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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1|"절대적으로 판세가 불리할 때는 한 장의 카드에 모든 것을 걸어 보는 모험도 해 볼 만하지 않겠는가?"|알프레트 요들 독일군 OKR 작전부장.'''}} | {{인용문1|"절대적으로 판세가 불리할 때는 한 장의 카드에 모든 것을 걸어 보는 모험도 해 볼 만하지 않겠는가?"|알프레트 요들 독일군 OKR 작전부장.'''}} | ||
[[제2차 벨트크리그]] 중인 1943년 12월 16일부터 1944년 1월 25일까지 서부전선에서 이루어진 독일 제국군의 겨울 대공세로 벌어진 일련의 전투다. 아르덴 공세(Ardennes Offensive), 벌지 전투(Battle of the Bulge, 영미권에서 주로 쓰이는 명칭), 또는 바스토뉴 공방전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여기서 벌지(Bulge)란 '돌출부'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전략지도를 보면 독일군 전선이 서쪽으로 크게 돌출되어 있다. | [[제2차 벨트크리그]] 중인 1943년 12월 16일부터 1944년 1월 25일까지 서부전선에서 이루어진 독일 제국군의 겨울 대공세로 벌어진 일련의 전투다. 아르덴 공세(Ardennes Offensive), 벌지 전투(Battle of the Bulge, 영미권에서 주로 쓰이는 명칭), 또는 바스토뉴 공방전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여기서 벌지(Bulge)란 '돌출부'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전략지도를 보면 독일군 전선이 서쪽으로 크게 돌출되어 있다. | ||
벌지 전투는 서부전선에서 서서히 전세를 역전 시켜가던 독일군이 기상 상황을 이용하여 모든 것을 걸고 감행한 회심의 반격이었다. 그리고 이 전투의 결과, 독일군은 인터내셔널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며 아르덴을 돌파하고 낫질 작전을 성공 시키게 된다. 낫질 작전의 성공으로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인터군을 완전히 분쇄해버렸다. 이렇게 양면전선의 부담을 덜은 독일군은 동부에 더 많은 병력을 집중 시킬 수 있게 되면서 [[바르바로사 작전 (빌레펠트)|바르바로사 작전]]까지 이어지게 된다. | 벌지 전투는 서부전선에서 서서히 전세를 역전 시켜가던 독일군이 기상 상황을 이용하여 모든 것을 걸고 감행한 회심의 반격이었다. 그리고 이 전투의 결과, 독일군은 인터내셔널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며 아르덴을 돌파하고 낫질 작전을 성공 시키게 된다. 낫질 작전의 성공으로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인터군을 완전히 분쇄해버렸다. 이렇게 양면전선의 부담을 덜은 독일군은 동부에 더 많은 병력을 집중 시킬 수 있게 되면서 [[바르바로사 작전 (빌레펠트)|바르바로사 작전]]까지 이어지게 된다. | ||
=배경= | |||
인터내셔널군의 회심의 한방이었던 [[마켓가든 작전 (빌레펠트))|마켓가든 작전]]이 [[휘르트겐 숲 전투 (빌레펠트)|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발목이 잡혀 진흙탕 싸움에 말려들고, 곧바로 개시된 역습에 [[마켓가든 작전 (빌레펠트))|마켓가든 작전]]의 실패는 물론이거니와 독일군의 반격에 오랫동안 점령하고 있던 베네룩스까지 싹 밀릴 상황에 처하자 인터내셔널군은 제방을 폭파해 독일군의 반격을 저지하려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가뜩이나 동부전선에서 [[봄의 새싹 작전 (빌레펠트)|봄의 새싹 작전]]의 개시를 코앞에 둔 독일군의 입장에선 공세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 |||
마켓가든 작전의 실패와 협상군이 스페인 남부와 이탈리아에 상륙한 시점에는 서부전선의 인터내셔널군은 132개 사단으로 줄어들었다.<ref>참고로 개전 당시 인터내셔널의 군대는 140개 사단을 넘었고,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250개 사단에 육박했다. 아예 반토막이 나버린셈.</ref> 그나마 남아 있는 사단의 병력도 원래의 절반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ref>여기서 그나마 정예로 여겨진 브리튼과 프랑스 코뮌의 군대만 계산하면 92개 사단 밖에 되지 않았다.</ref> 그나마 베네룩스의 제방을 폭파해버린 덕분에 독일군의 공격을 어느정도 막아주었지만, 이 방어선이 뚫리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독일 입장에서도 언제까지나 맘놓고 기다릴 수는 없었던 것이 독일은 서부전선 보다 동부전선에서 아예 알박기를 시도하려던 러시아를 몰아내는 것이 더 급했던 상황에서 서부전선의 존재 자체가 부담이었다. 이에 빌헬름 3세는 그때까지 서부전선에서 방어에만 집중하고 있던 독일군 병력을 최대한 집중시켜 아르덴 지방의 숲을 전격적으로 돌파하여 베네룩스 지역의 인터내셔널군을 포위 섬멸한다는 일련의 반격 작전을 구상하였다. 정확히는 인터내셔널군을 최대한 몰아세워서, 인터내셔널이 보급 기지로 삼고 있었던 벨기에의 안트베르펀을 점령해 버리면 인터내셔널군이 전투 불능이 되어 버린다는 것.<ref>다른 항구도 많은데 왜 굳이 안트베르펀이냐 한다면 43년에 이르러서는 인터내셔널의, 특히 프랑스 코뮌의 철도와 항구는 협상국과 라이히스팍트의 무자비한 공습으로 마비되어가고 있었다. 칼레나 됭케르크는 진작에 마비된지 오래였고 그나마 촘촘한 방공망을 구축하여 이 공습의 피해를 어느정도 피해갈 수 있었던 안트베르펀을 잃는다면 브리튼은 유럽 대륙에서 싸우고 있는 자국의 군대에게 원활한 보급을 전달할 수 없었다.</ref> |
