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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 개요 == | ||
1944년 8월 1일부터 1944년 10월 2일까지 | {| class="wikitabl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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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f5f5f5; text-align:center" |'''블라이스카브카(блискавка, 번개)<ref>Mp 40의 우크라이나 카피판</ref>를 들고있는 우크라이나 국내군 병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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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8월 1일부터 1944년 10월 2일까지 나치 러시아 치하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에서 우크라이나 지하국이 일으킨 봉기이다. 독일의 우크라이나 망명정부가 지시한 우크라이나 전역 봉기 계획인 회오리 작전의 일환으로 독일군과 팍트군이 진입하기 전에 키이우를 자력으로 탈환하기 위해 발생했다. | |||
==서론== | ==서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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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이르자 상황은 극도로 암울해져 봉기군은 하수도로 들어가 저항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도시를 파괴하고 수많은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으며 수류탄과 화염방사기를 동원해 하수도의 봉기군을 소탕했다. | 9월에 이르자 상황은 극도로 암울해져 봉기군은 하수도로 들어가 저항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도시를 파괴하고 수많은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으며 수류탄과 화염방사기를 동원해 하수도의 봉기군을 소탕했다. | ||
키이우 봉기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발생한 수많은 저항 운동 중 가장 거대하고 중요했던 봉기로 꼽힌다. 비록 결과적으로 실패하였으나 우크라이나를 끝없이 수탈하던 러시아에 대항해 2차 대전 역사상 가장 거대한 봉기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현대 우크라이나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 키이우 봉기는 [[제2차 벨트크리그 (빌레펠트)|제2차 세계 대전]] 중 발생한 수많은 저항 운동 중 가장 거대하고 중요했던 봉기로 꼽힌다. 비록 결과적으로 실패하였으나 우크라이나를 끝없이 수탈하던 러시아에 대항해 2차 대전 역사상 가장 거대한 봉기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현대 우크라이나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 ||
=배경= | |||
1944년 6월 22일 시작된 [[바르바로사 작전 (빌레펠트)|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독일군의 진격에 동부전선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러시아의 벨라루스 전선군은 궤멸당했고 엄청난 크기의 지역이 다시 독일의 통제하로 들어갔다. 독일군의 진격은 거칠 것이 없어서 곧 우크라이나 영내로 진입하기 시작했고 작전이 끝나갈 즈음엔 키이우 함락도 목전이었다. 키이우 시내에선 독일군의 포성이 들릴 정도였다. | |||
한편, 베를린의 우크라이나 망명정부는 1942년 말부터 '폭풍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우크라이나 내부의 무장봉기를 통해 러시아를 몰아내고 자력 독립하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고 이를 실행할 단체로 우크라이나 지하국가(Українська підпільна держава, 속칭 Упд)를 지원하고 있었다. 1943년 중순부터 계획은 소규모로 실행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러시아의 지배가 강력했기에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다. 그러다 [[바르바로사 작전 (빌레펠트)|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전선이 우크라이나까지 밀려오면서 러시아군이 전면적으로 붕괴되고 독일군에 의한 우크라이나 점령이 눈앞에 다가오자 우크라이나의 자력 해방과, 전쟁에서의 기여분 확보, 그리고 전후 독일과의 평등한 관계 수립을 위해<ref>당시 독일은 우크라이나의 여러 이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실상 위성국에 가까웠다.</ref> 우크라이나 망명정부는 우크라이나 지하국가에게 대규모 무장봉기를 일으켜 독일군이 우크라이나로 진격하기 전에 우크라이나 각지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내라고 지시했다. | |||
이에 따라 빈니차, 크리비리흐, 드니프르, 우만, 하르키우 등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에서 7월 말부터 크고 작은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부분 실패로 끝났지만, 서부의 주요 도시 빈니차가 해방되었고 이 밖에 우크라이나 각지에서 작은 도시들이 다시 탈환되는 등 충분히 고무적인 성과가 잇달아 나오고 있었다. 이런 성과들에 힘입어 우크라이나인의 수도 키이우에서도 가장 대규모의 봉기가 준비되고 있었고 Упд의 주력인 우크라이나 국내군(внутрішні війська, вв)을 중심으로 1944년 8월 1일 17시(W-Hour)를 기해 키이우 봉기가 시작되었다. | |||
=봉기군의 구성= | |||
