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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덴의 함락이 임박하자, 괴벨스는 한가지 "쇼"를 준비했다. 1942년 10월에 독일은 [[함부르크 공방전 (빌레펠트)|함부르크까지]] 밀고온 인터내셔널군을 간신히 격퇴하고 브레멘과 라인강 일대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고, 아프리카 집단군은 [[엘 알라메인 전투 (빌레펠트)|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간신히 승리하고 수에즈 운하를 사수할 수 있었으나 여전히 상황은 열악했다. 거기다가 동부전선은 아직까지 베를린이 크게 위협 받고 있었으며 만약 드레스덴이 함락 된다면, 바이에른까지의 길이 활짝 열릴 것이었기에 전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 드레스덴의 함락이 임박하자, 괴벨스는 한가지 "쇼"를 준비했다. 1942년 10월에 독일은 [[함부르크 공방전 (빌레펠트)|함부르크까지]] 밀고온 인터내셔널군을 간신히 격퇴하고 브레멘과 라인강 일대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고, 아프리카 집단군은 [[엘 알라메인 전투 (빌레펠트)|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간신히 승리하고 수에즈 운하를 사수할 수 있었으나 여전히 상황은 열악했다. 거기다가 동부전선은 아직까지 베를린이 크게 위협 받고 있었으며 만약 드레스덴이 함락 된다면, 바이에른까지의 길이 활짝 열릴 것이었기에 전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 ||
상황이 |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군수 장관이던 슈페어를 필두로 더이상 전시경제가 아닌 '총력전'으로 돌입해야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이 '총력전'은 포로들의 노동을 통한 산업 인력을 확보하고, 징병법의 개정과 여군 모집을<ref>[[바그라티온 작전 (빌레펠트)|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자 [[베를린 공방전 (빌레펠트)|베를린 공방전]] 시점부터 독일 여군도 투입되긴 했으나 이건 어디까지나 젊은 여성들에 국한된 이야기였고 규모도 소규모였다. 여군들이 전면적으로 투입된 것도 총력전 연설 이후부터다.</ref> 확대하여 추가 병력을 마련하자는 내용이 주요 골자였는데, 이는 프로이센 융커들의 기사도 정신과 사민당의 가치에 상당히 위배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뮐러는 물론이거니와 빌헬름 2세 또한 상당히 주저했다. | ||
이 시점에서 OHL의 청색작전을 전해들은 괴벨스는 스포츠 궁에서 연설을 준비했다. 그는 드레스덴을 비롯한 각 전선에서의 장병과 특히 부상병들, 그리고 미리 정해둔 지점에서 박수쳐줄 배우들을 모았다. 괴벨스는 베를린 스포츠 궁전에서 여전히 전황이 어려움을 알리면서, 독일이 패배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동시에 생디칼리스트들과 러시아 슬라브족에게 패배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 수치스러운 것이라며 모든 국민이 목숨을 바쳐 전쟁을 지원해야한다고 선전했다. | 이 시점에서 OHL의 청색작전을 전해들은 괴벨스는 스포츠 궁에서 연설을 준비했다. 그는 드레스덴을 비롯한 각 전선에서의 장병과 특히 부상병들, 그리고 미리 정해둔 지점에서 박수쳐줄 배우들을 모았다. 괴벨스는 베를린 스포츠 궁전에서 여전히 전황이 어려움을 알리면서, 독일이 패배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동시에 생디칼리스트들과 러시아 슬라브족에게 패배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 수치스러운 것이라며 모든 국민이 목숨을 바쳐 전쟁을 지원해야한다고 선전했다. |
2024년 12월 14일 (토) 22:58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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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 주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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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덴 공방전 Battle of Drensden Битва при Дреннсдене Die Schlacht bei Dresde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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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중 동부 전선의 일부 | ||
날짜 | 1942년 8월 21일~1943년 2월 2일 | |
장소 | 독일국 작센 왕국 드레스덴 | |
결과 | 독일제국의 결정적 역전승 | |
영향 | 동부전선 전세의 변환점 독일군 반격의 시발점 나치 러시아국이 독일 완전 점령 계획을 포기하게 됨 | |
교전국 | ||
독일제국 도나우 연방 우크라이나 |
러시아국 세르비아 루마니아 왕국 그리스국 크로아티아 독립국 | |
병력 | ||
117만 명 | 132만 명+지원군 | |
피해규모 | ||
총 사상자 95만명 | 총 사상자 113만명(포로 19만 1000명 포함) | |
지휘관 | ||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에리히 폰 만슈타인 |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
파괴된 드레스덴 |
개요
드레스덴 전투는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독일의 드레스덴 일대에서 벌어졌던 독일제국군과 러시아 국방군 간의 전투이다.
