여기에 평안감사 박규수가 실리를 주장하며 개항을 촉구하는 상소까지 올리자 조정에 화친여론이 일어나기 시작함. 강경파는 박규수를 비롯해 화친을 주장한 신하들을 유배보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프랑스의 압도적인 화력 아래 조선군의 성곽과 군대가 무너져내린것을 본 대원군이 주화파의 손을 들어주며 박규수를 예문관제학에 제수하고 접견대관으로 파견해 4월 28일 통상조약을 체결함.
강화도 조약과 통리기무아문
강화도 조약 체결(1867.4.28)
- 제물포, 원산, 부산이 개항됐으며 조선에서 천주교 포교가 허용되는 한편 개항지 내에서 프랑스 선교사를 보호해야할 의무가 생김. 이외 치외법권 및 최혜국 대우, 관세권 등 기타 불평등 조항이 적용되었으며, 조선 측에서 프랑스의 피해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하는 한편 강화도가 프랑스에게 조차지로 제공됨[2].
- ~:병인양란으로 인해 개항이 이루어지는것을 넘어 강화도까지 프랑스의 조차지로 넘어가자 조선 사회, 특히 조정은 굉장한 혼란에 빠졌으며, 권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척화파들은 저마다 복수를 주장하는 한편 주화파들을 처벌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임. 하지만 척화파 신하들과 그 기반인 유림세력 본인들 또한 프랑스와 싸우며 압도적인 화력차이를 직접 느끼고 대패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3] 적극적 정치행동에 나서지는 못했음.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의 열악한 기술력과 그에 비해 발전한 서양의 기술력을 보고 위기감을 느낀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에 복수하기 위해서는 그와 대등한 군사력을 갖춰야 함을 주장하며[4] 서양식 신무기의 도입과 개발을 지시, 개항을 주장한 박규수를 병조판서 겸 훈련대장에 임명하며 중용하는 한편 서양식 무기 도입의 총책으로 삼음[5]. 이때 박규수와 친분이 있던 이들 또한 천거를 통해 조정에 입각하며 개화파가 조정에 들어섬.
1870:개항이 이루어지고 몇년의 시간이 흐른 뒤, 청나라에서 이홍장이 북양통상대신의 지위에 올라 외교를 주도하게 되자 당시 반강제적이긴 하지만 개항을 하고서도 서양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데 미온적이었던 조선 측에 접근을 시도함. 이에 흥선대원군의 주도하에 조선 조정에서는 이인응을 정사로 하여 사신을 파견해 이홍장과 접촉, 개화에 대한 지지를 얻었으며 이때 파견된 사신행렬에 소속된 개화파들이 당시 청나라에서 진행중이던 양무운동과 톈진의 개항장의 모습을 보며 이후 조선의 개화정책에 있어 본보기가 됨. 사신을 보냄으로서 이홍장을 통해 청나라의 정치적 후원을 얻으며 개화의 정치적 기반은 다졌으나, 서양 오랑캐들에게 굴복한것으로 모자라 청나라와 접선하여 이를 본받으려 하는 모습으로 인해 강경 유림 세력이 더욱 불만을 가짐.
- 병인양란과 개항지의 프랑스 상인들을 통해 발전한 서양의 기술력이 조정에 알려진 상태에서[6] 프랑스와의 통상과 개항지 관련 처리 문제, 서양식 무기의 도입 문제 등등의 문제가 산적한 상태에서 이홍장을 통해 개화에 대한 지지를 얻게되자, 병조판서 박규수를 위시한 개화파의 주장으로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됨. 이때 수구파로서 개화에 걸림돌이 되던 김병학 대신 동생인 김병국을 영의정으로 임명하며 총리통리기무아문사(總理統理機務衙門事)[7]를 겸하도록 했으며, 박규수가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8]로서 군무사, 군물사, 전선사를 직접 관할하며 실질적으로 통리기무아문의 운영을 주도함. 통리기무아문이 세워지자 조정에 입각했던 개화파와 친대원군파 등이 통리기무아문의 당상과 여러 직책을 차지하며 조정 내의 권력을 키워나감.
~:이후 통리기무아문의 주도로 청의 양무운동을 본떠 서양어 교육과 무기공장 설립 및 생산에 집중된 개혁이 시작. 강화도 조약 이후부터 시도되었던 서양식 무기도입정책을 확장하여 한양에 조병창을 세워 서양식 무기를 생산코자 하였지만 기술력의 미비와 자금력의 부족으로 실효성은 미미했음. 서양어 교육과 외교관 양성을 위해 수도인 한성 내에 한성어학당[9]을 건립함. 한성어학당을 통해 서얼과 중인계층이 수혜를 입었으며[10], 이후에 우수한 일부는 프랑스와 청나라 등지에 유학생으로 파견되어 서양의 지식을 연구하기도 함.
1872:메이지 정부와의 국교가 정상화되고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어 양국이 상호 개항함. 이후 조미수호통상조약 또한 체결.
1873:보불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 내부의 문제가 어느정도 정리되자 군무사와 군물사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박규수 주도하에 통리기무아문에서 신식군대 양성을 위해 프랑스와 접선, 기존의 오군영 체제를 혁파하고 궁궐과 왕의 호위를 맡는 무위영(武衛營)과 수도 한성의 경비를 맡는 장어영(壯禦營)의 2군영 체제로 개편하는 한편 군무사의 아래에 교련국을 두고 교련병대(敎鍊兵隊)를 창설해 프랑스 교관의 지도하에 서양식 군사훈련을 받도록 함. 강화도 조약 이후로 개화정책이 계속되는것을 넘어 서양인 교관을 받아 서양식 군사훈련을 받는 군대를 양성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척화파 및 유림세력은 말 그대로 분노했으며, 조정에 남아있던 척화파 신하들이 대원군파의 위세에 눌려 미온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내오던 차에 최익현이 나서서 상소를 올리며 흥선대원군을 탄핵함. 최익현의 상소는 당시 흥선대원군의 계속된 섭정체제로 인해 권력의 뒷전에 밀려나있던 고종의 호응을 얻었으나, 친대원군파 관료들이 최익현의 상소에 집단으로 반발하며 신식군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병인양란의 일을 강조하는 등 고종을 반협박, 결국 고종이 이들의 여론을 받아들이며 최익현은 국문을 당하고 유배당함. 이로서 흥선대원군의 섭정체제가 지속되는 한편 고종을 상대로 정쟁에서 승리하며 그 위상이 공고해졌음. 그러나 (개화를 지적한) 최익현이 유배당하고 이 과정에서 임금이 협박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척화파와 유림의 불만은 더욱 거세졌으며, 권력을 노리던 민씨 세력이 이를 눈여겨보아 암암리에 민씨세력과 척화파가 결탁함.