=봉기 발발= | |||
==시작== | |||
==진행== | |||
==러시아군의 진압== | |||
==9월의 상황== | |||
==종지부== | |||
==독일군의 역할에 대한 의문== | |||
{| class ="wikitable" style="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 max-width: 800px; width: 100%; border: 2px solid #536349; text-align: center; font-size: 10p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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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style="margin: -4.5px -9.0px">[[파일:해방이다!!!.jpg]]</d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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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color:#fff; background:#536349" | 키이우 서안을 해방한 독일군 오토바이 부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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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1|조만간 권력을 좇아 키이우 모험을 벌인 한 줌의 범죄자들에 대한 진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군사적 관점에서 볼 때 상황은 제국군과 우크라이나인들 모두에게 매우 불리합니다. 그럼에도 독일 부대는 사빈코프의 진격을 물리친 다음 키이우 인근에서 새로운 대규모 공세를 벌이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국군이 키이우에서 러시아군을 분쇄하고 우크라이나인들을 위해 도시를 해방시키는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귀하께 장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반나치 우크라이나인들을 효과적으로 돕는 최선의 방법일 것입니다.|1944년 8월 22일 바실 비시바니의 물자 투하 요청에 대한 헤르만 뮐러의 답변}} | |||
독일군은 봉기 기간 동안 키이우 봉기군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이는 근본적으로 독일이 '''우크라이나를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크라이나는 독일의 동방주로서 일종의 위성국이었는데, 직전에 내전이 일어나면서 스코로파즈키가 축출되고 공화국 정부가 들어섰다. 물론, 공화국 정부가 독일과의 동맹관계를 재확인하긴 했다만 이런 상황에서 '자력으로 키이우를 해방한 이후 독일과 평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하겠다.'는 그리 고깝게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더불어서 키이우 동쪽을 포함한 드니프로 강 동안은 친러 색이 짙은 곳으로 러시아군의 점령 기간동안 러시아에 협력한 이들이 많은 곳이었다.<ref>실제로 러시아군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발트 지역을 점령한 이후 이곳에서 수백만 단위의 병력을 동원했다.</ref> 적어도 드니프로 강 서안은 반러 성향이 짙고 자유 우크라이나군 합류자도 많았지만 이런 판국에 독일이 그들을 지원해주기는 쉽지 않았다. 다만 이런 독일 정부와 군부 상층부의 태도와는 별개로 독일의 공군이 키이우 봉기군에게 물자를 지원했고, 소티는 생각보다 많았지만(2,000소티) 아쉽게도 봉기군에게 직접 전달된 물건은 얼마 없었다. | |||
물론 여러 자료를 확인해볼 때 실제로 당시 독일군이 키이우에 진격하는 것이 '''군사적으로도 불가능 했음이''' 사실이다. 독일군이 언제든지 키이우를 들이칠 수 있을 것처럼 압도적으로 보였던 것은 사실은 상당부분 빌헬름 3세의 허세였고, 실제로는 구데리안은 키이우 봉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독일군에 키이우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하달했지만 재편성된 러시아군의 파쇄공격<ref>기동방어의 일종으로, 적군이 공격준비를 마치기 전에 선제공격으로 격파함으로써 적군의 공세역량을 분쇄하는 것이다.</ref>에 오히려 격파당했음이 드러났다. 당시 전세는 이미 독일에게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지만, 독일 제국군은 키이우 근교에서 공세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독일군을 상대하던 러시아군 사령관은 러시아 최고의 방어전 사령관인 안드레이 블라소프였다. 그는 무너진 나치러시아의 동부전선을 재건했고, 우크라이나 인근에서 독일군에게 역습을 날려 동부전선의 수호자로 불렸다. 나치러시아의 생명연장에 지대한 공을 세운 승리였지만 우크라이나에게 있어서는 크나큰 아쉬움으로 남을 지점이다. | |||
[[바르바로사 작전 (빌레펠트)|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지 약 1달 정도 지난 1944년 7월 22일 시점에서 키이우 방면의 선봉인 독일 제2 기갑군은 810량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제2 기갑군은 적어도 7월 27일 시점에는 키이우를 향해 급속히 전진하여 키이우에서 서쪽으로 고작 25km 정도 떨어진 코필리우(Kopyliv)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8월 1일 경 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인 블라소프 원수가 끌어다 모은 4개 기갑사단을 직접 지휘하여 키이우 전면에서 러시아군과 독일군의 치열한 전차전이 벌어졌다. 양측의 사투 끝에 독일 제2 기갑군은 포위섬멸당하는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지만 매우 심각한 타격을 입어 263량의 전차만이 남았고 8월 5일에 전선에서 후방으로 철수했다. 이처럼 키이우 초입에서 러시아군과 독일군의 대규모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독일 지휘부가 의도적으로 도시 점령을 늦췄다 볼 근거는 빈약하다. | |||
