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 국군 (빌레펠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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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벨트크리그==
==제1차 벨트크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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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빌레펠트)|대한국]]이 선포 될 때까지 한국은 확실히 동맹국 보단 협상국에 가까운 국가였다. 1911년에 [[요동 사변]]을 일으켜 남만주<ref>현재의 요동도와 압록도</ref>를 얻어냈고, 이후 [[남만주 대토벌 작전]] 등 한국군 상당수가 남만주 안정화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일동맹을 체결하며 적극적으로 친 협상국 행보를 보이던 일본만큼은 아니었으나, 당시까지의 한국은 영국과 프랑스를 벤치마킹하여 근대화된 국가였고, 내각 인사들의 상당수도 친미, 친영, 친프 성향을 가진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근대국가로 발돋움한 동아시아의 양강으로서 한일은 서서히 서로 라이벌이 되었음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친 협상국 국가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고, 이미 두차례의 전쟁에서 한일은 동맹을 체결하여 연합전선을 형성한 바가 있었다. 더욱이, 당시까지는 한국의 국력이 일본에 미치지 못하였다. 일본은 한국 보다 한발 앞서 근대화한 국가였고 국가의 규모, 인구 부터 두배가 차이나던 국가였다.
[[대한국 (빌레펠트)|대한국]]이 선포 될 때까지 한국은 확실히 동맹국 보단 협상국에 가까운 국가였다. 1911년에 [[요동 사변]]을 일으켜 남만주<ref>현재의 요동도와 압록도</ref>를 얻어냈고, 이후 [[남만주 대토벌 작전]] 등 한국군 상당수가 남만주 안정화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일동맹을 체결하며 적극적으로 친 협상국 행보를 보이던 일본만큼은 아니었으나, 당시까지의 한국은 영국과 프랑스를 벤치마킹하여 근대화된 국가였고, 내각 인사들의 상당수도 친미, 친영, 친프 성향을 가진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근대국가로 발돋움한 동아시아의 양강으로서 한일은 서서히 서로 라이벌이 되었음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친 협상국 국가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고, 이미 두차례의 전쟁에서 한일은 동맹을 체결하여 연합전선을 형성한 바가 있었다. 더욱이, 당시까지는 한국의 국력이 일본에 미치지 못하였다. 일본은 한국 보다 한발 앞서 근대화한 국가였고 국가의 규모, 인구 부터 두배가 차이나던 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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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은 1915년 일본의 [[부산 기습]]으로 깨졌다. 친독적 행보로 선회하고 있던 한국을 잠재적 적국으로 간주하고 있던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한국을 기습했고, 아무런 대비 없이 허를 찔린<ref>제국익문사와 정보대에서 몇번의 경고가 있었으나, 모두 무시됐다.</ref>한국군은 급속도로 무너졌다. 성공적인 기습으로 '''한국전선'''을 열은 일본은 순식간에 삼남을 점령, 파죽지새로 수원까지 다다르자 조정은 한성을 포기했고, 평양으로 도망쳤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시 내각총리던 이완용은 고종을 데리고 일본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려 했으나, 이러한 시도는 훗날의 성조가 되는 의친왕의 쿠데타로 저지되었다.<ref>이완용은 목숨을 건져 일본의 점령지인 부산으로 도망칠 수 있었으나, 1918년 이재명 의사에 의해 피살된다.</ref>
중립은 1915년 일본의 [[부산 기습]]으로 깨졌다. 친독적 행보로 선회하고 있던 한국을 잠재적 적국으로 간주하고 있던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한국을 기습했고, 아무런 대비 없이 허를 찔린<ref>제국익문사와 정보대에서 몇번의 경고가 있었으나, 모두 무시됐다.</ref>한국군은 급속도로 무너졌다. 성공적인 기습으로 '''한국전선'''을 열은 일본은 순식간에 삼남을 점령, 파죽지새로 수원까지 다다르자 조정은 한성을 포기했고, 평양으로 도망쳤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시 내각총리던 이완용은 고종을 데리고 일본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려 했으나, 이러한 시도는 훗날의 성조가 되는 의친왕의 쿠데타로 저지되었다.<ref>이완용은 목숨을 건져 일본의 점령지인 부산으로 도망칠 수 있었으나, 1918년 이재명 의사에 의해 피살된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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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진격도 거기까지였다. 일본군은 [[수원 전투]]에서 홍범도가 이끄는 제 1군에 박살났고,<ref>훗날 이 전투에서 활약한 홍범도, [[안중근 (빌레펠트)|안중근]] 김좌진은 삼(三) 장군이라고 불렸다.</ref>동장군이 도래하면서 공세종말점에 도달하자 이내 한국군의 공세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위험한 위치에 있음을 인식한 일본군은 대규모로 후퇴하여 경상도에 새 방어선을 구축했고, 1916년 부터 종전까지 한국전선은 서부전선과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참호전과 고지전의 양상으로 흘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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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ss="w-[%] dark:!text-[#ddd] dark:!bg-[#423f3a] text-[#373a3c] bg-[#d2cfca]" | '''노획된 일본군의 마크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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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진격도 거기까지였다. 일본군은 [[수원 전투]]에서 홍범도가 이끄는 제 1군에 박살났고,<ref>훗날 이 전투에서 활약한 홍범도, [[안중근 (빌레펠트)|안중근]] 김좌진은 삼(三) 장군이라고 불렸다.</ref>동장군이 도래하면서 공세종말점에 도달하자 이내 한국군의 공세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위험한 위치에 있음을 인식한 일본군은 대규모로 후퇴하여 경상도에 새 방어선을 구축했고, 1916년 부터 종전까지 한국전선은 서부전선과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참호전과 고지전의 양상으로 흘라갔다.
1915년에는 최초의 비행부대가 창설됐고, 그해 말에 육군항공대와 해군항공대가 창설됐다. 1917년 [[다부동 전투]]에서 일본군에 의해 한국전선에 처음으로 전차가 등장했고, 1918년엔 [[마산 전투]]에서 한국군 전차가 처음으로 일본군에게 맞섰다.
1915년에는 최초의 비행부대가 창설됐고, 그해 말에 육군항공대와 해군항공대가 창설됐다. 1917년 [[다부동 전투]]에서 일본군에 의해 한국전선에 처음으로 전차가 등장했고, 1918년엔 [[마산 전투]]에서 한국군 전차가 처음으로 일본군에게 맞섰다.