을해정난과 그 이후
1874:11월 경 흥선대원군과 개화파 세력이 계속해서 개화정책[11]을 추진하자 이에 분노한 척화파 세력과 권력을 노린 민씨세력이 지방의 유림세력까지 동원하여 조정의 흥선대원군파 관료들을 대대적으로 탄핵, 대원군파 관료들이 저항하였으나 이미 사전에 반대파와 손을 잡은 고종에 의해 박규수 등 대원군파 관료들이 대거 실각하거나 유배를 가며 정국이 전환됨[12]. 이후 척화파였던 홍순목이 영의정의 자리에 오르고 이외 척화파 관료들과 민승호, 민겸호, 민태호 등 민씨세력 등이 조정의 중직에 올랐으며, 유배를 갔던 최익현 또한 고조의 신임을 받아 우부승지의 관직에 오르며 조정에 입각함. 통리기무아문은 폐지되었으며, 군제 또한 다시 오군영 체제로 회귀하여 교련병대는 훈련도감에 소속됨[13]
1875:1월 5일 형조판서 민승호의 집에 의문의 폭탄상자가 배달되어 민승호 일가가 폭사함. 혼란스러운 와중 흥선대원군의 형 흥인군의 집에 알수없는 화재가 발생하고, 민겸호의 집에 자객이 침입했다가 사라지는 등 계속해서 친고종-반흥선대원군파 대신들에게 사고가 생기자 모두가 배후로 흥선대원군을 의심하였으나 아무리 권력에서 밀려났어도 감히 임금의 친부를 테러범으로 내몰 수 있을리가 없었고, 조정에서 잇따른 사고와 이에 대한 대응으로 혼란스러운 사이 2월 16일, 흥선대원군이 사전에 인맥과 자금 등을 동원하여 매수한 훈련도감의 교련병대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진격, 순식간에 창덕궁의 궐문들을 장악하고 궐내각사와 인정전, 내전을 장악하며 고종을 확보함. 이에 친고종파 관료들이 중앙군을 동원하여 반격에 나서려고 하였으나 대원군의 협박을 받은 고종이 반란세력을 인정하고 친고종파 관료들을 간신으로 선포하는 교서를 내리자 명분이 취약해졌으며, 그다지 친고종파 관료들에게 협조할 생각이 없었던[14] 오군영의 군졸들이 대원군파에 가세하여 친고종파 인사들이 죽거나 체포됨. 사건이 정리된 후 고종이 대원군을 공식적으로 섭정으로 선포하였으며, 실각되었던 대원군파 관료들이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고 간신으로 몰린 고종파 관료들이 유배를 가며 대원군파가 다시한번 정권을 장악함.(을해정난)
- 공식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이 폐지된 통리기무아문을 대신하여 군국기무처를 설립, 개화파 이유원을 영의정에 임명하고 군국기무처 총재로 삼았으며, 박규수를 좌의정에 임명하고 부총재로 삼아 군국기무처의 실권을 맡김[15]. 이외 김홍집 등 박규수와 친분이 있던 젊은 개화파들이 관직에 임명되며 조정에 입각함. 또한 이때 정권의 안정성을 위해 우호적인 세력을 확보하고 각 지방과 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측면에서 보부상들이 중심이 된 혜상공국(惠商公局)이 군국기무처 직속에 설립됨.[16]
- 대원군파가 군국기무처를 통해 국정의 전권을 장악하며 박규수 주도하에 근대화 정책이 강화되어 통리기무아문 설립 이래 양성된 한성어학당의 외국어 능력자와 유학파 일부 등을 등용하여 서구식 교육[17]을 시작. 기존 개화파 관료 등용이 주로 박규수의 개인적인 친분관계 등에 의한 천거로 이루어져 개화파를 크게 양성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문제로 인해 과거제에 양무과(洋務科)를 설립, 양인 모두에게 응시자격을 부여하여 개화론자들이 성리학 공부에 관계 없이 관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종친과 양반 자제들에게도 서구식 교육을 하기 위해 수학원이 설립됨. 또한 공업화를 위해 광산업을 장려하였으나, 채광기술의 문제와 예산부족 등의 문제에 더해 근대화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측면에서 주로 서구열강국가들에게 채굴권을 판매하여 실제로 국가주도의 채굴산업이 활발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음.
- 이외에도 청과 일본, 미국, 프랑스 등에 영선사와 수신사, 보빙사를 파견했는데, 이를 기점으로 이후 유학파 및 관료들 사이에 대원군의 지원을 받아 왕권중심의 체제를 지지하며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집중하는 온건개화파와,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해 전면적인 사회제도의 개혁을 요구하는 급진개화파가 분화되기 시작함.[18]
1877년 군국기무처를 이끌던 좌의정 박규수가 사망하자 개화파 정권은 박규수의 문하였던 김홍집과 박정양에게 양분됨. 김홍집이 좌의정으로서 군국기무처 부총재의 지위를 이어받아 정책을 주도하고, 박정양은 우의정으로서 군국기무처 회의원에 임명되어 보좌하는 형식이었음.
1878.10.21: 3년동안 정권을 유지하며 정치적 안정성과 함께 근대화를 추진하는데 기반이 될 관료조직을 어느정도 양성해낸 흥선대원군 정권에서 체제를 공고화하고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무인경장(戊寅更張)을 선포함.
- -군제개혁이 단행되어 고종 친정기에 부활하였던 오군영이 다시 혁파되고 금위영[19]과 시위영[20], 진위영[21]이 설치되어 삼군영 체제가 확립되었으며, 군무아문 산하에 군사병마학당(軍師兵馬學堂)[22]과 수사해방학당(水師海防學堂)[23]이 설립됨. 학당의 교관은 기존 교련병대와 달리 미국에서[24] 초빙하였으며, 기존에 교련병대만을 서양식 군대로 양성하던것을 금위영과 시위영 전체에 확대하여 서양식 군사훈련을 받도록 함.[25]
- -군사병마학당과 수사해방학당의 설립으로 인해 무과가 폐지되고 이후부터 무관직은 군사병마학당과 수사해방학당의 교육 후에 제수하도록 정함. 다만 두 학당의 입학은 다음해인 1879년에 시작되었으며, 군사병마학당과 수사해방학당의 교육기간은 설립당시 규정상 2년이었기 때문에 무과 폐지 조치는 실질적으로 3년 후인 1881년부터 시행됨.
- -의정부의 6조가 혁파되었으며 8아문[26] 체제로 개편됨. 삼정승 체제는 남아 수장인 영의정을 필두로 좌의정 김홍집이 외무(직접 겸임), 농상[27], 탁지, 군무아문을, 우의정 박정양이 내무(직접 겸임), 공무, 법무, 학무아문을 지휘하도록 하였음.[28] 또한 이때 승정원 등 국왕비서기구와 종친담당기구가 통폐합되어 궁내부로 독립하여 의정부와 분리되며 왕실/국정업무를 담당하는 기관들이 완전히 분리되었으며, 이로인해 고종의 국정개입 여지가 완전히 차단됨.[29]
- -행정체계가 개편되며 경찰제도 또한 개편되어 일본의 경시청을 모방하여 기존의 좌우포도청이 합쳐져 내무아문 산하에 경무청이 설립됨. 일반적인 치안업무 뿐만 아니라 감옥, 집회 관리와 더불어 한성부의 호구조사 업무와 보건, 환경미화 업무 등을 담당하며 한성부의 행정업무 또한 수행함.
- -과거시험 체계 하의 양무과 시행만으로는 근대화에 필요한 관료집단을 모집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주장으로 인해 각 아문 산하에 전고국(銓考局)을 두고 각 아문대신이 주관하는 시험에 따라 참외관(參外官) 이하의 관원을 자유롭게 선발할 수 있도록 정함. 추천 등에 의해 뽑힌 후보자를 간단한 시험을 치르게 하고 관리로 임용하며 빠르게 인력을 충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사실상 음서나 다름없는 제도였기 때문에 승진에 한계가 있었음.