2023년 10월 31일 (화) 18:31 판
공지 | | 빌레펠트 연재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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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덴 대공세 (벌지 전투) Battle of the Bulge/Ardennes Counteroffensive Unternehmen Wacht am Rhein[1]/Ardennenoffensive La bataille des Ardennes, Opération Wacht am Rhei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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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벨트크리그 중 낫질 작전의 일부 | ||
날짜 | 1943년 12월 16일 ~ 1944년 1월 25일 | |
장소 | 아르덴 숲 일대 | |
결과 | 독일의 승리 | |
영향 | 독일의 아르덴 숲 돌파 성공 낫질 작전 성공의 결정적인 역할 프랑스 코뮌의 패망 가속화 | |
아르덴의 한스 |
개요
전투 당시의 지도 |
"절대적으로 판세가 불리할 때는 한 장의 카드에 모든 것을 걸어 보는 모험도 해 볼 만하지 않겠는가?" 알프레트 요들 독일군 OKR 작전부장. |
제2차 벨트크리그 중인 1943년 12월 16일부터 1944년 1월 25일까지 서부전선에서 이루어진 독일 제국군의 겨울 대공세로 벌어진 일련의 전투다. 아르덴 공세(Ardennes Offensive), 벌지 전투(Battle of the Bulge, 영미권에서 주로 쓰이는 명칭), 또는 바스토뉴 공방전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여기서 벌지(Bulge)란 '돌출부'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전략지도를 보면 독일군 전선이 서쪽으로 크게 돌출되어 있다.
벌지 전투는 서부전선에서 서서히 전세를 역전 시켜가던 독일군이 기상 상황을 이용하여 모든 것을 걸고 감행한 회심의 반격이었다. 그리고 이 전투의 결과, 독일군은 인터내셔널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며 아르덴을 돌파하고 낫질 작전을 성공 시키게 된다. 낫질 작전의 성공으로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인터군을 완전히 분쇄해버렸다. 이렇게 양면전선의 부담을 덜은 독일군은 동부에 더 많은 병력을 집중 시킬 수 있게 되면서 바르바로사 작전까지 이어지게 된다.
배경
인터내셔널군의 회심의 한방이었던 마켓가든 작전이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발목이 잡혀 진흙탕 싸움에 말려들고, 곧바로 개시된 역습에 마켓가든 작전의 실패는 물론이거니와 독일군의 반격에 오랫동안 점령하고 있던 베네룩스까지 싹 밀릴 상황에 처하자 인터내셔널군은 제방을 폭파해 독일군의 반격을 저지하려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가뜩이나 동부전선에서 봄의 새싹 작전의 개시를 코앞에 둔 독일군의 입장에선 공세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마켓가든 작전의 실패와 협상군이 스페인 남부와 이탈리아에 상륙한 시점에는 서부전선의 인터내셔널군은 132개 사단으로 줄어들었다.[2] 그나마 남아 있는 사단의 병력도 원래의 절반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3] 그나마 베네룩스의 제방을 폭파해버린 덕분에 독일군의 공격을 어느정도 막아주었지만, 이 방어선이 뚫리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독일 입장에서도 언제까지나 맘놓고 기다릴 수는 없었던 것이 독일은 서부전선 보다 동부전선에서 아예 알박기를 시도하려던 러시아를 몰아내는 것이 더 급했던 상황에서 서부전선의 존재 자체가 부담이었다. 이에 빌헬름 3세는 그때까지 서부전선에서 방어에만 집중하고 있던 독일군 병력을 최대한 집중시켜 아르덴 지방의 숲을 전격적으로 돌파하여 베네룩스 지역의 인터내셔널군을 포위 섬멸한다는 일련의 반격 작전을 구상하였다. 정확히는 인터내셔널군을 최대한 몰아세워서, 인터내셔널이 보급 기지로 삼고 있었던 벨기에의 안트베르펀을 점령해 버리면 인터내셔널군이 전투 불능이 되어 버린다는 것.[4]
- ↑ 라인을 수호하라
- ↑ 참고로 개전 당시 인터내셔널의 군대는 140개 사단을 넘었고,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250개 사단에 육박했다. 아예 반토막이 나버린셈.
- ↑ 여기서 그나마 정예로 여겨진 브리튼과 프랑스 코뮌의 군대만 계산하면 92개 사단 밖에 되지 않았다.
- ↑ 다른 항구도 많은데 왜 굳이 안트베르펀이냐 한다면 43년에 이르러서는 인터내셔널의, 특히 프랑스 코뮌의 철도와 항구는 협상국과 라이히스팍트의 무자비한 공습으로 마비되어가고 있었다. 칼레나 됭케르크는 진작에 마비된지 오래였고 그나마 촘촘한 방공망을 구축하여 이 공습의 피해를 어느정도 피해갈 수 있었던 안트베르펀을 잃는다면 브리튼은 유럽 대륙에서 싸우고 있는 자국의 군대에게 원활한 보급을 전달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