독러전쟁에서 가장 거대했던 전투 중 하나로, 규모면에서 포젠 전투가 가장 규모가 큰 전투였다면 드레스덴 전투는 최대규모의 사상자를 낸 전투이다.
서론
드레스덴 전투의 전개 |
드레스덴 공방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로 기억되고 있다. 엘베강 유역에 위치한 도시인 드레스덴은 베를린 방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고, 만약 러시아군에게 함락된다면 베를린 남부의 방위가 위태롭게 됨은 물론이고 바이에른으로 향하는 길이 활짝 열리기에 독일군 입장에선 반드시 사수해야하는 도시였다.
한편 나치 러시아는 베를린 공방전에서의 패배로 바그라티온 작전이 중단되었고, 벨로루시 전선군이 심각한 손실을 입고 말았다. 이로인해 러시아군은 베를린 재공격을 회의적으로 보았고, 베를린을 다시 공격한다는 계획을 뒤엎는다. 그 대신에 베를린 남부와 보헤미아 방면을 점령하여 독일의 남은 동맹군과 방어선을 붕괴 시키어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킨다는 천왕성 작전을 구상하였으며 겨울이 끝나고 1942년 여름이 되어 작전을 실행하였다.
보리스 사빈코프에게 드레스덴이라는 도시의 중요성은 매우 컸다. 이 도시는 엘베 강의 주된 산업 도시였고, 점령한다면 바이에른으로 진군하는 러시아군 좌익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었다. 빌헬름 2세도 이 점을 알고 있었고, 총을 들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이곳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천왕성 작전이 실행되고 러시아군이 작센으로 진군하자 독일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러시아군의 측면 포위로 인해 제대로된 방어선의 구축은 실패하였다. 그나마 바그라티온 작전 때와는 달리 전력의 결정적인 손실을 입지는 않았다. 러시아군은 드레스덴으로 진입해 시가전을 벌이기 시작했으나, 독일군의 격렬한 저항에 무려 3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엄청난 피해를 내며 도시 점령에 골머리를 앓게 된다.
이렇게 벌어준 시간 동안 독일군은 점점 러시아군과 대등한 수준의 병력을 확보했고 마침내 11월 19일, 청색 작전을 통해 러시아군의 측면을 보호해주던 루마니아군을 분쇄하고 도시에 있던 러시아군 54만여명을 포위하는데에 성공한다. 러시아는 공중보급을 통해 포위된 병력을 살릴 방법을 구상했으나 곧 포기하고 최대한 독일군에게 저항해 그들을 묶어두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1943년 2월 2일 드레스덴의 러시아군은 최종적으로 독일에게 항복하게 된다.[1]
이 전투는 러시아의 독일 침공 계획을 완전히 좌절시키고 전세를 뒤바꿨다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된다. 러시아군의 병력과 자원은 이미 드레스덴에서 지나치게 소모되었고 더는 독일군을 압도할 만한 힘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독일군은 초기의 패배를 딛고 이 전투를 기점으로 러시아군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전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1942년의 동부전선
1941년 6월 22일 러시아 국방군과 추축군이 바그라티온 작전을 개시하여 제2차 독러전쟁이 발발한 뒤, 1941년 가을까지 독일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으며 패퇴를 거듭했다. 그러나 이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맹렬하게 저항하던 독일군과 갑작스런 폭설로 인해 러시아군의 베를린 점령(오데르-나이세 대공세)은 실패하게 된다.