1880:중앙정계에서 온건개화파에 비해 힘이 밀린 급진개화파가 청과의 관계를 해소하고 자주국화를 주장하며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설함. 김옥균과 서재필이 주도하였으며, 주로 친미, 친일 성향을 보임
- 입지 확대를 위해 독립협회에서 만민공동회를 주관, 지식인과 서민계층이 모였으며, 이후 입헌운동과 사회개혁 요구에 영향을 줌
- 독립협회가 출범하자 온건개화파에서 이에 대응해 보국협회(輔國協會)를 창설함. 총리대신 김병국이 수장이었으나 참정대신 겸 내부대신 김홍집이 주도. 대원군의 후원을 받음
1882:만민공동회의 규모가 날로 커지자 흥선대원군이 친림하여 1881년 말 관민공동회를 개최, 독립협회와 협의하여 1882년 개혁을 선포
- 1차 임오개혁
- 독립협회에서 임오개혁 발표 직후 의회 설립과 입헌군주제 시행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다만 1882년 말 자주성을 강화하기 위해 선포한 2차 임오개혁에서 의회 설립이 일정 부분 반영됨
- 2차 임오개혁
- -국명을 조선국에서 대조선국으로 교체하는 안이 올라왔으나 청의 반대가 예상되어 부결됨. (청나라 연호가 폐지되고 건양을 연호로 세우는 것도 마찬가지) 그러나 내부에서는 국왕의 호칭을 대군주로 변경하는 등 호칭을 격상하도록 하는 안이 통과됨.[32]
- -중추부가 중추원으로 개편되어 의회의 역할을 맡음[33]
- -의정부가 내각으로 변경되고, 총리대신의 명칭이 의정국무대신으로 변경되었으며, 8아문이 7부로 개편됨[34]
- -태양력이 도입됨.
- -국문보급이 시작되어 정부문서에서 국한문이 혼용되기 시작하였으며, 학부 주도로 소학교가 설치되기 시작해 초중등교육을 담당함
청불전쟁 패배로 인해 베트남에 대한 권리를 상실한 청이 조선에 종속관계를 명시한 조약의 체결을 요구함.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어 양국 간 통상에 대한 규정이 발효됨. 해당 조약에서는 조선이 청국에 종속되어 있는 조항이 삽입되어 있음.
1884:건양양전이 선포되고 양지아문이 설립되어 전국단위의 토지조사사업이 시행, 지계가 발급되기 시작하고 역·둔토와 주인이 모호한 땅들이 국유지로 전환됨
1885:독립협회가 중추원의 권한 및 여론수렴 등에 대한 제도 수립과 그 근간인 헌법 제정을 요구함. 박정양(보국협회)와 홍영식(독립협회)를 필두로 한 헌법시찰단을 서양 국가(일본, 영국, 독일)로 파견하여 근대식 헌법제도를 연구하도록 함.
1886:청국이 조선에 명목적인 종속관계가 아닌 실질적인 종속관계를 요구함. 이에 따라 청국은 조선에 서양 국가와의 조약은 무효이며, 이를 유효하게 하려면 청국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함. 이로 인해 국내 정치에서는 청국의 지위에 대한 큰 반향이 불었음(유교 내에서도 소중화사상 등 청국을 업신여기는 풍조가 남아있었음). 독립협회는 소식을 접하자 중추원을 통하여 해당 조약에 대한 반대 의견을 분명히 제시하였으며, 장외집회를 열어 반청운동을 개시함. 보국협회 내에서는 현실파와 자강파 간의 격렬한 토론이 벌어지며, 내분이 일어났으며 반청여론이 공식적으로 제기됨. 이에 따라 정부는 청국의 요구를 거부하며, 결국 양국 간 대등한 조약의 체결을 요구하기에 이름.
- 독립협회에서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건립하는 운동을 벌였으며, 민중의 열렬한 지지 위에 독립문이 건립됨
1887:조선의 요구를 받은 청국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여 정국의 경색을 완화하려 하였으나, 위안스카이가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톈진으로 압송하려 모의한 사건이 드러나자, 양국 관계는 더욱 악화됨. 이때 독립협회의 김옥균이 조일 연합을 통해 청국에게서 완전히 독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흥선대원군을 설득해내면서 외교특사단(단장 김옥균)이 일본으로 파견됨. 외교특사단은 자유민권운동가 출신의 이타가키 다이스케, 후쿠자와 유키치, 당시 총리이던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조일연합론을 강조하였음. 후쿠자와 유키치가 이들을 지지하고 나서자, 자유민권운동 파벌이 이를 뒤따랐고, 조선 조정이 일본과 힘을 합치면 청국으로부터 조선을 빼앗을 수 있다고 확신한 이토 히로부미가 지원을 선언하자, 조일동맹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함. 이에 따라 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군사동맹으로까지 이어지는 관계 개선을 이루어내게 됨.
조선 조정은 당장의 생존을 위해 일본이 내놓은 경제합리화 정책(악폐 폐기, 조일은행 설립 및 중앙은행 설립, 해관세 조정) 및 개항지 조건 변경(개항장 밖 동서남북 직경 25리(10km)까지 통상 가능), 재조선일본군 주둔 허용(영사관마다 경비대 최대 600명 주둔 가능)의 조항을 받게 되어 경제블록화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 개선, 더 나아가 동맹까지 이뤄낸 김옥균 등 독립협회의 정치적 영향력이 확보되었고, 이론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실정치와 외교무대에 더 많은 독립협회 출신 인사들이 진출하게 되는 계기가 됨. 또한 독립협회에 대한 대중여론이 전반적으로 개선되었음(상민의 반대 여론 증가)
칭제건원
1889:2월 11일 창덕궁에 유폐되있던 고종을 꺼내와서 칭제건원을 하고 황제국을 선포, 대한국이 세워짐. 파견되었던 시찰단이 귀국하여 7월 17일 근대식 헌법인 대한국 국제가 반포됨[35]. 헌법이 반포되며 군국기무처가 폐지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이 헌법에 따른 섭정 자리에 오르며 권력이 유지됨
- 헌법이 반포되며 중추원이 크게 개혁되어, 의석이 200석으로 늘고 4년 임기의 제한선거[36]가 허가되었으며 입법권이 제정되었으나, 문하원[37]과 황제(실질적으로 대원왕)의 거부권으로 입법권이 일정부분 제한당했으며, 정국을 주도하던 보국협회가 독일식 입헌군주제를 지향한 관계로 군령권은 원수부에게 제한당하였고, 총리의 임명은 양원의 의원 중에서 하도록 규정은 되어있었으나 이 과정에서 의회의 신임이 규정되지 않아 내각 구성에도 직접적인 영향은 없었음[38]
- 7월 25일 황제국 선포를 빌미로 청이 한국에 선전포고를 감행. 한청전쟁이 개전됨
1890:4월 17일 한청전쟁이 한일동맹의 승리로 종결. 청과 한국의 종속관계가 공식적으로 청산되었으며, 전쟁 이후 한국은 간도를, 일본은 대만을 할양받았으며 각각 배상금을 지불받음
- 7월 7일 초대 중추원 선거가 개최됨.[39]
권세지가
사대부들의 수장
황실틀
대한국 황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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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가가계틀
한태왕가
한태왕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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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왕가
틀였던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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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인것
궁주 틀
휘영궁
휘영궁주 · 영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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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궁
정명궁의 역대 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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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궁
주경궁의 역대 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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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화궁
안화궁의 역대 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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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덕궁
승덕궁의 역대 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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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문궁
월문궁의 역대 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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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예궁
직예궁의 역대 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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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궁
성현궁의 역대 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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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틀
황제
대한국 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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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황제 大韓國 皇帝 | Kaiser von Kore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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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 경덕제 / 제6대 |
즉위 | 1995년 8월 12일 |
지위 | 대한국의 국가원수 |
연호 | 경덕 (慶德) |
경칭 | 폐하 (陛下)[40] |
관저 | 경복궁 (법궁)[41] |
대한황제어기[42] |
추존황제
비황족 추존황제
대한국 비황족 추존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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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한국사의 역대 연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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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윤 시대 德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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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월 1일 ~ 1956년 12월 31일 (365일) (단기 4289년 1월 1일 ~ 4289년 12월 31일) | ||||||||
이전 | 이후 | |||||||
평장 (平章) | 건녕 (建寧)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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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가분류
태궁가(太宮家): 다른 대원군들과 달리 국태왕으로서의 작위를 받은 흥선국태왕사손 가문을 특별히 다른 대궁가와 구분해 부르는 명칭.
