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unist 1968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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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26A9DF; color: #fff;" | 경력 | ! style="background: #26A9DF; color: #fff;" | 경력 | ||
| 민주사회를 위한 | | 경성 제1대학교 총학생회장<br>민주사회를 위한 대학생모임 회장<br>'''제9~10대 남포광역시장'''<br>한인사회당 선거대책위원장<br>남포국립대학교 법학과 교수<br>제13회 지방선거 남포광역시장 후보 {{small|(무소속)}}<br>제16회 대통령 선거 야권 단일후보 {{small|(등록 무효)}}<br>버지니아 주 변호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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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공화국 (리좀)|대한공화국]]의 변호사 출신 정치인. 과거 좌익 계열의 아이돌로 평가받기도 하였으나, 정치적 실수와 줄타기 실패로 인해 현재는 재야 인사에 머물고 있다. | [[대한공화국 (리좀)|대한공화국]]의 변호사 출신 정치인. 과거 좌익 계열의 아이돌로 평가받기도 하였으나, 정치적 실수와 줄타기 실패로 인해 현재는 재야 인사에 머물고 있다. | ||
== 생애 == | == 생애 == | ||
1964년 | 1964년 평양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박정희 (리좀)|박정희]]의 지지자였으며 공화당의 열혈 당원이었다고 한다. 박만영 역시 보수주의자로 자라났으나, 대학생 시절 친구가 구해다준 정치 서적을 읽고 신좌파 사상에 경도되어 노동운동을 시작한다. 경성 제1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한 후 남포의 공단에 위장취업을 하고, 좌익 성향 유인물을 뿌리다가 경찰에 체포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래도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는 좋았는지 1987년 경성 제1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어 '''[[1987년 노동자대투쟁 (리좀)|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주도하여 유명해졌고, 졸업하기 직전 [[민주사회를 위한 대학생 모임 (리좀)|민주사회를 위한 대학생 모임]]을 설립하여 초대 회장이 된다. | ||
1989년, 진지한 법학공부를 하길 원했던 부모님의 등쌀에 떠밀려 미국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 여러 견문을 쌓은 그는 노선을 다소 온건화하고, 3년만에 법학박사(JD) 학위를 취득한다. 특히 당시 미국을 뒤흔들던 앨 고어와 빌 클린턴의 "제3의 길" 운동에 영향을 받았다. 그럼에도 좌익적인 성향은 남아있어, 귀국 후 바로 변호사 개업을 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인권변호사가 되어 관북권에서 유명한 재야 노동운동가 겸 변호사가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조순 (리좀)|조순]]을 지지한 인사 중 한명이었는데, 특히 1995년 대선을 앞두고 한인사회당 전당대회에서 고건을 지지하는 장문의 연설을 해 주목 받았다. | |||
그를 일찍이 주목한 사회당 지도부는 [[제9회 지방공직자 동시선거 (리좀)|1998년 지방선거]]의 남포광역시장 선거에 그를 전략공천했다. 당시 남포의 상황은 [[이휘령 (리좀)|이휘령]] 시장이 공천헌금 살포 사건으로 컷오프를 당하고 [[남포시민연합 (리좀)|남포시민연합]]이라는 지역정당을 만들어 독자출마를 감행한 가운데 청년좌파 세력의 [[청년진보당 (리좀)|청년진보당]], 공단 지역에서 인기가 높은 대한공산당, 급진좌익 성향의 [[노동자혁명당 (리좀)|노동자혁명당]] 등 다수의 좌익 성향 정당이 난립하던 구도였다. 이휘령 시장이 사회당의 조직을 들고 날랐기 때문에 당시 사회당은 전국적으로 높은 지지도에도 불구하고 남포에서 승리하는 것이 불가능해보였다. 그러나, 청년 정치가 박만영이 공천되며 청년진보당으로 이탈했던 사회당 20대 지지층이 결집하였으며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거세진 이휘령 시장의 사법리스크로 박만영의 지지율이 치솟았다. 선거 결과 모두의 예상을 깨고 '''52% 대 48%'''라는 여유로운 표차로 박만영이 이휘령 시장을 꺾으며 그는 다시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다. | |||
그는 시장으로 "제3의 길"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 기업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신산업에 투자하는 한편 노동조합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여 노동자와 기업인 모두에게서 지지를 받았다. 또한 공단의 쇠퇴와 동남아시아 발 외환위기로 위기에 몰려있던 남포의 구도심 상당 부분을 재개발해 남포가 오늘날과 같이 대한공화국에서 가장 잘 사는 도시 중 하나가 되도록 만들었다. 재선을 앞둔 박만영 시장의 지지율은 80%대에 육박했고 그는 2002년 지방선거에서 재선하는데에 성공한다. | |||
재임 2기부터는 박만영이 2007년 대선에 도전해야한다는 여론이 높아진 상태였기에 시정보다 중앙정치에 더 관심을 가졌다. [[노무현 (리좀)|노무현]] 대통령의 저조한 인기 때문에 꽤 유력한 후보자로 여겨졌고 2005년 여론조사에서도 후보자 적합도 사회당 내 1위(19%), 양자대결 시 박근혜에 경합열세(53% 대 47%), 이명박에 경합(50.5% 대 49.5%), 이회창에 경합우세(48.5% 대 51.5%)를 보이며 경쟁력 있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남포시장으로서도 남포-구성 고속도로 통과, KTX 남포역 설치 등을 주도하며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도 이 점을 고려해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정작 2007년 대선이 다가오자 안정적이고 중도적인 리더십을 내세운 [[고건 (리좀)|고건]]의 지지율이 상승하며 간발의 차이로 경선에서 패배했다. | |||
뒤이은 [[제32회 국민원 의원 총선거 (리좀)|제32회 국민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종로 출마설 등이 제기되었으나 본인은 출마하지 않고 선거대책위원장직을 맡았다. 하지만 이는 최악의 악수가 되었는데 인기가 높은 이명박 총리 및 박근혜 대통령을 상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였던데다가 "무능한 300석을 들고 있기보다는 똘똘한 100석을 들고가는게 더 낫다"라는 최악의 망언을 하며 진보 유권자들의 투표 의욕이 급격하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이 선거에서 사회당은 종전 의석의 '''200석'''을 잃고 겨우 93석(...)만을 건지는 대참패를 당하고, 이 책임을 지고 박만영은 모든 당내 직책을 사퇴한다. | |||
