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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f5f5f5; color:#111; text-align:center" |'''모스크바 대공세 직전, | | style="background:#f5f5f5; color:#111; text-align:center" |'''모스크바 대공세 직전, 괴벨스 장관을 비롯한 독일 내각과 중부집단군 병사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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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 간의 대규모 공세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4월, 빌헬름 3세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 발터 모델, 게오르크 폰 퀴흘러 등 각 집단군과 군단 사령관들을 베를린으로 소집해 모스크바 공략에 대해 논의했다. 모든 사령관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모스크바 공략을 맡고 싶어했지만, 빌헬름 3세는 특정 사령관에게 모스크바 공략을 맡긴다고 하지 않고 "모스크바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집단군이 모스크바 공략을 맡을 것이다."라고만 이야기했다. 이 때문에 군단 사령관들은 회의를 마치자마자 자신들의 사령부로 돌아가 부하들을 닦달하며 이 경쟁에 이길 생각만 했다. | 3개월 간의 대규모 공세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4월, 빌헬름 3세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 발터 모델, 게오르크 폰 퀴흘러 등 각 집단군과 군단 사령관들을 베를린으로 소집해 모스크바 공략에 대해 논의했다. 모든 사령관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모스크바 공략을 맡고 싶어했지만, 빌헬름 3세는 특정 사령관에게 모스크바 공략을 맡긴다고 하지 않고 "모스크바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집단군이 모스크바 공략을 맡을 것이다."라고만 이야기했다. 이 때문에 군단 사령관들은 회의를 마치자마자 자신들의 사령부로 돌아가 부하들을 닦달하며 이 경쟁에 이길 생각만 했다. |
2024년 11월 10일 (일) 13:42 기준 최신판
공지 | | 빌레펠트 연재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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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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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 주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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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공방전 Battle of Moscow Битва за Москву, Московская битва, Битва над Москвой Die Schlacht um Moskau Operation Taifun[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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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중 태풍 작전의 일부 | ||||||||||||||||||
날짜 | 1945년 4월 16일~1945년 5월 2일 | |||||||||||||||||
장소 | 러시아 모스크바 | |||||||||||||||||
결과 | 독일의 모스크바 점령 | |||||||||||||||||
영향 | 나치 러시아의 멸망 유럽전선 종결 라이히스팍트 4개국의 러시아 분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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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항복 소식을 들은 베를린 시민들 |
개요
바르바로사 작전과 드네프르 돈 공세, 그리고 모스크바 공세의 전개. |
슬라브 학살자들의 소굴, 앞으로 50km 독일군 전차의 낙서 |
제2차 벨트크리그의 막바지였던 1945년 5월 독일군이 나치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를 함락한 전투이다. 러시아의 보즈드였던 보리스 사빈코프는 모스크바 함락이 임박하자 자살했고 사빈코프에 의해 후임 러시아 대통령에 임명된 해군 원수 네스토르 모나스티료 제독을 수반으로 하는 사마라 정부는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다. 미하일 드로즈돕스키 대장이 독일제국을 배제하고 항복 문서에 서명하자 독일제국의 이의제기로 라브르 코르닐로프 육군원수가 모스크바에서 독일제국 포함 모델 원수 앞에서 항복 서명을 했다.
배경
1944년 여름에 펼쳐진 독일군의 대규모 공세인 바르바로사 작전의 결과로 동부전선 러시아군의 주력인 벨라루스 전선군이 완전히 붕괴했고, 이에 따라 러시군은 폴란드와 벨로루시에서 철퇴하여 드네프르 강을 경계로 독일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벌어진 독일군의 남부 공세 때문에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에서도 물러났고, 이때 독러전쟁 초기부터 러시아군의 동맹국이었던 루마니아와 그리스는 독일과 강화를 맺고 독일군 측으로 돌아서서 러시아군을 공격하였다(몰다비아 전쟁). 이러한 동부전선의 붕괴와 함께 설상가상으로 극동에서는 대한제국군과 미군이 러시아 극동지방에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여 순식간에 시베리아 철도를 따라 우랄 산맥으로 접근했다.
독일군은 1944년 가을을 끝으로 공세를 중지하고 재편성에 들어갔다. 이는 베를린 전투 이후의 반격 작전과 제3차 브레슬라우 공방전에서 강박감에 의해 공세종말점을 억지로 넘어가면서까지 진격을 고수하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가 이끄는 러시아군에 역습당해 참패하고 탈환한 영토를 다시 빼앗긴 전훈에 따른 것이었는데 문제는 사빈코프가 이것을 가지고 전세를 오판한 것이다. 이 때문에 '동부전선에서는 우리 러시아군이 독일군을 패퇴시켰으니까 극동전선에서 대한제국군과 협상군만 패퇴시키면 러시아는 다시 영토를 되찾을 수 있다.'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급 문제로 진격이 둔화된 극동의 대한제국군과 협상국 연합군에 공세작전을 계획했다.