흥선국태왕궁 - 운현궁
대궁가(大宮家): 대원군사손 가문인 궁가를 이르는 명칭. 대궁(大宮)은 본래 황실의 생물학적 본가인 인평대군 가문의 종가만을 이르는 단어였으나 칭제건원 이후 제실대전을 제정하며 궁가의 분류를 정할때 의미가 확장되어 대원군사손 가문을 통틀어 뜻하게 됨.
덕흥대원군궁 - 도정궁
전계대원군궁 - 누동궁
친궁가(親宮家): 친왕이 세운 궁가를 이르는 명칭. 흥선국태왕의 서장자 가문인 은친왕가 역시 친왕가이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태궁가인 흥선국태왕가의 속궁가에 해당하기 때문에 통상적인 친궁가의 분류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은친왕가를 제외한 대한국의 모든 친왕가는 고종 태황제의 계보를 잇는 황실의 직계 종친들이며, 이때문에 친궁가라 하면 보통 궁실을 제외한 직계 종친들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이기도 한다.
영친왕부 - 휘영궁(輝永)
정친왕부 - 정명궁(政明)
경친왕부 - 주경궁(周慶)
안친왕부 - 안화궁(安和)
승친왕부 - 승덕궁(承悳)
달친왕부 - 월문궁(月文)
직친왕부 - 직예궁(直禮)
성친왕부 - 성현궁(成賢)
속궁가(屬宮家): 다른 궁가에서 파생되어 창설된 궁가를 이르는 명칭.
한왕속궁가 - 고리왕가, 노람왕가, 일화왕가
강하종실(降下宗室)
대궁
계동궁
은언궁
은전궁
인물정보
저격수의 월척
대한국 장조의 7대손 진왕충장세자 | 震王忠壯世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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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8년 7월 23일 |
대한국 한성부 누동궁 | |
사망 | 1943년 1월 23일 (향년 34세) |
대한국 한성부 성북구 성복동 | |
묘소 | 국립한성현충원 |
재위기간 | 대한국 진왕세자 |
1915년 7월 25일 ~ 1943년 1월 23일 (광무 22년 7월 25일 ~ 평장 17년 1월 2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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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볶음밥
조선 중종의 17대손 예왕충의세자 | 濊王忠毅世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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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8년 3월 5일 |
대한국 한성부 도정궁 | |
사망 | 1950년 11월 25일 (향년 32세) |
일본민국 기타큐슈현 이이즈카시 | |
묘소 | 일본민국 오사카부 기시와다시 지원군묘지 |
재위기간 | 대한국 예왕세손 |
1925년 3월 15일 ~ 1945년 3월 19일 (융희 6년 3월 15일 ~ 평장 19년 3월 19일) | |
대한국 예왕세자 | |
1945년 3월 19일 ~ 1950년 11월 25일 (평장 19년 3월 19일 ~ 평장 24년 11월 2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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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효자
운현궁 제4대 궁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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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제3대 한왕 한충공왕 | 韓忠恭王 | |
출생 | 1914년 8월 7일 |
대한국 한경 한성부 사동궁 | |
사망 | 1952년 6월 23일 (향년 37세) |
일본민국 | |
묘소 | 국립한성현충원 |
재위기간 | 대한국 한왕세자 |
1921년 8월 15일 ~ 1941년 3월 22일 (융희 2년 8월 15일 ~ 평장 15년 3월 22일) | |
대한국 제3대 한왕 | |
1941년 3월 22일 ~ 1952년 6월 23일 (평장 15년 3월 22일 ~ 평장 26년 6월 2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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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
대한국 제5대 황제 강종 | 康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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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2년 11월 15일 | |||||||||||||||||||||||||||||||||||||
대한국 한경 한성부 중부 관인방 사동궁 (現 한경 한성부 황성구 사동궁) | ||||||||||||||||||||||||||||||||||||||
즉위 | 1956년 7월 12일 (43세) | |||||||||||||||||||||||||||||||||||||
한경 한성부 황성구 경복궁 근정전 | ||||||||||||||||||||||||||||||||||||||
사망 | 1995년 8월 7일 (향년 82세) | |||||||||||||||||||||||||||||||||||||
한경 한성부 황성구 경복궁 건청전 | ||||||||||||||||||||||||||||||||||||||
능묘 | ||||||||||||||||||||||||||||||||||||||
건릉(乾陵) | ||||||||||||||||||||||||||||||||||||||
재위기간 | 대한국 모수왕 | |||||||||||||||||||||||||||||||||||||
1919년 11월 18일 ~ 1926년 5월 2일 (광무 26년 11월 18일 ~ 융희 7년 5월 2일) | ||||||||||||||||||||||||||||||||||||||
대한국 명왕 | ||||||||||||||||||||||||||||||||||||||
1926년 5월 2일 ~ 1956년 7월 12일 (융희 7년 5월 2일 ~ 덕윤 원년 7월 12일) | ||||||||||||||||||||||||||||||||||||||
대한국 제5대 황제 | ||||||||||||||||||||||||||||||||||||||
1956년 7월 12일 ~ 1995년 8월 7일 (덕윤 원년 7월 12일 ~ 건녕 39년 8월 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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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영특검법통과하라
조선 고종의 왕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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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고종의 황후 명성태황후 | 明成太皇后 | |
[ 존호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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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51년 11월 17일 |
경기도 여주목 근동면 섬락리 (現 경기도 여주시 능현동) | |
사망 | 1928년 10월 8일 (향년 76세) |
한경 한성부 황성구 경복궁 흥복전 | |
능묘 | |
홍릉 (洪陵) | |
재위기간 | 조선국 왕비 |
1866년 3월 21일 ~ 1894년 2월 20일 (음력 병인년 신묘월 을미일 ~ 광무 원년 2월 20일) | |
대한국 황후 | |
1894년 2월 20일 ~ 1919년 1월 21일 (광무 원년 2월 20일 ~ 광무 26년 1월 12일) | |
대한국 황태후 | |
1919년 1월 21일 ~ 1926년 4월 25일 (광무 26년 1월 12일 ~ 융희 7년 4월 25일) | |
대한국 태황태후 | |
1926년 4월 25일 ~ 1928년 10월 8일 (융희 7년 4월 25일 ~ 평장 2년 10월 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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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당계의 당부(黨父)
조선 좌의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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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초대 반양군공 반양군문익공 | 潘陽郡文翼公 | |||||||||||||||||||||
출생 | 1807년 10월 27일 | ||||||||||||||||||||
한성부 북부 양덕방 계생동계 (現 한경한성부 황성구 계동) | |||||||||||||||||||||
사망 | 1877년 2월 9일 (향년 69세) | ||||||||||||||||||||
한성부 | |||||||||||||||||||||
묘소 | - | ||||||||||||||||||||
재위기간 | 제344대 좌의정 | ||||||||||||||||||||
1875년 1월 12일 ~ 1877년 2월 9일 (- 2년 8월 15일 ~ - 15년 3월 2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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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체계
공신 등등을 귀족으로 임명하고 수훈자 본인 아래로 4대까지 작위를 세습함. 방계 황족의 경우 황제로부터 아래로 4대까지 황실 작위를 가지고 그 아래 세대는 귀족으로 봉한 뒤 아래로 4대를 귀족작위를 세습한 다음 평민으로 편입
귀족(貴族): 전체 귀족개념
-제실돈령(帝室敦寧): 황족의 지위에서 강하된 종실 가문. 대한국 제실제례의상 황제의 5대손부터는 황족 지위에서 이탈되는데, 이때 강하된 후손들은 황실의 준황족으로서 일반 이성귀족들이 군현 기반의 공후백자남 오등작 작위를 받는것과 달리 봉의국공(奉義國公)의 작위를 받으며 일반 귀족들과 구별되는 지위를 가진다. 제실돈령 가문들은 종성(宗姓)이기 때문에 이론상 친왕이나 군왕 등 제후왕 작위를 받을 수 있으며, 이들 가문에 대한 관리도 이성귀족들과 달리 충훈부 이성제후청이 아닌 궁내성 돈녕원에서 도맡아 한다.