이후 사회당 내에서는 사실상 내논 자식이 되었고, 32회 총선 이후 사회당이 노무현을 비판하자 [[유시민 (리좀)|유시민]], [[문재인 (리좀)|문재인]] 등이 국민참여당을 창당하였을 때에도 타이밍을 놓쳐 참여하지 못했다. 오히려 "노무현은 경제적으로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소리를 해 유시민 대표의 분노를 키웠고, 2010년 평양광역시장에 출마해 재기하려 했으나 정작 경선 시작 전부터 사회당 지도부에 의해 컷오프된다. 박만영은 2010년 지방선거 직후 사회당이 오만과 독선의 정당이 되었다며 탈당을 선언,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를 지지선언하는 끔찍한 정치적 판단을 내린다. 이 때문에 그는 사회당 내에 남아있던 최소한의 기반마저 잃고 이도 저도 아닌 지역 정치인으로 머무르게 된다. | |||
그나마 남포 내에서는 영향력이 건재했고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그가 무소속으로 남포광역시장에 출마한다면 당선 가능성이 높다는 여론조사가 다수 발표되었으나, 정작 선거 당일에는 1차 투표에서 겨우 '''18%(...)'''밖에 못받은데다, 거의 지뢰 수준의 후보로 평가받던 [[손석형 (리좀)|손석형]] 공산당 후보가 노조의 지지 속에서 깜짝 1위를 하고 유력 후보 [[김대호 (리좀)|김대호]] 사회당 시의원이 2위를 하며 결선에 진출하지조차 못했다. 이는 사실상 박만영 정치 인생의 종결을 의미했으며 2014년 후 박만영은 미국으로 떠나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에서 변호사로 일하며 간간히 TV 조선의 패널로 나오는 비참한 신세가 된다. | |||
2016년, [[안철수 (리좀)|안철수]]의 지지를 선언하고 국민의당 창당에 관여하였으며 워싱턴 D.C. 한인회 국민의당 후원회장의 자리를 받아낸다. 박만영 시장은 개인적으로 연이 있는 남포 총선 차출이나 법무부장관 임명 등을 바라고 있었으나 안철수는 그에게 관심이 없었고, 낙동강 오리알이 된 박만영은 2018년 바른정당과의 합당에 반대한다는 핑계로 국민의당을 탈당한다. 2022년에는 느닷없이 [[제16회 대통령 선거 (리좀)|제16회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고 야권 단일후보로 선출되기도 했으나 이 단일 경선 자체가 박만영 후보의 극소수 지지자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라 의미가 없었고, 설상 가상으로 후보 등록에 필요한 서명도 충분히 받아내지 못해 아예 후보 등록 무효가 된다. 2023년, 그는 자신의 SNS를 통해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 |||
최근에는 그가 펜앤드마이크, 신의한수, 윤루카스 등 극우 성향 유튜버들을 구독하고 있는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주류 정치권에서 10년 넘게 당하고만 산것에 원한을 품어 [[윤석열 (리좀)|윤석열]]을 지지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국민의힘이 최근 세를 키워나가고 있는 남포에 국민의힘 혹은 우리공화당 소속으로 참사원 의원이나 시장 후보로 출마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 |||
== 어록 == | == 어록 == | ||
{{인용문|'''무능한 300석을 얻느니 똘똘한 100석이 더 낫다.'''|[[제32회 국민원 의원 총선거 (리좀)|2007년 총선]] 선거대책위원장 재직 中. 이 선거에서 한인사회당은 겨우 93석만을 건지는 역대급 대참패를 당하고 만다.}} | {{인용문|'''무능한 300석을 얻느니 똘똘한 100석이 더 낫다.'''|[[제32회 국민원 의원 총선거 (리좀)|2007년 총선]] 선거대책위원장 재직 中. 이 선거에서 한인사회당은 겨우 93석만을 건지는 역대급 대참패를 당하고 만다.}} | ||
{{ | == 저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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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color: #fff; background: #26A9DF;" | 제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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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 | |||
| 럭스미디어 | |||
| 박만영의 혼이 담긴 남포 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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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 |||
| 행복에너지 | |||
| 아! 대한공화국: 박만영이 국민께 드리는 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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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 | |||
| 기파랑 | |||
| 왜 나는 박근혜를 선택했나 (공저)<ref>한광옥, 장성민, 박주선과의 공저.</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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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소속 정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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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style="color: #fff; background: #26A9DF;" | 소속 | |||
! style="color: #fff; background: #26A9DF;" | 기간 | |||
! style="color: #fff; background: #26A9DF;"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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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혁명당 (리좀)}} | |||
| 1983 - 1985 | |||
