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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1|부산에서의 마지막 순간은 마치 본토 결전이 실행된 순간 같았습니다. 한국군은 복수심에 불타서 물 밀듯이 밀려오고 있었고, 하늘에 아군 항공기는 보이지 않았어요. 우리 각 부대들은 참호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사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 {{인용문1|부산에서의 마지막 순간은 마치 본토 결전이 실행된 순간 같았습니다. 한국군은 복수심에 불타서 물 밀듯이 밀려오고 있었고, 하늘에 아군 항공기는 보이지 않았어요. 우리 각 부대들은 참호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사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것이 한국군의 포병대와 기갑부대에게 분쇄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죠. 결국엔 부산에서 철수하는 배에 몸을 실게 되었는데, 그때 항구는 난리였어요. 부산에 이주해왔던 우리 일본인들은 이제 몰려오는 한국군을 피해 항구에 정박한 배에 몸을 실으려고 안간힘을 썻죠. 그 난리통에서 사람들을 실고서 출항한 배들 중에 한국군의 공군과 해군을 뿌리치고 본토로 도착한건 10척중에 2척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느꼈죠. 아, 본토 결전이 시작되면 우리 본토도 부산의 마지막 모습을 하겠구나.|미즈키 시게루 일본의 반전주의 만화가. 당시 일본군 소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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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1946년 부터 부산이 해방된 6월 6일을 현충일로 지정하여 현재까지 추념일로서 기념하고 있다. | 한국은 1946년 부터 부산이 해방된 6월 6일을 현충일로 지정하여 현재까지 추념일로서 기념하고 있다. |
2024년 9월 23일 (월) 23:45 기준 최신판
공지 | | 빌레펠트 연재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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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 주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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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부산 전투 Third Battle of Busan 第3次釜山戦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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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중 신멸 작전의 일부 | ||
날짜 | ||
1944년 5월 16일~1944년 6월 6일 | ||
장소 | ||
대한제국, 부산부 | ||
교전국 | 대한제국 | 일본인민공화국 |
지휘관 | 안중근 이범석 김홍일 김종오 백선엽 김원봉[1] |
우메즈 요시지로 이무라 조 허민국 |
병력 | 105만 4천명 | 71만 2천명 |
피해규모 | 총 사상자 약 28만명 | 총 사상자 약 36만명 포로 22만명 |
결과 | ||
대한제국의 대승 | ||
영향 | ||
한반도에서 일본군 완전 축출 한국전선 종결 일본군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음 |
낙동강 물을 떠 마시는 6사단 7연대의 병사 |
개요
선비가 문경새재를 넘었다. 051604 신멸 작전 개시 암호 |
제3차 부산 전투, 또는 부산 수복전이라고 불리는 전투는 1944년 5월 16일 부터 1944년 6월 6일까지 일본 인민공화국군 및 조선인민군[2]과 대한제국군간 부산 및 경상남도 전역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대한제국군이 일본군을 완전히 격파하고 대마도까지 수복함으로써 대한제국에서 잔존 일본군을 모두 축출하며 1940년 6월 6일 부터 진행된 한국전선이 1944년 6월 6일 정확히 4년만에 종결되었으며, 이로써 아시아 전선의 주전장은 완전히 일본 본토로 넘어가게 된다.
배경
1944년 한국전선의 상황
한국군은 42년에 한성부를 수복했다. 일본군의 강한 저항을 분쇄하며 남하하던 한국군은 44년에 곽재우 작전을 발동,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전역에서 게릴라를 진행하던 의병들의 총 봉기를 진행했고, 의병이 주요 지역을 장악하는 것에 성공하면 공세를 진행해 일본을 완전히 한반도에서 몰아내려 했다.
봉기는 성공적이었다. 작전이 발동되자 10월 19일에 전라도에서의 봉기를 시작으로 10월 22일에 충청도에서, 25일에 경상도에서 대규모 봉기가 발생했다. 갑작스런 대규모 봉기를 마주한 일본군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고 의병의 봉기와 한국군의 공세를 마주한 일본군은 붕괴했다. 한국군은 순식간에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일본군을 몰아냈다.
그러나 경상도는 그러지 못했다. 일본의 주요 거점이었던 경상도는 그 어느 곳보다 많은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고, 경상도의 봉기는 실패, 마산 대학살 등의 끔찍한 보복으로 이어졌다.
어록
부산에서의 마지막 순간은 마치 본토 결전이 실행된 순간 같았습니다. 한국군은 복수심에 불타서 물 밀듯이 밀려오고 있었고, 하늘에 아군 항공기는 보이지 않았어요. 우리 각 부대들은 참호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사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것이 한국군의 포병대와 기갑부대에게 분쇄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죠. 결국엔 부산에서 철수하는 배에 몸을 실게 되었는데, 그때 항구는 난리였어요. 부산에 이주해왔던 우리 일본인들은 이제 몰려오는 한국군을 피해 항구에 정박한 배에 몸을 실으려고 안간힘을 썻죠. 그 난리통에서 사람들을 실고서 출항한 배들 중에 한국군의 공군과 해군을 뿌리치고 본토로 도착한건 10척중에 2척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느꼈죠. 아, 본토 결전이 시작되면 우리 본토도 부산의 마지막 모습을 하겠구나. 미즈키 시게루 일본의 반전주의 만화가. 당시 일본군 소속. |
기타
한국은 1946년 부터 부산이 해방된 6월 6일을 현충일로 지정하여 현재까지 추념일로서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