펠릭스 슈타이너가 이끄는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거리를 매우 빠른 속도로 지나쳤고 그러다보니 전력 재정비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보급도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다.<ref>이는 독일이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진입하며 더욱 심화됐다.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보급로는 엄청나게 길어졌는데, 정작 우크라이나의 도로는 빈약하고, 하필이면 독일이 우크라이나에 진입했을 무렵 라스푸티차가 시작됐다.</ref> '''어느정도로 심각했냐 하면 전차가 철갑탄이 없어서 적 기갑차량을 고폭탄으로 상대해야 했을 정도이며 그 반대의 경우로 고폭탄이 없어 동축기관총 하나로 적 벙커를 부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 |||
또한, 9월 중순부터 독일은 키이우에 대한 공중 투하를 늘렸는데, 이 조치는 독일군의 공격 개시와 동시에 이루어졌다. 9월 14일부터 10월 1일까지 남부집단군은 키이우에 2,243회 출격하여, 박격포 156문, 대전차포 505문, 기관단총과 소총 2,667정, 탄약통 300만 개, 수류탄 4만 2,000발, 의약품 500kg, 식량 113톤을 투하했다. | |||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바로사 작전에 연이은 공세의 마지막에 키이우라는 무리한 목표가 하달되어 공세종말점을 지나치게 되었고, 그 결과 러시아군의 반격으로 오히려 수십km를 밀려나 방어에 급급한 상태에 몰리게 되었다. 이 때문에 독일은 봉기군에게 지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실제로 독일이 다음 공세인 [[아우구스투스의 몰락 작전 (빌레펠트)|아우구스투스의 몰락 작전]]을 펼 수 있었던 것은 키이우 봉기가 끝나고도 무려 3개월이 지난 후였다. | |||
즉 최종 결론을 내리면 독일군에게 키이우 봉기군을 도와줄 여력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 공교롭게도 마침 개입할 의지가 약했던 독일 상층부의 의도와 맞아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봉기 시점에서 독일군의 키이우 해방 가능 여부 또는 뮐러의 의사와 결정에 관한 의문은 독일 측 자료로 명백한 답을 내릴 수 있지만, 그럼에도 전진 중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남아있다. | |||
그것과 별개로 바르바로사 작전 종결 단계에서 구데리안과 독일군의 작전 지휘를 비판하는 견해도 있다. 작전 마무리 단계에서 구데리안은 하나의 방면에 병력을 집중하기 보다는 벨라루스의 중부와 발트 해 방면, 중부의 키이우 방면, 남부의 우만 및 체르카시 방면으로 공세를 분산시켰고, 압도적인 전력을 투입했음에도 러시아군 전선을 완전히 붕괴시키지 못해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전선을 다시 안정화시키는 것을 허용했다는 비판이다. 이 같은 견해에 따르면 독일군의 키이우 방면의 진격은 너무 늦게 이뤄졌고, 동원 가능한 병력 중에서도 일부만이<ref>즉 키이우 공격에 800대의 전차가 아니라 8천대 이상의 동원이 가능했다 추산한다. <del>러시아군 다 죽겠다 이놈들아</del> 지나치게 결과론적이다는 견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실제로도 공세를 분산시킨 결과가 영 신통치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ref> 동원됐다고 비판한다. | |||
=피해= | |||
=평가 및 영향= | |||
=봉기군의 노래= | |||
=여담= | |||
=대중매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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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4일 (토) 23:13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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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우 봉기 Київське повстання Kyiv Uprising Восстание в Киеве Der Aufstand von Kiew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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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중 러시아 점령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봉기 | ||||||||||||||||||
날짜 | 1944년 8월 1일~1944년 10월 2일 | |||||||||||||||||
장소 | 우크라이나 키이우 | |||||||||||||||||
결과 | 봉기진압 | |||||||||||||||||
영향 | 러시아의 키이우 파괴 및 민간인 학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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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우 봉기 기념비 |
개요
블라이스카브카(блискавка, 번개)[2]를 들고있는 우크라이나 국내군 병사 |
1944년 8월 1일부터 1944년 10월 2일까지 나치 러시아 치하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에서 우크라이나 지하국이 일으킨 봉기이다. 독일의 우크라이나 망명정부가 지시한 우크라이나 전역 봉기 계획인 회오리 작전의 일환으로 독일군과 팍트군이 진입하기 전에 키이우를 자력으로 탈환하기 위해 발생했다.