| 입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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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소속 (리좀)}} | |||
| 1985 - 1997 | |||
| 노선 차이로 탈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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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사회당 (리좀)}} | |||
| 1997 - 2010 | |||
| 정계 입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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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소속 (리좀)}} | |||
| 2010 - 2016 | |||
| 탈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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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 2018 | |||
| 창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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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 - | |||
| 탈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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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 이력 == | == 선거 이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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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2" | {{한인사회당 (리좀)}} | | rowspan="2" | {{한인사회당 (리좀)}} | ||
| '''327,347 (52.31%)''' | | '''327,347 (52.3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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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선''' | | '''초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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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 | | 2014 | ||
| [[제13회 지방공직자 동시선거 (리좀)|제13회 지방공직자 동시선거]] | | [[제13회 지방공직자 동시선거 (리좀)|제13회 지방공직자 동시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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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2,740 (18.93%) | | 132,740 (18.93%) | ||
| 낙선 (3위) | | 낙선 (3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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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담 == | |||
* 2020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지지선언하였다. 그의 아들 [[박찬원 (리좀)|박찬원]](미국 이름 케빈 팍)은 2021년 1월 6일 국회의사당 폭동 사태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박만영 본인은 도널드 트럼프의 부정선거 음모론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조 바이든이 적법한 당선인이라고 인정하였다. 하지만 2022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한인회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정계 은퇴 이후 쓸쓸해져 할게 없었는지 집에서 매일 우파 유튜버를 시청하여, 사실상 극우 트럼피스트나 다름이 없게 되었다고 한다. | |||
* 무신론자였으나 연이은 선거 고배 이후 불교로 개종하였다. | |||
== 둘러보기 == | |||
{{대한공화국의 광역자치단체장(민선 10기) (리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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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공화국의 광역자치단체장(민선 9기) (리좀)}} |
2023년 9월 19일 (화) 19:20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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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0대 남포광역시장 박만영 朴滿永 | Park Man-yeo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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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4년 5월 29일 (58세) |
평양광역시 중구 만수동 | |
국적 | 대한공화국 | 미국[1] |
사저 | 미합중국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남포광역시 온천군 금곡리 20-5 |
현직 |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공동이사장 미국 버지니아주 변호사 |
재임기간 | 제9-10대 남포광역시장 |
1998년 7월 1일 ~ 2006년 6월 30일 | |
링크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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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공화국의 변호사 출신 정치인. 과거 좌익 계열의 아이돌로 평가받기도 하였으나, 정치적 실수와 줄타기 실패로 인해 현재는 재야 인사에 머물고 있다.