이에 당초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러시아 국방군의 목표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1941년 12월부터는 독일군의 반격이 시작되었으며, 1942년 새해 1월까지의 공세로 러시아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베를린 일대에서 150km~250km 가까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41년/42년 동계공세)
하지만 빌헬름 2세는 여전히 베를린이 점령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여 있었고 뮐러의 내각도 개전 초기 대패로 인해 여론의 압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 반격에서 축출하는 데 실패한 슈테틴 돌출부에 대대적인 공격을 명령했으나 슈테틴 전투에서 독일군은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러시아군의 전술에 말려 엄청난 사상자를 낳았을 뿐 돌출부를 제거하는 데 실패했다. 연이어 장크트푈텐에서 포위된 러시아군이 방어에 성공하며 러시아 벨라루스 전선군은 대타격을 받긴 했지만 독일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전선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최초전개
천왕성 작전과 제2차 브레슬라우 전투
독일군의 대응
모스크바 협정군의 공격
시 외곽의 전투
생쥐 전쟁(Латвийская война)
독일군의 반격
묻겠다, 제군은 총력전을 원하는가?
괴벨스의 총력전 연설 |
Ich frage euch: Wollt ihr den totalen Krieg? Wollt ihr ihn, wenn nötig, totaler und radikaler, als wir ihn uns heute überhaupt noch vorstellen können? 제군에게 묻겠다. 그대들은 총력전을 원하는가? 만약 필요하다면, 오늘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급진적이고 총력적인 전쟁이 되기를 원하는가? |
드레스덴의 함락이 임박하자, 괴벨스는 한가지 "쇼"를 준비했다. 1942년 10월에 독일은 함부르크까지 밀고온 인터내셔널군을 간신히 격퇴하고 브레멘과 라인강 일대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고, 아프리카 집단군은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간신히 승리하고 수에즈 운하를 사수할 수 있었으나 여전히 상황은 열악했다. 거기다가 동부전선은 아직까지 베를린이 크게 위협 받고 있었으며 만약 드레스덴이 함락 된다면, 바이에른까지의 길이 활짝 열릴 것이었기에 전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군수 장관이던 슈페어를 필두로 더이상 전시경제가 아닌 '총력전'으로 돌입해야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이 '총력전'은 포로들의 노동을 통한 산업 인력을 확보하고, 징병법의 개정과 여군 모집을[2] 확대하여 추가 병력을 마련하자는 내용이 주요 골자였는데, 이는 프로이센 융커들의 기사도 정신과 사민당의 가치에 상당히 위배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뮐러는 물론이거니와 빌헬름 2세 또한 상당히 주저했다.
이 시점에서 OHL의 청색작전을 전해들은 괴벨스는 스포츠 궁에서 연설을 준비했다. 그는 드레스덴을 비롯한 각 전선에서의 장병과 특히 부상병들, 그리고 미리 정해둔 지점에서 박수쳐줄 배우들을 모았다. 괴벨스는 베를린 스포츠 궁전에서 여전히 전황이 어려움을 알리면서, 독일이 패배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동시에 생디칼리스트들과 러시아 슬라브족에게 패배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 수치스러운 것이라며 모든 국민이 목숨을 바쳐 전쟁을 지원해야한다고 선전했다.
연설은 큰 효과를 봤다. 독일은 곧바로 슈페어의 계획대로 군수개혁을 진행, 총력전 체제에 돌입했으며 수 많은 군수공장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전선의 병사들에게도 이는 큰 호응을 얻었으며 사기를 크게 높일 수 있었다.