서론
키이우 1944에서 나타난 키이우 봉기 |
1944년 여,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독일군은 러시아군을 격파하며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로 진격해 오고 있었으나 러시아군은 키이우를 요새화하고 독일군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에 우크라이나 망명 정부는 독일군과 팍트군이 키이우에 당도하기 전에 자력으로 우크라이나를 독립시키기 위해 우크라이나 내 지하 저항 운동 조직인 우크라이나 지하국가에게 대규모 봉기를 일으킬 것을 지시했다.
따라서 키이우 봉기의 목표는 첫째로 러시아 국방군을 키이우에서 몰아내는 것이었고, 둘째로 독일군이 키이우를 해방시키기 전에 우크라이나인들의 손으로 키이우를 해방시켜 전후 독일이 소유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이권을 돌려받아 평등한 외교 관계를 수립할 목적이었다. 봉기 초기 우크라이나 지하국가 하의 우크라이나 봉기군은 키이우 중심가 대부분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봉기군은 주요 요충지인 무기고를 탈취하는 데 실패하였고 이로 인해 보급품 부족과 무기 고갈에 시달리며 장기간 봉기를 이끄는 데에 한계를 보이게 된다.
키이우에 도착한 독일군은 전력 재정비 문제로 우크라이나 측의 무전 접촉에도 불구하고 키이우 경계 밖에서 대기만 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독일은 대신에 키이우에 공중 보급을 하지만 대부분 러시아군의 손으로 넘어갔으며 우크라이나 측에 도착한 물품들도 대부분 당장 사용할 수 없는 기호품들과 러시아의 항복을 권유하는 삐라가 전부였다.
9월에 이르자 상황은 극도로 암울해져 봉기군은 하수도로 들어가 저항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도시를 파괴하고 수많은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으며 수류탄과 화염방사기를 동원해 하수도의 봉기군을 소탕했다.
키이우 봉기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발생한 수많은 저항 운동 중 가장 거대하고 중요했던 봉기로 꼽힌다. 비록 결과적으로 실패하였으나 우크라이나를 끝없이 수탈하던 러시아에 대항해 2차 대전 역사상 가장 거대한 봉기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현대 우크라이나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배경
1944년 6월 22일 시작된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독일군의 진격에 동부전선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러시아의 벨라루스 전선군은 궤멸당했고 엄청난 크기의 지역이 다시 독일의 통제하로 들어갔다. 독일군의 진격은 거칠 것이 없어서 곧 우크라이나 영내로 진입하기 시작했고 작전이 끝나갈 즈음엔 키이우 함락도 목전이었다. 키이우 시내에선 독일군의 포성이 들릴 정도였다.
한편, 베를린의 우크라이나 망명정부는 1942년 말부터 '폭풍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우크라이나 내부의 무장봉기를 통해 러시아를 몰아내고 자력 독립하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고 이를 실행할 단체로 우크라이나 지하국가(Українська підпільна держава, 속칭 Упд)를 지원하고 있었다. 1943년 중순부터 계획은 소규모로 실행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러시아의 지배가 강력했기에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다. 그러다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전선이 우크라이나까지 밀려오면서 러시아군이 전면적으로 붕괴되고 독일군에 의한 우크라이나 점령이 눈앞에 다가오자 우크라이나의 자력 해방과, 전쟁에서의 기여분 확보, 그리고 전후 독일과의 평등한 관계 수립을 위해[3] 우크라이나 망명정부는 우크라이나 지하국가에게 대규모 무장봉기를 일으켜 독일군이 우크라이나로 진격하기 전에 우크라이나 각지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내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빈니차, 크리비리흐, 드니프르, 우만, 하르키우 등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에서 7월 말부터 크고 작은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부분 실패로 끝났지만, 서부의 주요 도시 빈니차가 해방되었고 이 밖에 우크라이나 각지에서 작은 도시들이 다시 탈환되는 등 충분히 고무적인 성과가 잇달아 나오고 있었다. 이런 성과들에 힘입어 우크라이나인의 수도 키이우에서도 가장 대규모의 봉기가 준비되고 있었고 Упд의 주력인 우크라이나 국내군(внутрішні війська, вв)을 중심으로 1944년 8월 1일 17시(W-Hour)를 기해 키이우 봉기가 시작되었다.