1918년, 프랑스가 무너지고 영국과 미국이 독일과의 평화협상에 나서자 한국전선도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은 [[장사리 상륙작전]]과 [[제2차 포항 전투]]를 진행하며 10월 공세를 전개하였으나, 한국군의 견고한 방어에 대패, 11월에 협상장에 나서며 [[도쿄 조약]]<ref>한국은 대마도를 할양 받고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 더불어 이 조약에서 이오지마가 독일에게, 그리고 [[류큐 (빌레펠트)|류큐]]는 독립했다.</ref>을 체결했다. 이로써 3년간 진행된 한국전선은 제1차 벨트크리그의 끝을 알리며 막을 내렸다.{{-}}
1918년, 프랑스가 무너지고 영국과 미국이 독일과의 평화협상에 나서자 한국전선도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은 [[장사리 상륙작전]]과 [[제2차 포항 전투]]를 진행하며 10월 공세를 전개하였으나, 한국군의 견고한 방어에 대패, 11월에 협상장에 나서며 [[도쿄 조약]]<ref>한국은 대마도를 할양 받고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 더불어 이 조약에서 이오지마가 독일에게, 그리고 [[류큐 (빌레펠트)|류큐]]는 독립했다.</ref>을 체결했다. 이로써 3년간 진행된 한국전선은 제1차 벨트크리그의 끝을 알리며 막을 내렸다.


==전간기==
==전간기==

2024년 6월 17일 (월) 16:12 판



대한국 국군
大韓國國軍
Empire of Korea Armed Forces
국가 대한국
소속 대한국 국방부[군정권]