그리고 독일은 이렇게 총력전 체제에 돌입하면서 청색작전 진행에 필요한 신규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청색 작전
러시아군의 대응
작전 발동
항공 보급의 실패
후반 전개
토성 작전
러시아군은 상황이 절망적으로 변하자 유능하다고 판단된 장교들을 비행기로 탈출시키기 시작했다. 러시아군 수중의 마지막 비행장인 드레스덴 공항에서는 안전한 곳으로 탈출하려는 광란의 쟁탈전이 벌어졌고, 장교들은 비행기에 올라타려고 뇌물을 주고 매수하려고 들기도 했다. 장교들만 빼온 것은 아니고, 부상병들, 열등한 게르만-유대인들에게 강간당하는 수모를 막는다며 사빈코프가 직접 철수시킬 것을 명한 간호사 등 여성 보조원들, 도하 작전 지원을 위해 왔다 할 일이 없어진 흑해함대 하천함대 소속 해군 장병 등 일부도 운좋게 철수 행렬에 합류해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드레스덴 공항에서 벌어진 아비규환에 대해서 러시아 내에서는 드레스덴 같은 좌파 영화가 매도한 것이라는 반발도 있었으나 OPT에서 제작한 드레스덴 전투 다큐멘터리 및 다수의 참전자 수기를 보면 드레스덴 공항은 살기 위한 온갖 수가 동원되는 아비규환이었단 증언들이 많이 나온다. 현재도 드레스덴 공항과 기타 비행장에서는 많은 러시아군의 유해와 유품들이 발굴되고 있다.
아예 사단 예하 부대는 남겨두고 사단장과 참모장교, 기타 중요 인물 몇몇만 탈출시킨 경우도 있었다. 기병사단에서 개편되었기 때문에, 제복에 기갑 병과를 뜻하는 상징이 아닌 기병 병과의 상징을 단 것으로 유명한 6기갑사단이 대표적이다. 부대 자체는 드레스덴에서 전멸했으나, 참모진 등을 수송기편으로 빼와 후방에서 그들 및 구 6기갑사단 출신 타 부대 전출자나 회복된 부상병 등을 모아 재창설했다. 물론 대다수는 신병들이었다. 하지만 사단장인 미하일 콘스탄티노프 소장은 다른 부하와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종전 후 러시아군 재창설 후 육군 소장으로 임관했고 퇴역 후 국가두마 의원까지 되었다.
하지만 독일군의 공중 봉쇄로 이렇게 어렵게 탄 비행기편마저 사실 안전하지 못했다. 전술된 바와 같은 독일군의 악착같은 공중공세와 대공포화로 인해, 러시아군은 드레스덴 전역에서 수송기 488대, 승무원은 1천 명 이상을 상실했다. 천신만고 끝에 수송기에 탑승하고서 하늘에서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비행장이 수중에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러시아군 갈리치아 전선군의 수중에 있던 마지막 비행장인 드레스덴 공항에서는 1943년 1월 23일, 수송기들이 이륙을 준비하던 중 활주로에 독일군들이 난입하는 바람에 공포에 질린 탑승객들이 마구잡이로 비행기에 매달리다 떨어지고, 심지어 이륙하던 수송기가 독일군의 전차포에 맞아 격추되는 아비규환과 대혼란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 날 드레스덴 공은 독일군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그와 동시에 러시아군 장병은 4성장군 로코솝스키부터 말단 이등병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라도 드레스덴을 탈출할 길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러시아군의 항복
항복 이후 포로로 끌려가는 러시아 갈리치 전선군 장병들 |
1943년, 해방된 드레스덴[3] |
소러시아의 테러리스트를 위해서 죽을 수는 없지. -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
항복이라는 말은 절대 쓰지 마라. 우리 군대가 보급품을 받을 수 없어서 공격을 이기지 못했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이를 희생이라고 해야 한다. - 보리스 사빈코프 |
결과
드레스덴 성에서 독일 전쟁기를 게양하는 독일군 |