이것은 상당히 도박적인 작전이었는데 당시 전격전으로 무자비한 파상 공세를 펴던 독일에 맞서고 있던 동부전선의 정예 기갑 부대를 빼내어 투입했기 때문에, 당시 동부전선의 총책임자였던 총참모장 세르게이 마르코프는 사빈코프에게 항의했다. 심지어 크라스노야르스크 대공세가 실시되기 전에 러시아국의 군수장관이었던 알렉산드르 보즈네센스키 마저도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동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할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보즈네센스키는 일반인이라 군사적인 것은 잘 몰랐지만 동부전선은 중요했는데 사빈코프의 전략은 동부전선의 방어를 포기하고 극동전선에 올인한 셈이며 이게 성공했다면 제2제국의 수명이 조금은 더 연장될 수 있었겠지만 초반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제공권도 없었고 보급을 노획으로 해결한다는 말도 안되는 전략을 가지고 움직인 러시아군은 참패했고 공세가 실패한 극동전선 뿐만 아니라 이미 붕괴된 동부전선에 더욱 더 거대한 전력 공백을 초래했다.
한편 러시아군의 극동 공세에 당황한 극동 대한제국군과 협상군은 압력을 덜기 위해 독일군에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개시해 줄 것을 요청했고 독일군의 위력을 과시하고 싶던 빌헬름 3세는 흔쾌히 이에 응해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는 한편 전쟁 종결의 거대한 상징이 될 모스크바 점령의 영광과, 러시아의 분할 점령을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 대한제국 라이히스팍트 4개국에게 모두 넘길 것을 요구했다. 전쟁 기간 동안 협상군이 입은 인명피해도 적진 않았지만 독일군을 비롯한 팍트군 및 독일인들의 어마어마한 피해에 비하면 경미한 수준이었고 협상군의 지휘관들은 전후 자신들의 입지를 위해 더 이상의 많은 희생자를 내고 싶지 않아했기 때문에 이에 동의했다. 이러한 양측의 이해에 따라 모스크바 공략은 독일군의 몫이 되었다. 러시아 극동을 순조롭게 진격하던 대한제국과 협상군은 카잔에서 약간 떨어진 예카테린부르크와 우랄 산맥에서 진격을 멈추었다. 이것이 러시아 전선에서 대한제국군과 협상군의 마지막 활동이었다.
1945년 4월 두달 동안 진행된 브리튼 전투가 끝에 다다르며 서부전선의 종결이 임박하자, 수십만의 팍트군의 병력과 물자가 서부전선에서 차출되어 동부전선에 도착했다. 이리하여 중부집단군 250만 여명이라는 대규모 전열이 형성되어 러시아의 심장부 모스크바로 진격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이 250만 여명의 팍트군을 막아야하는 것은 늙고 병들어 약체화 된 150만 여명의 러시아군이었다.
이후 모자이스크 전투 직전까지의 상황은 아우구스투스의 몰락 문서 참조.
전투
모스크바 근교에서 창설된 국민해방군 부대 |
러시아군은 병력 대부분이 소년과 중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즈음엔 러시아 전역에서 젊은 남성들이 거의 전부 동원된 상태라 징병 연령이 15~60세라는 막장으로 치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비롯한 44년 전역에서의 파멸적인 전선 붕괴로 인해, 가용 가능한 청년 인구를 이미 모조리 전장에서 소모해버린 이후였고, 연합군의 공습과 여러 군수 공장이 차례차례 점령되며 보급체계도 이미 무너진지 오래였다.
동원해야할 인구도 없고, 보급도 없는 마당에 연합군은 러시아 본토로 진공 중인 상황이었으니, 전선을 틀어막아야 했던 러시아는 "국민해방군"을 창설. 총을 들 수 있으면 어린이고 노인이고 상관 없이 모조리 징집했으며, 변변찮은 무기조차 쥐어지지 않았다. 패망을 앞둔 러시아는 그야말로 현세에 강림한 지옥 그 자체였다.
