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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 개요 == | ||
바실 비시바니(본명:빌헬름 프란츠 요제프 카를)는 | 바실 비시바니(본명:빌헬름 프란츠 요제프 카를)는 도나우 연방의 황족이자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우크라이나식 이명으로 지었던 '자수옷 입은 바실'이라는 뜻의 바실 비시바니(Василь Вишиваний)를 사용하였다.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 바이에른 왕국의 마지막 왕세자 [[루프레히트]]와 사촌간이다. | ||
현대 우크라이나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우크라이나 안에서는 국부로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있다. 키이우 내 일부 도로의 이름을 바실의 이름에서 따서 짓기도 하였으며, 키이우 대학에서는 그가 암살당한 그 장소에 그의 거대한 흉상을 세웠을 정도이다. | 현대 우크라이나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우크라이나 안에서는 국부로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있다. 키이우 내 일부 도로의 이름을 바실의 이름에서 따서 짓기도 하였으며, 키이우 대학에서는 그가 암살당한 그 장소에 그의 거대한 흉상을 세웠을 정도이다. | ||
== 생애 == | == 생애 == | ||
=== 초년 시절 === | === 초년 시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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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color:#ffcc00; background:#2f3f60" | 망명정부 내각 기념사진 | ! style="color:#ffcc00; background:#2f3f60" | 망명정부 내각 기념사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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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멸망하자 바실을 비롯한 정부와 국회의 인사들은 | 결국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멸망하자 바실을 비롯한 정부와 국회의 인사들은 도나우로 피신하며 빈에 망명정부를 세우게 된다. 이때 수립된 망명정부에서 보수정당인 민주농민당을 위시로한 보수파가 이사아크 마제파 대통령의 책임론을 주장하며 라다에 탄핵안을 발의했고, 실질적으로 가결될 가능성은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제파 대통령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결국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된다. | ||
이때 차기 대통령을 누가 맡을것인가에 대하여 라다 내에서 엄청난 갑론을박이 오갔는데, 결과적으로 | 이때 차기 대통령을 누가 맡을것인가에 대하여 라다 내에서 엄청난 갑론을박이 오갔는데, 결과적으로 도나우 연방 황족으로 도나우 당국의 지원을 가장 안정적으로 받을수 있을거라고 여겨졌으며 동시에 군사경험으로 전시상황 대처에 뛰어날것이라 판단되었던 바실이 유력한 후보에 오르게됐다. | ||
허나 정작 바실 본인은 대통령직을 수락할 의사가 없었다. 그는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야망이 있기는 했으나 이는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서만 이루어질수 있다고 수차례 강조했기 때문에 자기는 대통령직을 수락할수 없다고 한것이다. 허나 결국 중앙라다에서는 바실의 대통령 선출안이 제출되었고, 외국인을 대통령으로 인정할수 없다는 보수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범좌익의 몰표로 인하여 바실은 대통령에 당선된다. | 허나 정작 바실 본인은 대통령직을 수락할 의사가 없었다. 그는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야망이 있기는 했으나 이는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서만 이루어질수 있다고 수차례 강조했기 때문에 자기는 대통령직을 수락할수 없다고 한것이다. 허나 결국 중앙라다에서는 바실의 대통령 선출안이 제출되었고, 외국인을 대통령으로 인정할수 없다는 보수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범좌익의 몰표로 인하여 바실은 대통령에 당선된다. | ||
