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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 2차 대전 직전 === | === 1920년대 ~ 2차 대전 직전 === | ||
* | * '''한국''' | ||
** ''' | ** '''1920-1936''' - 먼저 공격했던 일본에게 전쟁배상금을 받아낸것은 물론, 대마도는 조선땅이라는 가사를 실현시켜 버린 한국은 극강의 애국주의 열풍에 빠진다. 허나 이와는 별개로 호남을 비롯한 영남권이 초토화된 상태였기에 조선은 일본에게 뜯어낸 배상금의 대부분을 경제발전에 쏟아부어야 했다.<ref>여담으로 이때 이완용이 한국으로 소환당해 [[반제국유지법]]에 의해 사형판결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ref> 또한 배상금 운용 과정에서의 횡령 관련한 논란으로 이동녕의 거국내각이 붕괴해버리고 한국독립당이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우파독립당<ref>공식 당명은 독립촉성회</ref>과 당시 당내 청년진보의 거두였던 조소앙으로 대표되는 좌파독립당<ref>공식 당명은 대한사회당</ref>으로 분당되는 정치 혼란속에 치뤄진 중추원선에서 본래 친일성격의 정당인 국민당이 어부지리로 집권해 당내 외교적 중립노선을 표명했던 윤치호를 총리로 내세웠음에도 전국민적 반발로 인해 1년이 안되어 의회를 해산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혼란이 지속되었다.<ref>이후 의회를 해산한 국민당은 우파독립당과 좌파독립당에게 밀려 240석 중 30석 조차 얻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고, 차차기 선거에서는 10석대로 완전히 쪼글아 들어 결국 해산의 길을 밟게된다.</ref> 이외에도 간도에 잔존한 한인문제와, 대마도 내 일본인들의 폭동들로 상당히 휘청거리긴 했으나, 결론적으로는 36년 대공황까지는 나름 일본 배상금을 통한 경제발전과 더불어 "효제평안"이라 불리는 평화의 시대로서 그럭저럭 잘굴러 갔다. 정치계 또한 우파독립당과 좌파독립당이 양강체제를 이루고 기타 군소정당이 캐스팅보터가 되는 식으로 굴러가며 이렇다 할 큰 논란 없이 민주주의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경제 또한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대외적으로는 여러 경제 조약으로 독일과 더욱 돈독한 관계를 맺게 되고,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마인드로 협상국의 캐나다 망명정부와도 어느정도 관계를 회복하는 등의 성과가 있었다만, 성장하는 동북아시아의 공산주의를 막지 못한 것은 앞으로 대한제국의 미래를 크게 흔들게 된다. | ||
** '''1936-1939''' - 그렇게 대망의 1936년의 새해가 밝아왔다. 설날 이후 10일만인 2월 3일 월요일, 베를린이 무너졌다. 시장의 불안정이 지속되자 모든 사람이 모든 주식을 팔아치우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주식시장은 월요일에 개장하자마자 파산했다. 이를 "검은 월요일"이라 부르고, 독일 경제와 깊게 연관돼있던 한국의 경제 또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월요일 장이 폐장하기 전까지 한국종합주가지수는 35% 이상 하락했으며, 다음 날인 화요일에는 개장하기 한참 전부터 제국거래소가 위치해있는 한성부 용산방에 좀처럼 볼 수 없던 수의 군중이 모여들었고, 한국의 주식시장 또한 파산했다. 이 당시 총리였던 이승만과 경제부장관을 비롯해 내각의 대부분이 회담을 위해 태국에 가있었고, 이는 경제위기에 대한 즉각적인 조치를 힘들게 만들었다. 수요일에 한성에 도착한 내각은 즉시 은행을 폐쇄시켜 예금 인출을 막았지만 변화는 없었고, 검은 화요일, 검은 수요일 등이 이어져 검은 일주일이 완성되었다. 경제침체로 좋지않던 이승만에 대한 지지도는 이번 사건으로 완전히 폭락했다. | |||
* '''일본''' - 전쟁 패전 이후 정치계에서 군부는 완전히 배제되었다. 이는 정치인들이 전쟁 패전의 책임을 군부에게 돌려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함이기도 했고, 실제로도 패전의 이유 중에는 군부의 실책이 가장 컸기 때문이였다. 전쟁 이후 최초로 개최된 중원선의 결과로 기요우라 게이고가 총리에 올랐지만 그는 자신의 국가에 부과된 막대한 배상금을 다룰줄을 몰랐고, 결국 일본의 경제는 보이지 않는 구렁 속으로 빠지게 된다. 