이 전투로 러시아는 동부전선 전체에서 가장 전투 경험이 많은 갈리치아 전선군이 삭제되며 1942년 이래 주전선이 된 남부전선의 차후 공세 진행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드레스덴 전투는 전선군 규모의 러시아군이 포위-섬멸당한 최초의 전투로 일방적인 러시아의 공세로 진행되던 독러전의 흐름을 완전히 바꿨다고 평가받는다. 이 시점에서 독일군의 전쟁 수행 능력은 러시아군을 넘어서기 시작하고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게 된다. 이 전투에서 항복한 러시아 갈리치아 전선군은 러시아군 정예 병력으로 동부전선에서 큰 활약을 하였던 부대였기 때문에 이후 러시아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그 공백의 크기를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드레스덴 전투가 독러전쟁의 결정적 전환점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이로 인해 러시아군이 동부전선에서 공세 역량을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동부전선에서 발트 전선군은 쾨니히스베르크-쿠를란트에 붙잡혀 있었고 벨라루스 전선군은 베를린 공방전에서 극심한 손실을 입고 이반 코네프의 지휘하 슈테틴 전역에서 방어전에 일관하고 있었다. 발트와 벨라루스 전선군이 공세능력을 상실한 동안 러시아의 공세는 남부 4전선군[4]이 주축이 되었고 그 선봉에는 갈리치아 전선군이 있었다. 러시아 갈리치아 전선군은 그냥 단일 전선군이 아니었다. 천왕성 작전이 진행되면서 전신인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정예 병력 뿐 아니라 육군사령부 예비 야전군을 증원받고, 제5 전차군의 기동전력까지 건네받은 거대 전선군이었다.
드레스덴에서 갈리치아 전선군이 섬멸되며 러시아는 전 전선에 걸쳐 공세 능력을 잃어버렸고 이후 물 오른 독일군의 역습을 돌려 막기 급급해졌다. 갈리치아 전선군만의 피해가 아니었다. 청색 작전 직후 러시아 제5전차군은 껍데기만 남아버렸고, 세르비아 및 루마니아 군에서 십수만의 피해가 발생했다. 육군 사령부 예하의 1개 전선군-3개군급 부대가 붕괴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것이다. 기갑 장비의 손실도 막대해 최소 2,000대 이상의 전차를 손실해버렸고 또한 수송기 전력도 880대 이상이 파괴되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어버렸다. 이는 러시아의 생산능력으로는 더 이상 복구가 불가능한 피해였다.
청색 작전이 시작된 시점에 러시아군의 운명은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포위 전에도 갈리치아 전선군은 병사들이 '음식이 부족하다'는 수기를 남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갈리치아 전선군은 말에게 먹일 먹이가 없어 겨울이 오자 갈리치아 전선군의 기동력을 책임지고 있던 말들을 후방으로 보내야만 했다. 여기에 포위망이 완성되니 더욱 상황은 심각해졌다. 토성작전 작전 당시 1달 정도 포위되어 제대로 된 보급을 받지 못하자 러시아 갈리치아 전선군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식량 및 연료가 부족해 제대로 전투 행동을 취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갈리치아 전선군이 공세역량이 있다고 판단한 사단은 제248근위소총병사단 하나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탈출은 결국 갈리치아 전선군 전체의 전투서열이 붕괴하는 결과만을 초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독일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아쉬운 점도 있었는데, 갈리치아 전선군이 독일의 군대를 드레스덴에 묶어두고 있을 동안 프라하 남쪽에 진출했던 예료멘코의 보헤미아 전선군은 간발의 차이로 포위망을 탈출해 버렸다. 만약 갈리치아 전선군이 일찍 항복했다든지 아니면 일찍 탈출해 버렸으면 보헤미아 전선군은 독일군의 포위망에 걸려 갈리치아 전선군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사빈코프는 로코솝스키를 비난하지 말고 오히려 더 칭송해야 될 판국이었다.