1941년 바실은 대통령에 취임한 뒤 곧바로 자유 우크라이나군의 재정비에 온힘을 다하였다. 그는 사실상 오스트리아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린지는 오래였지만, 여전히 | 1941년 바실은 대통령에 취임한 뒤 곧바로 자유 우크라이나군의 재정비에 온힘을 다하였다. 그는 사실상 오스트리아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린지는 오래였지만, 여전히 도나우 황실의 일원이였다. 그렇기에 우크라이나 망명정부의 지원에 미적지근했던 도나우 당국은 바실의 당선 이후 자유 우크라이나군 재정비에 필요한 자금을 상당수 대주었고, 이를통하여 국경을 통해 도나우로 도망친 난민들을 재무장시키며 15만명 남짓이던 자유 우크라이나군은 세를 불려 25만명을 가량의 상당한 규모를 갖추게 된다. | ||
또한 망명정부 산하 우크라이나 해방전선을 창설한 뒤 본인이 수장으로서 러시아의 고위관료들을 대상으로 한 암살과 테러에도 열성적으로 나선다. 위와 같은 활동들로 인하여 러시아와 사빈코프에게 여러차례 암살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의 암살이 실패하며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 또한 망명정부 산하 우크라이나 해방전선을 창설한 뒤 본인이 수장으로서 러시아의 고위관료들을 대상으로 한 암살과 테러에도 열성적으로 나선다. 위와 같은 활동들로 인하여 러시아와 사빈코프에게 여러차례 암살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의 암살이 실패하며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 ||
허나 | 허나 도나우 연방이 러시아군으로 인해 빈을 뺏기고, 도나우의 대부분 영토가 추축국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우크라이나 망명정부를 베를린으로 옮기게 되자 바실의 입지 역시 당달아 내려가게 된다. 이로인해 중앙라다에 바실의 탄핵안이 제출되고 급진민주당 내에서도 바실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며 바실은 점점 나락행 열차를 타게된다.<ref>바실은 독일로는 못간다며 완강히 버텼지만 사회민주노동당 계열의 각료들이 바실의 말을 무시하고 베를린으로 탈출해버리며 결국 바실도 따라갔다고 한다.(...) 당시 바실의 입지가 어땠는지 알수있는 부분.</ref> 하지만 트롤안하고 말 잘듣는 우크라이나 망명정부에 대해 독일이 오스트리아 못지 않게 지원 해줄것을 약속하면서 보수파에 의해 탄핵당할뻔 했던 고비는 가까스로 넘기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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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살 === | === 암살 === | ||
==== 사후 ==== | ==== 사후 ==== | ||
바실의 사후 치루어진 제6대 대선은 국민들 사이에 ‘바실 3선투표’라고 불릴 정도로 급진민주당에 기울어진 대선이었다.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바실의 동정표를 받은 [[급진민주당]]의 [[뱌체슬라프 프로코포비치]]가 압도적인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허나 그는 바실 대통령이 임명했던 [[올렉산드르 슐린]] 총리와 계속해서 대립하면서 내치에서 지속적으로 혼란을 겪었으며, 그로 인해 전후 복구에 실패하였다. 특히 [[우크라이나-루마니아의 국경분쟁|루마니아와의 국경분쟁이 가시화되는 시기]]에, 국민들이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군 전력 강화에 대한 의회의 동의를 얻는 데 처참하게 실패하면서 총리 등 쟁쟁한 정치지도자들에게 지도력을 모두 빼앗기는 데 이른다. 그는 외치에도, 특히 바실이 쌓아놓았던 도나우 연방과의 외교관계를 거의 파탄시키는 데 이르는 등 유능하지 못했기에 그의 인기는 언제나 바닥을 달렸다. 그런 와중에 전쟁동안 우크라이나 지하국의 일원으로써 우크라이나 파르티잔을 이끌었던 스테판 | 바실의 사후 치루어진 제6대 대선은 국민들 사이에 ‘바실 3선투표’라고 불릴 정도로 급진민주당에 기울어진 대선이었다.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바실의 동정표를 받은 [[급진민주당]]의 [[뱌체슬라프 프로코포비치]]가 압도적인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허나 그는 바실 대통령이 임명했던 [[올렉산드르 슐린]] 총리와 계속해서 대립하면서 내치에서 지속적으로 혼란을 겪었으며, 그로 인해 전후 복구에 실패하였다. 특히 [[우크라이나-루마니아의 국경분쟁|루마니아와의 국경분쟁이 가시화되는 시기]]에, 국민들이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군 전력 강화에 대한 의회의 동의를 얻는 데 처참하게 실패하면서 총리 등 쟁쟁한 정치지도자들에게 지도력을 모두 빼앗기는 데 이른다. 그는 외치에도, 특히 바실이 쌓아놓았던 도나우 연방과의 외교관계를 거의 파탄시키는 데 이르는 등 유능하지 못했기에 그의 인기는 언제나 바닥을 달렸다. 그런 와중에 전쟁동안 우크라이나 지하국의 일원으로써 우크라이나 파르티잔을 이끌었던 [[스테판 반데라 (빌레펠트)|스테판 반데라]]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강력한 포퓰리즘 정책을 앞세워 대선에 출마하자 지지율은 그쪽으로 점차 기울었고, 슐린이 반데라의 당선을 막고자 출마했으나 뱌체슬라프가 이에 반발해 독자출마를 감행함으로서 진보진영의 표분열로 보수정당들의 지지를 받은 반데라가 당선되는 참사가 일어나고 만다. 그리고 결과는 [[우크라이나 문화혁명|알다시피]]... | ||