-훈척대족(勳戚大族): 공신과 외척들의 가문. 국가에 공훈을 세워 공신책록을 받으며 작위를 받은 공신과 그 후손들로 이루어진 귀족가문들이 대부분이며, 황실의 외척으로서 작위를 받은 이들 또한 여기에 포함된다. 전자의 경우 충훈부 이성제후청에서 이들의 관리를 도맡아 하나 후자의 경우 국구와 부마, 의빈 본인들은 궁내성 돈녕원에서 관리한다.
작위 수여 및 승계
종성작위는 황내손 세대를 봉의인국공에, 황곤손 세대를 봉의의국공에, 황잉손 세대를 봉의예국공에, 황운손 세대를 봉의지국공에, 황이손 세대를 봉의신국공에 봉함. 황내손녀는 군군(郡君)에, 황곤손녀는 현군(縣君)에, 황잉손녀는 향군(鄕君)에, 황운손녀 이하는 정군(亭君)에 봉함.
이성작위는 작위 수훈자 본인의 적통 계승자는 선대의 본 작위를 계승하고, 그 외는 선대 작위의 한단계 아래를 세습함. 이때 봉호는 본작위의 것으로 하되 군현의 급을 한단계 내리도록 함.(예시로 익양군공 가문은 적통은 익양군공 작위를 계승하고 방계로는 4대까지 직계와 방계의 구분 없이 익양현후 작위를 세습함. 이미 현급인 자남작급의 경우 향(鄕)으로 함.). 여성은 군공의 딸에게 순랑(順娘), 군후의 딸에게 안랑(安娘), 군백의 딸에게 단랑(端娘), 현자현남의 딸에게 유랑(孺娘) 작위를 줌.
황후의 아버지를 동국공(同國公)에 봉하고, 공주와 혼인한 이는 부마도위(駙馬都尉)에 봉하고 황손녀 이하와 강하종실 여식과 혼인한 이는 의빈(儀賓)에 봉함. 동국공과 부마도위는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삼고, 의빈은 황족 여성과 결혼한 경우 종1품 숭정대부로, 제실돈령 여식과 결혼한 경우 정2품 자헌대부로 삼음. 동국공 작위는 세습되지 않으나 군공(郡公) 가문과 동격으로 취급하여 자손들이 이에 준하여 작위를 세습하도록 하고, 부마와 의빈은 본인은 아내의 격에 맞추어 대우하되 자손은 각각 군공, 군후로 취급하여 세습하도록 함.
아래는 서훈기준으로, 겹칠 경우 상위기준에 따름
군공(郡公):
- 대한반국갑족 10개 가문.[44]
- 동국공(同國公)의 자손 중 직계인 경우.[45]
- 부마도위(駙馬都尉)의 자손 중 직계인 경우.[46]
- 종1품 이상으로서 공신위를 받은 경우.
- 사후 종묘에 배향된 경우.
- 대훈위(大勳位)에 서훈된 경우.
군후(郡侯)/현후(縣侯):
- 동국공, 부마도위의 자손으로서 직계가 아닌 경우.
- 종3품 이상으로서 공신위를 받은 경우.
- 의빈(儀賓)의 자손으로서 직계인 경우.[47]
- 군백/현백이 품계에 상관없이 공을 세워 공신위를 받은 경우.
- 훈(勳) 1등장에 서훈된 경우.
군백(郡伯)/현백(縣伯):
- 의빈의 자손으로서 직계가 아닌 경우.
- 종6품 이상으로서 공신위를 받은 경우.
- 현자/향자가 품계에 상관없이 공을 세워 공신위를 받은 경우.
- 훈(勳) 3등장 이상에 서훈된 경우로 칙명이 있는 경우.
- 공(功) 1등장에 서훈된 경우.
현자(縣子)/향자(鄕子):
- 종9품 이상으로서 공신위를 받은 경우로 칙명이 있는 경우.
- 현남/향남이 품계에 상관없이 공을 세워 공신위를 받은 경우.
- 훈(勳) 5등장 이상에 서훈된 경우로 칙명이 있는 경우.
- 공(功) 3등장 이상에 서훈된 경우로 칙명이 있는 경우.
- 기타 국가와 제실에 공훈이 있는 자로 경국도평의사의 주청이 있는 경우.
현남(縣男)/향남(鄕男):
-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서 칙명이 있는 경우.
- 공(功) 5등장 이상에 서훈된 경우로 칙명이 있는 경우.
- 기타 국가와 제실에 공훈이 있는 자로 경국도평의사의 주청이 있는 경우.
- 기타 국가와 제실에 공훈이 있는 자로 중추원의 주청이 있는 경우.