한편 갈리치아 전선군이 전멸해 버린 러시아군은 작센-보헤미아 전선 자체가 완전히 무너질 위기에 처하게 됐다가 안드레이 블라소프와 바실렙스키의 신들린 방어로 슈테틴 전역에서의 독일군의 공세(들소작전)와 뒤이은 브레슬라우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 내면서 생명 연장의 꿈을 꾸게 되지만, 1943년 사빈코프가 공세능력을 상실했지만 방어능력은 건재했던 우크라이나 전선군을 포젠 전투에서 날려먹으며 굳건한듯 했던 러시아의 동부전선이 붕괴되어 독러전쟁에서 패배한다.
또한 팍트군 저격 전설의 시작도 이 드레스덴 전투였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 도나우 전설의 저격수 마테우스 헤체나우어 산악사단 일병과 러시아 바실리 자이체프 해군 하사의 초인적인 저격수 대결을 묘사했다. 도나우에선 마테우스의 회고록에서 나온 내용이니 진짜라고 하지만 서방 측은 물론 심지어 도나우에서도 마테우스가 거물급 저격수들을 해치운 것은 사실이나 바실리 자이체프나 이반이란 이름의 저격학교 교장을 사살했다는 기록이 없다. 이 바실리 자이체프나 이반 아르투어 나츠그바르디아 대령이라는 이름은 전투가 끝난 후 러시아 저격수 포로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름들이고, 당시 격전에서 러시아군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헤체나우어가 사살한 러시아 측의 특급저격수가 누구인지는 오리무중이다.
드레스덴 전투를 연합군 반격의 시발점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즉,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드레스덴 전투로 추축국에서 연합국으로 전환되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서구 전사학자들도 드레스덴 전투를 시작으로 나치 러시아의 패망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전투를 시점으로 나치 러시아가 동부전선에서 본격적으로 독일의 자체적 역량에 밀리기 시작한데다 독일 측이 무기대여법 효과까지 받는 것으로 전력에서 뒤쳐지게 되면서 점점 동부전선에서 밀리기 시작했으며, 이후 극동전선에서도 결국 크라스노야르스크 대공세의 실패로 인해 독일군에게 모스크바까지 점령당하는 결말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러시아군은 기동전과 포위섬멸을 반복하면서 팍트군을 말 그대로 갈아버리고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교전비 1:10 수준의 참담한(나치에겐 찬란한) 결과의 원인이 바로 이것. 통상적인 전투는 양군이 서로 피터지게 싸우다가 진 쪽은 물러나며 병력의 20-50% 손실을 입고, 이긴 쪽도 그와 비슷하거나 더 적은 피해를 입는 병력 교환, 즉 소모전의 형태를 보인다. 1차대전기의 참호전이 그 전형적인 예시. 그러나 러시아은 빠른 기동을 통해 팍트군을 포위하고, 팍트군은 분산된 지휘체계 탓에 망기적거리다 포위망에 갇혀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부대 자체가 삭제되는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러시아군이 바그라티온 작전 개시 후 불과 몇 달만에 베를린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기습의 효과도 있었지만 기동전과 포위섬멸을 채택한 전과였다.
하지만 베를린 전투부터 러시아군은 포위기동 대신 단단하게 준비된 방어선에 들이박는 소모전을 강요당했고, 여기서도 러시아군이 잘 싸웠지만 어쨌든 양측이 멱살잡고 싸우며 러시아 측의 손실도 이전에 비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모전의 절정이 드레스덴 전투. 독러전 초기 팍트군 수백만을 잡을때 입은 피해보다 드레스덴의 빌딩 하나 점령하는 데 입은 피해가 크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처절한 격전이었는데, (상대적으로) 작은 도시 하나에 군 전체가 묶여버리며 기동전을 활용하지도 못했다. 역으로 독일군이 갈리치아 전선군의 포위섬멸을 시도해 궁지에 몰아넣고 결국 승리하며, 자신들의 특기인 기동전과 제병합동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되었다.[5] 그리하여, 러시아군은 천왕성 작전 이후로 더이상 이전과 같은 돌파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성장해가는 독일군과 밀고밀리는 전선 싸움을 반복하게 된다.