== 평가 == | == 평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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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대 우크라이나 대통령 바실 비시바니 Василь Вишивани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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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빌헬름 프란츠 요제프 카를 Wilhelm Franz Joseph Karl | |||||||||||||||||||||||||
출생 | 1895년 2월 10일 | |||||||||||||||||||||||||
이스트리아 변경백국 로신 | ||||||||||||||||||||||||||
사망 | 1948년 8월 18일 (향년 53세) | |||||||||||||||||||||||||
우크라이나 키이우 볼로디미르스카 키이우 대학교 | ||||||||||||||||||||||||||
재임기간 | 제4대 대통령 | |||||||||||||||||||||||||
1941년 3월 22일 ~ 1946년 3월 21일 | ||||||||||||||||||||||||||
제5대 대통령 | ||||||||||||||||||||||||||
1946년 3월 22일 ~ 1948년 8월 18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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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바실 비시바니(본명:빌헬름 프란츠 요제프 카를)는 도나우 연방의 황족이자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우크라이나식 이명으로 지었던 '자수옷 입은 바실'이라는 뜻의 바실 비시바니(Василь Вишиваний)를 사용하였다.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 바이에른 왕국의 마지막 왕세자 루프레히트와 사촌간이다.
현대 우크라이나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우크라이나 안에서는 국부로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있다. 키이우 내 일부 도로의 이름을 바실의 이름에서 따서 짓기도 하였으며, 키이우 대학에서는 그가 암살당한 그 장소에 그의 거대한 흉상을 세웠을 정도이다.
생애
초년 시절
제1차 세계대전
우크라이나 내전
정계 입문
제2차 세계대전
떠맡은 대통령직
망명정부 내각 기념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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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멸망하자 바실을 비롯한 정부와 국회의 인사들은 도나우로 피신하며 빈에 망명정부를 세우게 된다. 이때 수립된 망명정부에서 보수정당인 민주농민당을 위시로한 보수파가 이사아크 마제파 대통령의 책임론을 주장하며 라다에 탄핵안을 발의했고, 실질적으로 가결될 가능성은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제파 대통령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결국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된다.
이때 차기 대통령을 누가 맡을것인가에 대하여 라다 내에서 엄청난 갑론을박이 오갔는데, 결과적으로 도나우 연방 황족으로 도나우 당국의 지원을 가장 안정적으로 받을수 있을거라고 여겨졌으며 동시에 군사경험으로 전시상황 대처에 뛰어날것이라 판단되었던 바실이 유력한 후보에 오르게됐다.
허나 정작 바실 본인은 대통령직을 수락할 의사가 없었다. 그는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야망이 있기는 했으나 이는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서만 이루어질수 있다고 수차례 강조했기 때문에 자기는 대통령직을 수락할수 없다고 한것이다. 허나 결국 중앙라다에서는 바실의 대통령 선출안이 제출되었고, 외국인을 대통령으로 인정할수 없다는 보수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범좌익의 몰표로 인하여 바실은 대통령에 당선된다.
