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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6일 (수) 17:59 판
공지 | | 빌레펠트 연재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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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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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 주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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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Kesselschlacht_von_Tscherkassy Корсунь-Шевченковская битва Battle of the Korsun–Cherkassy Pocke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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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중 바그라티온 작전의 일부 | ||
날짜 | 1941년 7월 14일~1941년 8월 6일 | |
장소 | 우크라이나 코르순, 체르카시 | |
결과 | 러시아군의 승리 독일군의 후퇴 성공 | |
영향 | 판터-보탄 라인의 붕괴 우크라이나 방면 독일군의 궤멸적인 피해 | |
포위전의 전개 |
개요
독러전쟁 중 1941년 7월 14일부터 8월 6일까지 우크라이나의 체르카시와 코르순에서 벌어진 전투. 러시아에서는 '코르순-세브첸코프스키 공세'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체르카시 포위전'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7월 14일 당시 체르카시는 러시아군이 점령한 상태였으니 엄밀히 따지면 틀린 말이다. 바그라티온 작전 작전 당시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였다.
1941년 7월의 상황
1941년 7월, 발터 폰 라이헤나우 원수의 독일군 남부집단군은 드네프르 강 서안으로 밀려나 판터-보탄 방어선을 유지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당초 독일은 30년대 초 부터 훗날 독일이 또 다시 양면전선의 위협에 빠질 것을 대비하여 동부 방어 작계에 따라 판터-보탄 방어선을 건설하고 있었으나, 직후 터진 검은 월요일로 인하여 방어선의 건설은 중단되었다. 독일이 판터-보탄 방어선의 건설을 재개할 무렵엔 인터내셔널의 공격으로 제2차 벨트크리그가 터져버렸는지라 판터-보탄 방어선의 주축인 동부방벽(Ostwall)의 건설은 심각하게 지연됐다. 그 결과, 드네프르 방어선상의 판터-보탄 방어선은 대부분 콘크리트도 없는 유개호로 만들어진 경우가 다반사였고, 결국 드네프르 강 방어선은 1941년 러시아군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바그라티온 작전을 직격탄으로 얻어맞고 대부분 붕괴되었다.
대충 만든 이런 엉성한 방어선은 그대로 붕괴되었다. |
러시아군이 1941년 7월에 들어서자마자 키이우를 점령하고 키이우 서쪽으로 돌출부를 확대하는 데 성공하자, 라이헤나우는 전선을 후퇴시켜 남부의 니코폴 광산을 포기하고 집단군 중점을 중부집단군과 연결할 수 있는 북부, 4기갑군 지역에 둘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니코폴 광산은 독일 전시 경제에 필수적이며, 단 한 치의 땅도 내 주지 말라며 요지부동이었다.[1] 빌헬름 2세의 결정에 따라, 니코폴 북쪽으로는 늘어날 대로 늘어난 전선을 지친 보병사단들과 기갑사단들이 지켜야 하게 되었다.
남부집단군 소속 빌헬름 슈팀머만 대장의 제42군단과 테오발트 리에브 중장의 제11군단은 B 분견군을 형성하여 체르카시 서쪽 코르순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토 뵐러 상급대장의 제8군 전방에서 러시아군의 드네프르 강 도하를 막고 있었다. 두 군단은 마지막 남은 드네프르 강 방어선이라는 이유로 위치를 절대 사수해야만 했다. 빌헬름 2세는 이 지역은 훗날 반격에 중요한 곳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의 이들은 망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무렵, 스타프카 대리로 파견되어 우크라이나 전선군들을 통합 지휘하고 있던 라브르 코르닐로프 원수는 제8군과 B분견군 사이의 틈으로 공세를 가한다면 B분견군을 코르순과 체르카시에 포위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코르닐로프는 자신의 작전 계획을 스타프카에 보내며 승인을 요청한다.
코르닐로프 작전안에 따르면 니콜라이 바투틴 대장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과, 레오니트 고보로프의 제2우크라이나전선군 소속 전차군들이 체르카시와 코르순에 대한 2중 포위망을 형성할 것이었다. 내부 포위망은 B분견군을 직접적으로 포위망 안에 가두며, 외부 포위망은 갇힌 독일군의 탈출 기도를 차단할 것이다. 라이헤나우는 2개 군단이 포위당할 것이라며 빌헬름 2세에게 후퇴 요청을 했지만, 늘 그랬듯 라이헤나우의 요청은 거절당한다.
주공은 고보로프의 제2우크라이나전선군이 맡았으며 고보로프는 제53군, 제4근위군, 제5근위전차군을 체르카시 남서쪽에 투입시키고 후속으로 제52군, 제5근위기병군단, 제2전차군을 투입시킬 것이었다. 바투틴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제27군과 제40군, 새롭게 편제된 제6전차군을 북서쪽에서 투입시킬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은 독일군이 포위 기도를 눈치채지 못했다고 판단했지만, 독일 제8군 참모들은 어느 정도 러시아군의 기도를 눈치챈 상태였다.
포위
만슈타인의 역습
항복 요구와 끓어오르는 가마솥
우리는 이 지옥에서 탈출한다!
결과
기타
- ↑ 구데리안은 예전에 드네프르 상류 석탄광과 철광에 대해서도 똑같은 소리를 했다며 빈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