모스크바 대공세 직전, 괴벨스 장관을 비롯한 독일 내각과 중부집단군 병사들. |
3개월 간의 대규모 공세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4월, 빌헬름 3세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 발터 모델, 게오르크 폰 퀴흘러 등 각 집단군과 군단 사령관들을 베를린으로 소집해 모스크바 공략에 대해 논의했다. 모든 사령관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모스크바 공략을 맡고 싶어했지만, 빌헬름 3세는 특정 사령관에게 모스크바 공략을 맡긴다고 하지 않고 "모스크바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집단군이 모스크바 공략을 맡을 것이다."라고만 이야기했다. 이 때문에 군단 사령관들은 회의를 마치자마자 자신들의 사령부로 돌아가 부하들을 닦달하며 이 경쟁에 이길 생각만 했다.
모스크바 주위에 포진한 독일군은 1개 집단군, 5개 군단으로 구성되었고 병력은 약 250만 명, 전차 3,250대, 전술기 7,500대, 각종 야포 30,000문 등 많은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는 러시아군 수비대는 150만 명의 병력과 1,519대의 AFV[2], 2,000여 대의 전투기, 9,000문의 야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모든 분야에서 3:1 ~ 4:1의 전력 차이가 나고 있었고 그나마 저 러시아군군 병력 수치도 전부 멀쩡한 병력은 아니고 움직일 수 있는 부상자, 병자, 지상 전투에 숙달이 덜 된 러시아 해군과 러시아 공군에서 차출한 병력, 그보다도 못한 전투 경험이 부족하거나 전무한 국민해방군과 사빈코프 청소년단의 소년병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군은 독일군에 숫적으로뿐만 아니라 질적에서도 확실한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극동의 독일의 동맹인 대한제국군과 협상군이 담당한 극동전선에서도 연합군이 우랄을 넘어 유럽 방면으로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적은 병력을 극동전선으로 돌렸다가 동부전선으로 복귀시키는 힘든 작업을 수행해야 했다.
한편 러시아군 사령부는 극동전선의 마지막으로 남은 병력조차 모스크바로 데려오라고 시도했다. 대표적으로 사빈코프는 극동 전선의 우랄 산맥 방면을 담당하던 보리스 시테이폰 장군과 그가 지휘하던 제 12군[3]에게 모스크바를 구원하라고 명령했다. 시테이폰과 12군은 어찌어찌 라멘스코예까지는 진격해서 독일군을 격파했지만, 극동에서 미군의 뒷치기를 우려한 시테이폰이 12군을 다시 극동 전선으로 보내버리면서 12군의 모스크바 구원은 없던 일이 되었다. 이 사실을 들은 사빈코프는 분노하면서 시테이폰에게 모스크바 구원을 지속적으로 명령했으나, 시테이폰은 더 이상 한 개인의 운명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라고 말한 뒤 그대로 씹었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이후 12군의 병력들은 이후 제 9군과 연합해서 러시아 민간인들과 부상병들을 탈출시키는 볼가 강 방어 작전에 투입되었다.
모스크바 전투에서 사로잡힌 러시아군 포로들. 포로들 중에 러시아 해군과 공군 또한 포함 됐음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모스크바 전투에는 1,000여명의 해군을 포함해 꽤 많은 수의 해공군 인원들이 방어 전투에 육전대로 투입되었다. 위 사진처럼 몇명이 개별적으로 투입되는건 예사였고, 실제로는 많으면 1, 2개 사단이 해공군이라는 이름만 남기고 통째로 육군으로 전군되는 경우가 흔했다. 저렇게 전군된 병력들은 대부분 육군의 측 장교의 지휘를 받았지만, 막판에는 장교 숫자 자체가 매우 부족해졌기에 해공군에서 할 일이 없어진, 육상전과는 전혀 관계없는 장교들까지 끌어와서는 지휘를 맡기고는 했다.
모자이스크 고지 전투
모자이스크 고지를 돌파하고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판터 전차 |
사령부에 돌아온 원수들은 서둘러 공세를 준비했고, 4월 16일, 모든 전선에 걸쳐서 북부 집단군, 중부 집단군, 남부 집단군은 일제히 공세를 시작했다. 이 작전들을 통틀어 태풍 작전이라고 한다.