생애
1964년 평양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박정희의 지지자였으며 공화당의 열혈 당원이었다고 한다. 박만영 역시 보수주의자로 자라났으나, 대학생 시절 친구가 구해다준 정치 서적을 읽고 신좌파 사상에 경도되어 노동운동을 시작한다. 경성 제1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한 후 남포의 공단에 위장취업을 하고, 좌익 성향 유인물을 뿌리다가 경찰에 체포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래도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는 좋았는지 1987년 경성 제1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어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주도하여 유명해졌고, 졸업하기 직전 민주사회를 위한 대학생 모임을 설립하여 초대 회장이 된다.
1989년, 진지한 법학공부를 하길 원했던 부모님의 등쌀에 떠밀려 미국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 여러 견문을 쌓은 그는 노선을 다소 온건화하고, 3년만에 법학박사(JD) 학위를 취득한다. 특히 당시 미국을 뒤흔들던 앨 고어와 빌 클린턴의 "제3의 길" 운동에 영향을 받았다. 그럼에도 좌익적인 성향은 남아있어, 귀국 후 바로 변호사 개업을 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인권변호사가 되어 관북권에서 유명한 재야 노동운동가 겸 변호사가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조순을 지지한 인사 중 한명이었는데, 특히 1995년 대선을 앞두고 한인사회당 전당대회에서 고건을 지지하는 장문의 연설을 해 주목 받았다.
그를 일찍이 주목한 사회당 지도부는 1998년 지방선거의 남포광역시장 선거에 그를 전략공천했다. 당시 남포의 상황은 이휘령 시장이 공천헌금 살포 사건으로 컷오프를 당하고 남포시민연합이라는 지역정당을 만들어 독자출마를 감행한 가운데 청년좌파 세력의 청년진보당, 공단 지역에서 인기가 높은 대한공산당, 급진좌익 성향의 노동자혁명당 등 다수의 좌익 성향 정당이 난립하던 구도였다. 이휘령 시장이 사회당의 조직을 들고 날랐기 때문에 당시 사회당은 전국적으로 높은 지지도에도 불구하고 남포에서 승리하는 것이 불가능해보였다. 그러나, 청년 정치가 박만영이 공천되며 청년진보당으로 이탈했던 사회당 20대 지지층이 결집하였으며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거세진 이휘령 시장의 사법리스크로 박만영의 지지율이 치솟았다. 선거 결과 모두의 예상을 깨고 52% 대 48%라는 여유로운 표차로 박만영이 이휘령 시장을 꺾으며 그는 다시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다.
그는 시장으로 "제3의 길"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 기업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신산업에 투자하는 한편 노동조합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여 노동자와 기업인 모두에게서 지지를 받았다. 또한 공단의 쇠퇴와 동남아시아 발 외환위기로 위기에 몰려있던 남포의 구도심 상당 부분을 재개발해 남포가 오늘날과 같이 대한공화국에서 가장 잘 사는 도시 중 하나가 되도록 만들었다. 재선을 앞둔 박만영 시장의 지지율은 80%대에 육박했고 그는 2002년 지방선거에서 재선하는데에 성공한다.
재임 2기부터는 박만영이 2007년 대선에 도전해야한다는 여론이 높아진 상태였기에 시정보다 중앙정치에 더 관심을 가졌다. 노무현 대통령의 저조한 인기 때문에 꽤 유력한 후보자로 여겨졌고 2005년 여론조사에서도 후보자 적합도 사회당 내 1위(19%), 양자대결 시 박근혜에 경합열세(53% 대 47%), 이명박에 경합(50.5% 대 49.5%), 이회창에 경합우세(48.5% 대 51.5%)를 보이며 경쟁력 있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남포시장으로서도 남포-구성 고속도로 통과, KTX 남포역 설치 등을 주도하며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도 이 점을 고려해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정작 2007년 대선이 다가오자 안정적이고 중도적인 리더십을 내세운 고건의 지지율이 상승하며 간발의 차이로 경선에서 패배했다.
뒤이은 제32회 국민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종로 출마설 등이 제기되었으나 본인은 출마하지 않고 선거대책위원장직을 맡았다. 하지만 이는 최악의 악수가 되었는데 인기가 높은 이명박 총리 및 박근혜 대통령을 상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였던데다가 "무능한 300석을 들고 있기보다는 똘똘한 100석을 들고가는게 더 낫다"라는 최악의 망언을 하며 진보 유권자들의 투표 의욕이 급격하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이 선거에서 사회당은 종전 의석의 200석을 잃고 겨우 93석(...)만을 건지는 대참패를 당하고, 이 책임을 지고 박만영은 모든 당내 직책을 사퇴한다.