작위 목록
종성작위(宗姓爵位): 봉의인국공(奉義仁國公), 봉의의국공(奉義義國公), 봉의예국공(奉義禮國公), 봉의지국공(奉義智國公), 봉의신국공(奉義信國公)
이성작위(異姓爵位): 군공(郡公), 군후(郡侯)/현후(縣侯), 군백(郡伯)/현백(縣伯), 현자(縣子)/향자(鄕子), 현남(縣男)/향남(鄕男)
봉호
종성작위에는 따로 봉호를 붙이지 아니하고, 이성작위는 "봉호+작위"으로 구성(ex. 신안군백)되며, 이성작위의 여성 또한 마찬가지로 구성됨. 봉호를 붙일 때 공후백작의 봉호는 고금의 군급지방의 명칭에서, 자남작의 봉호는 현급지방의 명칭에서 따오도록 함. 시호는 '(봉호)군(시호)공'의 형식으로 하며, 동국공은 군공과 마찬가지로 하되 '(봉호)군동국공'으로 하고 시호의 경우 '(봉호)군(시호)동국공'으로 함
앉은거
- 경기:21 독립;보국
- 독립:11, 보국:7, 기타:3
- 강원:14 기타
- 기타:9, 수구:4, 보국:1
- 충북:9 독립;보국
- 독립:6, 보국:2, 기타:1
- 충남:13 독립;보국
- 독립:7, 보국:4, 기타:2
- 전북:14 보국;수구
- 보국:8, 수구:5, 기타:1[48]
- 전남:22 보국;수구
- 보국:13, 수구:7, 기타:2
- 경북:24 보국;수구
- 보국:11, 수구:9, 기타:4
- 경남:21 보국;독립
- 보국:10, 독립:8, 기타:3
- 황해:15 보국;독립
- 보국:7, 독립:4, 기타:4
- 평북:14 독립;보국
- 독립:9, 보국:4, 기타:1
- 평남:13 독립;보국
- 독립:7, 보국:4. 기타:2[49]
- 함북:6 기타
- 기타:5, 독립:1
- 함남:14 기타
- 기타:7, 보국:5. 독립:2
기관
헌법기관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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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부아문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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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도성 13부 33속아문 [ 펼치기 · 접기 ]
|
궁내성
궁내성 宮内省 | Department of Imperial Household | ||
---|---|---|
파일:궁내성.svg | ||
약칭 | 궁내성 (宮内省 | DIH) | |
설립일 | 모년 모월 모일 | |
궁내령 | 김긴배 | |
궁내시랑평장사 | 김긴배 | |
주소 | 지도를 불러오는 중... | |
한경 한성부 황성구 경복궁 궁내성청사[50] | ||
상급기관 | 대한국 황제 |
승정원, 공사청->궁내부->궁내성(칭제건원 후 고종시기)
홍문관
홍문관 弘文館 | Office of Special Advisors | ||
---|---|---|
파일:홍문관.svg | ||
약칭 | 옥당 (玉堂 | OSA) | |
설립일 | 모년 모월 모일 | |
의정국무대신 (영홍문관사 겸임) |
유승민[51] | |
대제학 | 김긴배 | |
주소 | 지도를 불러오는 중... | |
한경 한성부 황성구 경복궁 궁내성청사[52] | ||
상급기관 | 대한국 황제 |
국무도성
국무도성 國務都省 | Department of Stat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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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무도성.svg | |||||||||||||
약칭 | 내각 (內閣 | DOS) | ||||||||||||
설립일 | 모년 모월 모일 | ||||||||||||
의정국무대신 | 유승민 | ||||||||||||
참정국무대신 | 김정은 | ||||||||||||
찬정흠명대신 | [ 펼치기 · 접기 ]
| ||||||||||||
국무총서 | 김긴배 | ||||||||||||
주소 | 지도를 불러오는 중... | ||||||||||||
한경 한성부 황성구 국무도성청사 |
의정부->국무성(고종시기)
국무성: 내각, 행정부 조직
국무도성: 내각부
의정국무대신
대한국 의정국무대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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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홍집, 광무 시대 1차대전기에 이완용 재임, 평장 시대 2차대전기에 박중양-김구 교체, 건녕 시대에 박정희 재임 후 정권교체, 김영삼김대중 등 재임, 경덕 시대에 이회창 재?임, 이외 현실인물 등 재임, 현임 유승민, 직?전총리 문재인
국무관방
국무관방 國務官房 | State Secretariat | ||
---|---|---|
파일:국무관방.svg | ||
약칭 | ? (? | SS) | |
설립일 | 모년 모월 모일 | |
국무총서 | 김긴배 | |
부총서 | 김긴배 (정무 / 문하원) 김긴배 (정무 / 중추원) 김긴배 (사무) | |
주소 | 지도를 불러오는 중... | |
한경 한성부 황성구 국무도성청사 | ||
상급기관 | 국무도성 |
내각관방+내각부 대신관방격
경국기무회의
문서틀
경국기무회의 經國機務會議 Koreanisches Konstituierender KaiserlicherRat | ||
---|---|---|
파일:경국기무회의 문장.svg | ||
약칭 | 도당 (都堂 | KKK) | |
개회 | 1894년 모월 모일 | |
태사[60] | 한왕 이순 (제실종친제후왕) | |
경국기무시중[61] | 이회창 (중추원 자유민주당 주청 칙임평장사) | |
경국기무시랑평장사 | 김긴배 / 좌시랑 (중추원 조국전선 주청 칙임평장사) | |
김긴배 / 우시랑 (주급지방의회 ??도의회 주청 칙임평장사) | ||
녹사대부 | 김긴배 | |
경국기무평장사[62] | 정원 396석 중 396인 제실종친제후왕 (30석) 대한반국갑족 (10석) 제실돈령·훈척대족 (80석) 국무성재신 (23석): 국무성재신회의 (23석) 선현평장사 (253석): 제국대학교수협회 (75석) 중추원교섭정파 (50석) 외성의회·주급지방의회 (128석) | |
주소 | 지도를 불러오는 중... | |
한경한성부 황성구 경복궁 경세전 | ||
최근 선출 | 제??대 경국기무평장사선거 | |
차기 선출 | 제??대 경국기무평장사선거 |
산계및관등
조정관계 (朝廷官階) | 문무관등급 (文武官等級) | |||||||
---|---|---|---|---|---|---|---|---|
직계 | 품계 | 동반 | 서반 | 직계 | 관등 | 문관 | 무관 | |
당상관 (堂上官) |
정1품 (正一品) |
대광보국숭록대부 (大匡輔國崇祿大夫) |
칙임관 (勅任官) |
1등 (一等) |
의정대신급 (議政大臣級) |
부원수 (副元帥) | ||
종1품 (從一品) |
숭정대부 (崇政大夫) |
2등 (二等) |
참정대신급 (參政大臣級) |
참원수 (參元帥) | ||||
정2품 (正二品) |
자헌대부 (資憲大夫) |
3등 (三等) |
찬정대신급 (贊政大臣級) |
대장 (大將) | ||||
종2품 (從二品) |
가선대부 (嘉善大夫) |
4등 (四等) |
협판급 (協辦級) |
부장 (副將) | ||||
정3품 (正三品) |
통훈대부 (通訓大夫) |
어모장군 (禦侮將軍) |
주임관 (奏任官) |
5등 (五等) |
참의급 (參議級) |
참장 (參將) | ||
참상관 (參上官) |
종3품 (從三品) |
중훈대부 (中訓大夫) |
보공장군 (保功將軍) |
참서관급 (參書官級) |
준장 (准將) | |||
정4품 (正四品) |
봉렬대부 (奉列大夫) |
소위장군 (昭威將軍) |
6등 (六等) |
비서관급 (秘書官級) |
정령 (正領) | |||
종4품 (從四品) |
조봉대부 (朝奉大夫) |
선략장군 (宣略將軍) |
7등 (七等) |
시찰관급 (視察官級) |