봉기군의 구성
봉기 발발
시작
진행
러시아군의 진압
9월의 상황
종지부
독일군의 역할에 대한 의문
키이우 서안을 해방한 독일군 오토바이 부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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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권력을 좇아 키이우 모험을 벌인 한 줌의 범죄자들에 대한 진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군사적 관점에서 볼 때 상황은 제국군과 우크라이나인들 모두에게 매우 불리합니다. 그럼에도 독일 부대는 사빈코프의 진격을 물리친 다음 키이우 인근에서 새로운 대규모 공세를 벌이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국군이 키이우에서 러시아군을 분쇄하고 우크라이나인들을 위해 도시를 해방시키는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귀하께 장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반나치 우크라이나인들을 효과적으로 돕는 최선의 방법일 것입니다. 1944년 8월 22일 바실 비시바니의 물자 투하 요청에 대한 헤르만 뮐러의 답변 |
독일군은 봉기 기간 동안 키이우 봉기군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이는 근본적으로 독일이 우크라이나를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크라이나는 독일의 동방주로서 일종의 위성국이었는데, 직전에 내전이 일어나면서 스코로파즈키가 축출되고 공화국 정부가 들어섰다. 물론, 공화국 정부가 독일과의 동맹관계를 재확인하긴 했다만 이런 상황에서 '자력으로 키이우를 해방한 이후 독일과 평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하겠다.'는 그리 고깝게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더불어서 키이우 동쪽을 포함한 드니프로 강 동안은 친러 색이 짙은 곳으로 러시아군의 점령 기간동안 러시아에 협력한 이들이 많은 곳이었다.[4] 적어도 드니프로 강 서안은 반러 성향이 짙고 자유 우크라이나군 합류자도 많았지만 이런 판국에 독일이 그들을 지원해주기는 쉽지 않았다. 다만 이런 독일 정부와 군부 상층부의 태도와는 별개로 독일의 공군이 키이우 봉기군에게 물자를 지원했고, 소티는 생각보다 많았지만(2,000소티) 아쉽게도 봉기군에게 직접 전달된 물건은 얼마 없었다.
물론 여러 자료를 확인해볼 때 실제로 당시 독일군이 키이우에 진격하는 것이 군사적으로도 불가능 했음이 사실이다. 독일군이 언제든지 키이우를 들이칠 수 있을 것처럼 압도적으로 보였던 것은 사실은 상당부분 빌헬름 3세의 허세였고, 실제로는 구데리안은 키이우 봉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독일군에 키이우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하달했지만 재편성된 러시아군의 파쇄공격[5]에 오히려 격파당했음이 드러났다. 당시 전세는 이미 독일에게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지만, 독일 제국군은 키이우 근교에서 공세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독일군을 상대하던 러시아군 사령관은 러시아 최고의 방어전 사령관인 안드레이 블라소프였다. 그는 무너진 나치러시아의 동부전선을 재건했고, 우크라이나 인근에서 독일군에게 역습을 날려 동부전선의 수호자로 불렸다. 나치러시아의 생명연장에 지대한 공을 세운 승리였지만 우크라이나에게 있어서는 크나큰 아쉬움으로 남을 지점이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지 약 1달 정도 지난 1944년 7월 22일 시점에서 키이우 방면의 선봉인 독일 제2 기갑군은 810량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제2 기갑군은 적어도 7월 27일 시점에는 키이우를 향해 급속히 전진하여 키이우에서 서쪽으로 고작 25km 정도 떨어진 코필리우(Kopyliv)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8월 1일 경 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인 블라소프 원수가 끌어다 모은 4개 기갑사단을 직접 지휘하여 키이우 전면에서 러시아군과 독일군의 치열한 전차전이 벌어졌다. 양측의 사투 끝에 독일 제2 기갑군은 포위섬멸당하는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지만 매우 심각한 타격을 입어 263량의 전차만이 남았고 8월 5일에 전선에서 후방으로 철수했다. 이처럼 키이우 초입에서 러시아군과 독일군의 대규모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독일 지휘부가 의도적으로 도시 점령을 늦췄다 볼 근거는 빈약하다.