1941년 바실은 대통령에 취임한 뒤 곧바로 자유 우크라이나군의 재정비에 온힘을 다하였다. 그는 사실상 오스트리아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린지는 오래였지만, 여전히 도나우 황실의 일원이였다. 그렇기에 우크라이나 망명정부의 지원에 미적지근했던 도나우 당국은 바실의 당선 이후 자유 우크라이나군 재정비에 필요한 자금을 상당수 대주었고, 이를통하여 국경을 통해 도나우로 도망친 난민들을 재무장시키며 15만명 남짓이던 자유 우크라이나군은 세를 불려 25만명을 가량의 상당한 규모를 갖추게 된다.
또한 망명정부 산하 우크라이나 해방전선을 창설한 뒤 본인이 수장으로서 러시아의 고위관료들을 대상으로 한 암살과 테러에도 열성적으로 나선다. 위와 같은 활동들로 인하여 러시아와 사빈코프에게 여러차례 암살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의 암살이 실패하며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허나 도나우 연방이 러시아군으로 인해 빈을 뺏기고, 도나우의 대부분 영토가 추축국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우크라이나 망명정부를 베를린으로 옮기게 되자 바실의 입지 역시 당달아 내려가게 된다. 이로인해 중앙라다에 바실의 탄핵안이 제출되고 급진민주당 내에서도 바실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며 바실은 점점 나락행 열차를 타게된다.[1] 하지만 트롤안하고 말 잘듣는 우크라이나 망명정부에 대해 독일이 오스트리아 못지 않게 지원 해줄것을 약속하면서 보수파에 의해 탄핵당할뻔 했던 고비는 가까스로 넘기게 된다.
바실을 반기는 우크라이나 군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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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바실은 독일의 지원을 통하여 우크라이나 내 파르티잔 세력을 지원했고, 바르바로사 작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최종적으로 자유 우크라이나군 산하 2사단에 의하여 키이우가 해방되자 내각 인사로는 가장 먼저 입성하여 행진을 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확실히 현대 우크라이나의 아버지가 되는 순간이였다.
종전과 재선
거리에 붙어있는 바실의 선거벽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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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영웅 Наш герой 바실의 1946년 선거캠페인 |
암살
사후
바실의 사후 치루어진 제6대 대선은 국민들 사이에 ‘바실 3선투표’라고 불릴 정도로 급진민주당에 기울어진 대선이었다.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바실의 동정표를 받은 급진민주당의 뱌체슬라프 프로코포비치가 압도적인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허나 그는 바실 대통령이 임명했던 올렉산드르 슐린 총리와 계속해서 대립하면서 내치에서 지속적으로 혼란을 겪었으며, 그로 인해 전후 복구에 실패하였다. 특히 루마니아와의 국경분쟁이 가시화되는 시기에, 국민들이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군 전력 강화에 대한 의회의 동의를 얻는 데 처참하게 실패하면서 총리 등 쟁쟁한 정치지도자들에게 지도력을 모두 빼앗기는 데 이른다. 그는 외치에도, 특히 바실이 쌓아놓았던 도나우 연방과의 외교관계를 거의 파탄시키는 데 이르는 등 유능하지 못했기에 그의 인기는 언제나 바닥을 달렸다. 그런 와중에 전쟁동안 우크라이나 지하국의 일원으로써 우크라이나 파르티잔을 이끌었던 스테판 반데라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강력한 포퓰리즘 정책을 앞세워 대선에 출마하자 지지율은 그쪽으로 점차 기울었고, 슐린이 반데라의 당선을 막고자 출마했으나 뱌체슬라프가 이에 반발해 독자출마를 감행함으로서 진보진영의 표분열로 보수정당들의 지지를 받은 반데라가 당선되는 참사가 일어나고 만다. 그리고 결과는 알다시피...
평가
성향
여담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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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 1938년 재보궐선거 | 키이우 5구 | 무소속 | - | 당선 (1위) | 초선[2][3] |
1941 | 제4대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 우크라이나 | 우크라이나 급진민주당 | 139 (50.73%) | 초선[4][5] | |
1946 | 제5대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 14,712,619 (72.31%) | 재선[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