부령 (副領) | |||
정5품 (正五品) |
통선랑 (通善郎) |
충의교위 (忠毅校尉) |
판임관 (判任官) |
8등 (八等) |
재무관급 (財務官級) |
참령 (參領) | ||
종5품 (從五品) |
봉훈랑 (奉訓郎) |
창신교위 (彰信校尉) | ||||||
정6품 (正六品) |
승훈랑 (承訓郎) |
진용교위 (進勇校尉) |
9등 (九等) |
이사급 (理事級) |
정위 (正尉) | |||
종6품 (從六品) |
선무랑 (宣務郎) |
병절교위 (秉節校尉) |
부위 (副尉) | |||||
참외관 (參外官) |
정7품 (正七品) |
무공랑 (務功郞) |
적순부위 (迪順副尉) |
참위 (參尉) | ||||
종7품 (從七品) |
계공랑 (啓功郞) |
분순부위 (奮順副尉) |
10등 (十等) |
기사급 (技師級) |
준위 (准尉) | |||
정8품 (正八品) |
통사랑 (通仕郞) |
승의부위 (承義副尉) |
11등 (十一等) |
주사급 (主事級) |
특무정교 (特務正校) | |||
종8품 (從八品) |
승사랑 (承仕郞) |
수의부위 (修義副尉) |
정교 (正敎) | |||||
정9품 (正九品) |
종사랑 (從仕郞) |
효력부위 (效力副尉) |
12등 (十二等) |
서기급 (書記級) |
부교 (副校) | |||
종9품 (從九品) |
장사랑 (將仕郞) |
전력부위 (展力副尉) |
13등 (十三等) |
서기생급 (書記生級) |
참교 (參校) |
국경일및공휴일
공휴일
신정연휴: 1월 1일
구정연휴(음력 12월 말일 전날, 12월 말일, 1월 1일, 2일, 3일)
상원절(上元節): 음력 1월 15일* 정월대보름, 도교 명절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 2월 11일* 대한제국 선포일
천일(天日): 4월 5일* 천도교 기념일
석가탄신일(釋迦誕辰日): 음력 4월 8일
?절(): 4월 23일* 경덕제 생일
어린이날: 5월 5일
현충일(顯忠日): 6월 6일
국제반포절(國制頒布節): 7월 17일
개국기원절(開國紀元節): 8월 14일* 조선 건국일
전승절(戰勝節): 8월 15일
곤원절(坤元節): 8월 16일* 황후 생일
추석연휴: 음력 8월 13일, 14일, 15일, 16일, 17일
공부자탄강일(孔夫子誕降日): 9월 28일
국군의 날: 10월 1일
개천절(開天節): 음력 10월 3일
한글날: 10월 9일
기독탄신일(基督誕辰日): 12월 25일
신정연휴: 12월 31일
천추경절(千秋慶節): ?월 ?일* 황태자 생일
비공휴일 국경일
국기의 날: 3월 6일* 국기제정일
건원절(乾元節): 3월 25일* 순종 생일
수경성절(壽慶聖節): 3월 30일* 성조 생일
즉위예식일(卽位禮式日): 8월 12일* 황제즉위예식일
만수성절(萬壽聖節): 9월 8일* 고종 생일
천장절(天長節): 10월 28일* 혜종 생일
건명절(乾明節): 11월 15일* 강종 생일
묘사서고일(廟社誓告日) : ?월 ?일* 황제즉위를 종묘사직에 고한 날
예비계획
↓예비문서공간↓
↓을해정난↓
↓제실제례의↓
- ↑ 각지에서 근왕군이 모여 2만여 명의 군세를 이룸
- ↑ 이후 제1차 벨트크리그 이후 빌레펠트 조약을 통해 강화도 조차의 계약기간을 조기종료 하고 반환받을때까지 강화도는 프랑스의 조차지이자 조선방면 거점으로서 기능함
- ↑ 특히 강화도에서 유림세력이 중심이 된 근왕군이 강화산성을 포기하고 후퇴했던 사실 때문에 유림세력 또한 명분적으로 척화를 주장하는것 이상의 강경한 행보를 보일 수 없었음.
- ↑ 학자에 따라서 이때에 흥선대원군이 이미 개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척화파가 많은 조정에 복수를 명분으로 내세웠다는 시각이 있음.
- ↑ 이때 조선에서는 직접 조병창을 운영해 신식무기를 생산하고자 했으나, 애초에 기술력이 미비하였으며 병인양란으로 인해 가뜩이나 좋지 않던 재정상황이 더욱 좋지 않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기간동안 실질적으로 이루어진 무기 도입정책은 홍이포를 조금 더 도입하고 기존의 화포와 조총을 개량하는것을 연구하는 등에 그침.
- ↑ 다만 당시까지도 기술적 우월함과 강함에 대한 인식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오랑캐의 문물이라 배척하는 여론이 강했음.
- ↑ 통리기무아문의 수장이기는 하나 이는 재상인 영의정을 수장으로 둠으로서 통리기무아문의 권위를 실어주기 위한 조치로, 실질적으로 총리사의 통리기무아문의 운영에 대해 영향력은 없었음.
- ↑ 통리기무아문의 당상으로서 이 경리사들이 통리기무아문 아래의 12사의 업무를 분담하며 실질적으로 통리기무아문의 운영을 주도함.
- ↑ 漢城語學堂, 통리기무아문의 어학사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후일 한성제국대학이 됨.
- ↑ 양반계층에서도 한성어학당에 들어가 수학하는 사례가 없지는 않았으나, 상대적으로 서양문화에 대한 배척 성향이 강해 그 수가 적었음.
- ↑ 물론 이때까지 '개화정책'이라 해봐야 기껏해야 서양식 무기를 약간 도입하고 한성어학당에서 외국어 교육을 하는 등이 중심이었고 서양식 무기 도입 자체는 "선진화된 무기 도입을 통해 양이에게 복수"한다는 변명거리라도 있었기 때문에 반발이 덜했으나, 1873년 교련병대 창설과 프랑스 교관 초빙, 최익현 유배 사건과 이 과정에서 대원군파 관료들이 고종을 반협박하는 모습 등을 통해 불만이 많은 상태였음
- ↑ 이 과정에서 대원군 측에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가진 기록이 여럿 있으나, 이때에 대원군의 정치적 권력기반 내지 집권정당성은 '임금의 생부'라는 위치에서 오는 초법적 명분이었기 때문에 고종이 직접 나서서 대원군파를 숙청하는 사태에 공식적으로 손을 쓸 도리가 없었음
- ↑ 원래 조정 일각에서는 '감히 양이에게 군사를 맡길 수 없다'는 논리로 프랑스 교관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교련병대를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척화파들도 강한 군대의 쓸모는 알고 있었고 여기에 더해 프랑스가 보상금을 요구해와 존치하는 방향으로 결정됨. 다만 척화사상으로 인해 척화파 정권 하에서 되려 구식군인인 오군영을 우대하고 교련병대를 상대적으로 무시해 교련병대의 원성을 삼.
- ↑ 대원군 체제 아래서 교련병대의 창설로 상대적으로 기존 구식군인들이 덜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긴 했으나 큰 차별은 받지 않았고, 오히려 대원군 실각 후 민씨세력 등 친고종파 인사들의 비리로 인해 친고종파에 대한 불만이 쌓여있는 상황이었음
- ↑ 영의정이 좌의정보다 높고 군국기무처에서도 영의정 이유원이 총재로서 좌의정 겸 부총재 박규수보다 높았으나, 전통적으로 영의정은 실권을 가진 재상보다는 명예직에 가까웠기 때문에 군국기무처의 실질적 운영은 좌의정인 박규수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게 되었음
- ↑ 이 혜상공국은 국내 상인들에 대한 상표(商標, 상업허가증)의 발급과 상업세 징수 뿐만 아니라 화적과 불법 상인들을 단속하는 치안업무 또한 수행하며 사실상 경제-치안을 아우르는 거대 조직으로 기능함. 혜상공국의 장관인 구관당상(句管堂上) 등 중앙기구 지도부는 본래 정부에서 임명하였지만 혜상공국의 실질적인 운영은 보부상들이 주도하는 지방조직이 장악함.
- ↑ 수학, 과학, 서양어 등
- ↑ 다만 초기에는 이 구분 자체가 모호하였으며, 근대화가 대원군 주도로 이루어진 특성상 한동안 급진개화파의 수와 정치적 영향력은 온건개화파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었음
- ↑ 궁내부 소속으로 국왕의 근접경호 담당
- ↑ 궁궐과 한성의 경비를 맡은 중앙군
- ↑ 지방군
- ↑ 훗날의 육군무관학교
- ↑ 훗날의 해군무관학교
- ↑ 대원군파가 정권을 잡기는 했지만 프랑스가 병인양란으로 인해 대중적 인식이 좋지 못한 것을 의식함.