펠릭스 슈타이너가 이끄는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거리를 매우 빠른 속도로 지나쳤고 그러다보니 전력 재정비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보급도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다.[6] 어느정도로 심각했냐 하면 전차가 철갑탄이 없어서 적 기갑차량을 고폭탄으로 상대해야 했을 정도이며 그 반대의 경우로 고폭탄이 없어 동축기관총 하나로 적 벙커를 부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9월 중순부터 독일은 키이우에 대한 공중 투하를 늘렸는데, 이 조치는 독일군의 공격 개시와 동시에 이루어졌다. 9월 14일부터 10월 1일까지 남부집단군은 키이우에 2,243회 출격하여, 박격포 156문, 대전차포 505문, 기관단총과 소총 2,667정, 탄약통 300만 개, 수류탄 4만 2,000발, 의약품 500kg, 식량 113톤을 투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바로사 작전에 연이은 공세의 마지막에 키이우라는 무리한 목표가 하달되어 공세종말점을 지나치게 되었고, 그 결과 러시아군의 반격으로 오히려 수십km를 밀려나 방어에 급급한 상태에 몰리게 되었다. 이 때문에 독일은 봉기군에게 지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실제로 독일이 다음 공세인 아우구스투스의 몰락 작전을 펼 수 있었던 것은 키이우 봉기가 끝나고도 무려 3개월이 지난 후였다.
즉 최종 결론을 내리면 독일군에게 키이우 봉기군을 도와줄 여력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 공교롭게도 마침 개입할 의지가 약했던 독일 상층부의 의도와 맞아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봉기 시점에서 독일군의 키이우 해방 가능 여부 또는 뮐러의 의사와 결정에 관한 의문은 독일 측 자료로 명백한 답을 내릴 수 있지만, 그럼에도 전진 중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것과 별개로 바르바로사 작전 종결 단계에서 구데리안과 독일군의 작전 지휘를 비판하는 견해도 있다. 작전 마무리 단계에서 구데리안은 하나의 방면에 병력을 집중하기 보다는 벨라루스의 중부와 발트 해 방면, 중부의 키이우 방면, 남부의 우만 및 체르카시 방면으로 공세를 분산시켰고, 압도적인 전력을 투입했음에도 러시아군 전선을 완전히 붕괴시키지 못해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전선을 다시 안정화시키는 것을 허용했다는 비판이다. 이 같은 견해에 따르면 독일군의 키이우 방면의 진격은 너무 늦게 이뤄졌고, 동원 가능한 병력 중에서도 일부만이[7] 동원됐다고 비판한다.
피해
평가 및 영향
봉기군의 노래
여담
대중매체
둘러보기
- ↑ 12.14~
- ↑ Mp 40의 우크라이나 카피판
- ↑ 당시 독일은 우크라이나의 여러 이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실상 위성국에 가까웠다.
- ↑ 실제로 러시아군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발트 지역을 점령한 이후 이곳에서 수백만 단위의 병력을 동원했다.
- ↑ 기동방어의 일종으로, 적군이 공격준비를 마치기 전에 선제공격으로 격파함으로써 적군의 공세역량을 분쇄하는 것이다.
- ↑ 이는 독일이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진입하며 더욱 심화됐다.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보급로는 엄청나게 길어졌는데, 정작 우크라이나의 도로는 빈약하고, 하필이면 독일이 우크라이나에 진입했을 무렵 라스푸티차가 시작됐다.
- ↑ 즉 키이우 공격에 800대의 전차가 아니라 8천대 이상의 동원이 가능했다 추산한다.
러시아군 다 죽겠다 이놈들아지나치게 결과론적이다는 견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실제로도 공세를 분산시킨 결과가 영 신통치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