대한국 원수부[군령권]
통수권자[1] 경덕제 (대한제국 황제)[명목적]
유승민 (대한국 내각총리대신)[실질적]
지휘·감독권자[4] 신원식은 아님 (대한국 국방대신)[군정권]
해군 대장 김명수 (대한국 원수부 총관)[군령권]
상비군 72만여 명[5] (2022년 국방백서)
예비군 310만여 명[6] (2022년 국방백서)
병역제도 양성 징병제
육군력
[ 펼치기 · 접기 ]
3.5세대 전차 1,977대[7]
3세대 전차 1,051대[8]
2세대 전차 0대
1세대 전차 0대
중형전차 251대[9]
전차 총합 3273대
병력수송장갑차 7,021대[10]
보병전투차 2,005대[11]
소형전술차 10,000대[12]
견인포 3,500문 [13]
박격포 14,900문+[14]
자주포 3,150문[15]
야포 총합 5,600문[16]
다연장로켓 310문+[17]
지대지 유도무기 60기
해군력
[ 펼치기 · 접기 ]
해군 함정 총합 321척
전투함정 총합 179척
상륙함정 총합 30척
소해정 총합 20척
지원함정 총합 40척
잠수함정 총합 52척
주력 수상함
10,000톤 이상-15,000톤 미만
방공구축함
7척[18]
8,000톤 이상-9,000톤 미만
방공구축함
14척[19]
5,000톤 이상-6,000톤 미만
구축함
12척[20]
3,000톤 이상-4,000톤 미만
구축함
15척[21]
6,000톤 이상-7,000톤 미만
아스널십
1척(+2척)[22]
4,000톤 이상-6,000톤 미만
방공호위함
8척(+6척)[23]
2,500톤 이상-4,000톤 미만
호위함
14척[24]
1,000톤 이상-1,500톤 미만
초계함
3척(-3척)[25]
500톤 이상-600톤 미만
미사일 고속함
24척[26]
200톤 이상-300톤 미만
미사일 고속정
22척(+18척)[27]
100톤 이상-200톤 미만
고속정
56척(-56척)[28]
항공모함, 상륙함, 군수지원함, 수송함, 지휘함
60,000톤 이상 ~ 75,000톤 미만
항공모함
1척[29]
30,000톤 이상-45,000톤 미만
경항공모함
2척[30]
15,000톤 이상-20,000톤 미만
강습상륙함
3척[31]
20,000톤 이상-25,000톤 미만
군수지원함
3척[32]
8,000톤 이상-10,000톤 미만
군수지원함
4척[33]
5,000톤 이상-10,000톤 미만
LPD, LSD
4척[34]
3,000톤 이상-5,000톤 미만
LST
4척[35]
3,000톤 이상-5,000톤 미만
기뢰부설함
2척[36]
100톤 이상-200톤 미만
공기부양정
24척[37]
잠수함
16,000톤 이상-18,000톤 미만
탄도 미사일 원자력 잠수함
5척[38]
10,000톤 이상-12,000톤 미만
순항 미사일 원자력 잠수함
3척[39]
7,000톤 이상-8,000톤 미만
공격 원자력 잠수함
15척[40]
3,000톤 이상-5,000톤 미만
재래식 잠수함
11척[41]
1,700톤 이상-1,800톤 미만
재래식 잠수함
9척[42]
1,100톤 이상-1,200톤 미만
재래식 잠수함
9척[43]
공군력
[ 펼치기 · 접기 ]
5세대 전투기 225기(+100기)[44]
4.5세대 전투기 426기(+50기)[45]
4세대 전투기 351기[46]
3세대 전투기 98기[47]
조기경보통제기 (AEW&C) 18기[48]
해상초계기 26기[49]
공중급유기 20기[50]
고고도 무인 정찰기 6기[51]
전투임무기 총합 1100기
공중기동기 총합 100기
감시통제기 총합 140기[52]
훈련기 총합 400기
공군기 총합 1740기
헬리콥터 1400기[53]
항공기 총합 3140기
예산
국방비 (GDP의 약 3.1%)

개요

2023년 국군의 날 134주년 열병식

대한국 국군(大韓國國軍, KOR Armed Forces)은 대한국의 정규군이다. 육군, 해군, 공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군 예하에 해병대를 두고 있다. 줄여서 '한국군(韓國軍)', 또는 '국군(國軍)'이라고도 한다.

조선군이 그 전신이며, 대한국 선포 이후 한청전쟁과 한러전쟁, 세계대전 등 굵직한 전쟁에 참가하며 성장했다. 세계에서 손 꼽히는 강력한 군사력과 핵전력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막강한 포병 및 기갑전력은 한국군의 자랑이다.

대한국 헌법 제74조 1항에 따라 대한국 황제는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군을 통수한다.

명칭

정식 명칭은 대한국 국군(大韓國國軍)이며, 줄여서 한국군 또는 국군이라고도 부르나, 대한제국군(大韓帝國軍)이라는 명칭 또한 공적인 자리에서까지 널리 사용된다. 과거에는 황군이라는 명칭 또한 쓰였으나, 이는 동일본군의 명칭하고 겹칠 뿐만 아니라 1차 벨트크리그 당시 일본제국군의 명칭이기도 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황군을 말한다면 과거 일본제국군을 지칭하거나, 동일본군을 뜻한다.