포위되는 모스크바
영화 몰락의 장면 中. |
하지만 사빈코프는 여전히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다. 모스크바 강변에 있었던 한진의 54군은 후퇴를 요청했지만 전선을 유지하라는 사빈코프의 명령에 의해 결국 고립되었다. 여기에 만슈타인 방면의 쿠즈네초프가 말로만 사빈코프를 안심시키고, 측면에서 독일군에게 성공적인 공격을 했다고 허풍을 친 것도 사빈코프의 오판을 도왔다. 한편 극동에서 한국군과 대치 중이던 시테이폰을 모스크바로 불러들이고, 나츠그바르디아 장성인 이반 코노노프 대장에게 새로운 부대를 창설해 독일군의 진격을 막을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이 명령은 병력과 물자 모두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유명무실한 허세에 불과했고, 사빈코프는 제대로 보고도 받지 않은 채 이 부대가 이미 편제를 완료했다고 판단한 후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코노노프에게는 그때까지도 한 줌밖에 안 되던 병력 밖에 없었고, 사방팔방으로 밀려드는 독일군에 맞서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클린에 있었던 보리스 비셰슬랍체프는[4] 항복 협상을 위해 자신의 나츠그바르디아 병력 25,000~40,000명을 몰래 빼돌려 놨고, 자신과 친한 코노노프에게 사빈코프와 사령부의 명령을 무시하라고 지시했다.
4월 23일에 열린 작전 회의에서 코노노프가 공격하지 않았던 걸 알고 사빈코프는 욕을 퍼부으면서 직접 니콜라이 나자렌코를 파견했다. 참모진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코노노프의 부대가 아직 제대로 편제도 되지 않았고 공격도 당연히 실행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24일에도 코노노프가 공격에 나서지 않자 사빈코프는
"나는 전쟁에서 졌다!" |
고 소리쳤고, 탈출하느니 차라리 자살할 것이라고 말했다.[5]
러시아국의 최후
유럽전선의 종결
베를린에서 알린다. 독일 정부의 발표를 전한다.
중부전선군 사령관인 독일제국의 발터 모델 원수가 남부전선군 사령관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의 도움을 받아 치열하게 진행된 시가전 끝에 모스크바를 지키는 러시아군을 괴멸 시키고, 그리고 바로 오늘 5월 2일 러시아의 도시이자 수도인 모스크바를 완전히 점령했다! 러시아 제국주의와 러시아의 침략의 중심부인!모스크바 함락 방송. |
기타
독일군의 전쟁범죄
드레스덴에서 모스크바까지
지하철의 비극
이후
어록
"증오가 아주 깊어졌다. 전쟁을 끝내고 싶어졌다. 우리를 죽이려 한 저들을 전멸시키자. 저들을 없애자. 1명도 빠짐없이!" 독일군 '일리아스 슈타이너' |
"절망적이다. 모두들 아무 소용없는 짓을 하고 있다." 니콜라이 바투틴 대장, 모스크바 수비 방어선을 시찰한 후 |
"독일군이 이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는 1시간이 걸릴 것이다. 허술한 방어선의 꼬락서니를 본 독일군이 55분 동안 웃으며 뒹굴다가 5분 안에 깨끗이 거덜내 버릴 것이니까..." 전투 당시 러시아군 사이에 퍼진 농담 |
"모든 병사들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현재의 참호에서 최후를 맞으라. 이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슬라브 민족도 사라진다." 보리스 사빈코프 |
"그리고 나는 외치고 싶었다. 우크라이네, 벨로루시, 폴란드의 땅 속에 누워 있는 이들, 우리가 거쳐온 모든 땅에서 영원히 잠든 이들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전우여, 우리가 해냈소!"' 독일군 종군기자, 오스카 하르트만, "전쟁의 해들(Die Jahre des Krieges, Years of the war)" 중 |
승리의 날이여. 이를 위해 얼마나 멀리 달려왔던가.
승리를 위해, 불타버린 머나먼 길을 달려왔고 이날을 위해 우리 모두 장렬하게 싸워왔네. 유럽의 반을, 천하의 반을 큰 걸음으로 달려왔네, 이날을 위해 우리 모두 장렬하게 싸워왔네!독일 군가 <승리의 날> 중 |
대중문화
- ↑ 태풍 작전
- ↑ Armoured fighting vehicle, 전차, 구축전차, 돌격포, 장갑차 등 장갑을 두른 모든 차량, 전차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당시 러시아군 수중에 남아 있던 모든 전투차량이라는 것이다.) 러시아군은 1945년 3월 햇볕 작전에서 상당수의 남은 전차, 구축전차, 돌격포를 상실했기 때문에 이 1519대의 AFV 상당수는 장갑차였을 것으로 보인다.
- ↑ 사실상 대전 말기 중부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온전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 군단이었다.
- ↑ 모스크바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모스크바에서 탈출했다.
- ↑ 위 영상 속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