- ↑ 진위영은 재정상의 문제 등으로 인해 구식군인으로 남음
- ↑ 내무아문(일반 국가행정, 지방업무), 외무아문(외교통상업무), 탁지아문(재정업무), 법무아문(사법), 학무아문(교육업무, 과거시험 관리), 공무아문(국가토목사업), 군무아문(군사업무), 농상아문(농업, 상업 등 국가경제)
- ↑ 농상아문대신의 경우 혜상공국의 구관당상을 겸임하도록 정함. 본래 관료가 임명되었으나 상업업무를 사실상 혜상공국에서 전적으로 관할하며 농상아문대신 직위가 유명무실화 되었으며, 후에 보부상이 혜상공국을 장악하며 보부상들이 농상아문대신을 역임하게 됨
- ↑ 자세히 보면 영의정은 사실상 권력이 없고 좌의정이 근대화 추진에 필요한 정책결정권한(외교, 재정, 경제, 군사)을 쥐고 우의정이 국내행정사무를 맡고 있음을 알 수 있음. 따라서 이때 사실상 좌의정인 김홍집이 의정부의 최고권력자로서 대우받음.
- ↑ 물론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전제군주국가인 조선에서 국왕인 고종이 고작 행정기관 분리로 국정개입이 불가능해진다는건 말이 안되는 이야기지만, 이시점에서 고종은 을해정난의 영향으로 창덕궁에 사실상 유폐된 수준이었기 때문에 비서기구의 분리만으로 국정개입의 여지를 상실시킬 수 있었음.
- ↑ 이때 성균관 또한 개편되어 성리학 교육이 아닌 서구식 교육을 하며 서양의 대학과 유사하게 변경됨
- ↑ 이후 많은 노비들이 머슴으로 전환됨
- ↑ 대원군 또한 이때 호칭이 전하로 격상되었음
- ↑ 20명 정원으로 설립되었으나, 의관의 절반이 군국기무처(대원군)가 인선하는 형식이었고 나머지 절반 또한 각각 보국협회와 독립협회가 양분하였으며, 역할 또한 내각의 사무에 대한 자문과 백성들의 여론 수집 정도로 제한되어 실권은 적었음
- ↑ 김홍집이 의정국무대신에 임명됨
- ↑ 헌법이 공포된 이후 총리로는 김홍집이 재임명됨
- ↑ 연간 일정 이상의 세금을 납부한 25세 이상 성인 남성(종친, 귀족, 현역군인 제외)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짐
- ↑ 종친과 귀족, 기타 칙선 의원들로서 구성됨
- ↑ 조선시대 언론기관과 같이 내각을 탄핵할수는 있었으나 여타 내각제의 내각불신임보다는 내각규탄에 가까운 것이라, 내각의 운영에 지장을 줄수는 있어도 내각의 사퇴에 직접적인 영향은 없었다.
- ↑ 보국협회 76석, 독립협회 55석, 위정척사회 25석, 기타44석
- ↑ 공식적이고 가장 흔하게 쓰이는 경칭으로, 이외에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 황제와 군주에 대한 경칭으로 쓰이는 다른 경칭들 또한 사용할 수 있다.
- ↑ 대한국 황제의 공식 관저로, 이외에 수도 한성부에 소재한 경희궁과 창덕궁, 창경궁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이궁들 또한 존재한다.
- ↑ 이외에 황(제)기, (황)어기, (태극)팔괘기, (태극)팔괘어기 등 다양한 명칭으로도 불린다.
- ↑ 정식 시호는 '강종-무황제(康宗-武皇帝)'가 된다.
- ↑ 최고위 귀족가문으로서 직계가 만대불강(萬代不降)의 특혜를 받음
- ↑ 즉 황후의 친정.
- ↑ 즉 황제의 외손인 경우.
- ↑ 즉 종친 및 돈령의 외손인 경우.
- ↑ 호남신민회
- ↑ 천도교청우회
- ↑ 경복궁 궁내성청사는 옛 궐내각사 권역으로, 본래 한청전쟁 이후 경복군을 중건하며 기존 궐내각사 권역도 복구하여 이곳에 궁내성의 각 관청과 홍문관을 비롯해 국무성대신회의 회의실 등 중요한 기구들을 위치시켰었다. 그러나 제2차 벨트크리그 이후 경복궁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기존 궐내각사 권역을 개조하게 되었고, 국무성대신회의 회의실은 지금의 국무도성청사로 이주시키고 궐내각사 권역 일대에 궁내성청사를 새로 건립하여 궁내성의 관청들과 황제 직속기구들을 위치시키게 되었다.
- ↑ 홍문관은 황실의 문서 관리 및 학술업무 외에도 황제에 대한 조언의 업무 또한 수행하기 때문에, 그 상징성으로 인해 홍문관의 기관장인 영홍문관사의 업무는 국무에 대한 황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하는 대한국 의정국무대신이 겸임하여 수행한다. 다만 의정국무대신이 영홍문관사로서의 업무를 실제로 수행하는 경우는 황권이 행사되어야 할 경우에 한정되며, 문서 관리 업무와 학술업무 등 대부분의 일상적인 업무는 홍문관 대제학이 실질적인 기관장으로서 지휘한다.
- ↑ 경복궁 궁내성청사는 옛 궐내각사 권역으로, 본래 한청전쟁 이후 경복군을 중건하며 기존 궐내각사 권역도 복구하여 이곳에 궁내성의 각 관청과 홍문관을 비롯해 국무성대신회의 회의실 등 중요한 기구들을 위치시켰었다. 그러나 제2차 벨트크리그 이후 경복궁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기존 궐내각사 권역을 개조하게 되었고, 국무성대신회의 회의실은 지금의 국무도성청사로 이주시키고 궐내각사 권역 일대에 궁내성청사를 새로 건립하여 궁내성의 관청들과 황제 직속기구들을 위치시키게 되었다.
- ↑ 안창호 사후 동우회를 김구와 서재필-이승만 계열은 유신동우회로 새로운 계파를 창설했다.
- ↑ 동우회 온건파들이 유신동우회에 반대하며 창설한 계파.
- ↑ 이후 유신동우회에 잔류한 백의사 계열은 이재유 백색테러 사건을 일으키고 해체당했다.
- ↑ 김성수 내각이 도각되면서 광범위한 좌파 연정이 잠시 정권을 잡았다.
- ↑ 한독당 우파 중 김성수 반대파벌.
- ↑ 한국독립당이 붕괴하자 여운홍의 혁신계와 김규식의 민중동맹이 뭉쳐 호당운동을 전개했다. 삼청장독립당은 김규식의 자택 삼청장에서 나온 별칭.
- ↑ 조선민족청년단의 원내단체.
- ↑ 황족 제후왕 중에서 한 명이 태사를 겸임하며, 경국도평의사의 공식적인 수장이나 실질적으로 명예직이다.
- ↑ 의결을 통해 선출하는 경국도평의사의 차관직으로, 경국도평의사의 실질적인 수장이다.
- ↑ 경국도평의사는 공식적으로 정파(政派)를 구성할 수 없으며, 따라서 모든 평장사는 무소속이다. 여기 기재되는것은 도평의평장사의 선출 배분이다.
- ↑ 양력으로는 고종 12년, 1875년 02월 16일이다.
- ↑ 유배 직후 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