이는 무수한 공산주의자 탄생을 불러왔고 그들은 일본공산당을 창당했다. 중의원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 치안유지법을 통과시켰지만 그것은 단 하루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이내 이들은 이를 막기 위해 치안유지법을 통과시켰지만 그것은 단 하루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결국 차기 선거에서 집권이 확실해진 의회 내 공산당은 내각에게 중의원의 해산을 요구하게된다. 허나 여전히 근자감이 넘쳤던 내각의 거부로 중의원은 해산되지 않았고, 결국 공산당은 내전을 일으키게된다. 1년이 가까이 되는 치열한 내전 끝에 공산당이 오사카에 입성하며 내전은 끝나게 된다. 오사카에서 끝까지 저항하던 의회와 천황은 끝내 패배하고 일본에서 캐나다로 망명을 떠나 임시정부를 수립, 일본에는 인민공화국이 들어섰다. 그 이후 일본은 안정기에 들어서는데, 정부에서 단행한 화폐개혁으로 초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고, 오키나와에서 일어난 독립 시위도 협상을 통해 잠재우는 성과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정부는 제1차 5개년 계획을 세워 본격적으로 경제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 |||
** '''중국''' - 카라의 중국과 별차이가 없다. 약간 다른점이라면 봉천군벌이 한국의 지원을 받는다는 정도. | ** '''중국''' - 카라의 중국과 별차이가 없다. 약간 다른점이라면 봉천군벌이 한국의 지원을 받는다는 정도. |
2022년 10월 31일 (월) 11:1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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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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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 1914
1914년 일본이 영일동맹에 의거하여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를 해 협상국 측으로 참전했다. 이때 한국은 중립을 선언했다. 일본이 독일의 동아시아 식민지를 대거 점령한다.
- 1915
1915년에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 1916
일본 해군이 한국의 함대가 일본의 영해를 침범한 것을 포착(일본 해군의 주장)하고 수차례 경고했으나 영해에서 나가지 않았고, 이에 일본 해군이 포격을 감행해 한국 구축함 1척이 침몰한다. 이에 한국 해군이 반격해 일본의 어느 경순양함 2척이 큰 피해를 입는다. 일본에서는 한국에 "자신의 정당한 대응에 불법적으로 반격한 한국은 피해금을 보상하라"고 요구했고, 한국은 "우리 해군이 일본 영해를 침범하지 않았는데 포격한 일본 해군이 잘못된 것이므로 일본이 우리에 보상해야된다"라며 맞불을 놓았고, 원래부터 한국을 노리던 일본은 급발진하여 1916년 6월 25일, 선전포고한다.
이후 일본은 대마도 해전과 제주도 해전에서 연달아 승리하며 한국 해군의 주요 전력을 격파시켜 해상 주도권을 획득했고, 동래부 해안 지역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펼쳐 치열한 전투 끝에 동래부 일대를 완전히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대한제국 황실과 국민적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완용 내각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한성은 안전합니다"라는 말을 한 뒤 황실을 데리고 평양으로 도피해버린다. 그 사이 일본은 전쟁 발발 4개월이 안되어 대구 및 호남 일부를 점령함과 동시에 대한제국 내각에 화친을 제안한다. 내용은 한국이 일본제국을 형의 나라로 여기게 하고 제국의 지위를 박탈시키는, 사실상의 괴뢰국이 되라는 조건이였다. 이에 이완용 내각은 적극적으로 화친에 나섰으나, 화친조약 직전 황제 직권으로 이완용을 총리대신에서 해임해버리고, 한독당-국민당 내 반이완용계를 규합하여 이동녕 중심의 거국내각을 구성한다. 이후 이완용은 평양에서 탈출하여 원산을 통해 동래에 도착, 일본이 11월 설립한 괴뢰정부인 대한민국 유신정부의 주석으로 취임한다. 또한 내각은 황실의 강력한 지지아래 12월 21일, 다시 한성으로 돌아온다.