영어로는 Empire of Korea Armed Forces, 줄여서 EOK Armed Forces라고 한다.

특징

강력한 대양함대와[54]공군전력 또한 미국, 독일과 견줄만한 수준이나 한국군의 가장 큰 강점은 강력한 전력의 육군 전력이다. 칼터크리그가 끝난 지금에도 한국군은 비대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나 육군의 막강한 기갑 및 포병전력은 타국과의 비교를 불허한다.

하지만 이러한 한국군의 화력 중심 교리는 특유의 인명 경시 분위기를 형성했는데, 만주전쟁에서 크게 데인 이후 완화된 지금에도 한국군 보병의 개인 장구류는 타국에 비해 부실한 편이다.

선진국 중에 특이하게 징병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몇 안되는 국가기도 한데, 이는 한국군이 비대한 군 규모를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이유기도 하다. 칼터크리그 체제가 데탕트로 완화된 현대에도 동북아시아는 여전히 대규모 전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이며,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군은 여전히 소규모의 정예군이 아닌 대규모의 비대한 군대를 유지하고 있다.

역사

근대화 이전

개화기

1867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이후 조선은 쇄국정책을 끝내고 굳게 닫은 나라의 문을 열었다. 조선 사회 전체에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거대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이는 전근대적인 군대에 머물러 있던 조선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에서 교관이 파견되어 이를 주축으로 별기군이 창설 되었으며 별기군을 중심으로 조선군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허나 별기군의 창설은 별기군과 구식군인 간의 차별을 일으켰고, 이는 곧 군 내 척사파와 별기군에 대한 불만을 가진 구식군인들이 병자군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병자군란은 청과 프랑스의 개입으로 진압되었으나, 병자군란으로 인해 국방력에 큰 타격을 입은 조선군의 근대화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무인개혁으로 금위영과 시위영, 진위영이 설치되었으며, 무과시험이 폐지되었다. 동시에 훗날의 육군무관학교와 해군무관학교의 전신이 되는 삼군영학당과 통제영학당이 설립되어 서구식 교육을 받은 장교들을 배출하기 시작했고, 수입과 군수공장의 건설을 통해 생산된 신식무기들은 조선군을 서서히 전근대 군대에서 근대 군대의 모습으로 탈바꿈 시키기 시작했다. 특히 이 시기에 주목할만한 점은 징병제가 실시되면서 본격적으로 군대의 규모를 키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프랑스에 의해 개항하였으므로, 프랑스군의 영향을 짙게 받았으나, 이 시점에는 이미 보불전쟁으로 프랑스군이 독일군에게 패배한 이후였기 때문에 조선군의 근대화는 프랑스군을 참고하면서도 동시에 독일군의 제도 또한 참고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훗날에 협상국 군대의 모습과 동맹국 군대의 모습이 동시에 연출되는 독특한 모습을 띄게 되었다.

1889년에는 대한국 선포와 함께 조선군에서 대한국 국군으로 재편되었으며, 한국군을 총지휘하는 원수부가 창설되어 당시 황제였던 고종을 대원수로 추대, 흥선대원군이 육해군 대원수에 올랐다.

평양 전투 당시 한국군

같은 해 7월에 청나라가 대한국의 선포에 반발하며 압록강을 넘어 한국을 침공하며 한청 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한국은 일본과 동맹을 형성해 청에게 맞섰으며, 청군은 근대화 된 한국군에게 8월 평양 전투에서 박살났고, 다음 달 9월 북양함대가 한일 연합함대에 의해 황해 해전에서 격멸됐다. 그해 10월 1일에 양성환의 1사단이 압록강을 넘었다. 이는 훗날 한국 국군의 날의 기원이 됐다. 요동에서까지 패배를 거듭하자 이듬해 1890년에 청은 개성조약을 체결하며 한국은 청과의 종속관계를 청산하고 연화도를 할양 받았다.[55]또한 이때 청에게서 얻은 배상금은 한국군의 발전을 지속할 원동력이 되었다.

1900년에 의화단 운동이 발생하면서 한국인이 살해 당하고 공사관이 포위되자, 한국은 9개국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 만주와 베이징을 향해 진군했다. 의화단 운동 동안 한국이 9개국 연합군의 거점이 된 덕분에 이 영향으로 한국 경제는 호황을 누리게 되었고, 신축조약의 결과로 남만주까지 손에 얻었다. 그러나 삼국간섭으로 남만주에서 물러나게 되자 한국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결심하게 됐다.