독일은 야전군이 통째로 삭제되는 참사에서도 꾸역꾸역 새로운 부대를 편성했지만, 러시아는 여기서 한번 삭제된 피해를 종전 때까지 회복하지 못했다.
기타
말말말
이후 독일 육군에 끼친 영향
이후 러시아 육군에 끼친 영향
참전한 한국군 병사들
양측의 편제
모스크바 협정
우크라이나 전선군
갈리치아 전선군
지원군
루마니아 왕국군
세르비아 왕국군
그리스군
크로아티아 의용군
라이히스팍트
제국군 총사령부
드레스덴 방위 사령부
독일 제국군 제6군
독일 제국군 4기갑군
지원군
도나우 연방군
자유 우크라이나군
관련 작품
어록
드레스덴에서는 7초에 한 명씩 러시아군이 죽고 있습니다. 1초, 2초, 3초, 4초, 5초, 6초, 7초. 방금 또 한 명이 죽었습니다. 독일군 선전방송 |
어제 개가 필사적으로 엘베 강을 수영해서 건너는 걸 보았다. 가장 강인한 동물도, 가장 단단한 돌도 이 곳에선 버틸 수 없다. 오직 인간만이 버틸 뿐이다. 어느 신원미상의 러시아군 |
묻겠다, 제군은 총력전을 원하는가? 만약 필요하다면,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완전하고 전면적인 전쟁을 원하는가?(중략)묻겠다. 제군은 이 땅(조국)의 군단으로써, 투쟁의 제국군을 카이저와 함께 뒷받침하며, 어떠한 운명의 결과에도 굴하지 않고 결연한 의지로 우리가 승리를 거머쥘 때까지, 이 투쟁을 해나갈 준비가 되었는가?(중략)지금이야말로, 국민들이여, 일어나라! 폭풍이여, 떨쳐 나가라! 괴벨스 당시 선전부 장관의 총력전 연설, 이 연설 이후 청색작전이 시작됐다. |
"드레스덴은 어떻게 되고 있느냐?" "아버지, 우리 군이 러시아 놈들을 포위 했습니다. 드레스덴에서 우리가 이겼습니다." "전쟁은, 전쟁은 이길 수 있겠느냐?" "염려마세요 아버지.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그럼 됐다." 빌헬름 2세와 빌헬름 3세의 마지막 대화. 빌헬름 2세의 유언이기도 하다. |
- ↑ 전투에서 살아남아 포로가 된 19만 명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독일에 억류되어 전후 복구 사업에 강제 동원되다가 최종적으로 1955년 러시아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들은 채 6만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
- ↑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자 베를린 공방전 시점부터 독일 여군도 투입되긴 했으나 이건 어디까지나 젊은 여성들에 국한된 이야기였고 규모도 소규모였다. 여군들이 전면적으로 투입된 것도 총력전 연설 이후부터다.
- ↑ 전투 막바지의 모습과 항복하는 로코솝스키 원수와 그 참모진, 포로로 잡힌 러시아군 장병들의 모습이 담겼다.
- ↑ 우크라이나 전선군, 갈리치아 전선군, 보헤미아 전선군, 발칸 전선군
- ↑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독일군이 오히려 러시아군의 기동전에 말려들은 이유는 간단했다. 서부전선에 묶여있던 주력군이 동부전선에 재배치 되기도 전에 동부군이 박살난 덕분에 전선을 유지하는 것 조차 벅찼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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