- 1917
1916년 안에 전쟁을 끝낸다는 일본 내각의 계획이 실패하여 경기도 남부-강원도를 중심으로 전선이 교착되면서 점점 일본은 초조해진다. 이에 당황한 일본 정부는 한단계 낮은 조건으로 화친을 제안하나, 내각은 그에 대한 회신도 하지 않았고, 중추원에서는 독일제국 중심의 동맹국에 가입안을 가결시킨다. 이에 러시아는 동아시아 전선 개입을 검토했으나 유럽에 집중해야한다는 이유로 개전하지는 않았다. 그 이후 지속해서 실질적인 전선 변화 없이 고착상태가 계속되자 군부에서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러시아에게 차라리 대한제국을 칠 길이라도 내어달라 요구했으나, 거절당한다.
- 1918
전선은 여전히 교착상태이고 안그래도 견고하지 못했던 일본 경제가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붕괴된다. 이에 일본의 하라 다카시 내각은 군부와의 합의 없이 한국과의 협상을 진행하게 된다. 이에 분노한 군부는 총리를 암살하고 군부의 수장격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스스로 내각총리대신에 오르게 된다. 허나 이미 떨어질대로 떨어진 일본군의 사기를 파악한 한국군의 반격으로 충청과 호남 및 강원도 남부를 탈환한다. 이후 영남 전선에서의 전쟁 장기화를 예상한 일본군부에 의해 대한민국 유신정부는 해산되고 동래에 조선총복부를 설치해 알박기 및 최후의 발악을 시작한다.
- 1919
군부는 한국군의 반격이후 정체되어있는 전선에 대한 타개책으로 인천부에 상륙을 준비하게 되고, 1919년 3월, 남은 모든 것을 쏟아부은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한다.. 하지만 사전에 이를 예측했던 한국에선 방어병력을 배치해놨고, 치열한 전투 끝에 상륙에는 성공했으나 뒤이은 한국 후속병력이 도착하자 상륙군 대부분이 전멸당한다. 상륙작전의 실패 후 몇일만인 3월 26일, 아미앵이 독일에게 합락되며 협상국의 붕괴가 점쳐지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자살하고, 총리 권한대행 우치다 고사이가 마침내 항복을 선언한다.
전간기
1920년대 ~ 2차 대전 직전
- 한국
- 1920-1936 - 먼저 공격했던 일본에게 전쟁배상금을 받아낸것은 물론, 대마도는 조선땅이라는 가사를 실현시켜 버린 한국은 극강의 애국주의 열풍에 빠진다. 허나 이와는 별개로 호남을 비롯한 영남권이 초토화된 상태였기에 조선은 일본에게 뜯어낸 배상금의 대부분을 경제발전에 쏟아부어야 했다.[1] 또한 배상금 운용 과정에서의 횡령 관련한 논란으로 이동녕의 거국내각이 붕괴해버리고 한국독립당이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우파독립당[2]과 당시 당내 청년진보의 거두였던 조소앙으로 대표되는 좌파독립당[3]으로 분당되는 정치 혼란속에 치뤄진 중추원선에서 본래 친일성격의 정당인 국민당이 어부지리로 집권해 당내 외교적 중립노선을 표명했던 윤치호를 총리로 내세웠음에도 전국민적 반발로 인해 1년이 안되어 의회를 해산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혼란이 지속되었다.[4] 이외에도 간도에 잔존한 한인문제와, 대마도 내 일본인들의 폭동들로 상당히 휘청거리긴 했으나, 결론적으로는 36년 대공황까지는 나름 일본 배상금을 통한 경제발전과 더불어 "효제평안"이라 불리는 평화의 시대로서 그럭저럭 잘굴러 갔다. 정치계 또한 우파독립당과 좌파독립당이 양강체제를 이루고 기타 군소정당이 캐스팅보터가 되는 식으로 굴러가며 이렇다 할 큰 논란 없이 민주주의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경제 또한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대외적으로는 여러 경제 조약으로 독일과 더욱 돈독한 관계를 맺게 되고,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마인드로 협상국의 캐나다 망명정부와도 어느정도 관계를 회복하는 등의 성과가 있었다만, 성장하는 동북아시아의 공산주의를 막지 못한 것은 앞으로 대한제국의 미래를 크게 흔들게 된다.