한국은 이해관계가 제법 맞았던 일본과 다시 한번 동맹을 맺고 1904년에 뤼순[56]의 러시아 함대를 기습하며 한러 전쟁을 일으켰다. 압록강 전투 이후 뤼순을 포위 하였으나, 이곳에서 무모한 공격으로 많은 피를 흘린 끝에야 간신히 함락 시킬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한국군은 이어진 봉천 전투에서 크게 승리, 1905년 5월에 러시아 발트 함대가 대마도 해전에서 한일 연합함대에게 패배하며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었고, 전쟁의 결과로 한국은 비사시를 조차로 얻어낼 수 있었다.

제1차 벨트크리그

수원 전투 기록화

대한국이 선포 될 때까지 한국은 확실히 동맹국 보단 협상국에 가까운 국가였다. 1911년에 요동 사변을 일으켜 남만주[57]를 얻어냈고, 이후 남만주 대토벌 작전 등 한국군 상당수가 남만주 안정화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일동맹을 체결하며 적극적으로 친 협상국 행보를 보이던 일본만큼은 아니었으나, 당시까지의 한국은 영국과 프랑스를 벤치마킹하여 근대화된 국가였고, 내각 인사들의 상당수도 친미, 친영, 친프 성향을 가진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근대국가로 발돋움한 동아시아의 양강으로서 한일은 서서히 서로 라이벌이 되었음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친 협상국 국가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고, 이미 두차례의 전쟁에서 한일은 동맹을 체결하여 연합전선을 형성한 바가 있었다. 더욱이, 당시까지는 한국의 국력이 일본에 미치지 못하였다. 일본은 한국 보다 한발 앞서 근대화한 국가였고 국가의 규모, 인구 부터 두배가 차이나던 국가였다.

하지만 1898년 흥선대원군이 사망하고, 고종이 실권을 잡으면서 이러한 이야기는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한러 전쟁이 끝나고, 남만주 대토벌 작전이 성공으로 마무리 될 쯔음 부터 한국은 친독, 친 동맹국 국가의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고 이러한 한국의 행보는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불러왔다. 그럼에도 한국은 "아직까지는" 동맹국 국가가 아니었다. 1914년 사라예보 사건 이후 제1차 벨트크리그가 터지면서 일본이 협상국의 일원으로 참전했음에도 한국은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중립은 1915년 일본의 부산 기습으로 깨졌다. 친독적 행보로 선회하고 있던 한국을 잠재적 적국으로 간주하고 있던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한국을 기습했고, 아무런 대비 없이 허를 찔린[58]한국군은 급속도로 무너졌다. 성공적인 기습으로 한국전선을 열은 일본은 순식간에 삼남을 점령, 파죽지새로 수원까지 다다르자 조정은 한성을 포기했고, 평양으로 도망쳤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시 내각총리던 이완용은 고종을 데리고 일본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려 했으나, 이러한 시도는 훗날의 성조가 되는 의친왕의 쿠데타로 저지되었다.[59]

노획된 일본군의 마크 전차

일본군의 진격도 거기까지였다. 일본군은 수원 전투에서 홍범도가 이끄는 제 1군에 박살났고,[60]동장군이 도래하면서 공세종말점에 도달하자 이내 한국군의 공세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위험한 위치에 있음을 인식한 일본군은 대규모로 후퇴하여 경상도에 새 방어선을 구축했고, 1916년 부터 종전까지 한국전선은 서부전선과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참호전과 고지전의 양상으로 흘라갔다.

1915년에는 최초의 비행부대가 창설됐고, 그해 말에 육군항공대와 해군항공대가 창설됐다. 1917년 다부동 전투에서 일본군에 의해 한국전선에 처음으로 전차가 등장했고, 1918년엔 마산 전투에서 한국군 전차가 처음으로 일본군에게 맞섰다.