이후 사회당 내에서는 사실상 내논 자식이 되었고, 32회 총선 이후 사회당이 노무현을 비판하자 유시민, 문재인 등이 국민참여당을 창당하였을 때에도 타이밍을 놓쳐 참여하지 못했다. 오히려 "노무현은 경제적으로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소리를 해 유시민 대표의 분노를 키웠고, 2010년 평양광역시장에 출마해 재기하려 했으나 정작 경선 시작 전부터 사회당 지도부에 의해 컷오프된다. 박만영은 2010년 지방선거 직후 사회당이 오만과 독선의 정당이 되었다며 탈당을 선언,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를 지지선언하는 끔찍한 정치적 판단을 내린다. 이 때문에 그는 사회당 내에 남아있던 최소한의 기반마저 잃고 이도 저도 아닌 지역 정치인으로 머무르게 된다.
그나마 남포 내에서는 영향력이 건재했고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그가 무소속으로 남포광역시장에 출마한다면 당선 가능성이 높다는 여론조사가 다수 발표되었으나, 정작 선거 당일에는 1차 투표에서 겨우 18%(...)밖에 못받은데다, 거의 지뢰 수준의 후보로 평가받던 손석형 공산당 후보가 노조의 지지 속에서 깜짝 1위를 하고 유력 후보 김대호 사회당 시의원이 2위를 하며 결선에 진출하지조차 못했다. 이는 사실상 박만영 정치 인생의 종결을 의미했으며 2014년 후 박만영은 미국으로 떠나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에서 변호사로 일하며 간간히 TV 조선의 패널로 나오는 비참한 신세가 된다.
2016년, 안철수의 지지를 선언하고 국민의당 창당에 관여하였으며 워싱턴 D.C. 한인회 국민의당 후원회장의 자리를 받아낸다. 박만영 시장은 개인적으로 연이 있는 남포 총선 차출이나 법무부장관 임명 등을 바라고 있었으나 안철수는 그에게 관심이 없었고, 낙동강 오리알이 된 박만영은 2018년 바른정당과의 합당에 반대한다는 핑계로 국민의당을 탈당한다. 2022년에는 느닷없이 제16회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고 야권 단일후보로 선출되기도 했으나 이 단일 경선 자체가 박만영 후보의 극소수 지지자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라 의미가 없었고, 설상 가상으로 후보 등록에 필요한 서명도 충분히 받아내지 못해 아예 후보 등록 무효가 된다. 2023년, 그는 자신의 SNS를 통해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최근에는 그가 펜앤드마이크, 신의한수, 윤루카스 등 극우 성향 유튜버들을 구독하고 있는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주류 정치권에서 10년 넘게 당하고만 산것에 원한을 품어 윤석열을 지지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국민의힘이 최근 세를 키워나가고 있는 남포에 국민의힘 혹은 우리공화당 소속으로 참사원 의원이나 시장 후보로 출마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어록
무능한 300석을 얻느니 똘똘한 100석이 더 낫다. 2007년 총선 선거대책위원장 재직 中. 이 선거에서 한인사회당은 겨우 93석만을 건지는 역대급 대참패를 당하고 만다. |
저서
연도 | 출판사 | 제목 |
---|---|---|
2002 | 럭스미디어 | 박만영의 혼이 담긴 남포 이야기 |
2005 | 행복에너지 | 아! 대한공화국: 박만영이 국민께 드리는 편지 |
2012 | 기파랑 | 왜 나는 박근혜를 선택했나 (공저)[2] |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83 - 1985 | 입당 | |
무소속 | 1985 - 1997 | 노선 차이로 탈당 |
1997 - 2010 | 정계 입문 | |
무소속 | 2010 - 2016 | 탈당 |
2016 - 2018 | 창당 | |
무소속 | 2018 - | 탈당 |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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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 제9회 지방공직자 동시선거 | 남포광역시장 | 327,347 (52.31%) | 당선 (1위) | 초선 | |
2002 | 제10회 지방공직자 동시선거 | 000,000 (00.00%) | 재선 | |||
2014 | 제13회 지방공직자 동시선거 | 무소속 | 132,740 (18.93%) | 낙선 (3위) |
여담
- 2020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지지선언하였다. 그의 아들 박찬원(미국 이름 케빈 팍)은 2021년 1월 6일 국회의사당 폭동 사태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박만영 본인은 도널드 트럼프의 부정선거 음모론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조 바이든이 적법한 당선인이라고 인정하였다. 하지만 2022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한인회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정계 은퇴 이후 쓸쓸해져 할게 없었는지 집에서 매일 우파 유튜버를 시청하여, 사실상 극우 트럼피스트나 다름이 없게 되었다고 한다.
- 무신론자였으나 연이은 선거 고배 이후 불교로 개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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