- 1936-1939 - 그렇게 대망의 1936년의 새해가 밝아왔다. 설날 이후 10일만인 2월 3일 월요일, 베를린이 무너졌다. 시장의 불안정이 지속되자 모든 사람이 모든 주식을 팔아치우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주식시장은 월요일에 개장하자마자 파산했다. 이를 "검은 월요일"이라 부르고, 독일 경제와 깊게 연관돼있던 한국의 경제 또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월요일 장이 폐장하기 전까지 한국종합주가지수는 35% 이상 하락했으며, 다음 날인 화요일에는 개장하기 한참 전부터 제국거래소가 위치해있는 한성부 용산방에 좀처럼 볼 수 없던 수의 군중이 모여들었고, 한국의 주식시장 또한 파산했다. 이 당시 총리였던 이승만과 경제부장관을 비롯해 내각의 대부분이 회담을 위해 태국에 가있었고, 이는 경제위기에 대한 즉각적인 조치를 힘들게 만들었다. 수요일에 한성에 도착한 내각은 즉시 은행을 폐쇄시켜 예금 인출을 막았지만 변화는 없었고, 검은 화요일, 검은 수요일 등이 이어져 검은 일주일이 완성되었다. 경제침체로 좋지않던 이승만에 대한 지지도는 이번 사건으로 완전히 폭락했다.
- 일본 - 전쟁 패전 이후 정치계에서 군부는 완전히 배제되었다. 이는 정치인들이 전쟁 패전의 책임을 군부에게 돌려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함이기도 했고, 실제로도 패전의 이유 중에는 군부의 실책이 가장 컸기 때문이였다. 전쟁 이후 최초로 개최된 중원선의 결과로 기요우라 게이고가 총리에 올랐지만 그는 자신의 국가에 부과된 막대한 배상금을 다룰줄을 몰랐고, 결국 일본의 경제는 보이지 않는 구렁 속으로 빠지게 된다. 이는 무수한 공산주의자 탄생을 불러왔고 그들은 일본공산당을 창당했다. 중의원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 치안유지법을 통과시켰지만 그것은 단 하루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이내 이들은 이를 막기 위해 치안유지법을 통과시켰지만 그것은 단 하루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결국 차기 선거에서 집권이 확실해진 의회 내 공산당은 내각에게 중의원의 해산을 요구하게된다. 허나 여전히 근자감이 넘쳤던 내각의 거부로 중의원은 해산되지 않았고, 결국 공산당은 내전을 일으키게된다. 1년이 가까이 되는 치열한 내전 끝에 공산당이 오사카에 입성하며 내전은 끝나게 된다. 오사카에서 끝까지 저항하던 의회와 천황은 끝내 패배하고 일본에서 캐나다로 망명을 떠나 임시정부를 수립, 일본에는 인민공화국이 들어섰다. 그 이후 일본은 안정기에 들어서는데, 정부에서 단행한 화폐개혁으로 초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고, 오키나와에서 일어난 독립 시위도 협상을 통해 잠재우는 성과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정부는 제1차 5개년 계획을 세워 본격적으로 경제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 중국 - 카라의 중국과 별차이가 없다. 약간 다른점이라면 봉천군벌이 한국의 지원을 받는다는 정도.
제2차 세계대전
-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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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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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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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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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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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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