1918년, 프랑스가 무너지고 영국과 미국이 독일과의 평화협상에 나서자 한국전선도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은 장사리 상륙작전제2차 포항 전투를 진행하며 10월 공세를 전개하였으나, 한국군의 견고한 방어에 대패, 11월에 협상장에 나서며 도쿄 조약[61]을 체결했다. 이로써 3년간 진행된 한국전선은 제1차 벨트크리그의 끝을 알리며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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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
(2003-2011)
이라크 이라크

각주

  1. 국가원수의 권한으로서 군에 관한 모든 것을 통솔할 수 있다.
  2. 대한국 황제는 대한국의 상징적 국가원수로 군에 대한 통수권을 지닌다.
  3. 대한국의 행정수반으로 실질적으로 군에 대한 통수권을 행사한다.
  4. 군령권과 군정권을 지휘한다.
  5. 육군 48만 + 해군(해병대 27, 800명 포함) 12만 + 공군 12만
  6. 사관후보생, 전시근로소집, 전환/대체 복무 인원 등 포함.
  7. 33식 3호 주력전차 E2형 1027대, 33식 3호 주력전차 A3형 484대, 29식 4호 주력전차 흑표 466대.
  8. 33식 3호 주력전차.
  9. 12식 보병전투차량 120mm.
  10. 29식 장갑차, 23식 장갑차 806, 43식 상륙돌격장갑차.
  11. 12식 보병전투차량, 23식 장갑차 808, 23식 장갑차 808 120mm.
  12. 23식 소형전술차량 현마.
  13. 24식 155mm 견인포.
  14. 29식 60mm 박격포, 2식 81mm 박격포, 25식 120mm 박격포.
  15. 5식 자주곡사포 A1, 30식 자주곡사포 A1, 23식 차륜형 자주곡사포 풍익.
  16. 해병대 포함
  17. 해병 포함. GMARS, 1식 다연장로켓 구룡, 19식 다연장로켓 천무.
  18. 세종대왕급 3척, 정조대제급 3척, 성조대제급 1척.
  19. 시경신순성급 10척, 문약민영환급 4.
  20. 충무공이순신급.
  21. 광개토대왕급
  22. 태조대제급 합동화력함, 2척 추가 건조 예정.
  23. 충남급 8척, FFX Batch-IV 계획.
  24. 인천급 6척, 대구급 8척.
  25. 포항급, 2030년까지 전량 퇴역 예정.
  26. 윤영하급
  27. PKX-B, 초기형과 후기형 각각 16 + 18척 예정.
  28. 참수리급, 2030년까지 전량 퇴역 예정.
  29. 백두급 정규항공모함.
  30. 한라급 경항공모함 한라, 태백.
  31. 독도급 대형수송함 독도, 마라도, 이어도.
  32. 소양급 군수지원함 소양, 백록, 시화.
  33. 천지급 군수지원함 천지, 대청, 화천, 의암.
  34. 천왕봉급 상륙함 천왕봉, 천자봉, 일출봉, 노적봉.
  35. 고준봉급 상륙함 고준봉, 비로봉, 향로봉, 성인봉.
  36. 남포급 기뢰부설함 남포, 원산.
  37. 솔개 631급 고속상륙정
  38. 백야김좌진급 잠수함
  39. 충장공양성환급 잠수함
  40. 여옥이범윤급 잠수함
  41. 도산안창호급 잠수함.
  42. 손원일급 잠수함.
  43. 장보고급 잠수함.
  44. Me 357 빈샤트 120기, 21식 전투기 KF-21 보라매 105기 및 추가 100기 예정
  45. 24식 전투기 KF-24U 참매 추가 50기 예정
  46. Fw 224 슈반 42기,24식 전투기 KF-24 참매 120기, 16식 다목적 전투기 FA-16 전투독수리 189기.
  47. 9식 전투기 KF-9 제공호.
  48. 1식 조기경보통제기 KA-1
  49. 37식 해상초계기 KA-37, 18식 해상초계기 KA-18.
  50. 21식 공중급유기 KC-21.
  51. He 105 4기, 26식 고고도 무인 정찰기 KQ-26 2기.
  52. 해군 포함
  53. 육군 해군 포함
  54. 대표적으로 이화함대와 청룡함대
  55. 이때 일본은 대만을 할양 받았다.
  56. 현재 비사시의 일부
  57. 현재의 요동도와 압록도
  58. 제국익문사와 정보대에서 몇번의 경고가 있었으나, 모두 무시됐다.
  59. 이완용은 목숨을 건져 일본의 점령지인 부산으로 도망칠 수 있었으나, 1918년 이재명 의사에 의해 피살된다.
  60. 훗날 이 전투에서 활약한 홍범도, 안중근 김좌진은 삼(三) 장군이라고 불렸다.
  61. 한국은 대마도를 할양 받고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 더불어 이 조약에서 이오지마가 독일에게, 그리고 류큐는 독립했다.